무교 - 권력에 밀린 한국인의 근본신앙, 개정판
최준식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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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식의 <무교>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서 깊숙하게 박혀 있는 무교를 '한국인의 근본 종교'로 복권하고자 한다. 무당은 "이상한 귀신을 섬기는 한참 덜떨어진 기괴한 인간"이 아니며 무교는 단순히 점을 봐주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이 아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저자가 구사하는 전략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저자는 '무교'가 미신적인 무속(巫俗)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나 불교와 같은 나름의 체계를 갖춘 '종교'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무교는 어떠한 의미에서 종교인가? 무교에는 신(신령)과 인간(신도) 사이를 매개하는 무당이라는 사제가 있다. 신령, 무당, 신도의 세 요소는 굿이라는 무교의 고유한 의례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구조에서 무교는 신도가 무당이라는 특수한 사제 계급의 중개로 신령을 만나 도움받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무당은 신도가 신령과 교통하기 위해 중개자로서, 그리스도교의 사제에 해당한다. 즉,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무교는 그리스도교나 불교와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기에 종교인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역설적이게도, 한국 고유의 정신인 무교가 서양의 종교와 유사하기 때문에 미신이 아니라는 논리를 펼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도 둘째로, 저자는 무교를 미신으로 취급하는 '우월한' 고등종교인 그리스도교와 불교 역시 '저열한' 미신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무교나 그리스도교나 "종교 신앙은 일반적으로 다 같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이는 무교, 그리스도교, 불교의 신앙 구조가 동일하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신의 성격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대승불교는 보살이라는 허구적 존재를 신봉하며 그것에게 자신의 문제 해결이나 복을 빈다. 이는 신적 존재에 의존하지 말고 이성적 가르침에 의거하며 살아가라는 붓다의 본래 정신에 근본적으로 어긋나는 신앙이다. 저자가 더 가혹하게 비판하는 그리스도교 역시 증명되지 못하는 신을 믿으며, 내용의 진리값이 확실치도 않은 성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불교나 그리스도교 역시 "신도들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허구의 존재"를 믿는다면, 동일한 이유로 무교만이 미신 취급 당하는 것은 부당하다. 논리를 이렇게 가져가면, 차라리 무교(無敎)가 가장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저자는 이러한 주장으로 무교(巫敎)를 옹호한다.

