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리트의 껍질
최석규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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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질이 바닥을 향해 물처럼 흘러내리고 안이 텅 비어 있는 푸른 사과. 꽤 인상적이었지. 무언가 꽉 막힌 답답한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묘한 여운을 주는 작품이었어. 무엇을 생각하며 그린 거냐고 물어봤더니 이렇게 반문했어. ‘우리 모두 겉을 감싼 껍질을 벗겨내면, 사실 똑같이 생긴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상도 하지. 그 말이 지금까지 머릿속에서 잊히질 않아』

지난달에 ‘우리 속에 숨은 사이코패스’를 읽어서 그런가, 반전이 그럴 수도 있다로 여겨진다. 인격의 한 종류이며 ‘아, 그런 사람이구나’로 짧게 판단하며 지나쳐 버렸다. 사이코패스는 지나가는 한 사람에 불과하고 평범한 타인으로 인정하는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아아 내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특성을 표출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들이 펼쳐놓은 인격이 오작동된 세상을 마주했을 때도 과연 이해가 가능할까? 웃기게도 더 이상 날뛰며 소름 돋는 일이라 여기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마그리트의 껍질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다가왔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워요. 종들이 가득한 방이 있어요. 강규호 씨는 거기서 제일 작은 종을 망치로 때립니다. 처음에는 종 하나만 징징거리며 울리겠지만, 공명 효과 때문에 주변의 가까운 종들도 곧 따라 울릴 겁니다. 소리는 점점 사방으로 퍼지고 결국 방 안의 종들은 모두 깨어나 같은 소리를 내게 됩니다. 하나의 울림에서 전체의 울림으로. 기억이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살아나는 겁니다. 그걸 ‘기억의 트리거링’이라고 부릅니다』

사고로 최근 2년간의 기억을 잃은 그의 이름은 강규호다. 타인의 관심사에 집중하는 모습을 어떻게 의도적으로 보여주느냐가 관계의 첫 단추라 생각하며, 대가 없는 이타심에 보람을 어색하게 갖다 붙이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맞는지 궁금해한다. 이상하게도.

『서랍을 열었다. 수북이 쌓인 약을 모두 꺼내 쓰레기통에 처넣어버렸다.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기억력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약이다. 신경안정제가 조금 섞여 있겠지만 별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신경 안정 따위는 내게 필요 없었으니까. (…) 고통의 심연에는 어떤 맹렬한 아픔도 와닿지 않는 텅 빈 곳이 있다. 그곳엔 일종의 환희가, 승리에 넘친 긍정이 있다』

통제력을 잃은 생각의 흐름은 의혹의 몸집만 키워갔다.

『그녀의 이웃은 분개했지. 그 아가씨가 사람에겐 정이 없고 강아지가 죽으니까 운다고 말이네. 그녀가 강아지의 죽음을 슬퍼한 이유는 강아지가 그녀의 세계에 동참했기 때문이야. 개는 그녀의 목소리에 대꾸했지만, 사람들은 대답하지 않았잖은가』

밀란 쿤데라의 ‘불멸’을 읽는 그는 한 문장에 집중했다.

‘강아지가 그녀의 세계에 동참했다.’

어찌 됐건 인간은 무리생활을 하는 본능을 갖고 있는데 지금 시대의 흐름으로 봐서는 본능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 급기야 본능을 잃어가고 새로운 무언가를 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중심에 마그리트의 껍질이 있는 건 아닌지.

세상에 온갖 종류의 선들만 남았을 때 그중 덜 선한 것이 악이 된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선은 선 자체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조금의 악이라도 있어야 선으로 판가름할 수 있다. 사이코패스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선하다는 것을 돋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덜 인간적인 사람은 아닐까.

껍질을 벗겨내면 다 똑같다. 누구는 껍질을 벗겨내고 누구는 껍질을 덧씌우고 산다. 어떤 게 오른지는 모르겠다. 이 소설은 누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는 모르지만, 해선 안 되는 일은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지금 현시대에서는 말이다.





