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한 균형 아시아 문학선 3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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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인도 수학자 ‘라마누잔’의 일대기를 담은 <무한대를 본 남자>를 봤다. 카스트 제도의 계급 중 최상위인 브라만 계급임에도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가 독학으로 수학을 공부하고, 생계를 위해 회계사로 근무하다가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수학자의 초청으로 영국을 가게 된다.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인으로 인종차별을 받는 모습부터 영국 수학협회 정회원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나오는데 영화가 끝난 뒤에도 계속 기억나는 한 남자가 있었다.

영국을 가기 위해 배를 타러 가는 깔끔한 정장을 입은 라마누잔 뒤로 그의 짐들을 머리에 이고 걸어오는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한 인도인 남성이 내 머릿속에 떠나질 않았고, 머릿속에 맴도는 그의 잔상이 <적절한 균형>를 펼치게 하였다.


이 책의 저자 ‘로힌턴 미스트리’는 파르시 집안 출신이다.
인도 상인 집단이자 최대 부자 가문 중 하나인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파르시는 페르시아(현재의 이란)지역에서 살다가 세력을 확장한 이슬람교도들을 피해 인도로 넘어오게 된다. 서양의 유대인과 유사한 모습이다. 등장인물 중에도 파르시 집안 출신들이 나온다.


카스트 제도의 가장 하층민, 불가촉천민 출신의 재봉사인 삼촌 이시바와 조카 옴, 파르시 출신 의사 아버지 밑에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현재는 과부가 되어 홀로 자립을 위해 낡은 아파트에서 하숙을 치는 여성 디나, 그리고 디나와 마찬가지로 파르시 가문 출신이자 가게 일을 하는 부모 밑에서 곱게 자란 대학생 마넥, 이 네 사람의 각기 다른 삶을 담은 책이다.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갈 꿈을 품고 도시를 찾은 이시바와 옴. 그리고 여유가 있는 집안에서 점점 발전해가는 세상에 발맞춰 배움을 위해, 더 좋은 학교에 가려고 도시를 찾은 마넥.

이시바와 옴은 재봉일을 하러, 마넥은 하숙을 하러 디나의 집을 향한다.

이 책은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기 전 시절부터 국가비상사태 체제로 지내던 시절과 그 이후의 삶까지 인도의 현실을 아주 세밀하게 담았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된 이후에는 국경선이 생기면서 참혹한 학살 속에서 막대한 재산이 한순간에 사라졌던 사람들이 다시 해결책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균형 잃은 무질서 속에 계급에 따라 하늘과 땅 차이가 나는 삶의 질 속에서 살아갔던 사람들의 모습은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큰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


결혼 후 3년 만에 약제사였던 남편을 잃고 그 이후로 혼자 살아가는 방법을 익혀가며 재봉 일을 배웠던 디나.
마흔두 살이 되자 시력에도 문제가 생겨 재봉 일이 어려워졌다. 그녀는 미국과 유럽의 양품점들에 의류를 수출하는 여성을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되어 재봉사들을 고용해서 그들을 감독하는 일을 시작하게 된다. 즉, 외국 바이어들의 요구 사항에 맞추어 현지에서 재봉해서 수출하는 의류 산업자에게 용역을 받아 일하게 된 것이다. 그 재봉 일을 맡게 된 사람이 이시바와 옴이다.


고향에서 무두질과 가죽세공을 하는, 태어나자마자 부여받은 가장 낮은 지위의 공동체인 차마르 카스트에 속하는 이시바와 옴.
평생 빈곤한 삶에서 벗어나기 힘든 이들은 카스트 장벽을 허물고 다른 공동체에서 받아들여지길 바라며 살아왔다.
카스트가 높은 사람들이 하층 카스트의 사람들에게 저지를 수 있는 범죄들은 이들의 삶에서 영원히 인내해야 할 동반자였다.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카스트가 높은 사람들에게 더욱 비굴하게 엎드려야만 했다.


비상 계획 실행을 위해 날품팔이 노동자들, 여자들과 아이들, 육체노동자들에게 돈을 주고 집회 현장으로 향하는 트럭에 실어나르는 총리의 부름을 받은 자들을 보고 있자니, 내 머릿속에는 열성적으로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날리는 빨간 모자를 쓴 사람들의 모습이 둥둥 떠다녔다.

