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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ㅣ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평점 :
사람들은 내가 겪은 일이 먼지인 줄 안다. 먼지처럼 털어내라고 말한다. 먼지가 아니다. 압사시키는 태산이다. 꼼짝할 수 없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움직일 수 있다, 걷고 보고 말하고 달릴 수 있다. 울고 웃고 판단할 수 있다. 나는 쓸 수 있다. 나는 하고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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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끝에 제야는 그편을 선택하기로 했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그런 일을 당할 만한 애가 되는 편을. 더 나은 선택이란 없다. 지옥뿐이고, 지옥뿐이라면, 당숙도 지옥에 있어야 했다.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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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내가 의심받는가. 어째서 내가 증거를 대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설명해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사라져야 하나.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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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은 뭔가를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나 말고는 아무도, 아무것도 책임지도 싶지 않았거든.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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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선해지고 나빠지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다른 길이 있는지, 다른 삶이 가능했던 건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더라도 알고 싶었다. 그럼 조금은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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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고 싶다는 말이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살고 싶단 말이 아니야. 그런 일이 있었던 나로, 온전한 나로,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내 편에 서서, 제대로 살고 싶단 말이야.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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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을 즐겁고 밝게 지내던 소녀 제야는 2008년 7월 14일 수업을 마치고 동생 제니와 사촌 동생 승호와의 아지트 버려진 컨테이너에 간다. 승호와 만나기로 했지만, 기다린 승호는 오지 않고, 자신에게 늘 친절하고 다정하던 당숙이 컨테이너에 오게 되고, 그 곳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만다.
두려움에 떨던 십대 소녀는 엄마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며, 숨기고, 제야는 그를 처벌하고자 혼자 산부인과와 경찰서를 찾아가 자신이 당한일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부모와 친인척은 그녀를 외면하고, 일말의 도움을 주지 않는다.
부모는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된다고 했고, 없었던 일처럼 넘어가라 했다.
친인척들, 동네 모든 사람들은 "그런일을 당할만한 여자애"라고 치부하며 제야의 상처를 더욱 짓밟는다. 어느 누구도 그 어린 소녀의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함께 나누려하지 않고 숨기기 급급해하는 어른들 때문에, 피해자가 마치 가해자처럼 돌변하는 상황들이 벌어지고, 피해자는 되려 잘 지내는데... 견디기 힘든 그녀는 강릉에서 혼자 사는 이모와 함께 지내며 그 곳에서 조금씩 치유해가는 듯 보이지만, 지옥같았던 그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상대를 증오하고, 주변 사람들을 경멸하고,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고통속에 사는 그녀는 사실 그저 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주변에서는 매 순간 긴장하고 불안에 떨며 예민하고 조심하면서 살아가는 것만이 답이라 한다.
그렇게 혼자가 되라고 했다.
그냥 실수였다고, 그럴 수도 있다고 여기며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잘 사는 가해자들.
그리고 되려 피해자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그럴만한 사람이라고, 왜 그걸 피하지 못했느냐고 2차 폭력과 고통을 주는 주변사람들.
다 지나갈꺼라고, 다 이해한다고, 힘든거 안다고..
이겨낼 수 있다며 피해자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처럼 보이나, 일말의 이해도 공감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지금도 어디선가 지옥같은 그 기억속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며 고통과 싸우고 있을지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나 또한 위로한답시고, 누군가에게 더 큰 상처를 주고 있는것은 아닌지...
그들에게 2차 폭력을 가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했다.
이 책은 성폭행 피해자의 고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고, 그 고통속에서 묵묵히 견뎌내고 살아내고 있는 피해자의 간절한 목소리를 담고 있어 묵직한 울림을 준다.
주인공 제야의 일기형식으로 쓰여져 있어 세밀하고 깊이 있는 감정표현들이 돋보이고, 깔끔한 문체덕에 더욱 진심이 묻어나는 듯 했다. "내일을 향한 질문 젊은 문학의 새로운 발견"이라는 모토로 시작된 창비의 "소설Q" 시리즈의 첫작품!
시리즈 소장욕구를 자극시키는 책!
다음 작품도 무척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