*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생각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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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카페에서 우리가 만난다면
황주리 지음 / 파람북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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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좋은 글귀를 만나면 밑줄을 긋고, 음악을 듣다가 소름 돋으면 한 번 더 플레이시키고, 그림이 마음을 관통했을 때는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감탄한다. 가끔 이런 즐거움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을 때가 있다. 옆에서 흥분한 채로 팔을 때려가며 재잘재잘 귀찮게 하는 그런거. 이 소설이 그렇게 다가왔다. 게다가 영화, 음악, 그림, 책이 함께하고 있어 현실의 비협조적인 상황에서도 사랑의 속삭임으로 들렸다. 사랑과 불안은 전쟁과 평화로 대치되기도 하면서 불멸의 지점에서는 한없이 외롭게 다가오기도 했다.


주인공을 의사와 화가로 정한 건 시대의 상처를 치유하는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설정이다. 그리고 영화 <바그다드 카페>가 있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영화이며, 이 책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제베타 스틸이 부른 Calling You의 몽환적인 울림은 영화와도 무척이나 어울렸지만, 이 소설의 속삭임이 외침으로 느껴질 때 Calling You를 찾게 된다. 바그다드 카페와 오버랩되어 읽는 내내 정말 행복했다.


『사물이 환기시키는 기억의 힘이란 너무도 커서 사람이 죽어도 그가 남긴 물건들은 끈질기게 살아남죠. 그중에서도 가장 힘이 센 사물이 그림이 아닐까 합니다. (…) 우리가 같은 시절 같은 영화 <바그다드 카페>를 좋아했다는 우연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 외로움은 마치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세상을 다르게 변화시키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재료 같습니다』

그리움은 현실에 혼란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대상이 명확하면 힘이 된다. 그래서 그녀가 남긴 그림은 힘이 세다.



『때로 전쟁의 반대말은 평화가 아니라 파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환한 불빛 아래서 춤을 추는 사람들, 와인 잔들이 부딪치는 소리, 여자들의 화려한 의상, 가끔은 영화 속에서라도 그런 장면을 보고 싶어져요. (…) 돈도 금도 지혜도 아닌 증오의 상속이라니, 옳은 건 과연 무엇일까요? (…) 실체는 없지만 고통을 느끼는 환상통처럼 있지도 않은 수많은 소리들이 들려오는 병이 마치 전염이 된 것 같습니다』

전쟁과 질병, 위태로운 자본주의로 너무나 현실적인 문장들을 엮어봤다. 여유로운 생각일지 모르지만 사랑이 절실해 보여 두 사람의 끌어당김은 당연해 보였다.


『삶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때는 당신의 편지를 읽을 때입니다. (…) 이곳에 없는 그대가 그곳에서 나를 생각한다는 그런 기분은 뭔가 든든한 비현실의 힘이죠. (…) 영화 바그다드 카페 속의 뚱뚱한 여주인공이 좋아요. (…) 영화가 나온 이후 다른 삶을 경험함으로써 인간의 삶은 세 배로 길어졌다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납니다』

분명 사랑의 속삭임은 맞는데 잠시 공허함을 느꼈던 문장들이다. 과연 편지는 존재하는 걸까. 이곳과 그곳의 경계를 알 수 없어 비현실적이며, 그녀는 마른 몸인데. ‘인간의 삶이 세배로 길어졌다’는 이 멋진 말이 그와 그녀의 간격을 더 멀어지게 하는 건 아닌지.

『언젠가 오래된 일기를 뒤지니 ”오늘도 행복했다“라고 짧게 쓰여 있더군요. 내가 쓴 건데도 그 짧은 일기가 마치 어떤 유명한 사람의 묘비명처럼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 어쩌면 이런 식의 감정이 사랑일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많이 사랑했는지도 모릅니다』


이 책 참 아리다. 그리고 아름답다.


