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캐리어 안에 든 것
듀나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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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캐리어안에든것 🗝️

“ 그게 예술의 기능이야.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를 썼기 때문에 수많은 러시아 여자가 철로에 몸을 던지지 않아도 되었던 거라고. 모든 건 한 번이면 충분해. 아름답고 결정적인 한 방. 그러니 너희들은 이제 다른 길을 가. 인간 경험의 폭을 넓혀, 어른이 되라고. ”
| 102, <항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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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을 아우르는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진 미래.
더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우리는
여전히 인간다움을 찾아 과거로의 여행을 계속한다.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미래의 모습은 어딘가 서늘했다.
AI에 정복당한 채 모두가 파멸해버린 세계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과거를 바꾸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였다.
이 지옥같은 세상에 더 이상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그들은 기어코 그 인간다움을 지켜내려 몸부림친다.

“ 도대체 순수한 인간이 뭔가요?
왜 우리가 그런 게 되어야 하는데요? ”
이 두 문장이 듀나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이유는
‘인간’의 자리에 ‘문학’ ‘SF’ ‘한국인’ ‘인종’ ‘성별’ 등을 넣어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듀나는 ‘어떤 것’으로 규정되는 것을 거부하며 역설적으로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움켜쥔다. 이게 바로 듀나가 장르와 소재, 세계를 향유하는 방식이다.
| 책 소개 중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기발한 소재가 가득했고
전에 상상해본 적 없는 미래의 모습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지 않았으면 하는 모습이랄까?
하지만 그 안에서도 여전히 인간다운 면모
(좋은 의미일수도, 나쁜 의미일수도)를 잃지 않은 것을 보면
인간의 본성이란 수세기를 관통하면서도 여전히 어리석고
쉽게 바뀌지 못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표제작 <파란 캐리어 안에 든 것>의 도입부에는
2024년 12월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내가 아는 지금의 한 장면 속에 듀나작가가 그리는 미래의 한 장면이 겹쳐지는 묘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며 이렇게나 서로 다른 경험과 생각을 갖고 산다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생경하면서도 마치 다른 차원의 여행을 한 것처럼 짜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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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웠던 점은 역시 단편 소설이 극복할 수 없는 ‘길이‘의 문제랄까? 이 짧은 이야기 속에 온갖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담겨있다보니 독자의 입장에서 그 속도에 맞춰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자주 무슨 말인지 헤아리려 애써야 했고
이제 겨우 시작했는데 서둘러 끝나는 느낌이라
읽고나면 뭔가 아쉽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 재밌는 소재를, 제발 이게 끝이 아니기를!

그래서 파란 캐리어 안에 뭐가 들었냐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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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제국주의라고들 했다. 첨단 무기로 무장하고 기술적으로 뒤진 시대의 사람들을 정복하는 행위였으니 정확한 기술이다. 하지만 엄마와 엄마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걸 당연히 해방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노비군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탄압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잘 못한다. | 171

그리고 네 말이 맞아. 크게 보면 다를 게 없어. 우린 그냥 게임을 하고 있을 뿐이야.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 정말 아무것도. 우린 미리 만들어진 무한하게 갈라진 미로 속에서 길을 찾는 개미 떼에 불과해. | 179

통로 저편의 세상은 황량했다. 밤이었다.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덮여 있었고 색깔이 있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게 검거나 희거나 회색이었다. 하지만 공기는 숨을 쉴 수 있었다. 다른 곳은 여기보다 덜 죽어 있다는 뜻이겠지. | 182

우린 이런 우연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의미 없는 우주 안에서 우리만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만약 우리가 그때 다른 지역에서 살아남은 다른 아이를 발견해 구출했다면 우린 또 다른 의미를 가진 다른 이야기를 그렸을 거야. 아마 화옥이 죽고 그 다른 아이가 살아남는 다른 시간선도 있겠지. 우린 지금 화옥을 소중하게 여기듯 그 아이를 소중하게 여겼을 거야. | 189

우린 아름다움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그걸 갈망하는 게 아닐까. | 207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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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는 날 - 존엄사의 최전선에서, 문화인류학자의 기록
애니타 해닉 지음, 신소희 옮김 / 수오서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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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평생 수학부터 집수리까지 온갖 것을 공부하면서도
정작 우리가 겪을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죽음을 어떻게 준비했는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죽은 이를 어떻게 애도했는지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일은 우울하지 않았다. 오히려 집단적 죽음 회피를 깨뜨리고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 | 315

