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서양 서사시 문학의 원형을 이루고, 서양 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작품이지만, 이 서사시를 읽은 사람은 많지 않다. 너무 긴 분량, 낯선 형식, 생소한 인물과 단어들. 이런 것들이 <일리아스>의 진입장벽을 높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일리아스>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있다는 걸 듣고 어느 정도 기대했다. 잘만 만들어지면, 영화의 장점을 살려 원작의 전투씬을 실감나게 시각화해서 볼 수 있고, 호메로스의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표현들을 영화를 통해 접할 수 있어 원작으로 가는 부담감을 줄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다 보았다.

그런데.......이 영화는 아무래도 추천하기 어렵다.

<일리아스>를 원작으로 삼았다고는 하나, 원작을 원형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하도 난도질하고 각색해버려 원작의 감동을 재현하기는커녕 이 영화를 보고는 원작의 기본적인 내용 이해도 힘들다.

 

일단 좋았던 점 먼저

전투 장면은 정말 잘 스펙터클하게 만들었다.

특히 아킬레우스의 부대가 트로이에 도착하여 펼친 해변에서의 전투 장면이나

헥토르와 아킬레우스의 건곤일척 전투씬이나 모두 너무 멋있었다. 영화의 전투 장면에서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감독이 대규모 전투를 매우 리얼하고 실감나게 영상에 담아서, 덕분에 시각적 즐거움이 매우 컸던 영화다.

전투 씬만으로도 볼 만한 영화.

대작 블록버스터 오락 영화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

 

 

나빴던 점은, 원작과는 너무 달라진 캐릭터 설정, 원작의 명대사들을 잘 구현하지 못한 것, 원작의 매력을 잘 살리지 못했단 것 등 많지만, 여기서는 한 가지만 언급하겠다.

 

흔들리는 주제의식

 

무엇보다 불만인 점은 이것이다.

<일리아스>의 이야기는 싸움만 잘하는 육체적 영웅이었던 아킬레우스가 정신적으로도 성숙한 영웅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일리아스>는 전쟁에 참여하여 불멸의 명성을 얻는 대신 요절할 운명을 받아들일 것인지, 혹은 영웅으로서의 명예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얇고 긴 삶을 살 것인지를 두고 아킬레우스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가 백미인 작품이다. 아가멤논이 브뤼세이스를 뺏자 분노한 아킬레우스는 전투 참여를 거부한다. 전황이 어려워지자 그를 설득하기 위해 오뒷세우스가 나서는데, 아킬레우스는 처음에는 명예는 부질없다며 그의 제안을 거부한다. 하지만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의 손에 죽자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불멸의 명예를 얻는 영웅이 되기를 택한다. <일리아스>란 작품은, 아킬레우스의 두 번의 선택과, 그 과정에서 전투에 나서면 죽을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다시 무기를 잡고 헥토르와 싸우는 아킬레우스의 성숙해진 내면 변화에 이 작품의 모든 주제의식이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영화는 초반에 테티스(아킬레우스의 어머니)와 아킬레우스의 대화를 통해 이런 주제를 어느 정도 다루는 듯했다. 테티스는 이 전쟁이 아들의 죽음임을 알지만, 불멸의 명예를 얻을 수 있다고 아킬레우스의 참전을 독려한다. 아킬레우스도 아주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같은 이유로 참전을 결심한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런 주제의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중반부터 갑자기 아킬레우스와 브뤼세이스의 치정극이 되어버렸다. 영웅적 행위란 무엇인지, 진정한 명예란 무엇인지에 대한 원작의 질문은 찾아볼 수 없고, 당연히 아킬레우스의 성숙도 볼 수 없다. 불필요한 곁가지를 너무 넘어 굳이 안해도 되었을 서사의 변형이 가해졌다. 아킬레우스의 선택을 다루는 제9권의 오뒷세우스와 아킬레우스의 대화가 영화에선 삭제되었으니 당연히 극의 흐름이나 주제가 길을 잃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다 보니, <일리아스>의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24권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와 성숙한 아킬레우스의 격조 높으면서도 감동적인 대화도 영화에서는 감흥이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프리아모스를 연기한 배우 피터 오톨의 연기는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아킬레우스가 트로이 함락 작전 중 너무도 사랑하는 브뤼세이스를 구하려다가 파리스의 화살에 맞아 죽는다는 결말도 그다지 와닿지 않는다. 영웅의 전투도, 영웅의 슬픔이 가고 난 자리를 영웅의 사랑이 채웠다. <일리아스>의 주제나 기본의식은 사라지고, 그저 그런 할리우드 상업 러브 영화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냥 훌륭한 전투 장면을 위로 삼아야 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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