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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네 여행기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29
하인리히 하이네 지음, 황승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0월
평점 :
하이네는 고3 수험생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수능을 앞둔 예민한 여고생에게 클래식 FM ‘노래의 날개 위에’는 진정제였다. 틈만 나면 방바닥 한가운데 누워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시그널뮤직을 기다렸다. 멘델스존의 가곡인 ‘노래의 날개 위에’는 ‘하이네’라는 날개를 달아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데려가는 꿈을 꾸게 했다. 덕분에 수험생 시절에는 참 꿈이 많았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인 슈베르트와 멘델스존, 슈만에 의해 하이네의 시가 가곡에 등장하면서 그의 서정은 빛을 발했다.
<하이네 여행기>
하인리히 하이네 저 / 황승환 역 | 2023년 10월
「북해」 연작과 중편 「이념―르그랑의 책」을 선별해서 실었다.
<하이네 여행기>는 노랫말처럼 서정적 음률에 기대지 않는다. 상스러운 뉘앙스를 아름답게 포장해 버리는 하이네의 시는 운율의 어긋남에 철렁이다가도 냉소적 마무리를 잊지 않는다.
그녀는 아궁이 앞에 앉아
물 주전자에, 달콤하고 몽환적인 물 끓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네.
바스락거리는 땔감을 불에 던져 넣고
입김을 불어 넣네.
그러자 깜박이던 빨간 불빛이
마술처럼 환하게 되살아나
꽃다운 얼굴을,
투박한 잿빛 셔츠 사이로
살갑게 비집고 나온
여리고 하얀 어깨를,
고운 허리춤에
속치마를 단단히 졸라매는
작고 섬세한 손을 비추네. - 해변의 밤 中
유혹하듯 감미롭게 가물거리는 시선의 움직임을 작은 불빛의 이끌림으로 막힘없이 써 내려간 ‘해변의 밤’은 독자로서 숨죽임이 감탄 때문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혼란스럽지만 분명한 건 어느 쪽으로든 만족감을 준다는 사실이다.
널리 굴러다니는 물결과 희롱, 저녁의 어스름과 거친 파도, 벌건 대낮의 위협, 해방된 영혼에 환호, 축축한 모래, 침울한 입술.
감정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시어들을 따라가 보았다. 넘실거리기도 거칠기도 했던 파도는 바다의 일부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작시로 채워진 「북해」 1, 2부와는 달리 산문인 3부는 바다와 이어진 섬을 이야기한다. 소박한 결속에서 피어난 풍습을 지닌 서로 돕는 자연스러운 공동체가 정신적 가면을 쓰고 오해로 뒤범벅된 낯섦의 편입을 경계하며 모순과 아이러니를 쏟아낸다.
“랄랄라랄라, 랄랄라랄라, 랄라랄-랄-랄-라.”
<하이네 여행기>의 마지막 파트인 「이념―르그랑의 책」은 흥얼거림으로 모든 걸 정리하는 것 같다. 긍정은 나의 힘이라는 최면을 거는 걸까. 혹은 다가올 무언가에 대한 기대는 아닐는지.
넘실대는 바다와 불안한 섬, 이 둘을 비벼놓은 듯한 이념을 <하이네 여행기>로 꾸렸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