우리가 했던 모든 일이 사랑이라면, 지금 죽어도 괜찮다.
- 페르난도 페소아 《불안의 책》




*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생각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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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현대 예술의 거장
앙투안 드 베크.세르주 투비아나 지음, 한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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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향해 뛰어들 기세로 달리던 앙트완은 막상 바다 앞에 도착하자 멈춰 선다. 달리는 동안 스쳐 지나간 무언가로부터의 해방에 힘입어 뒤돌아 카메라를 응시한다. 구속과 같은 바다의 끝을 마주하지만 뒤돌아 또 다른 앞을 향해 세상과 맞설 준비가 된 앙트완. 그는 트뤼포였다.

영화 ‘400번의 구타’는 트뤼포를 널리 알린 작품이다. 영화로, 한 인간으로 이 작품만큼 트뤼포의 세계에 머물게 하는 작품은 없다.


트뤼포 :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앙투안 드 베크,세르주 투비아나 저 / 한상준 역
을유문화사 | 2022년


‘인생, 그것은 스크린이었다.‘

굴곡 많은 과거사는 훌륭한 소재거리였다. 그에게 풍요로운 원천이자 일차 자료, 일종의 이야기 보고였으며, 삶의 격렬했던 순간을 서로 연결해 주는 길잡이가 바로 영화였다. 그리고 스크린, 즉 영화관은 그의 피신처였다.


『나는 하늘을 오랫동안 쳐다보지 않는다. 나의 눈동자가 땅으로 되돌아올 때 세상은 내게 소름 끼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에게 부모는 인간 그 이상이 아니었으며, 부모가 된 건 우연이고 타인에 지나지 않았다. 우정 또한 믿지 않았으며, 정치인이란 똑똑한 불량배라고 생각한 그의 세상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평화로운 한숨을 쉬느니, 쉴 틈 없이 직진하며 아웃포커싱 하듯 지나쳤고, 부모의 보호에서 풀려나면서 “늘 구멍 난 상태”로 자유로운 삶을 시작한다.


트뤼포는 스크린 속 여자들의 몸짓과 신체를 묘사하면서 에로틱한 페티시즘으로 채워진 표현을 멋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숙련된 시선으로 포착한 날카로운 앵글은 그의 사생활을 생각나게도 한다.

『얼굴은 속마음을 감출 수 있고, 수줍음도 거짓일 수 있고, 정조는 위장될 수 있지만, 브래지어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적이고 은밀한 요소를 어필하면서 영화를 넘어 현실을 자극하는 그의 시선은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아벨 강스를 옹호하는 그의 말에서는 극도의 역설 취미를 가지고 특정 작품이 지닌 결점을 활용해 작가 정책을 설명하기도 했다. 아벨 강스는 전혀 재능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실은 재능이 그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며 실패가 곧 재능이라고 말한다. 뒤이어 완벽성과 성공 등의 표현이 비천하고 저속하고 부도덕하고 추잡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작가 정책이란 전부 이른바 “덜 중요한 영화의 역설”에 그 토대를 두며 비타협적이고도 매우 설득력 있는 비평을 이어간다.

『몇 년 전 순진무구한 스무 살의 나였다면 이 같은 영화를 통틀어 맹렬하게 비난했을 것이다. 오늘 나는 훌륭하다기보다는 영리한, 고결하다기보다는 빈틈없는, 다감하다기보다는 눈치 빠른 영화에 부분적으로나마 감탄하는 나 자신을 문득 깨닫고는 얼마간의 씁쓸함을 느낀다』

오직 자신의 비타협적인 비평만이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낼 수 있다고 여긴 걸까. 그를 잃어가는 순응적인 부딪침의 씁쓸한 말도 참 좋다.


수치스러웠을 자신의 욕망을 진정시키고, 과거 온갖 어려움을 잊도록 해준 시네필로서의 열정은 을유문화사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인 『트뤼포』에서 그의 영원한 초상은 계속 이어진다.