✔️‘조력 사망’은
말 그대로 누군가의 ‘도움’에 의해 스스로 사망에 이르는 것이다. ‘존엄사’라는 말은 종종 들어봤지만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 그것이 자살로 치부되는 것이 아닌, 의료적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의사의 처방과 간호사 및 전문 인력의 도움을 받아 합법적으로 ‘죽는’ 이 방법은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우리는 죽음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다. 죽는다니? 너 요즘 무슨 일 있어? 왜 그런 생각을 하냐며 죽음을 말하는 순간 당장이라도 삶을 포기할 것 처럼 위태로운 사람이 되고만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우리는 잠을 자면서도 늘 죽음을 경험한다. 죽음은 늘 곁에 있고 언제 어떻게 나에게 당도할지 모르기에 죽음에 대한 유연한 생각과 닫힌 마음을 열어두는 노력은 우리의 평생 과제일 것이다.

🕊️ 그들은 왜 조력사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치유될 수 없는 병으로 더 이상 말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고통, 매일 진통제에 의지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를 나답게 했던 자질 대부분을 잃고 다양한 기계에 의지한 채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간다. 이것은 나 혼자만의 역경, 극복해야할 고난의 수준을 넘어선다. 또한 나를 돌보는 가족에게도 원치 않는 짐을 짊어지게 하는 것일수도 있다.

누군가는 스스로 포기하는 삶을 ‘패배자’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건 겪어보지 못한 사람의 자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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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서술 된 그들의 절박함은 나의 상상을 초월했다. 이것을 삶이라고 할 수 있나? 인생은 아름답다지만 단 한 순간도 내 의지대로 움직일수도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 시간이 결코 그들에게도 아름다울까?

인류학자 애니타 해닉은 조력 사망 자격을 얻으려 고군분투하는 실제 환자들, 조력사망 선택을 한 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과정을 심도 깊게 연구해왔다. 전문적인 지식의 전달 보다는 다양한 사례를 소개하며 말 그대로 존엄사의 최전선에서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사실들을 우리에게 전한다.

아직은 조력 사망이 가능하다고 해도 실질적인 허들이 많아 법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우리 모두에게 선행되어야 할 과제가 있다.

🕊️ 죽음을 부정하는 것을 멈추는 것.

“ 죽음을 적으로 여기면 죽음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죽음을 회피하려 할 경우 그 불가피성을 직면하기가 지독하게 고통스러워진다. 죽음을 향한 침묵과 회피를 깨뜨리려면 나이를 떠나 모든 사람에게 삶의 마지막을 받아들이는 다양한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과의 관계를 탐구할 공간과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 일찍부터 삶의 마지막을 두고 대화를 시작하면 죽음에 관한 사회적 지식을 되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삶의 무상함을 깊이 인식하고 애도 상담부터 호스피스 치료에 이르기까지 죽음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 ” | 307

더 많이, 더 자주 함께 이야기하는 것.
죽음에 대한 열린 마음을 준비하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이제 테이블에 앉을 준비가 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방법에 대해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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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홀리 : 무단이탈자의 묘지 언와인드 디스톨로지 2
닐 셔스터먼 지음, 강동혁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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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사는 인류의 슬픈 진실이란, 사람들이 듣는대로 믿는다는 것임을 빠르게 깨달았다. 처음 들었을 때는 미친 소리라고 생각했던 이야기도 백 번쯤 들으면 당연한 것이 된다. ” | 130

✔️ 여전히 ‘생명법’은 존재하고…

해피잭 하비스트 캠프가 폭발 사고로 파괴되고, 생명법에서 언와인드의 연령 제한이 17세까지로 낮춰졌다. 17세까지의 언와인드들이 풀려난 반면 사람들은 기이한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더 빨리 언와인드를 결정하자’
‘이제 우리가 이식받을 장기가 부족하다’

자유로워진 아이들보다 더 많은 수의 아이들이 언와인드되기 시작하고, 이식할 장기가 부족해지자 장기 밀매를 하는 조직들이 거리의 아이들을 납치하기 시작한다. 혼란이 거듭되는 상황 속에서 인간은 이제 언와인드한 신체 조직 중에서 최고의 조건을 가진 조직들만을 합성하여 새로운 형태의 ‘인간’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 ‘카뮈 콩프리’
그는 과연 인간일까?
그의 영혼 어디에서부터 생겨난 것일까?