선거 때마다 약속한 대로 물, 화장실, 전기 같은게 좋아질 거라 기대하며 판자촌에서 기다렸던 이들에게 나타난 건 집들을 부수기 시작한 큰 중장비들, 그리고 강제노역과 인구증가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강요된 불임 수술이었다.
희망을 꿈꾸며 온 도시는 이시바와 옴 같은 사람들에게는 지옥 같은 광란의 도시였을 뿐이다.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배려심을 가진 디나는 고용주가 된 후, 재봉사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고용주 답게(?) 그들을 경계하고 채근하는 면모를 드러냈다. 가볍게 보이면 일하는 사람이 머리 위로 올라오려고 할 거라는 주변의 충고를 따르는 것이었다. 경계해야 할 것은 이뿐만 아니라 이시바와 옴이 뿜어내는 악취도 포함이다.

자신들보다 높은 계급의 사람들을 비난하면서도 그들의 삶을 갈망하고, 받았던 수모들은 더 낮은 계급의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사람들. 아들이 태어나면 사람들에게 돌리던 사탕 과자를 딸이 태어나자 돌리지 않는 모습. 말대꾸한다고 부인을 때리는 남편의 모습.

이렇듯 조화로운 삶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속에서 인간의 다양한 이면을 느낄 수 있었다.


국가비상사태 시기의 학생들이 민주화, 민족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프롤레타리아 주의의 대해 논의할 때, 마넥은 대부분 가난한 학생들이었던 그들과 자라온 환경이 달랐기에 위협과 공격이 너무나 흔해진 캠퍼스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기숙사를 떠나 디나의 하숙집을 찾아온 것이다.

어려움을 겪으며 자라온 적 없던 마넥은 삶에서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닥치면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의 선택을 도덕적, 윤리적 문제로 바라보기는 어려웠다.
아무래도 나 조차가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향해 관심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이는 사람이 못 돼서 일 거다.


거리에는 끊임없이 반정부 시위와 행렬로 교통이 막히고 떠들썩한 군중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며, 디나와 마넥이 사는 세계 너머로 빈민굴에서 살아가는 오물 가득 한 하수구에서 풍기는 악취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도 존재했다.

저자는 한 인물에게도 다층적 심경을 알 수 있게 이야기들을 풀어내며, 감정의 층위가 복합적이어서 많은 관점이 교차하여 바라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두꺼운 책임에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계급을 향한 이들의 시선도 다양하다.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자신의 계급에 따라 사는 것이 당연했던 삼촌 이시바와 달리 조카 옴은 그 계급의 벽을 허물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무두질과 가죽세공을 해야 했던 이시바와 그의 동생 나라얀이 재봉사가 되기 위해 도제에게 보내졌던 어린 시절, 사람들은 감히 카스트의 영원한 사슬을 끊으려고 한다며 천벌을 받을 거라 말했었다. 복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했던 카스트 제도의 분위기 속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아버지 둑희의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자식들이 더 잘 살길 바라는 마음의 결정이었지만, 그 용기도 딱 거기까지만이다.

나방이 등불 유리로 뚫고 들어가려고 연약한 날개를 퍼덕거리는 모습처럼, 높은 계급의 사람들 뒤로 보이지 않는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이 예전과 같지는 않다고 이만해도 많이 좋아졌다며 아버지 둑희는 현재의 삶을 만족할 수 없는 아들을 향해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두려움을 느낀다.

(P. 216) “그런다고 뭐가 바뀔 것 같아? 그래 봐야 넌 몇백 년 된 깊은 우물에 빠진 두레박 꼴이야. 첨벙 소리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을 거라고.”

“존엄이 없는 삶은 가치가 없는 삶입니다.”

가치 있는 삶을 위해, 선거 날 유권자로서 권리를 찾기 위해, 투표용지를 달라는 계급이 낮은 남자를 동네 악당들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균형을 망가트렸다고 카스트의 선을 넘는 것은 가장 엄한 벌로 다스려야 한다며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참혹함으로 응징했다.

조용하게 좌절감을 느끼며 살았어야만 했나.
그러면 목숨은 부지했을까.


