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텐베르크의 조선 1 - 금속활자의 길
오세영 지음 / 예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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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19일 서울 디지털포럼 2005에 참석한 엘 고어는 이렇게 말했다.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최초로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는 당시 교황 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한 뒤 얻어온 기술이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할 때 교황의 사절단과 이야기했는데, 그 사절단은 한국을 방문하고 여러가지 인쇄기술 기록을 가져온 구텐베르크의 친구였다....한국의 디지털 혁명은 역사적으로 보면 두 번째로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기술 발전에 기여하는 사례가 될 것이다. 전 세계가 한국으로부터 인쇄술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혜택을 보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갖고있는 짧은 역사적인 지식으로 우리나라의 금숙활자가 구텐베르크보다 200년 앞서 있다고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앞서 있는지 그리고 그 기술은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훌륭한 기술이 서양보다 앞섰다는 사실에 뿌듯해했을 뿐이다.

작가는 조선의 금속활자가 어떻게 서양에 전수되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발전시키는지 픽션과 더불어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장영실의 수제자 '석주원'이 바로 조선을,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하는 것이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들고 그것을 보급하기 위해 인쇄술을 발전시키고자 한다. 책이 없으면 결국 글을 퍼질 수 없는 법이다. 주상의 밀지를 받고 중국으로 건너간 장영실과 석주원은 향동활자를 만들 기회를 포착하지만 음모에 빠져 결국 헤어지게 된다. 석주원은 사마르칸트를 걸쳐 마인츠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구텐베르크를 만나 아연활자보다 한층 우수한 향동활자를 만들어내고 인쇄술의 꽃을 활짝 피우게 된다.

늘 조선을 그리워하는 석주원이지만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차단에 막혀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놓치게 되고, 결국 인쇄술이 꽃필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열정을 바친다. 그것은 주상이 바라던 모든 백성들을 위한 글과 책을 만드는 뜻과 부합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천년제국의 몰락의 중심에도 서보았고, 이탈리아 메디치가의 음모의 중심에도 서있었다. 그런 세월의 풍파를 지나면서 석주원이 느낀 건 장인의 자부심과 인쇄술의 발전이였다.

'활자로드'라고 불러도 손색없을만큼, 석주원이 그려나간 행로는 다양했다. 고려시대 때부터 발전한 우리의 활자는 서양의 르네상스를 이끌어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쇄술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자랑스러운 마음을 감출 길 없었다.

엘 고어의 말대로 현재 우리나라는 IT 산업의 중심에 서있고, 또한 그것으로 세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 원동력은 구텐베르크보다 200년이나 앞선 금속활자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부족하고, 채울 것 많은 한국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선조들의 지혜만 잘 배우고 습득한다면 석주원이 그랬던 것처럼, 세계의 넓은 무대에 서도 두려움이 없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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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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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등산을 좋아하기도, 싫어하기도 한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산에 대해 갖는 마음을 영원히 두가지일 것이다.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한 두 가지 마음. 

내 마음을 늘 산을 향해 있다. 우뚝 서 있는 그 녀석을 보고 있노라면, 그 녀석과 조근조근 대화를 나누며 그녀석의 꼭대기에 다다라 복잡하기만한 세상을 내려다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막상 등산을 시작하면 후회한다. 이렇게 힘든길을 왜 자처해서 올라왔을꼬. 그렇게 산에 대해 양가감정을 가지며 갈팡질팡하던 어느 날,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일행과 떨어져 나 혼자 산길을 걷고 있는데 순간 주위가 너무나 조용해지는 것이 아닌가. 등산객의 말소리도, 시내물 소리도, 새소리도, 하물며 나무가 나무끼리 스치는 소리도 없는 고요함...그것은 공포라기 보다는 일종의 신비로운 경험이였다. 비로소 산과 나는 올곧이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어떤 장애물도 없이 산과 마주한 그때, 나는 내 자신과도 마주할 수 있었다.

'촐라체'를 읽어 가면서도 나는 내 자신과 마주하는 느낌이였다. 내가 등산한 산의 몇 배는 높은 산을, 오직 의지와 형제의 마음만으로 등반하는 여정은 손에 땀을 쥘 정도였다. 그래서 상민과 영교에게 묻고 싶었다. 산을 오른것에 후회는 없었느냐고. 하지만 그들은 후회하지 않았다. 조난당해 극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도, 영교가 추락해 상민이 위태롭게 줄을 붙들고 있었을때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후회한다는 것은, 곧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후회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촐라체'는 인생과 많이 닮아있다. 얼음으로 뒤덮인 그 곳, 언제 빙벽이 떨어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그곳을 바라보며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상민과 영교가 촐라체 아래로 내려갈 수 없어 올라가는 길만 택했듯이, 인생 역시 마찬가지일거라고.

아버지가 다른 이복형제는 그들의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숙명을 받아들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촐라체에서 죽음과 싸우며 그들의 숙명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촐라체'는 죽음의 코앞까지 형제를 몰아가기도 했지만 결국 형제의 존재에 대해, 숙명에 대해 받아들이게 도와주었던 것이다.

