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느와르 영화 하면 1년 간격으로 개봉한 <신세계>와 <범죄와의 전쟁>이 떠오른다. 두 영화는 큰 화제를 몰아 시간이 지나서도 수많은 유행어와 밈을 탄생시켰다. 그렇지만 작품성까지 따졌을 때 <범죄와의 전쟁>이 더 훌륭한 작품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영화 속 대사들이 재발견되어 밈화된 것으로 보듯이, 이 영화는 일단 장르적으로 대사를 잘 만들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잘 만들어진 구조 안에서 최익현이라는 인물을 통해 한국 사회에 대한 냉소적이고 날카로운 통찰력을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주인공 최익현을 중심으로 그가 어떤 세력과 손을 잡는가에 따라 나뉘어진다. 본래 부산항 세관원이던 최익현은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부패 공무원이었다. 어느날 그는 누군가의 고발로 인해 강제로 총대를 매게 되어 해고를 당하게 된다. 동료와 술을 마시며 신세한탄을 하던 중 수상한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마약을 발견하고는, 동료의 주선으로 부산 최대 조직폭력배의 두목인 최형배와 동업자 관계가 된다.


폭력배의 세계에 속하지 않던 인물이 정식으로 최형배 조직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최형배와 최익현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었다. 최익현과 최형배는 같은 본관의 같은 파로, 최형배의 아버지는 나이로는 그보다 한참 연상이지만 촌수로만 따지면 최익현이 더 웃어른이다. 그렇다보니 최형배의 아버지는 그에게 꼼짝도 못하고 최형배에게도 최익현에게 깍듯하게 대하라고 한다. 형배 입장에서는 탐탁치 않지만 아버지의 요구로 어쩔 수 없이 익현과 손을 잡게 된 것이다. 익현으로서는, 주먹의 논리로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되는 세상에서, 그 주먹의 정점에 위치한 가장 '쎈놈' 형배가 최고의 조력자로 여겨졌다. 그렇게 첫번째 파트너인 형배와 조폭의 비호 아래, 또 자신의 정치권 인맥의 비호 아래 형배는 뒷세계의 실권자로 군림한다.


그의 두 번째 파트너는 검사이다. 1990년 노태우 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자 형배가 손을 잡던 조폭 무리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 경찰과 검찰의 대대적인 검거 작전은 형배 조직을 사실상 와해시켜 버리고, 형배와의 관계가 틀어진 직후 익현의 새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었던 판호의 조직은 두목까지 검거되는 등 완전히 무너진다. 일련의 사건을 겪은 익현은 이제는 조폭의 주먹보다 검찰이 더 쎈놈임을 거의 본능적으로 인식하고는 그들에게 빌붙는다. 범죄와의 전쟁으로 익현은 깡패에 대해 무자비한 검사 조범석에 의해 실형을 받을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최익현은 교묘한 잔머리를 굴려 최형배 검거에 협조하겠다는 제안을 하고는 완전히 공권력과 한패가 된다. 물론 오로지 인맥과 혈연으로 권력에 기생한다는 방식에는 차이가 없었다. 새로운 쎈놈인 검찰을 찾은 그에게는 형배와 같은 깡패는 이제 필요 없었다.


작중 최익현을 상징하는 소품은 '빈 총'이다. 야쿠자 두목으로부터 익현은 빈 총을 선물받는데, 익현은 형배를 체포할 때 이 총으로 그를 위협한다. 그런데 총알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모양만 총이지 총으로서 제대로 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빈껍데기와 같았다. 겉모습은 위협적이나 그저 블러핑 용도였을 따름이다. 최익현은 부산에서 카지노 세 개를 운영하고 한때 조폭들을 거느렸으며, 이후에 검찰 아들을 두고 검찰국장 인맥을 두며 검찰세력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물이다. 하지만 그 실상은 마치 껍데기뿐인 빈 총처럼, 그 자신의 노력으로 일군 것은 하나도 없으며 그저 쎈놈에게 기생하여 얻어낸 것들뿐이다. 그의 성취는 그의 능력보다는 그가 가지고 있던 인맥빨이 더 크다. 그러면서도 그는 당당하게 자신의 업적인양 으스댄다. 최익현은 한국인에게 퍼다한 쎈놈주의를 반영한다. 자기개발서는 쎈놈이 되라고 말해준다. 학자들은 최신 해외 학술이론을 얼마나 많이 잘 알고 있는가로 공개적으로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며*, 공직자들은 '어떻게 하면 미합중국을 더 닮아갈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며 정책업무를 수행한다. 교회 성직자들은 기독교 수용을 문명의 척도로 삼아 미합중국을 신국으로 삼고 비기독교 국가를 야만국으로 이분한다. 오늘날의 이러한 행태는 최익현의 비열하고 기회주의적 행태와 얼마나 다른가.


*"학자들은 최신 해외 학술이론을 얼마나 많이 잘 알고 있는가로 공객적으로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며"

- 그 한 증거가 바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해외 최신 학설의 유행과 쇠퇴이다. 자기 공부가 없으니 들뢰즈, 라깡, 하버마스니 지젝 같은 최신 유행 학자들을 겉핥기로 공부하고 이들을 아는 것을 지성인의 잣대로 삼지만, 유행이 지나면 곧바로 새 학자로 갈아타고 기존의 담론은 사그라든다. 이런 물화된 한국 학계를 비판적으로 고찰한 책이 최근에 출간되었다. 이시윤, <하버마스 스캔들 - 화려한 실패의 지식사회학>, 파이돈 ,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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