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한 작품의 번역본을 여러 종 구매한다. 여러 번역본을 구매하는 이유는 다른 역자의 번역이 궁금하다기보다는(그것도 없지는 않지만), 평균 20쪽가량의 역자 해설이 궁금해서이다.
역자는 자신이 옮긴 작품을 어떻게 이해하고 무엇으로 규정하며, 이 작품을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고려사항으로 무엇을 꼽고 있는지. 마지막으로 이 작품이 현대에 어떠한 의의가 있다고 주장하는지. 그래서 이를 통해서 이 작품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시야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새로운 번역본을 산다.
이렇게 보면, 역자의 해설에는 대략 다음의 것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작품에 대한 일반적 의미 규정, 작품의 구조와 형식, 시대적 정황, 현대적 의의 등이 그것이다. 대다수의 고전 번역은 시대적 배경이나 저자의 생애를 길게 서술하는데, 정작 나는 저자 생애는 꼭 필요한 경우에만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시대적 배경도 최소한의 수준만 알려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3개월 전에 민음사에서 출간한 <오만과 편견>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이번에 조선정이 번역한 을유문화사 <오만과 편견>을 구매했다. 역자 조선정은 영국소설과 여성 문학을 전공한 연구자로, 민음사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로 <제인 오스틴의 여성적 글쓰기: <오만과 편견> 새롭게 읽기>라는 고전 해설서이자 교양서적을 낸 적이 있는 인물이다. 제인 오스틴 역자로서는 매우 안성맞춤이고, 다른 번역자들이 놓쳤을 중요한 발견이나 사실이 있지 않을까 하여 조선정 역을 구매했다. 여기서는 역자의 해설만을 요약 정리하겠다.
역자 해설의 제목은 “일상의 발견, 그 미학과 윤리”이다. 여기에는 역자가 생각하는 제인 오스틴의 문학적 성취와 역자가 내리는 <오만과 편견>에 대한 의미 규정이 들어가 있다. 그것이 바로 “일상의 발견”이다. “하루하루의 일상에도 나름의 치열한 생존 투쟁이 있고 그에 따른 희로애락의 진실이 녹아 있음을 빼어난 소설 언어로 보여준다는 데에 오스틴의 성취가 있다. 그것을 ‘일상의 발견’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392p)
(참고로 민음사판 윤지관/전승희 역 <오만과 편견> 해설의 제목은 “제인 오스틴의 삶과 문학, 그리고 <오만과 편견>”이다. 해설의 상당 부분은 제인 오스틴의 삶을 설명했다. 제목만 봐도 차이점이 느껴진다)
‘일상의 발견’이라는 측면에서 저자는 “풍속 소설의 본령”이라고 재규정한다. ‘풍속’이란 영어 단어로는 ‘매너(mannars)’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지켜야 하는 적절한 예법과 규범의 체계를 의미한다.”(393p) 매너에는 식사 예법 등의 예절도 포함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태도, 그리고 그 태도가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까지 두루 포괄하는 개념이다. ‘매너가 좋다’라고 할 때는, 예의범절은 물론이며 사람의 품성, 그가 공동체에 긍정적인 영향력까지 끼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매너가 적절하다’라고도 표현하는데, 제인 오스틴은 바로 ‘적절한 매너’에 대해 묻는 작품이며, 그런 의미에서 풍속 소설의 본령이라는 것이다.
