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아론>

[서양의 새로운 문명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되어]

우리 일본의 사인(士人)은 국가라는 것을 중히 여기며, 정부란 국가보다 가볍다는 대의를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다행히도 황실의 신성존엄에 의지하여 도쿠가와 구(舊)정부를 타도하고 신정부를 세워, 나라 안의 관민이 따로 없이 합심하여 서양 근대 문명을 취하며, 단지 일본의 구습을 벗어버릴 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 가운데서도 새로이 하나의 축을 세워, 주의주장으로 정할 것은 그저 '탈아' 두 글자이다.


우리 일본의 국토는 아시아에서도 동쪽에 있지만 그 국민의 정신은 이미 아시아의 고루한 태도를 벗고 서양 문명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웃에 중국이란 나라와 조선이란 나라가 있다. 이 두 나라의 인민은 옛날부터 아시아적인 정교풍속에 의해 길러진 점에서는 우리 일본 국민과 다르지 않지만은, 인종적으로 달라서 그런지, 같은 정교풍속 가운데 있으면서도, 유전 및 교육 방식이 달라서 그런지, 일본 중국 한국 세 나라를 비교해보면, 닮기는 중국과 한국이 서로 닮았으되, 두 나라가 일본과 닮기는 그보다 훨씬 덜하여서, 이 두나라는 나라의 백성들이나 나라 전체로서나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르고, 사람과 사물의 교통이 편리한 세상 가운데 살면서 문명 사물을 보고 들음이 없지 않건만, 그 보고 들음으로써 마음을 움직이지를 못하고, 그저 고풍스런 구습에 연연해하는 마음은, 수천 년 전과 달라진 바없이, 하루하루 새로워지는 세계의 활약상 앞에서도, 교육이라 하면 그저 유교와 인의예지만을 칭할 뿐, 하나에서 열까지 겉보기에 그럴 듯한 텅 빈 장식만을 둘렀을 뿐, 진리원칙의 식견이 부재한가 하면, 그들이 자랑으로 아는 도덕조차 땅에 떨어지고, 파렴치가 궁극에 달해, 그마저도 오만한 태도로서 일관하며, 자성(自省)의 염(念)이랄 것이 전혀 없는 상태라고 하겠다.


<후쿠자와 유키치 다시 보기>, 38~39쪽


실은 19세기 전반까지 ‘아시아‘라는 말에 그와 같은 통합성을 시사하는 의미는 없었다. 유럽에서 생긴 이 말이 동아시아에 들어올 당시에는 유럽에서 바라본 동방 전역을 가리키는 잔여 개념으로 쓰였고, 한자 문화권 사람들은 그것이 공허한 개념이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 P189

명말기인 1607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곤여만국전도>를 간행함으로써 중국문명권 사람들은 ‘아시아‘라고 하는 말을 접하게 되었다. 이 세계지도는 당시의 유럽인이 알고 있었던 지구지리를 유럽과 대서양이 아닌, 중국과 태평양을 중심으로 재배치하여 지명을 한자로 써넣은 것이다. - P201

‘아시아‘는 "남은 수마트라와 루손, 북은 스바르발과 북해, 동은 일본과 대명해, 서는 타나이스강/아조프해/서홍해/소서양으로 이어져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인 설명은 일체 없다. ‘아시아‘라는 말은, 기독교 유럽의 외부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동방에 있는 광대한 지역이라는, 오히려 자연 지리적인 세계 분절로서 중국문명권에 등장했던 것이다. 이 세계지도에 있어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말의 사용법이다. 여기에는 후세와 같은 ‘동양‘(=orient or The East), ‘서양‘(=Occident or The West)이라는 등식은 없다. 지도를 보면, 일본의 앞 바다에 ‘소동양‘, 멕시코 앞 바다에 ‘대동양‘, 포르투갈의 앞 바다에 ‘대서양‘, 지금의 아라비아해에 ‘소서양‘이라는 문자가 기재되어 있다. 즉 리치는 중국어의 용법에 충실해 동에 있는 대양이라든가, 서에 있는 대양이라는 의미로 동양이나 서양을 쓴 것이다. - P202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에서는 ‘아시아‘를 하나의 지역으로서 파악하기 시작했는데, 그에 앞서 세계 인식의 틀에 큰 전환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세계 각국이나 인구 집단을 명확한 기준에 따라 계층적으로 차별하여 인식하는 지적 습관이 도입된 일이다. 그중에 먼저 생긴 것은 각각의 나라가 ‘독립‘되어 있는가 아닌가라는 기준이며, 그 다음이 동시대 유럽을 기준으로 한 ‘문명‘화의 정도였다. 양자 모두 거대한 정치 환경의 변화, 즉 전자는 아편전쟁에 의한 대청의 패배, 후자는 메이지유신의 충격하에 일어난 것이었다. - P209

메이지 신정권이 도쿠가와 막부의 ‘개국‘정책을 계승했을 때, 당초의 관심은 오로지 서양 각국과의 관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조선 대청이란 주변 각국과 관계가 생겨났다. 우선 조선과의 사이에서 국내 개혁의 수단으로서 정한론이 일어났고, 국교 갱신의 실패를 계기로 그것은 외교정책상에서도 진지한 검토의 대상이 됐다. 그와 더불어 한편에서는, 이 분쟁의 해결을 위해 조선의 종주국인 대청과의 국교수립이 시도됐다. 메이지 정권은 서양에 이어, 처음으로 근린과의 외교관계를 갖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역적인 질서를 상정한 것이 아니었다. - P214

일본인이 얼마나 서양의 눈을 의식하며, 좋은 평판을 받기에 급급하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때 그들은 서양인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스스로를 높이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다른 ‘아시아‘ 각국과의 차이를 이야기한 것이다. - P216

일본인은 세계 정치와 아시아 전역의 여러 나라 지역에 대한 관심을 동시에 갖기 시작했지만, 메이지 10년쯤이 되면, 아시아 내부의 상호연관에 대한 인식에 부가하여, 서양의 지배에 대항하는 ‘아시아‘의 제휴 연대를 주장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 P221

일본 내부에서 생긴 ‘아시아‘의 정치적 상호의존성이란 인식은, 류큐 처분을 둘러싼 청일 충돌 위기를 계기로 중일관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진흥이란 주장으로 고양됐고, 1880년에는 흥아회라는 운동단체를 만들어냈다. 그 과정에서는 정부와 저널리즘이라는 두 차원에서 중일 간에 강한 상호작용이 생겼고, 1880년대 초기에는 러시아를 공통의 가상적으로 하여, 조선의 개혁을 대청이 지도한다고 하는 정책이 한중일 삼국간에 공유되었다. 이데올로기 차원과 외교정책의 두 차원에서 동아시아에 최초로 정합적인 지역적 틀이 설정된 것이다. - P237

여론의 다수 의견은 연합하여 구미와 겨루기 위해서는 중국과 조선도 일본처럼 ‘개화‘하지 않으면 유효치 않다 하여, ‘아시아‘를 ‘개화‘로 유도하는 것이 일본의 사명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개화‘의 가망성이 있다면 아시아 연대는 가치가 있으니, 현지의 지식인들을 적극 원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사람에 따라서는 혹은 현지에 깊이 관여한 경우에는 현지인에 의한 개혁의 장래성이 희박해 보이면, 일본인이 현지인을 대신하여 개혁의 실마리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개입하기에 이른 경우도 있었다. 거꾸로 현지의 개혁이 절망적이면, ‘아시아‘라는 지역적인 틀을 버리고, 메이지 초기와 같이 일본 단독으로 개화의 길을 돌진해 나아가면 된다고 하는 논리도 세워진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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