그렇다면 무교가 미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무교는 늘 권력의 중심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교나 불교는 권력에 습합해 있었기 때문에 '미신'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있었다. 권력의 논리에 의해 진리와 비진리의 문제가 결정되었고, 본래 한국인의 보편 신앙이었던 무교는 외래 종교인 유교와 불교에 의해 점점 밀려나게 되었다. 무교는 한국인의 정신적인 뿌리였으며 현대에도 성행하고 있지만, 늘 권력에 밀려 미신으로 폄하받았다. 고려 때부터 조정은 서서히 무당을 탄압하더니 조선 시대에는 본격적인 탄압 방안이 강구되었다. 식민지 정부와 박정희 정권도 대대적인 무당 탄압 정책을 펼쳤다. 무교가 힘을 쓰지 못했던 이유는, 저자가 정확하게 지적하듯이 "무교는 '어떤 중심 교리를 믿는다'와 같은 확실한 교리 체계"가 없으며 무당과 신도 사이에 잘 조직된 중앙집권적 체제 같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교는 더 밑으로, 더 주변으로 스며들어 간 것이지, 그 존재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저자의 권력 환원론적 논리는 너무 진부하고 음모론적이다. 특히 무교와 다른 종교의 역사적 관계를 권력과 억압의 관점에서만 본 것이 특히 그렇다. 한국 그리스도교사의 사례에 국한해서 보자면 1세대 선교사들은 한국의 무교를 미신으로 보는 관점을 끝까지 고수했지만, 이들의 태도는 제국주의적으로만 볼 수는 없으며 권력을 지닌 이들에 의한 일방적인 억압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 옥성득의 <한국 기독교 형성사>을 인용해보겠다. "샤머니즘에 대한 한국인의 믿음과 마귀의 실존에 대한 생생한 경험이 선교사와 한국인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접촉점을 제공했다. 북미 선교사는 귀신들림에 대한 한국인의 관점을 수용했고 한국인은 성령의 능력을 경험했다. 능력 대결에 따른 귀신 추방은 기독교의 우월성을 입증해주었다." 권력을 모든 변화의 변수로 본다면, 이러한 교류를 설명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권력에 의한 종교 대체 논리는 조선 시대 때 숭유억불 정책과 천주교 박해에도 그 종교들이 오늘날 많은 성도 수를 거느리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무교의 주변화와 무교의 생명력에 대한 저자의 주장에는 논리적 모순이 감지된다. 저자는 무교가 권력의 논리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났다는 서사를 짜지만, 정반대로 무교는 한국인의 근본신앙으로서 그 생명력을 잃은 적이 없었다. 저자는 무교가 쇠퇴한 역사적 현상과 한국인의 정체성 사이에 있는 이 간극을 "이중적인 태도"로 치부한다. 그러나 이를 공적으로는 무교를 내쫓으려 하면서 뒷문으로 다시 무교를 불러들이는, 위선의 발로만으로 볼 것인가? 동일한 역사적 현상을 저자와 정반대로 해석할 수 있다. 무교는 권력에 밀렸어도 결코 사라진 적이 없으며 오히려 불교와 그리스도교 등 다른 종교를 샤머니즘적 신앙 속에 흡수하여 존속했다. 한국의 종교적 심성에서 가장 흥미로운 현상이 바로 이 부분이다. 어떠한 종교가 들어와도 무교는 이들과 이질감 없이 공존할 수 있다(나홍진의 <곡성>에서 가톨릭 사제와 무당이 동시에 한 영화에 등장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던 것을 떠올려보라). 무교는 체계적 교리가 없어도, 오히려 그러한 교리가 없었기 때문에 무한한 생명력을 지닐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자가 이중적 태도로 지칭한 것을 그저 위선적 태도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무교와 다른 종교가 접촉하고 결합한 지점을 더 섬세하게 따져봐야 무교, 나아가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을 이해하는 데 더 유익하고 건실한 연구가 될 것이다.

<무교>는 확실히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을 이해할 때 무교는 간과할 수 없는 요소이며 더 탐구되어야 할 주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이상의 논의를 통해 다음과 같이 촉구한다. "한국의 무교는 모든 면에서 풍부하다. 앞으로 한국인들은 지금처럼 종교 제국주의에 빠져 자신들의 전통을 외래의 시각으로 폄하하고 부정하는 것을 하루빨리 청산하고 열린 마음으로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인들은 무교가 중심이 된 우리의 민간신앙을 연구하는 데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하고 과감한 재정 투자를 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결론은 그저 한국의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좋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국수주의적 태도로 귀결된 우려가 있으며, 실제로 저자가 그러한 오류에 빠져 있다. '외래' 종교인 그리스도교와 불교에 대해서는 비판을 서슴치 않는 저자지만, 무교에 대해서는 작은 흠결 하나도 용납하지 않는다. 특히, 신병을 영적 정화 과정으로 설명하는 대목은 설득력이 없으며, 신내림을 거부하는 무당의 주변 인물이 죽는 '인다리 현상'이 무당에 대해서 부정적인 사회의 책임이라고 지탄하는 주장은 논리가 극히 빈약하다. 저자는 다른 종교에도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인다리 현상의 사례가 많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본인도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하니 내놓는 다른 종교의 안다리를 거는 수준의 얄팍한 빈정거림이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입장에서 또 한 가지 비판을 더 해보자면, 그리스도교의 신을 믿는 것과 무교의 신을 믿는 것은 결코 같은 행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고등 신과 저속한 잡종 신령의 구도로 이 문제를 풀어가며 여기서 어느 종교의 신이든 다 마찬가지의 존재라는 결론을 낸다. 그러나 진정한 핵심은 고등 신과 하위 신의 문제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로마의 다신교 신앙의 문제점으로 비윤리성을 지목했다. 로마의 신들은 인간에게 복종만을 요구할 뿐 윤리적 삶을 명령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신은 신자에게 올바른 삶을 살 것을 요구한다. 다른 고등 종교의 특징이기도 하다. 무교의 신들은 "선악 개념이 불분명"하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답을 주지 않으며, 신자들의 삶을 책임지지도 않는다. 무당이 사제처럼 신과 인간을 매개하여도 그들이 신자를 보살핀다는 관념은 없다. 무교적 신앙은 있어도 무교적 삶의 방식은 없다. 그저 "금세리 인간들에게 큰 벌을 내릴 것처럼 외치다가도 신도들이 싹싹 빌면 곧 관대한 신으로" 바뀌는 비일관적인 신령들일 뿐이다. 무교적 신앙이 위험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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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학기 수업으로 읽었던 책(몇 달만 빨리 나왔다면...)