오스틴이 그린 풍속 세계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들은, 오늘날 중산층과 의미가 어느 정도 통하는 중상류 신사 계층인 젠트리(gentry)이다. <오만과 편견>에 등장하는 다아시, 빙리, 베넷 가, 위컴 등은 사회적 지위나 재산, 교양 정도는 다르지만 모두 젠트리 계층에 속한다. 오스틴은 같은 젠트리 계층이지만 매우 상이한 배경을 가진 남녀를 내세워, 이들이 어떻게 ‘적절하게’ 어울리며, 그것이 적절한지는 어떻게 제대로 알 수 있을지를 질문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주요 개념이 제목에 쓰인 ‘오만’(pride)과 ‘편견’(prejudice)이다. “제목에 쓰인 ‘오만’과 ‘편견’이라는 두 단어는 젠트리의 정체성에 직결된 개념이자 좋은 매너의 핵심적인 기준이다.” (398p)
‘오만’은 지위나 재산, 교양에서 깨나 가진 사람이라야 부릴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작품에서 ‘오만’을 상징하는 인물인 다아시 씨가 바로 오만함의 자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여기서 오만은 정확히 말해 ‘자존심’ 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수월하겠다. 그는 작위는 없지만 부유한 가문의 상속자로 연 수입 1만 파운드에 귀족적 지위를 누리는 독신 남성이다. 그는 젠트리 계층에서도 정점에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오만하게 구는 것은 젠트리 계층의 일반적 매너 기준에서 봤을 때는 당연한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럿이 다아시 정도의 사람은 그럴 수 있다고 그의 오만을 수긍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한편 ‘편견’은 “확고한 자기 믿음”을 의미한다. 작중 유일하게 다아시를 거리낌 없이 대하거나, 캐서린 드 버그 여사와 기 싸움을 벌이는 등 엘리자베스가 유쾌한 장난기를 보여주는 것은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장난기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재기를 과시하려는 욕망에 크게 빚지고 있다.”(401p)
제인 오스틴은 두 개념에 모두 비판적 자세를 취한다. 오만에 대한 비판은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의 청혼을 거절한 부분을 비롯하여 여러 군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의 오만이 신사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그의 청혼을 거절한다. 다아시가 충격을 받았을 부분은, 젠트리로서 한 번도 의심한 적도, 의심받은 적도 없는 ‘오만’이라는 정체성이 젠트리로서의 신사다움을 부정하는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엘리자베스의 편견은 극단적인 경우 젠트리 계층 전체와 자신의 공동체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리디아의 갑작스러운 사랑의 도피는 확고한 자기 믿음이 지나치게 발현되어 “건방지고 경솔하고 까부는 태도”(401p)가 되어버린 사례이다. 이것 역시 적절한 매너는 아니다.
제인 오스틴은 이런 식으로 기존의 오만과 편견을 비판하는 동시에 재정의함으로써 그때까지의 적절한 매너의 기준이 아닌 새로운 기준의 가능성을 연다. 다아시는 자신의 오만을 반성하고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편견을 반성한다. “오만할 만한 다아시는 자신의 풍부한 자원을 적극 활용하고 베푸는 방식으로 오만을 극복한다. 오만은 악덕이 아니라 공동체의 상처를 치유하는 자비로운 권력으로 환원된다.”(403p)
제인 오스틴이 탁월한 부분은 이런 주제를 전개하는 데 있어 시종일관 일상의 맥락을 놓치지 않았다는 데 있다. 19세기 영국 시골의 풍속, 젠트리 남성들의 경제적 상황이나 가부장적 의식, 그 속에서 젠트리 여성의 열악하고 위태로운 지위 등이 오스틴은 소설에서 묘사한다. 이러한 일상성은 오스틴 소설의 큰 특징인 결혼 플롯과도 연결된다. “<오만과 편견>이 이전의 결혼 플롯 소설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결혼과 일상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결혼이 보상이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일상과 밀착되어 그려진다.”(394p) 샬럿, 리디아, 제인, 엘리자베스 등의 캐릭터를 통해 그려내는 로맨스와 결혼의 과정은 로맨틱하기보다는 현실적이며 치열하다. 이렇게 볼 때, ‘일상의 발견’이라는 역자의 규정은 적절하다.
“영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로 제인 오스틴을 혹은 소설로 오스틴의 대표작인 <오만과 편견>을 뽑았다는 소식을 가끔 듣는다.”(389p) 같은 굳이 쓰지 않아도 되었을 문장이 첫 문장으로 들어간 것 정도를 빼면, 좋은 해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