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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평점 :
여기 한 사람의 삶을 통째로 포개어 펼쳐놓은 장대한 서사가 있다. 사건을 앞세우는 대신, 한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펼쳐지는 이야기들. 우리가 살아오며 경험한 균열과 후회, 기대와 고요가 문장의 곳곳에 스며있다.
책을 읽으며 주인공 롤랜드의 삶을 천천히 따라가 본다. 인간의 성장이라는 것이 단편적인 순간들의 모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깨달으며, 때로는 잘못된 선택이, 때로는 멈춰진 시간이, 또는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이 그의 삶을 뒤틀기도 하고 반짝이게도 한다. 그는 성장의 과정을 영웅적인 변화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의 비틀린 궤적 자체가 삶의 본모습임을 고요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천천히 나이들어 간다.
이 책에서 나이듦은 실패의 총합도, 성취의 결산도 아니다. 오래된 상처가 희미해지기도, 더 깊어지기도 하는 시간의 서로 다른 층위다. 롤랜드가 나이를 먹으며 바라보는 세상은 과거보다 특별해지지 않지만, 그 나이만이 볼 수 있는 풍경으로 서서히 변한다. 이 느린 변화속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나이든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천천히 용서하는 일이라는 듯이.
그가 삶 속에서 고요히 물들어가는 동안 그를 붙잡았던 한 가지는 바로 ‘쓰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거창한 창작의 행위라기 보다는 단지 기억하기 위해 애쓰는 방식이며, 잊어버린 마음의 결을 더듬는 과정이다. 롤랜드가 음악과 글을 붙잡는 이유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살아냈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래서 <레슨>의 문장들은 삶을 기록하려는 작가의 숨결처럼 느껴진다. 결국, 글쓰기는 삶을 보존하는 방식이자, 스스로에게 건네는 마지막 레슨이다.
책을 덮고 나면, 특별한 사건이 떠오르기보다 묵직한 여운 속에서 천천히 가라앉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마치 내 삶에서도 아직 해석하지 못한 기억들이 조용히 불려 나오는 기분.
성장해서 어른이 된고 어느 새 나이 들어 노년을 맞는다는 것은 한 순간 완성되는 일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다시 배우고 또 다시 잊혀지는 과정임을 깨닫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겪는 모든 것이
결국 우리만의 레슨이라고.
그리고 그 레슨을 기록하려는 작은 시도 하나가, 어쩌면 삶을 이해하는 가장 솔직한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월요일이 다가오는 건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지 난주에 생긴 멍은 희미해져가는데, 피아노 선생님의 향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향기를 기억한다는 것, 그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그 향을 맡는 것과는 달랐다. 그보다는 어떤 무채색의 그림, 혹은 어느 장소, 혹은 장소에 대한 느낌, 혹은 그 사이의 무언가 였다. 두려움 너머에는 다른 요소, 흥분이 있었고, 그는 그것 역시 밀어내야 했다. 19
칠 개월 된 아기의 마음에 무엇이 지나가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늘진 공허, 잿빛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인상들 -청각, 시각, 촉각에 따른 -이 원색의 호와 원뿔 모양의 불꽃처럼 터지고, 순식간에 잊히고, 즉시 대체되고 다시 잊힌다. 혹은 깊은 웅 덩이. 그곳으로 모든 것이 빠져 사라지지만 그럼에도 그대로 남아 있어서, 불가역적으로 존재해서, 깊은 물속의 어두운 형체들이 심지어 팔십 년 후 임종 자리에서, 마지막 고해성사에서, 잃어 버린 사랑을 향한 마지막 절규에서 중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32
세월이 육중한 뚜껑처럼 과거의 죽음을 슬그머니 덮었다. 우리는 삶에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을 잊는다. 그러니 일기를 써야 한다. 이제부터 일기를 쓰자. 과거는 빈칸으로 남고, 현재는, 이 감촉과 향기, 이 순간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곧 소멸할 것이다 458
하지만 사랑이 과거로 사라질 때 모두가 잊어버리는 본질이 있었다. 함께했던 순간, 시간, 나날 속에서 느끼고 맛보았던 것. 당연시되었던 모든 것이 버려지고, 그것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덮이고, 그후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불완전한 기억에 의해 다시 덮이기 전의 그 모든 것. 천국이든 지옥이든, 많은 기억이 남진 않는다. 오래전에 끝난 연애와 결혼은 과거에서 온 엽서와도 같다. 6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