촐라체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주말 산행을 계획했다. 비록 전문 등산장비로 철저하게 준비한 등산은 아니지만, 내 존재에 대해 그리고 내 안의 모습을 마주하기 위해 떠나는 등산이다. 이번에 내가 마주할 산은 좋기도, 때론 싫기도 한 두 가지 산이 아니라, 올곧이 나를 바라보게 해 줄 듬직하고 믿음직한 산이다. 그 산은 나에게 앞으로 나아갈바와, 세상을 이해할 좀 더 큰 안목을 줄 것이라 믿는다. 상민과 영교가 촐라체에서 배웠듯이 나도 그러할 수 있으리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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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악녀
페이 웰던 지음, 김석희 옮김 / 쿠오레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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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요즘 주위 어디에서나 흔히 듣고 볼 수 있는 '불륜'이 등장한다.
책의 주인공 루스가 버림받는 과정 또한 눈에 보듯 뻔한데, 잘생긴 그의 남편은 못생기고 덩치 큰 루스와 결혼한걸 일종의 수치로 여기고 늘 멸시한다. 그러다 소설을 쓰며 우아하게 살아가는 메리 피셔를 만나게 되고 루스와의 사이에는 없었던 '불같은 사랑'을 하게 되며 루스를 버리게 된다. 열심히 살림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남편만에게 헌신하던 루스는 말 그대로 헌신짝같이 버려지게 된다.

나는 복수를 원한다.
나는 힘을 원한다.
나는 돈을 원한다.
나는 사랑을 원한다. 하지만 그 대가로 사랑을 주지는 않겠다.

루스는 다짐한다. "당신은 악녀야"라고 소리치며 떠나간 남편을 향해 진짜 악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시 자신을 향한 변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남편과 메리 피셔를 향한 소리없는 복수도 시작된다.

그러면서 그녀는 사회안에 잠재되어 있는 모순을 향해 한걸음씩 내딛는다. 가진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아이만 셋씩이나 낳아 생활고에 허덕이는 젊은 여자에게는 차라리 아이를 팔아버리라고 일침을 놓고, 자신과 사회에게 늘 금욕적 생활을 할 것을 주장한 신부를 쾌락주의로 몰아넣는다. 안과 밖의 모습이 다른 판사의 집에 가정부로 들어가서는, 그녀의 목적을 위해 판사의 사디즘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녀의 분홍색 눈동자는 점차 빛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열심히 모은 돈을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성형하는 고통을 받아들인다. 큰 몸이 싫어서 허벅지의 뼈까지 잘라내는 그녀. 그런 그녀를 보며 나 또한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마지막에 자신을 위한 선택을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씁쓸한 생각을 해보았다. 자신의 남편과 메리 피셔를 향해, 그리고 늘 자신에게 불리한 잣대를 내밀었던 사회를 향해 독설을 내뱉은 그녀가 마침내 아름다워지게 된 순간 그녀는 다시 보보를 불러들이게 된다. 초라하고 초췌한 그를 곁에 두고 지배하는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라지만, 왠지 씁쓸한 뒷맛은 어찌할 수 없었다.

차라리, 모든 것을 마음대로 바꿔버린 그 후부터 좀 더 자신을 사랑하는 루스로 돌아갈 수 없었을까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메리 피셔가 살던 등대탑을 사들이고, 그녀가 부리던 가르시아를 다시 부리고, 보보를 곁에 두고 마음대로 부리는 결말은...왠지 가슴 아프기까지 했다.

'악녀'는 누가 만드는 것일지 생각해보았다. 사회가 바라보는 악녀는 그저 못생기고, 어두운 곳에 숨어사는 여자들을 말하는것 아닐까? 예쁘고 날씬하고 돈 많은 여자들을 악녀라고 부르진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도 루스가 보여주는 복수극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뼈를 깍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가 이룬 결말은 내 마음을 움직이진 못했다. 오히려, 그녀가 아름다운 얼굴로, 메리 피셔를 능가하는 소설가가 되었다는 결말이, 더 설득력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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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靑衣)
비페이위 지음, 김은신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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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다. 이토록 아름다운 문장이 있을 수 있다니.
비페이위가 만들어낸 이야기와 아름다운 문장들이 내 가슴속에 흘러 들어온다. 책을 덮고나서 폭풍같이 휘몰아치는 마음 속 감정들을 겨우 추스른다. 작가에게, 기립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청의'안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담겨있다. 모두 다른 이야기지만, 어찌 보면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들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사람, 서로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하나로 통하는 이야기들이다.

특히 '청의'에서 그리는 샤오옌추는, 한 인물이 비극속에 사라진다는 점에서 내 가슴속에 깊이 박혀 버렸다. 비페이위의 아름다운 문장은 오히려 그녀를 더 아프게 만들 뿐이였으니까 말이다.

