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거리는 고요
박범신 지음 / 파람북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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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한가히 지낸 날이 별로 없다는 저자는 앉아서 쉬는 것보다 달려가며 쉬는 게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고요한 나날 보내는 요즘이야말로 축복의 시간이라며 머물러 있으니, 세계가 오히려 무한대로 넓어지는 걸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펴낸 책들만 봐도 쉼 없이 달려온 걸 알 수 있다. 순례는 달려온 길에 대한 쉼이었을까. 머물러 있다는 게 답답하면서도 무섭기도 할텐데. 앞만 보고 달리다 고인 물처럼 흔들리기만 한다는 게 줏대 없어 보이고 후퇴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무한대로 넓어지는 축복의 시간은 머무르기에 존재한다는 확신을 얻은 무언가가 있을 터. 괜히 고요가 두근거릴까.

“나는 요즘 추락의 기술, 상실의 기술을 연마하고 있어요. 아름답게 늙어가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기술이지요. 애오라지 상승의 기술만을 연마하던 젊은 날보다 신과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어요. 나의 오랜 일부처럼 그분이 내 안에서 느껴질 때면 추락과 상실의 먼 길이 내 앞에 놓여 있다고 상상해도 전혀 두렵지 않아요. 나 자신, 쓸쓸한 듯 따뜻하고 고요한 듯 온전해지는 느낌이지요. 나는요, 이렇게 나날이 성숙하고 있답니다.“

추락과 상실이 늙어감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사실이 참 씁쓸하다.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외치는 건 그저 노랫말뿐인가보다. 무턱대고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니다. 추락과 상실에도 기술이 필요한데, 저자가 말하는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아직은 젊다는 증거일까. 기술이라고 하면 내려놓는 일을 말하는 것 같은데.

”문학에 대한 사랑과 갈망도 전혀 줄지 않는다. 머리가 희어지는 속도보다 가슴이 더 빠르게 붉어지고 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할까. 가속적으로 늘어나는 흰머리가 불변의 청춘으로 회귀하고 있는 속도를 드러내는 역설적인 표상일 수 있다는 걸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건 쉽지 않다.“

생각의 결함이라고 뇌의 어느 구석에서 콕콕 찌르는 것 같지만, 가슴을 붉게 하는 문학에 대한 열정이 육신을 무시한 영혼을 아주 건강하게 팔딱인다는 증거다. 앞으로 할 일은 영혼의 먹이인 가슴을 쿵쾅거리게 할 책을 읽든, 사람을 만나든, 음악을 듣던 일단 뭐라도 해보는 것 ‘시작’이라는 사실이다. 시작은 생기를 불러일으키기에 아주 좋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저자는 에세이집을 내면서 작가 생활 50년을 말하는 게 부끄러워 책이 나오면 인적 없는 봄 강을 따라 오래오래 걸을 생각이라며 스스로 강이 될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멋진 말을 남겼다. 책 속의 말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다가왔다. 부끄러워 스스로 강이 되고 싶다는 말에 녹아내리며 햇살 아래 쌓인 눈을 자처해 본다.


출판사를 통해 도서는 제공받았지만 주관적인 생각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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