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 중 해양대학교 나온 사람이 있다. 한때 마린보이였던 그의 이야기에 나는 잠깐이나마 매료되었었다.-“일단 바다에 나가면 바다만 봐야해요. 끝도 없는 바다 한 가운데서 끝이 보이지 않는 항해를 하죠. 한쪽 끝에서는 비가 오고 다른 쪽은 쨍쨍해요. 비가 오는 게 보이면 선장이 다들 샤워하러 나오라고 방송을 하는데, 그 장면이 장관이예요. 수백명의 사람들이 다 나와서 홀딱 벗고 샤워를 하는데 그 순간은 육지에 있는 지금도 잊지를 못해요.”-그는 그 순간의 기억을 다시 잡아 오려는듯 아련한 눈길로 말끝을 흐렸다.-나는 흐릿한 그 말 끝을 붙잡고 바다를 생각했다. 바다가 배경이 되었던 모든 소설과 영화들이 필름 속 한 장면처럼 지나쳐갔다.--스물 일곱, 그녀 또한 내 지인과 똑같은 경험을 했다. 아니, 어쩌면 더 특별한 경험을 했으리라. 남자집단에서 홀로 살아남으려면 혹독한 외로움과 지독한 고독함이 함께 했을테니 말이다.-대자연 앞에 서면 인간은 초연해진다. 어쩌면 초라해진다는 표현이 옳겠다. 특히나 바다 한 가운데서 한낱 미물일 뿐인 한 인간은 바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거역할 수 없는 것과, 불확실함을 버티는 것, 시련에 맞서야만 하는 것. 아무리 발버둥 치더라도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음을, 그것이 바로 살아간다는 것임을...--“운명은 거역할 수 없다. 견뎌야 한다. 운명을 극복한다거나 맞선다는 거창한 포부는 자연 앞에서 부질없다. 나는 마스트에 켜진 불빛 하나에 의지한 채 방향을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 바다가 잔잔해질 때까지. 삶의 시련을 극복하란 말이 때론 무책임하게 들릴 때가 있다. 극복이란 말의 추상성이 너무 커 사실 그 단어가 진정 무슨 의미인지조차 알기 어렵다.”<책속에서>-“아무리 배가 흔들리고 요동쳐도 선수의 빛은 늘 그 자리에 있다. 그 빛을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방향을 잃지 않는다. 삶을 억지로 극복하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순응하며 기다릴 때 다시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게 아닐까. 바다가 잔잔해지고 안개가 옅어졌다. 어느새 검은 바다는 푸르고 투명한 피부를 드러내며 심해까지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길이 다시 열렸다.”<책속에서>--#나는스물일곱이등항해사입니다 #김승주 #한빛비즈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