2권에서 가장 흥미진진했던 부분은 이 카뮈(캠)의 등장과 그 스스로 존재와 영혼에 대해 탐구하고 성장해 나가는 부분이었다. 너무 끔찍한 존재이지만 이미 이 세상에 내던져진 이상 그를 정말 인간이라고 불러야만 하는 것일까? 그의 끝없는 공허함이 안타까우면서도 인간의 이기심과 잔인함은 추악했다.

“ 공허함. 그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의 내면이다. 거대한 빈 공간, 눈 앞을 행진하는 소녀들 중에서 영혼의 짝을 찾을 수 없다면, 그 사람들의 생각이 맞고 그에게는 정말 영혼이 없다는 뜻 아닐까?
「불완전. 」 그가 말한다. 「내가 완전하다면, 왜 이렇게 완전하지 않은 기분이 들죠?」
인간의 영혼이 나뉠 수 없는 거라면, 그의 영혼은 어떻게 그를 있게 한 아이들의 부분의 총합이 될 수 있을까? 그는 그들 중 하나도 아니고, 그들 모두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일까? ” |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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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에 이어 주인공들은 대부분 그대로이지만 마냥 희망적일것 같았던 미래 대신 혼돈의 세계가 이어진다. 묘지를 이끌고 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과 언제 그들의 위치가 탄로날지 모르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코너, 게다가 장기 밀매 조직은 웃돈을 주고서라도 그의 몸을 차지하려고 혈안이다. 그와 자꾸만 어긋난 채 어디론가 끌려가 척추이식의 위기에 처한 리사, 언와인드 조직 복합체 카뮈 콩프리, 스스로 십일조를 자처하며 (부모가 서명하지 않았는데도) 죽지 못해 안달인 미라콜리나, 그리고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레브, 각각의 인물이 갖는 문제와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 서로 엊갈리고 분투하고 언와인드 디스톨로지의 향방은 여전히 미지수이다.

✔️ 그래서.. 빨리 3권..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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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몸을 떨며 깊이 숨을 들이쉰다. 마지막 기억은 이제 그의 일부가 되었다. 기억들이 얼굴의 피부처럼 짜맞춰져 있다. 견딜 수 없는 기억이지만 그는 견뎌 낸다. 이제야 그는 깨닫는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무너져 내리지 않고 백여 번의 언와인드 기억을 간직한 자신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 97

과학의 임무는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 위에 새로운 것을 쌓는 것입니다. 생명을 창조하는 게 아니라 완성하는 것 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 질문을 밀고 나갔습니다. 우리의 지적, 신체적 진화를 우리 자신의 가장 뛰어난 요소들로 재조합 할 순 없을까? 우리 중 가장 뛰어난 사람들을 모두 합치면 어떻게 될까? 알고 보니, 알맞은 질문을 던지게 된 순간 답은 매우 간단하게 떠올랐습니다. | 207

자신을 전부, 완전히 내주기를 바라는 것이 그토록 이상한 일일까? 미라콜리나의 마음속 생각이 그렇다면, 왜 거부당해야 하는 걸까? 내 정신은, 사랑으로 가득한 어린 시절의 내 기억은 그런 기억이라고는 없는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간다. 나의 일부가 간 지금, 그들은 살면서 입은 수많은 상처에서 치유된다. | 305

병든 사회가 자신의 병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건강했던 시절을 기억조차 못할 수도 있을까? 지금의 상황을 반기는 사람들에게 기억이라는 것이 너무 위험한 것이라면? | 370

일이 일어나는 데는 이유가 있거나 아무 이유가 없다. 인간의 인생은 영광스러운 태피스트리의 실오라기이거나, 그저 절망적으로 뒤엉킨 매듭에 불과하다. | 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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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세고 촛불 불기 바통 8
김화진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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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빛이 도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 새하얀 크림 사이로 켜진 영롱한 촛불, 이 어여쁜 표지 덕에 나는 귀엽고 아기자기하고 행복이 가득한 기념일에 대한 이야기를 상상했다. 연애 소설? 힐링 소설인가? 하지만 이 얼마나 납작한 상상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우리를 우리이게 한 모든 시간들 ”
생일이나 결혼처럼 흔한 기념일 보다는 나 또는 배우자가 죽었던 날, 이유없이 기억이 사라져버린 날, 어떤 사건이 발생한 날과 같이 우리의 흔한 상상 너머의 아주 특별한 날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리없이 스며들어 누군가의 기억속에 단단히 자리잡을
여덟 개의 기념일 앤솔러지.

