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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카페에서 우리가 만난다면
황주리 지음 / 파람북 / 2022년 11월
평점 :
책을 읽다가 좋은 글귀를 만나면 밑줄을 긋고, 음악을 듣다가 소름 돋으면 한 번 더 플레이시키고, 그림이 마음을 관통했을 때는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감탄한다. 가끔 이런 즐거움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을 때가 있다. 옆에서 흥분한 채로 팔을 때려가며 재잘재잘 귀찮게 하는 그런거. 이 소설이 그렇게 다가왔다. 게다가 영화, 음악, 그림, 책이 함께하고 있어 현실의 비협조적인 상황에서도 사랑의 속삭임으로 들렸다. 사랑과 불안은 전쟁과 평화로 대치되기도 하면서 불멸의 지점에서는 한없이 외롭게 다가오기도 했다.
주인공을 의사와 화가로 정한 건 시대의 상처를 치유하는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설정이다. 그리고 영화 <바그다드 카페>가 있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영화이며, 이 책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제베타 스틸이 부른 Calling You의 몽환적인 울림은 영화와도 무척이나 어울렸지만, 이 소설의 속삭임이 외침으로 느껴질 때 Calling You를 찾게 된다. 바그다드 카페와 오버랩되어 읽는 내내 정말 행복했다.
『사물이 환기시키는 기억의 힘이란 너무도 커서 사람이 죽어도 그가 남긴 물건들은 끈질기게 살아남죠. 그중에서도 가장 힘이 센 사물이 그림이 아닐까 합니다. (…) 우리가 같은 시절 같은 영화 <바그다드 카페>를 좋아했다는 우연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 외로움은 마치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세상을 다르게 변화시키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재료 같습니다』
그리움은 현실에 혼란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대상이 명확하면 힘이 된다. 그래서 그녀가 남긴 그림은 힘이 세다.
『때로 전쟁의 반대말은 평화가 아니라 파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환한 불빛 아래서 춤을 추는 사람들, 와인 잔들이 부딪치는 소리, 여자들의 화려한 의상, 가끔은 영화 속에서라도 그런 장면을 보고 싶어져요. (…) 돈도 금도 지혜도 아닌 증오의 상속이라니, 옳은 건 과연 무엇일까요? (…) 실체는 없지만 고통을 느끼는 환상통처럼 있지도 않은 수많은 소리들이 들려오는 병이 마치 전염이 된 것 같습니다』
전쟁과 질병, 위태로운 자본주의로 너무나 현실적인 문장들을 엮어봤다. 여유로운 생각일지 모르지만 사랑이 절실해 보여 두 사람의 끌어당김은 당연해 보였다.
『삶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때는 당신의 편지를 읽을 때입니다. (…) 이곳에 없는 그대가 그곳에서 나를 생각한다는 그런 기분은 뭔가 든든한 비현실의 힘이죠. (…) 영화 바그다드 카페 속의 뚱뚱한 여주인공이 좋아요. (…) 영화가 나온 이후 다른 삶을 경험함으로써 인간의 삶은 세 배로 길어졌다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납니다』
분명 사랑의 속삭임은 맞는데 잠시 공허함을 느꼈던 문장들이다. 과연 편지는 존재하는 걸까. 이곳과 그곳의 경계를 알 수 없어 비현실적이며, 그녀는 마른 몸인데. ‘인간의 삶이 세배로 길어졌다’는 이 멋진 말이 그와 그녀의 간격을 더 멀어지게 하는 건 아닌지.
『언젠가 오래된 일기를 뒤지니 ”오늘도 행복했다“라고 짧게 쓰여 있더군요. 내가 쓴 건데도 그 짧은 일기가 마치 어떤 유명한 사람의 묘비명처럼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 어쩌면 이런 식의 감정이 사랑일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많이 사랑했는지도 모릅니다』
이 책 참 아리다. 그리고 아름답다.
우리가 했던 모든 일이 사랑이라면, 지금 죽어도 괜찮다.
- 페르난도 페소아 《불안의 책》
*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생각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