'청의'에 등장하는 샤오옌추는 아름다웠다. 가슴 속 뜨거운 감정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는 아름다운 청의 역을 맡았지만 그녀의 삶은 청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샤오옌추는 재능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였음에도 자신의 아집과 욕심으로 인해 외로운 항아처럼 세상과 멀어졌다. 점점 사그러지는 그녀를 보며 소리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예술가로서 필요한 애착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그 애착은 그녀를 꽁꽁 옳아매었다. 파멸로 가는 길, 소리없이 스러지는 그녀는 진한 핏방울을 하얀 눈사이로 방울방울 흘려보낼 따름이였다.

'청의'의 샤오옌추, '추수이'의 펑제중, 그리고 '서사'에 등장하는 린캉까지 그들은 물질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세월의 흐름앞에 꿈틀거리는 중국의 역사와 함께 그들 역시 변해갈 수 밖에 없었으리라.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 아닐까? 일본의 침략과 함께 변해가는 시대상은 그들을 표독스럽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만 유리하도록 만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런 과정을 비페이위는 섬세하고도 깊은 심리묘사로 좀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을 뿐이다.

인간의 욕망은 그 깊이를 알 수 없기에 무한하고 끝없는 우물처럼 느껴진다. 그 안을 들여다보기란 무척 힘든 일일 것이리라. 비페이위는 그 우물안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았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처럼 치밀한 묘사는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중국의 거대한 역사와 함께 흘러가는 인간의 욕망을 그린 '청의'
그리고 아름다운 문장들과 함께 치밀한 심리묘사로 나를 오싹하게 만든 비페이위.

-샤오엔추는 얇디얇은 무대 의상 하나만 걸친 채 눈보라 속으로 걸어 나갔다. 극장 정문 앞으로 나온 그녀는 가로등 아래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눈이 내리는 큰길을 한 번 쳐다본 후 스스로 박자를 세고 피리를 흔들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황을 부르고 있었다. 눈꽃이 흩날리는 가운데 극장 앞으로 수많은 사람과 차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청의에서 샤오엔추가 보여준 마지막 몸짓은 아마 꽤 오랫동안 내 뇌리속에서 떠나지 않을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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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7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poison 2008-05-27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해용^^*
감동의 물결이 차르르륵~~~밀려오네요^^*
 
악기들의 도서관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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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음악에 대해 아주 잘, 그리고 많이 아는 분이다. 어떤 음악이 흘러나와도 가수와 작곡가를 줄줄 읊어대고 그 곡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알려준다. 가요뿐 아니라 클래식, 재즈, 올드팝까지 모든 음악에 정통한 그는 걸어다니는 음악 도서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바로 내 옆에서 귓가에 감미롭게 들려오는 음악에 대해 줄줄 읊어대는 그가 왠지 거북스럽게 느껴진다면 나만의 생각일까? 나는 음악에 대해 잘 모르지만, 대신 온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열린 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듣기전에 음악에 대해 먼저 분석하고 이야기할 뿐이다.

김중혁 작가의 <악기들의 도서관>을 읽으며 음악에 해박한 그를 떠올렸었다. <악기들의 도서관>에는 그처럼 음악에 대해 줄줄 읊어주며 설명하는 글은 없지만, 대신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음악처럼 따뜻하고 정겨운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어디선가 들려오는 멜로디에 발을 까딱거리며 흥겨운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가끔은 상상만으로 흥얼거렸던 노래처럼 특이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매뉴얼 제너레이션'과 '비닐광 시대'라든가, 호흡이 잘 맞는 예쁜 듀엣곡처럼 너와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리방패'와 '나와 B'라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는다는 건 억울하다'라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악기들의 도서관'은 신기하게도 그 문구를 입에 매단채 사는 경쾌한 트롯같은 내 친구가 떠올라 몇 번이고 계속해서 책과 그 구절을 읽기도 했다. 음치의 이야기를 다룬 '엇박자 D'는 친구들의 놀림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마이크를 놓지 않는 내 친구가 떠올라 책을 읽은 뒤 친구에게 전화를 하기도 했다.

이처럼, 소설속엔 평범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야기와 음악이 있다. 때론 우아한 클래식처럼, 때론 어깨가 들썩여지는 트롯처럼.

음악없이 살 수 있을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가끔 해볼때가 있다. 그만큼 음악이란 존재는 내 피부 속 깊이 파고든 어떤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한때는 나도 해박한 그처럼 음악을 파고들며 열심히 공부해 보았지만, 곧 포기했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내 마음속의 귀는 닫혀버렸기 때문이다.

김중혁 작가의 소설집 <악기들의 도서관>을 읽으면서 내 마음은 더 편안해졌는데, 그의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접하며 내 마음으로 예쁜 음악을 함께 들었기 때문이다. 편안한 음악처럼 그의 이야기 역시 편안히, 하지만 오래 내 가슴속에 남았다. 분석하고 해석하려기보다는 마음으로 느끼는 음악을, 일상을 알려준 작가를 만난 것 같아 그가 들려주고 연주한 음악들은 오랫동안 내 가슴속에 남아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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