이런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시간이 아무리 흘렀어도 자유를 위해, 정의를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편견과 악의 제도에 비폭력으로 맞서 싸우자는 마하트마 간디의 메시지를 듣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계급을 받은 자신들의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빛나는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용기를 내며 맞서는 사람들을 우려하며, 자신이 속한 곳에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지낸 사람들의 선택은 당연히 이해 못 할 이상할 일도 아니다.


서로 거리를 둬야 한다는 디나 아주머니의 말씀에도 마넥은 비슷한 또래인 옴과 친해지고, 서로 연관성 없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아갔다.
모든 사람과 잘 어울리라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온 덕분인지 편견과 차별 없이 옴을 대하는 마넥과 진흙탕 속 거친 어른들 틈바구니에서만 지내다가 마넥과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옴의 모습은 보는 동안 참 흐뭇했다.

그리고 디나는 이시바와 옴에게 철저히 그어 놓았던 경계 끝자락부터 서서히 그 흔적을 지워가며 다가갔다.
식탁을 다 같이 채운 이 네 사람은 멀리서 보면 가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찌그러진 반죽이 완벽한 원을 이루듯이.


이들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언제였을까.

디나는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에게 안겨 꼭 나중에 아버지처럼 의사가 될 거라고 말했던 순간이었을까, 아니면 죽은 남편 리스텀과 달콤한 연애를 즐기며 함께라서 행복했던 그때였을까.

이시바는 동생과 처음으로 배운 재봉 기술로 아빠 둑희의 조끼와 엄마 루파의 촐리를 만들어 그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선물로 안겼던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을까.


책을 다 읽고 나니, 텅 빈 학교에 몰래 들어가 처음으로 만져보는 분필을 석판에 대고 선을 하나, 또 하나 그려보며 킥킥대던 이시바와 동생 나라얀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이마에 브라만 카스트 계급 표시처럼 굵은 선을 만들어보는 것이 그저 신기하고 놀랍고 재밌었을 아이들.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 이렇게도 쉬운지 몰랐었던, 하지만 금지된 세계에서 금방 발각되어 수모를 당했던, 스스로 결정하고 미래를 선택할 기회를 꿈꿔볼 수 없었던, 이 아이들의 맺힌 상처는 누가 치유해 줄 수 있단 말인가.


희망과 절망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삶이란 영혼의 창을 닫을 수밖에 없는 지울 수 없는 운명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저 아득하기만 한 것일 뿐,
포효와 환호로 울부짖으며 승리를 외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연한 마음으로 좌절감을 견디고, 메울 수 없는 구멍을 견뎌야 했을 뿐이다.

어미 새가 물어다 준 먹이를 입 벌려 받아먹는 새끼 새처럼, 세상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참혹한 먹이를 이시바와 옴에게 물어다 주지만 이들은 잘근거리며 씹을 새도 없이 너무나 쉽게 삼켜버리며 살아왔다.

이 책을 더 많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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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어
서보 머그더 지음, 김보국 옮김 / 프시케의숲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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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과 그녀를 둘러싼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차이를 통해 내가 지닌 감정의 틈새를 채우고 있던 편견들을 재확인 할 수 있었다.서정적인 문장으로 채워진 소설의 옷을 입은 철학책과도 같았던 이 책을 통해 자신의 본질 너머 펼쳐진 세계를 들여다봄으로써 타인을 이해하는 마음을 배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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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어
서보 머그더 지음, 김보국 옮김 / 프시케의숲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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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평소에 아이들에게 살가운 편은 아니었던, 한 40대 초반쯤으로 기억되는 국어를 담당했던 여선생님께서, 본 수업에 들어가기 전 에세이 전문 월간지 <좋은 생각>에 수록된 글을 하나씩 꼭 읽어주셨었다.

난 그 시간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평소에 좀처럼 곁을 내어주지 않으셨던 선생님께서, 우리를 싫어하는 게 아닌 것 같은 기분에 안심도 되고, 읽어주시는 글에서 감동하여 아침부터 언니랑 싸우거나 부모님께 혼나서 시무룩해져 있는 어린 마음에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글을 다 읽어주신 후에는 꼭 그 잔상을 느껴보라는 듯 한동안 말씀이 없으시다가 곧바로 수업에 들어가시곤 했다.