트뤼포의 인생을 흡수하고만 싶다. 영화에 담긴 메시지를 꺼내놓지도 못하겠다. 글로 표현하기엔 온통 감탄사로 뭉쳐진 여운이 지금 이 순간에는 언어화를 쉬이 허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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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컨슈머 - 소비하지 않는 소비자들이 온다
J. B. 매키넌 지음, 김하현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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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주 4.5일 근무를 하고 있다. 근무 시간을 더 줄이고 취미생활에 집중하고 싶지만 망설여진다. 소비를 어디까지 할 것인가와 지출의 상한선을 정하는 일의 고민 때문이다. 저축보다 소비를 우선순위에 둔 이유는 현재를 중시하는 긍정적인 마인드 덕분이라고나 할까. 이런 생각에 잠긴 나날 속에서 마주한 디컨슈머는 결단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예고장 같았다.


예고는 예상을 뛰어넘어 방대했다. 한 개인의 사소한 결단과는 사이즈가 다른, 지구를 숨 쉬게 하는 일에 디컨슈머의 영향력을 펼쳐놓았다. 소비의 딜레마를 지구에서 인류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보고 있는 와중에 소심하기 그지없는 취미를 위한 고민은 조용히 묻어뒀다.



『우리가 그동안 이 모든 것에 대처해온 방식은 소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녹색화’하는 것이었다. 전 세계 휘발유를 태우는 자동차를 전기차로 대체하고 석탄이 아닌 바람과 태양에서 얻은 에너지로 핸드폰을 충전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 그러나 소비문화를 녹색화함으로써 물질 소비가 극적으로 줄어든 지역은 전 세계에 단 한곳도 없다』


이러한 녹색화의 노력은 전 세계 소비 증가량으로 남김없이 상쇄되어 이산화탄소량을 줄이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디컨슈머의 필요성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부분이다.



우리가 과시적 소비를 하는 본질적 이유는 탐욕스럽고 샘이 많고 경쟁적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존중이라 부르는 만족스러운 상태를 추구하기 때문이라는데, 생존을 위한 소비가 아닌 ‘과시적’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입하고 들고 다니지 않는 백, 사놓고 읽지 않는 책을 보니 자기만족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우선 ‘과시적‘이라는 표현에서 벗어나는 일부터 해야겠다.



1991년 소련이 무너졌다. 거의 10년간 옛 공산주의 왕국은 탈근대화를 거쳤으며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3분의 1이 줄었다. 이는 팬데믹 동안 가장 단속이 엄격했던 4주간 중국에서 감소한 25퍼센트보다 더 큰 감소량이라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은 질병의 문제를 떠나 다양한 각도로 연결 짓는 과정이나 결과에 봉착하게 한다. 마치 의도적인 실험대 속에 디컨슈머 실천을 강요한다는 어이없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하니. 소련의 붕괴로 인한 탈근대화와 팬데믹으로 인한 소비 감축은 디컨슈머를 가리키고 있긴 하다.



이 책은 기후변화와 삼림 파괴, 바다의 플라스틱 오염 등 지구를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드는 여타의 많은 생태 위기를 소비의 영향에서 착안하여 디컨슈머를 통해 해결 방안을 찾아 나간다. ‘첫 번째 희생자는 아마존이 될 것이다.’는 조짐을 시작으로 경제의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균열과 ‘더 이상 소비자가 아니라면 우리는 누구일까.’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을까.’ 등 굵직한 물음 속에서 사지 않을 자유 혹은 권리에 대한 적응을 제시하고 있다. 이어서 소비주의가 살아남을 마지막 기회인 소비의 변화로 마무리한다.


소비문화를 디지털 영역에 보존하는 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한다. 그에 걸맞게 가상 세계라는 완벽한 풍요의 세계에 다가가고 있다. 이 지점에서 무서워진다. 지구를 보존하기 위해 우리를 잃어가는 건 아닌지.