자칫 스릴러 미스터리가 될 뻔 했다가, 표지를 보고 달콤함에 빠져들 독자들의 뒷덜미를 잡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끌고갈지 모를 이야기들이라 뭐라고 딱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웠지만
김화진, 남유하, 박연준, 서고운, 송 섬, 윤성희, 위수정, 이희주 총 8명의 작가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고스란히 뭍어나 읽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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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좋았던 이야기는,
#박연준 #월드발레데이
#위수정 #비트와모모

특히 <월드 발레 데이>의 첫 문단은,

“ 나는 죽은 무용수다.
나는 왜 떠나지 못하지? 산 자들이 계속 살 수 있도록 자리를 비우고 퇴장해야 하는데. 목소리를 반납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하다. 사는 일에 미련이 남아 있는 걸까?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나를 향해 들려오는 여자아이의 목소리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있다. ”

우아한 발레리나들의 고군분투를 상상했다가 첫문장부터 죽은 무용수가 튀어나와서 숨을 참고 읽어 내려가야 했지만, 스산하게 시작하는 이야기가 갈수록 이렇게 애처로워지다니… 죽은 무용수가 죽은 후에야 깨닫게 되는 삶에 대한 통찰, 회한 같은 것이 느껴져 읽을수록 안타까움이 커져갔다. 죽었지만 죽지 못하는 그 마음이 아직 여전히 이 곳을 떠돌고 있고, 자신을 따르는 어린 발레리나에게 노력은 계속 하지만 자신을 다 태워버리진 말라고, 죽었음에도 무대 위에서 끝까지 한 마리 백조가 되고 마는 그녀의 움직임이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히 그녀는 무용수라는 것을 보여주는듯 했다.

“ 쉬지 않고 계속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전문가가 된다. 좀 더 집요하고 열렬히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뛰어난 전문가가 된다. 집요하고 열렬하며 꾸준히 같은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수월하게, 혹은 수월해 보이게 성장하며 자신을 믿고 긍정과 충만함으로 그 일에 뛰어드는 사람은 대가가 된다.
’뛰어드는‘ 이것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뛰다가 걷고, 걷는 중에 지치고, 중단하고, 의심하고, 머뭇거리고, 돌아가다 숨는다. 물론 대가가 되기 위해 이 모든 지체가 필요하다. ” |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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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수정작가의 <비트와 모모>는 배우자와 사별하고 그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그리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다시 삶을 살아내는 용기를 갖기까지 잔잔하게 고군분투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작가 특유의 섬세한 슬픔이 느껴져 무척 좋았다.

“ 거품으로 몸을 닦은 후 한참 뜨거운 물을 맞고 서 있었다. 영원히 그렇게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언젠가는 끝난다. 틀어놓은 물은 잠가야 한다. 새로 지은 집도 언젠가는 허물어진다. 나는 방금 태어난 것 같은데 이렇게 늙었다. 우리가 만난 게 언제였더라. 처음 만난 날 당신은 어떤 표정이었지. 나는 그것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 같은데 이미 모두 끝나버렸네. ” |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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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이라는 한 가지 주제로 이렇게 다양한 스타일의 이야기 가지가 퍼져나가다니. 어느 하나 비슷한 이야기가 없고 모두 저마다의 특성이 있어 지루하지 않았고 약간 기대에 못미치는 작품 조차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어 작품들 간에 서로 주고받는 에너지가 조화롭다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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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묻는다
정용준 지음 / 안온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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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는 아이들이 더는 울지 않게
슬픈 아이들이 더는 슬프지 않게 ” | 77

