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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 그 높고 깊고 아득한
박범신 지음 / 파람북 / 2023년 3월
평점 :
히말라야에 위로받고 싶어서 창을 열다 말고 ‘아’ 입을 벌리며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별빛으로 밤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시간, 야간 산행의 행복을 알기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별빛’에 거짓이 없음을 말하고 싶다. 팔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별들이 촘촘히 박힌 밤하늘은 쉼이고, 기대이며, 환호였으니.
햇빛은 타는 듯 빛나고 바람은 몸을 관통해 지나가며 절룩절룩 기분 좋게 걷는다는 말에 어깨가 실룩거리는 건 행복의 전달일까. 타는 햇빛과 함께 걷고, 몸을 관통하는 바람과 만나 절룩거리면서도 온몸으로 자연의 동행을 느끼는 순간 진정한 ‘나’를 발견하겠지.
행복하다. 사진과 함께 저자의 순례를 뒤따르는 일이. 잠시 정신 차리게 하는 문장과 마주할 때면 얼음 동동 띄워진 막걸리 한잔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경쟁은 가파르기 이를 데 없고, 분열은 자학적 수준에 도달했으며, 생명 가치는 효율성에 따라 일사불란한 서열화를 이루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다. 순례를 끌어당기는 위 문장이 우리의 삶이 방해받지 않는 순례길이라는 말에 오해가 있지 않나 의심해 본다.
오직 걷는 일. 자동차도 없고 비행기도 없고 앞에 놓인 길에만 의지하며, 더 빠른 자와 더 느린 자의 구분도 없고, 서열도 없으며, 몸은 고될지언정 불안감에 사로잡힐 일이 없는 그 길.
“낮은 어깨와 고요한 걸음새로 그이의 품속에 깃들어 마침내 존재의 시원에 닿고자 하는 꿈이 순례의 본뜻이라 할 것입니다.”
과거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미래는 정지되어 있으며, 현재는 장강의 물처럼 느릿느릿 흐르지 않는 듯이 흘러가지만, 뛸 필요가 없다는 순례의 현재와 마주하듯 천천히 한 장 한 장 넘기며 다가오는 공기를 힘껏 들이마시면서 신선한 현재를 느껴본다.
새로운 순례길의 황홀한 초입에서 저자의 폐암 일기는 공기마저 탁하게 느껴지지만, 이를 순화시키는 일에 서투른 독자를 위해 저자는 웃음 썩인 투로 열심히 길을 내고 있다.
“나는 화장실 좌변기에 앉는다. (…) 갑자기 터진 눈물샘에 놀란 아내가 달려와 내 얼굴을 당신 뱃살로 감싸 안는다. 애를 셋이나 낳은바 아내의 뱃살은 군살까지 넉넉히 보태 몰캉몰캉 야들야들하다. 눈물에 콧물까지 묻어 나오면서, 정작 나와야 할 나의 오줌 줄기는 뚝, 뚜우욱, 끊어진다.”
아.. 눈물은 떨어지고 오줌은 끊어지고. 슬픔이 마중 안 나와도 되는 이 라임은 해석이 반반이라 웃프로 남길란다.
“만약 내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고 해도 사랑하는 이여, 나의 죽음을 결코 차갑게 여기지 마소서. 내가 태어날 때와 내가 죽을 때를 구별하지 마소서. 혹 슬플지라도 ‘환하고 따뜻한 슬픔’으로 나를 느끼소서. 내 평생 따뜻한 물로 흐르며 살기를 간구했으니, 갓 낳은 달걀을 두 손으로 쥐었을 때처럼, 탄생처럼, 죽음으로 떠나는 나의 영혼도 부디 따뜻한 파동으로 느끼소서.”
갓 낳은 달걀을 두 손으로 쥐었을 때라면 불안과 따듯함이 공존하지만 귀엽고 사랑스러워 품고 싶은 그 마음을 떠올리면 되려나.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으나 주관적인 생각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