그래서 조금만 자세히 소개하자면

출판사는 이 책을 이스라엘-하마스 문제의 기원에 대한 책으로 홍보하는 듯하지만, 사실 이 책은 브렉시트를 전후로 하여 영국에서 강해진 영제국에 대한 향수를 비판하고 이를 바로잡겠다는 더 큰 목표를 가지고 쓰였다. 영제국과 케냐의 관계, 정착민 식민주의 연구 등으로 유명한 저자는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까지 영국이 식민지에서 저지른 강압과 폭력의 역사를 들추어낸다. 한국인으로서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잘 안 와닿을 수 있지만, 실제로 영국에서는 영국 덕분에 그나마 영국의 식민지들의 상황이 개선될 수 있었다는 나이젤 비거(Nigel Biggar) 같은 신학자의 개소리가 꽤 통용되고 있다(한국에서는 일본 덕분에 한국이 근대화될 수 있었다는 이영훈 류의 주장을 떠올리면 될듯하다).

엘킨스는 '자유주의적 제국주의'(liberal imperialism)라는 개념을 통해서 자유주의적 개혁을 한다는 명분으로 식민지에서의 초법적 폭력과 수탈을 정당화한 영국의 모순적 행태를 고발한다. 그러한 이중적 행태에 대한 영제국의 도덕적 파탄과 폭력으로 가득 찬 이 책은 일관된 내러티브로 긴 내용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서술했다. 그래서 매우 술술 읽힌다는 큰 장점이 있으며, 영제국사의 권위자이자 영국과 케냐의 재판에 실제로 참여하기도 한 인물이 쓴 책이라는 점에서 영제국의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다만 목적의식이 워낙 뚜렷하고, 엄밀한 학문적 분석보다는 서술에 치중되어 있어 비판적으로 보자면 저자의 서술에서 의문이 가는 지점들도 여럿 있다(Lauren Benton이라는 또 다른 저명한 제국사/법제사 연구자는 실제로 이 책에 매우 가혹한 평가를 내렸다). 그렇지만 한번쯤 일독할 가치는 있으며, 세계사에서 안 좋은 짓은 영국이 다했다는 농담 섞인 말이 얼마나 사실인지 확인해볼 수 있다.