다큐 프로그램 작가 ‘유희진’은 아동학대를 다루는 에피소드를 촬영하며 한 목사 부부와 그들의 두 아이를 만났다. 목사는 못난 질그릇을 수려하고 빼어난, 쓸모있는 그릇으로 만드는 ‘토기장이‘가 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며, 그 과정에는 늘 고통과 인내가 수반된다고, 아이들은 그것을 참고 견디며 이 세상과 주님의 뜻에 부합하는 아름다운 그릇으로 다시 태어날 것 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 뜻에 깊이 감응한 몇몇 신도들은 자신이 낳은 ’못난 토기‘를 빼어나게 정련하느라 기도하고 꾸짖고 열과 성의를 다해 그들의 자식을 ‘깨뜨렸다’. 자신이 하는 일이 신성하다고 믿었다. 죄 지은 자의 구원이며 사랑이라 믿었다.

” 때문에 고행은 계단입니다. 한 발 한 발 올라가면 그 분께 닿을 수 있죠. 고통이 필요합니다. 흘리는 눈물의 양 만큼 마음이 씻겨지는 법. 더 많은 눈물. 더 많은 고통. 거룩하고 깨끗한 그릇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나는 딸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 | 57

어떤 이유에서인지 유희진은 부모의 학대로 고통받다가 희미해진 불꽃처럼 사라져버린 아이들을 놓아버릴 수 없었다. 방송이 나간 후에도 추가적인 취재를 이어가던 어느 날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몇몇 학대 부모들이 돌연 사라져버린 것. 그중 하나는 강물에 투신한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부검 결과가 놀라웠다. 물고문의 흔적과 몸 속에서 검출된 락스 성분. 이건 죽은 자가 그의 자식에게 했던 학대의 방식이었다.

도대체 누가, 왜?
이들을 심판하고 있는 것일까?



<너에게 묻는다>는 못나고 약해빠진 인간의 내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것이 너의 얼굴이라고 들춰내는 것 같았다. 한 번도 마주하고싶지 않았던, 그러나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약한 모습들. 어쩌면 이것은 또한 사랑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당신이 지금 믿고 있는 것이 사랑이 맞느냐고, 슬퍼도 웃는 아이와 기뻐도 우는 어른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놓여진 이들이 정말 사랑을 하는 것이 맞느냐고.

“ 사랑이 차올랐다가 사라진 자리. 그 무게와 부피만큼 움푹 팬 기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처음엔 정리된 나의 대답을 들려주려 했지만 나중엔 너에게 묻고 있었다. 사람이 무엇이냐고. 사랑이 무엇이냐고. ” | 347 작가의 말

+ 아동학대를 다루는 글이라서인지 격한 감정 이입에 읽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학대를 당하면서도 엄마를 사랑하기 때문에 참아내고 죽을 결심까지 하는 아이를 보며 내가 사는 세상이, 그리고 부모로서 내가 사랑이라고, 사랑해서 그런 것 이라고 정의하는 그 모든 것들이 정말 사랑이 맞는지 마음 한 켠에 서늘한 냉기가 돌았다. 내 아이는 충분히 사랑 속에 자라고 있을까. 화를 낼 때 나의 표정을 본 아이가 깜짝 놀라거나 움츠려들 때, 나는 거울을 들어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여기 이 거울 안에 갖힌 나를, 아직도 다 자라지 못해 떼를 쓰며 어르고 달래주길 바라는 아이같은 나를.

+ 성경에서 욥의 이야기나, 분명 하나님의 뜻인데 그것이 폭력의 근거가 되는 잘못된 믿음, 이단, 그리고 기도.. 종교적인 관점에서 이게 정말 맞느냐고 묻고 있는 듯한 글이 깊이 와닿았다. 정용준 작가의 에세이에서 성경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 책에서는 그 생각이 구체적으로 소설 속에 녹아있는 것 같아 이게 작가의 세계관인가 싶었다.

오래된 기도에 대한 생각. 기약없는 기다림,
누군가는 이 어둠 속에서 나를 꺼내줄 것이라는 믿음.
하지만 세상이 변하고 내가 변하기 시작한 이유는
‘내가’ 움직여 스스로 어둠을 뚫고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전지전능한 신의 구원 보다
나의 의지가 늘 한 걸음 앞에 있다.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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