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카이 마코토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각인시킨 영화는 <너의 이름은.>이다. 이 영화는 무수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대재난 앞에서 느끼게 되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런 점이 통했는지, 그의 첫 장편 데뷔작은 일본 영화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으며, 한국에서도 크게 흥행하여 그 해 당연 최고 화제작 중 하나였다. 성공적인 데뷔 이후 공개한 두 번째 장편 작품인 <날씨의 아이>에서는 기후 재난을 다루었지만 박평식 평론가의 말처럼 "황홀하게 뜬구름 잡"는 영화가 되어버렸다. 감독의 개성은 강해졌으나 작품성은 약해졌다. 곳곳에서 감지되는 전작의 흔적과 단점들은 감독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에 비해 이번 <스즈메의 문단속>은 <너의 이름은.>과 비슷하다. 감독의 색깔은 옅어졌지만 대중성이 올라갔고 작품적으로도 전보다는 나아졌다.

신카이 마코토가 신작에서 택한 주제는 재난, 특히 지진이다. 이는 그리 놀랄 만한 선택은 아니다. 운석 재해를 등장시킨 <너의 이름은.>의 정신적 밑바탕에도 지진, 더 정확히 말하면 동일본 대지진이 있기 때문이다. <너의 이름은.>은 가상의 재해와 환상적 장치를 통해 동일본 대지진을 은유적으로 암시하며, 그때 이후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집단 치료를 시도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거대한 재난을 경험한 인간에 대해 예술은,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중요한 미학적 질문을 던진 <너의 이름은.>의 정신은 <스즈메의 문단속>으로 이어지며, 감독은 주제의식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주인공 스즈메는 우연히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을 열게 된다. 이 문을 열면 미미즈라는 재앙의 신이 나오는데, 미미즈가 땅에 떨어지면 큰 지진이 발생한다. 스즈메는 이 재앙의 문을 닫기 위해 소타와 여행을 떠난다.(여기서 영화는 로드무비의 성격을 띤다) 먼저 이 여행의 성격을 규정해보자. 스즈메와 소타의 여행은 거대한 힘에 맞서는 모험 서사이며, 일본 전통 설화에서 유래한 듯한 모티프가 섞여 제의의 성격도 동시에 띤다. 재앙의 문은 규슈, 고베, 에히메, 도쿄 등 일본 전역에 걸쳐 있으며, 문이 있는 장소는 과거 온천으로 유명했던 마을이거나, 산사태로 무너진 학교, 폐쇄된 놀이공원 등 재해로 인하여 더 이상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다. 이곳으로 가는 것조차 만만치 않지만, 미미즈라는 위험한 존재를 막기 위해 그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은 웬만한 용기가 있어도 불가능하다. 문을 닫기 위해서는 어떤 주문을 외우며 열쇠로 문을 잠가야 한다. 소타의 가문은 대대로 이 문을 관리하고 닫는 역할을 담당한 '토지사' 집안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여정은 스즈메의 귀향 서사이다. 여행의 최종 종착지는 이와테현으로, 이곳은 스즈메가 어린 시절까지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곳이자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일본 동복부 연안에 위치한 지역이다. 스즈메는 어머니가 재해로 사망한 곳에 어머니의 유품을 가지고 돌아온 것이다. 감독은 이 시점부터 동일본 대지진의 기억을 선명하게 상기시킨다. 당시 너무나 어린 아이였던 스즈메는 사건 당시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스즈메는 현재 일본의 10대, 20대 초반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동일본 대지진은 2023년을 기준으로 12년이 지났다. 현 중고등학생은 이 사건을 잘 기억하지 못할 것이며, 그보다 어린 이들은 아예 이런 사건이 있다는 것조차 실감하지 못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폐허가 된 장소들을 반복해서 비춰주면서 재해로 인해 파괴된 일상의 공간과 그 공간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비추며 이들에 대한 애도를 표한다. 이를 생각하면, 왜 감독이 문이라는 소재를 택했는지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재난의 문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이다. 이 문을 열면 저승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들어가지는 못한다. 그날 아침,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는 '다녀왔습니다'가 되지 못했다. 재난은 생과 사를 너무나 철저하게 갈라놓는다. 스즈메가 문을 닫기 전에 들려오는 사람들의 대화소리는 그 일상을 파괴하는 재앙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너의 이름은.>이 재난을 막고 다시 연결되려는 타키와 미츠하의 간절함에서 영화의 에너지를 형성한다면, <스즈메의 문단속>의 주안점은 재난을 막는 것 자체에 있기보다는 재난이 갈라놓은 일상 세계의 회복에 있는 것 같다. 이 지점에서 스즈메의 여정의 제의적 성격은 내면화되어 스즈메 개인의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제의가 되며, 이는 영화 밖으로도 확장되어 커다란 재난을 겪은 이들을 위로하려는 하나의 거대한 의례가 된다. 마지막에는 이런 주문을 외운다. "목숨이 덧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 항상 곁에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희는 기원합니다. 앞으로 1년, 앞으로 하루, 아니 아주 잠시라도 저희는 오래 살고 싶습니다. 용맹하신 큰 신이여. 부디 부탁드리옵니다." 이 대사를 통해 이 영화 자체가 하나의 의례가 된 것만 같다.(실제 이동진도 이렇게 평한다) "다녀오겠습니다." 모든 역경을 뚫고 여정을 마무리하는 한 소녀의 이 말이 참 아름답다.