엘킨스와 정반대되는 관점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저자가 책에서 비판하기도 하는 학자 중에 니얼 퍼거슨이 있는데, 한국어로도 책이 번역되어 있다. (차마 권하지는 못하겠다) 알라딘 '책 속으로'에 있는 문장만 봐도 엘킨스가 무엇에 분노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마거릿 맥밀런, <평화를 끝낸 전쟁: 1914년으로 향하는 길>, 책과함께

지난 2014년 서양에서는 1차 세계대전 개전 100주년을 앞두고 전전 유럽을 새롭게 조명하는 굵직한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 하나가 마거릿 맥밀런의 <평화를 끝낸 전쟁>이다. 《뉴욕 리뷰 오브 북스》 같은 서평매체에서는 아예 그런 책들만을 추려서 특집호를 내기도 했다. 이 경쟁장에서 새로운 표준 서사라는 평가를 받은 책은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몽유병자들>이지만, 마거릿 맥밀런의 책도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국에서도 다행히 같이 비교해볼만한 책이 몇 권 출간되었다.













애덤 스미스, <북메이커: 책 제작자 18인의 생애로 읽는 책의 500년 변천사>, 책과함께

서책사와 관련된 책이 나오면 일단 장바구니에 담아둔다. 이 책은 일단 도서관에 신청했다.

이 책의 저자 애덤 스미스는 책의 문화사를 연구한다는데,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 더 경력을 검색해봐야 할 듯하다. 책 내용 자체가 매우 흥미롭다. 단순히 책 제작의 역사를 무미건조하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역사적/문화적 의미까지 짚는 역동적인 서술을 기대해본다. 그리고 각 챕터마다 한 인물에 집중하는 식으로 설명을 전개하는 듯한데, 책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지니게 되면서 각 행위자가 어떤 고민을 하고 무슨 역할을 했을지도 알 수 있다면 꽤 의미 있는 독서가 될 것 같다.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로는 서책사의 대가인 앤드류 페티그리의 책들이 있다(난 <루터, 브랜드가 되다>만 읽어봤는데, 루터를 인쇄업과 관련해서 분석하는 이 책도 추천할 만한 책). 최근 한국에 자주 번역되어 나오는데, 별다른 주목을 못 받는 게 아쉽다.




<옥스퍼드 책의 역사>는 Oxford handbook 시리즈를 번역한 것인데, 이 시리즈는 각 분야의 전문가가 한 꼭지씩 담당해서 집필하는 개설서라 하나 장만하면 두고두고 볼 만하다. 남아시아, 동아시아에 대한 내용도 있다는 게 이 책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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뢰비트는 근대적 역사철학은 그리스도교 신학개념에 전적으로 의존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섭리에 대한 믿음이 근대의 진보이념으로 변모하였다고 주장한다. 역사철학이란 근대인이 신학적 원리를 경험적 사실 일반에 적용한 이념이었다. 뢰비트 자신의 말로 표현하자면 역사철학은 "역사적 사건과 결과를 연결시키고 궁극적 의미와 관련지어 주는 원리를 실마리 삼는 세계사에 대한 체계적 해석"(die systematische Ausdeutung der Weltgeschichte am Leitfaden eines Prinzips, durch welches historische Geschehnisse und Folgen in Zusammenhang gebracht und auf einen letzten Sinn bezogen werden)이다.

이러한 뢰비트의 규정에 따르면 역사철학은 근본적으로 역사의 의미를 묻는 지적 활동이다. 이러한 의미의 역사철학은 신학에서 도출되는데, 무엇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 자체가 유대-그리스도교적 사유 틀 속에서 제기되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의미를 구성하는 것은 목적(telos)이다. 이 목적은 사물 외부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사물이나 사건, 생명체는 그 자체로서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않지만, 그것이 존재하고 만들어진 목적을 통해서 외부로부터 의미를 부여받는다(연장선상에서 뢰비트는 독일어 Sinn이 '의미', '목적', '목표'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따라서 역사의 의미를 묻는 것은 의미가 부재한 사태의 나열일 뿐인 과정을 그 목적에 따라 인과관계를 재구성하는 것이이거니와, 뢰비트의 지적대로 역사철학이 역사적 사건의 궁극적 의미를 찾는다면 이는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종말론적 미래의 지평에서 역사의 최종 목적을 앎으로써 역사의 전체 과정을 사유할 수 있다. 역사의 궁극 목적이 역사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이다.