*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생각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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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가 간절한 날에 읽는 철학 이야기
사토 마사루 지음, 최현주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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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문제 없이 일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제를 해결하느냐 또는 문제를 받아들이느냐의 선택의 기로에서 늘 고민한다. 어쨌든 답답하고 복잡한 머릿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변화는 필요한데, 그 변화에 철학의 필요성을 제공한 책이다.


『퇴사가 간절한 날에 읽는 철학 이야기』
사토 마사루 저 / 최현주 역 | 동양북스 | 2022년


우선 주변 사항을 정리하고, 고민의 내적 논리 즉, 본질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퇴사 앞에서 냉철한 판단과 본질에 이르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루에도 ‘욱’만 몇십 번 오르락내리락하는데 릴렉스에도 한계가 있다. 그래도 잡다한 이유 갖다 붙이지 않고 본질 파악에 집중하다 보면 하루는 금방 간다.


‘돈’ 관계로 퇴사를 고민하는 분께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로 이 책은 시작한다. 돈을 부정해서도 안 되겠지만, 돈 자체는 본질적인 가치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걸 쫓다가 인생이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욕심이 과하면 화가 따르는 법이니.


근무하면서 가장 스트레스 받는 문제를 파레토 법칙에서 만났다. 일부 구성원에 집단의 급여나 평가가 집중된다는 경험치에 근거한 이론이다. 파레토 법칙의 정리는 둘째고 예시가 눈에 들어왔다.

『개미 무리 중 ‘매우 열심히 일하는 개미, 일하는 개미, 게으른 개미’의 비율이 2:6:2라고 해요』

매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게으른 사람도 있다. 물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조직도 있겠지만, 게으르거나 요령 피우는 사람과 일하는 건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분위기에 이끌려 나 또한 일에서 한 발 빼게 되고 좋지 않은 결과에 나 자신을 자책하는 일로 이어지면 퇴사를 생각하게 된다. 차라리 파레토법칙의 적용으로 위안 삼아 일을 이어갈 수도 있겠지만, 예시에서 말한 게으른 개미는 존재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파레토법칙은 인간관계로도 설명한 부분이 있다. 사람은 자신이 신경 쓰는 부분에만 눈을 돌리고, 본인을 싫어하는 20%의 사람만 본다. 그건 전체를 보고 있지 않다는 증거라고 하는데, 좋은 사람 한 명만 있어도 일은 할만하다. 좋은 사람과 더 열심히 어울리면 된다. 그리고 게으른 직원 20%만 볼 게 아니라 매우 열심히 하거나 열심히 하는 80%를 봐야 하는데 그걸 놓치고 있었네. 전체를 보면서 일을 해야겠다.


결국 나 자신을 탓하는 게 문제다.

『자기혐오라는 것은 자신을 떼어내어 좀 더 객관적으로 나 자신을 볼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자기혐오는 자기반성을 위해서 굉장히 중요해요. (…) 사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진심으로 탓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자책하는 자신’을 좋아하는 거죠. 자기혐오와 세트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자기애입니다』

맞다. 탓할 대상을 찾는데 나 자신만큼 적당한 상대는 없다. 겸손이라고 착각할 때도 있지만 빨리 결론 내리고 마무리 짓기 위해 자기혐오에 빠지는 게 낫다. 자책하는 나 자신을 무언가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그래서 자기혐오와 자기애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마무리 단계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에 따른 고독의 실체를 쇼펜하우어 명언과 함께 고독에 대한 철학도 심도 있게 다룬다.

『외로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유를 사랑하지 않는 인간과 다름없다. 왜냐하면 외로울 때만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이다』


단순한 비즈니스 스킬이 아닌 사물의 본질을 알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보인다. 이 책은 본질을 보는 방법을 철학과 함께 대화 형식으로 아주 쉽게 펼쳐냈다.


제목 그대로 퇴사가 간절한 분, 일요일 밤만 되면 출근 생각에 소화가 안 되는 분께 『퇴사가 간절한 날에 읽는 철학 이야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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