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빈약한 투퀴디데스 이해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하지만, 약자는 해야만 하는 것을 하느라 고달프다"...강자와 약자의 처지에 관한 이 유명한 문구는 분명 히 아테네인들의 주장에서 나온 것이며, 현대의 인기는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약자는 '해야만 하는 것'을 하느라 고달프다는 식으로 대구를 이룬 균형 잡힌 표현에 힘입은 바가 크가...그러나 이는 투키디데스가 썼던 표현이 아니다. 투키디데스의 <전쟁사> 전체를 자구대로 따라가며 해설한 기념비적인 해설서의 마지막 3권에서 사이먼 혼블로어가 올바르게 표현한 것처럼 정확한 번역은 이렇다.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고, 약자는 따라야 한다." 심지어 이것도 약자에 대한 강요라는 개념을 과장한 감이 있다. 투키디데스가 말한 내용은 그저 "약자는 따른다"로, 반드시 해야 한다는 불가피성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다.

(...)

투키디데스 작품의 번역과 해설은 르네상스 시대 이래 꾸준히 이어져왔다. 그런데도 혼블로어는 무려 20년 이상의 세월을 쏟아부어 <전쟁사> 전체를 상세히 다룬 역사적, 문학적 해설을 내놓았다. 새삼 그럴 필요가 있었냐고? 투키디데스의 그리스어가 워낙 모호하고 난해해서 이런 작업은 지금도 충분히 가치 있다. 오늘날에도 투키디데스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전보다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pp.84~87)













2.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로마제국의 창작물

로마 작가들은 단순히 알렉산드로스의 성격에 대해 논쟁만 한 것도 아니고, 그를 본보기로 여겨 칭송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알렉산드로스'를 거의 만들어냈다...사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는 명칭이 쓰인 입증 가능한 최초의 사례는 로마 시대 플라우투스의 희극에 나오는데 알렉산드로스 사후 150여 년이 지난 기원전 2세기 초반의 것이다. 내가 보기에 플라우투스 자신이 그 단어를 고안해냈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아마도 로마인들 사이에 퍼진 신조어였을 것이다...어떤 의미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은 '위대한 폼페이우스Pompety the Great'와 마찬가지로 로마인의 창작물이다.

(...)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기록이 모두 로마 제국 시대에, 로마 제국주의를 배경으로 쓰였다는 사실이다. 현존하는 최초의 기록은 디오도로스 시켈리오테스가 기원전 1세기 말에 작성한 것이다. 현재 학자들이 가장 애용하는 정보원인 아리아누스는 서기 80년대에 니코메디아라는 도시에서 태어났고, 로마 정계에서 경력을 쌓아 120년대에 집정관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카파도키아의 총독으로 복무했다.

(pp.124~125)











3. 엉터리 역사가 리비우스

정통적 관점에서 볼 때 리비우스는 고대 기준으로든 현대 기준으로든 아주 형편없는 역사가였다. 리비우스는 매우 기본적인 조사도 하지 않고 전해오는 과거 이야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역사가였다. 물론 고대에는 이런 모습이 굉장히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순 없다. 그렇지만 리비우스는 대다수의 고대 역사가보다 그 정도가 더 심했다. 리비우스는 입수한 정보를 스스로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거나, 일관성 있는 단일한 서사 구조로 집약시키지 못할 때도 많았다. 리비우스가 같은 사건을 두 번 서술한 악명 높은 사례들이 있는데, 다른 두 자료에서 살짝 달리 서술된 내용을 보고 같은 사건임을 모른 채 빚어진 실수가 아닌가 싶다.

(...)

'방패'라는 그리스어를 분명하게 알지 못했던 로마 역사가에게서 과연 얼마나 똑똑한 폴리비오스 독해를 기대할 수 있을까?

(pp.175~180)









4. 클레오파트라의 현실

클레오파트라 "신화를 둘러싼 외피를 제거하면" 허구의 표면 아래 거의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그럴듯한 인생 이야기의 소재가 될 만한 것은 전무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현존하는 최선의 자료라고는 세금 감면 허가 문서에 나오는 그녀의 것으로 짐작되는 '서명', 클레오파트라가 마지막 순간에 "나는 전리품으로 끌려가지는 않을 거야"라고 반복해서 말했다는 기록 정도가 전부다.