뢰비트는, 이렇게 역사를 그 최종 목적에 따라서 성찰하는 목적론적인 역사철학은 그리스도교적 어휘와 사상 구조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한다. 고대와 그리스도교는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구분되었고, 그에 따라 역사를 사유하는 방식도 정반대였다. 고대의 시간관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구분하지 않았으며, 마치 계절이 돌고 돌듯이 동일한 현상이 무한히 회귀하고 순환함을 전제한다. "자연적 세계에 대한 관조(Anschauung)가 지배하고 있던 이러한 지적 분위기에서는 일회적이고 독자적인 역사적 사건의 세계사적 의의 따위가 존재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었다. 그들[고대 그리스인]이 시종일관 문제삼았던 것은 '우주의 이치'(Logos der Kosmos)였지 '우주의 지배자'(Herrn der Geschichte)가 아니었다." 이러한 세계관은 헤로도토스, 투퀴디데스, 폴리비오스의 역사서술에도 반영되었다. 그들이 역사를 서술할 때 제일전제는 "과거란 영속적인 원천으로서 그 자리에 있다"(wird die Vergangenheit als immerwährender Ursprung ver-gegenwärtigt)는 원리다. 과거에 일어난 사태는 현재, 당연히 미래에도 동일하게 반복될 것이며, 따라서 과거에서 시간적으로 뒤에 일어날 일을 유추할 수 있고, 역사란 미래의 궁극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종말론적 도정이 아니라 보편적인 우주의 이치가 실현되는 장이다.

유대-그리스도교적 사유는 "미래지향적"(futuristisch) 역사관을 통해 '역사'(historein)의 고전적 의미를 전복했다. 모든 역사란 "구속사"(Heilsgeschehen)다. 최고신인 야훼-하느님의 세계 창조와 섭리를 믿는 이 세계관은 세계의 종말을 사유하고, 그 속에서 그리스도교인은 역사의 단초를 상상하고 종말을 예기하면서 역사의 처음과 끝이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일직선을 그리며 나아간다고 여긴다. 신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한 이 역사는 신의 뜻의 완성이라는 궁극 목적을 향한 도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여기서 과거는 영속적으로 반복되는 원천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비적 과정으로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과거와 미래를 엮는 필연적인 우주의 법칙이 없다는 점에서 미래는 과거와 단절되어 있으며 미래는 결코 예측불가능한 불확실성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예언자가 미래를 예언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폴리비오스처럼 고정불변의 법칙을 찾는 것과 다르다. 예언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 확정되지 자연적 운명에 따라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래에 대한 어떠한 보호와 인도도 거부하며 스스로의 의지와 신앙을 통해 종말론적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고대인과 그리스도교인이 가장 크게 갈라지는 지점이자 진보의 이념이라는 세속화된 형태로 근대 이후에도 남아 있는 사고방식이다.

세속적 진보에 대한 믿음은 섭리적 믿음에서 변모된 것으로, 근대인은 신학적 원리를 진보로 세속화하여 이 원리를 경험적 사실 일반에 적용함으로써 역사철학을 전개했다. 진보에 대한 관심은 "메시아적 일신론"의 계보 위에 있고, 진보적 믿음 자체가 목적론적/종말론적 도식 내에서야 가능한 관념이다. 토크빌, 슈펭글러, 토인비가 그리스도교적 신에 대한 믿음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할지라도 "그 일이 과거에 어떻게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세속화된 종말론, 즉 근대의 진보적 역사관을 표방하고 있다.