어떤 상처로부터 치유된다는 것은 그것을 잊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특히 그것이 집단적 차원으로 발생하였다면 더욱 그렇다. <너의 이름은.>이 개별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을 지적한 데 이어, 현실의 사건을 직접 호명하여 어느 작품보다 더 직접적으로 현실에 개입하는<스즈메의 문단속>은 장소와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을 기억해야 함을 지적한다. 단순한 기억을 넘어 성장 서사로서의 희망까지 보여준다. 그것이 감동을 자아낸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역시나 유난히 서사에 취약한 신카이의 약점이 고스란히 노출되며, 그래서 후반부로 가면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제대로 따라가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전작보다 서사로 승부를 보려는 의도는 확실히 좋게 느껴졌으며, 감독의 진정성은 보는 이의 정서를 자극하여 공감을 이끌어낸다. 어느 모로 보나 관객이 신카이 마코토의 이름에 기대하는 바를 확실히 충족시켜준 작품이다. 한때 신카이 마코토에게는 호소다 마모루와 함께 '포스트 미야자키'로 촉망 받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 누구도 포스트 미야자키가 아니며 그렇게 되지 못함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신카이 마코토가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하고 주목할 만한 감독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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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알레비의 <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을 읽기 시작했다. 포스타입에서 강유원 선생님이 해설을 곁들인 통독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니 관심이 있는 사람은 포스타입을 이용하고, 여기서는 옮긴이 서문의 몇몇 부분을 옮겨본다.

이 책은 어떤 책인가?

"엘리 알레비의 <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은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를 중심으로 영국에서 철학적 급진주의가 태어나 형체를 갖춘 과정을 추적한 연구다." 알레비는 이 책에서 벤담의 삶을 세 기기로 나누어 서술하는데, 이는 벤담의 삶의 궤적과 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이 동일한 궤적을 그림을 시사한다.

제1권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1789년까지 벤담의 젊은 시절" "공리주의의 발상에 그가 도달하게 된 배경" "공리주의가 그의 마음 속에서 어떻게 해서 법철학과 사법개혁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는지, 그리고 경제적 문제들에 관해 애덤 스미스에게서 받은 영향" "개혁운동의 갈래들 중에서 어떤 위치를 점했는지" 등을 다룬다.

2권에서는 "1789년에서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815년까지 벤담의 중장년기이자 유럽이 격렬한 사회변동을 겪기 시작하는 시기에 버크, 페인, 고드윈, 맬서스 등 정치와 경제에 관해 활발히 주장을 펼친 동시대 개혁가들과 벤담으 주고받은 영향, 그리고 특히 제임스 밀을 통해서 벤담주의가 맬서스의 경고와 결합함으로써 마침내 철학적 급진주의가 탄생하는 사연"을 다룬다.

제3권에서는 "벤담의 노년기를 배경으로, 벤담과 그 추종자들이 꿈꿨던 사회의 기본 질서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리고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교육에 관한 그들의 이념이 정형화되는 바탕에 인간의 지식과 행동에 관한 어떤 견해들이 있었는지, 다시 말해 그들의 인식론과 심리학"을 탐구한다.

1~2권이 사상사적 탐구라면, 3권은 인식론과 심리학을 탐구하는 구성을 취한 것이다. 옮긴이인 박동천 교수는 이 책을 통해 공리주의와 벤담의 사상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제거하고 그 사상적 풍부함을 음미할 수 있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오해는 대략 다음 네 가지와 같다.

  1.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벤담의 파놉티콘이 교도소 체제에 그치지 않고 마치 모든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중앙에서 감시하는 사회체제를 시사한다는 듯이 과장해 놓은 투사(投射)가 있다."

  2. "존 롤스가 <사회정의론>에서 그리고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마치 공리주의가 도덕을 무시하고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듯이 그려놓은 이분법이 있다. 그러나 이런 이분법이야말로 벤담이 공리주의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던 잘못된 사고방식이다. 벤담은 도덕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도덕의 명령이란 이익들을 균형에 맞추면 필연적으로 생성되는 결과'라고 봤다."

  3. "공리주의가 사회주의를 배척하고 자본주의를 편든다는 생각이 있다...철학적 급진주의는 맬서스의 비관론에서 큰 영향과 많은 영감을 받아 탄생한 사회개혁 이념으로서, 자본의 힘이 세상을 지배하지 못하게 대항세력을 정부의 정책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봤"다.

  4. "대를 위해 소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발상을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이는 권력의 행사를 공리주의와 혼동하는 풍조가 있다." 벤담은 "'언제가 필요한 경우인가'라는 핵심적인 질문을 잊지 않았다...아무때나 대를 위한다는 핑계로 소의 희생을 강요하는 논법은 권력자의 편의에 굴종하는 어법에 불과한 반면에, 벤담은 권력자의 편의를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통제할 수 있는 어법으로서 공리의 어법을 개발한 것이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벤담을 비롯한 공리주의는 단순히 '대를 위한 소수의 희생'으로 도식화될 수 없는 개혁 사상이었다.


애덤 스미스, 토머스 페인, 맬서스, 윌리엄 고드윈, 에드먼드 버크, 엘베시우스, 체사레 베카리아 등 수많은 사상가들과의 상호작용을 밝힌 부분은 그 자체로 18~19세기 지성사를 위한 하나의 좋은 참고문헌이 될 수 있다. 더불어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역자 박동천 교수의 꼼꼼한 각주와 치밀한 해제가 덧붙여져 개념 공부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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