(285p)



5. 타키투스의 <역사>

왜 타키투스는 69년 1월 1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가? 결정적인 정치적 변화는 네로의 죽음으로 인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몰락과 함께 68년 6월에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것이 바로 타키쿠스가 말하려는 요점이다. 집정관 중심의 연도 표기라는 과거 공화정 시기의 구조를 보란 듯이 과시함으로써 타키투스는 로마의 전통과 제정기 정치 현실 사이의 긴장을 한층 더 강조하고 있다. 황제의 통치와 공화제 관료 취임 양식이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

지금까지 나온 <연대기> 번역 중 첫 문장의 불온한 다중성을 제대로 포착한 판본을 보지 못했다. "도시 로마는 처음부터a principio 왕들의 소유였다." 라틴어 a principio는 '처음에는'과 '처음부터'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이런 이중성이 중요하다.

(pp.362~366)











6. 좋은 황제

'좋은' 황제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로마 사람들의 생각이다. 좋은 황제는 관대해야 하고 멀리 볼 줄 알아야 하며 무엇보다 똑똑해서 마냥 속고 이용당하는 그런 부류가 아니어야 했다. 좋은 황제는 또한 대중과 직접 마주할 배짱을 지녀야 한다. 말하자면 상류층만 사용하는 외딴곳에 있는 사설 목욕 시설이 아니라 공중목욕탕에서 찾아노는 일반인 모두와 어울리고 고생도 함께 해야 한다. 로마 황제는 친구나 동료 같은 이미지여야 한다. 아니, 적어도 그런 척이라도 해야 한다.

(373p)



7. 로마 노예의 복잡한 사회사

로마처럼 많은 노예를 해방시킨 사회는 일찍이 없었다. 나아가 로마인은 해방노예에게 로마 시민이 누리는 거의 모든 권리와 혜택을 주었다. 고대 아테네에서 해방노예는 기껏해야 '거주 외국인' 정도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반면 로마에서 로마 시민에 의해, 특정 법률에 따라 해방된 노예는 누구든 몇몇 소소한 제약만 따르는 로마 시민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세대부터는 일부 제약마저 사라져 사실상 아무런 제약도 없었다. 유명한 시인 호라티우스도 로마 사회 최상위층과 가까이 지냈던 해방노예의 아들인데 이처럼 눈길을 끄는 사례는 그뿐만이 아니다. 한 추정에 따르면, 로마 도시에서 가사 노동을 하던 노예 대부분은 자유민으로 생을 마감했다.

(...)

자유는 얻었지만 로마 시민권은 얻지 못한 범주다. 물론 이들이 나중에 아이를 갖는다든가 해서 추가 기준을 충족시킴으로써 로마 시민권을 가질 수도 있었으리라.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위에 열거한 각각의 범주에 속했는지를 말하기란 어렵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인이 거치게 되는 조각보처럼 복잡하게 이뤄진 계층 구조다. 노예, 혹은 노예의 노예부터 공식 절차에 따라 해방된 시민권을 가진 해방노예까지, 위로의 상승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로마 법조항 가운데 하나는 노예를 얻어, 노예와 불륜을 저지른 자유민 여성을 해방노예 지위로 '강등시킨다'고 규정하고 있다. 만약 자유민 여성이 노예 주인의 동의 없이 그런 행동을 했다면 노예 주인의 노예가 되었다.




8. 로마 세계의 언어적 다양성

애덤스는 적어도 단순화시켜 보면 로마 제국 전역에서 라틴어가 군대의 '공식' 언어였다는 견해를 사실상 무너뜨린다. 그는 그리스어가 각종 '공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밝히고, 속주민으로 구성된 부대의 하급 병사들은 장교가 쓰는 라틴어 구사 능력이 매우 제한적이어서 각자의 모국어로만 편안한 의사소통이 가능했음을 보여준다...로마 군대의 실상은 그동안 영화, 소설, 교과서 등에 나왔던 비슷한 모습에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병사들의 이미지보다는, 언어적 문화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구성원들이 한데 뒤섞인 현대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팀 모습에 가깝지 않았을까 싶다.

(...)

속주나 변방에서 장기간 근무하는 관리들은 현지 언어 구사 능력을 어느 정도 갖출 수밖에 없었으리라. 무엇보다 그들 가운데 다수가 현지인 아내, 여자친구, 매춘부 등을 취했다. 추정컨대 그들이 라틴어로만 성생활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정도의 이중 언어 사용이 애덤스가 강조하는 그날그날의 간단한 기록, 급히 휘갈겨 쓰는 낙서, 조잡하게 새겨진 묘비 등에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은 이상할 게 없다. 여기서 다루는 대상이 고대 세계에서 다수를 점하는 글 모르는 최하층에 속한다는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이들 현지 토착어들은 많은 경우 기록 가능한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아 문서 기록으로 남길 방법이 없었다.

(pp.466~46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