뢰비트는 근대적 역사철학의 그리스도교적 기원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를 증명하기 위해 "진보에 대한 세속적 신앙이 갖고 있는 신학적 전제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렇게 세속화된 이념과 신학 사이의 실체적 동일성과 연속성을 드러내고자 뢰비트는 책에서 다루는 중요한 사상가들과 문헌들(부르크하르트, 마르크스, 헤겔, 콩도르세와 튀르고, 콩트, 프루동, 볼테르, 비코, 보쉬에, 요아킴, 아우구스티누스, 오로시우스, 성서)을 시간역순으로 배열하는 구조를 채택했다. 이로써 오늘날의 친숙한 이념이 점차 낯선 사상으로 바뀌어가면서도 오늘날의 사상이 어디서 유래하고 변천해왔는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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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르크 프라이, <요한복음과 만나다>, 비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내가 원하던 성서 입문서이다. 입문서라면, 어떤 책의 내용을 쉽고 재밌게 풀어서 설명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텍스트 형성사와 사상사적 위치, 읽는 법, 오늘날에 주는 의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꼼꼼한 해설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이 요소들의 조화를 잘 이루어야 좋은 입문서인지 아닌지가 판가름난다고 본다. 성서의 경우 텍스트 형성사만 강조하면 본문을 조각조각 해체하고 분석하여 텍스트를 하나의 전체로서 읽을 수 없게 된다. 반대로 역사적 해석을 고려하지 않으면 자의적 텍스트 읽기만 남게 될 것이다.

외르크 프라이는 바로 그러한 두 극단을 피하고, 때로는 (좋은 의미로) 학자답게 꼼꼼하게 때로는 감동적으로 요한복음의 의미를 해설해주고 있다. 총 3부 구성을 취하는 이 책은 1부에서 요한복음 저술 연도, 자료 등 역사적 문제를 다룬다. 외르크 프라이는 요한복음의 일관된 문체에 주목하면서 요한복음이 한 명의 저자가 쓴 책일 가능성을 주장하고, 2부에서는 요한복음을 톺으면서 이 책의 신학적 특징을 밝혀 보인다. 제3부는 요한복음을 읽는 법을 간략하게 제시한다. 입문서로 갖추어야 할 요소는 다 갖춘 셈이다.

제2부가 분량으로나 내용으로나 이 책의 백미였는데, 다른 세 복음서와 구분되는 (때로는 이것들에 비판적이기까지 한) 예수에 대한 요한복음의 이해를 통해 부활 신앙, 성육신, 십자가 신학과 같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문제에 요한복음이 어떠한 주장을 하는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신성, 달리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이라고 가장 분명하게"(p. 101) 말하고 또 증명하는 "가장 대담한 신학자"(p. 108)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의 신학적 의의를 강조한다.

"요한이 말하는 부활 신앙은 예수가 진실로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가 하느님임을, 그의 신적 정체성과 위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요한에 따르면 제자들은 부활절이 지나고 성령의 가르침을 통해 이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부활절 계시를 통해 요한은, 제자들은, 그리고 요한복음을 읽는 이 모두는 예수가 실제로 누구인지 이해하고, 그의 얼굴과 이야기를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실제로 어떤 분이신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외르크 프라이는 이러한 신학적 특징과 의의를 꼼꼼하게 주석 달듯이 차근차근 분석하면서 설명한다. 제3부는 1, 2부에 비하면 독해법에 대한 설명이 다소 소략하다는 인상은 있지만, 상대적으로 그럴 뿐 전체적으로 묵직한 주제들을 평이하고 감동적으로 서술했다. 서사 구조와 수사적 표현을 통해 사복음서가 그리는 서로 다른 예수의 초상을 해설한 리처드 버릿지의 <복음서와 만나다>와 같이 읽으면 요한복음과 마르코, 마태오, 루가 복음을 더 입체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독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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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의 탄생 - 로마 공화정의 몰락
에드워드 와츠 지음, 신기섭 옮김 / 마르코폴로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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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공화정의 역사를 통해 오늘날 정치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한다. 균형 잡힌 시각과 인상 깊은 통찰이 눈에 띈다. 그런데 출판사의 역량과 편집이 이 좋은 책을 못 따라간다. 인민을 국민으로 번역하는 등 번역가의 역량도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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