타인의 삶을 두루두루 살펴보며 무언가를 깨닫고 뉘우칠 정도로 철이 든 나이는 아니었지만, 선생님께서 읽어주시던 이야기들을 귀담아들으며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 팍팍한 어른들의 고된 삶을 통해 사랑과 우정 그리고 기쁨과 희망을 배워나갔던 것이다.

나는 사람에게 가진 오해를 벗기고, 이해하는 마음이 부족하다 느끼기에 사람 간의 관계와 심리를 다룬 책에 관심이 있다.
그래서 이제는 어느덧, 60대가 되셨을 선생님의 그 시절 음성을 떠올려 보며, 헝가리 작가 서보 머그더라는 여성을 통해 ‘이야기의 힘’을 다시금 얻어보고자 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사는 작가인 ‘나’는 집안일을 돌봐줄 사람을 구하다가 ‘에메렌츠’라는 여성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도 않을뿐더러 일을 봐주는 시간대, 보수 등의 대해서도 자신이 정하는 둥, 독특하면서도 다소 무례하게 보일 수 있을 만큼 모든 면으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내 집에서 잠만 잘 자고 있는데 늦은 밤이든, 새벽이든 와서 일한다니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이 지긋한 이 여성이 일 하나만큼은 흠 잡을 데가 없다.


곁을 좀처럼 내어주지 않는 그녀와도 그런대로 각자의 스타일에 맞춰가며 살아가던 중, 나의 남편이 폐종양에 걸린다.
6시간이라는 긴 시간의 수술을 기다리는 동안, 죽음의 경계에 다다랐을 남편을 향한 걱정과, 공포 때문에 겁에 질린 나를 위해 안심을 시켜주고 싶어하는 마음을 담은 듯, 에메렌츠는 집에 돌아온 나에게 평소와 달리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끓인 포도주 한잔을 건네며, 처음으로 자신의 지난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덤덤하게 말하는 이야기 속에 어린 에메렌츠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새아버지마저 전쟁으로 잃었으며 어머니를 도와 아홉 살 때부터 사람들에게 요리를 해주고 쌍둥이 동생들을 돌봤다.
그저 절망에 빠져있는 아홉 살 소녀였으며, 걱정과 불평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기어코 모든 것들이 우물 안에 물속으로, 매서운 빛이 번쩍이는 번개 속으로, 공기 중의 시커먼 연기 속으로 사라져 주었다. 모두를 잃은 어린 소녀는 하녀를 구하러 내려온 부다페스트 신사분들에게 맡겨진다.


이 책은, 전쟁의 참상을 거치고 그 안에서 선명하게 줄로 그어진 계급사회 속에서 철저히 분리된 채 살아갔던 실로 참혹하기 그지없는 한 여성의 인생을 품고 있으며,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 간의 관계를 통해 타인을 이해하는 마음의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철학적인 메시지를 품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헝가리 왕국은 추축국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전세가 역전되면서 불안정한 위치에 놓이고, 1944년 독일이 헝가리를 점령하면서 헝가리 내에 있던 유대인들이 수용소로 추방되기 시작했다. 시대적 배경이 이러하니, 이 시기에 주인마님으로 모시던 부인에게 받은 그릇으로 만들어 온 닭고기 수프를 받은 나는 에메렌츠에게 혐오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사람들을 태운 열차의 목적지가 가스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나는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들이지 않는 에메렌츠 집 내부에,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들의 보물들이 있을 거라 짐작해본다.
그러나 그 오해도 오래가지는 않는다.

에메렌츠 주변인들이 말해주는 그녀와, ‘나’가 눈으로 보고 겪은 그녀는 때론 비이성적인 성향이 고착된 신경질적인 면이 있긴 해도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서로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곁에 다가갔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무해한 위로를 주고받으며, 유난스럽지 않게 서로의 곁에 머무르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듯이, 말로써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던 두 여성의 우정은 맘 한구석을 일렁이게 했다.

상처입은 사람을 향한 위로의 방식은 서로 달랐지만, 상대를 향한 감정은 빗나가지 않았다.


정해져 있는 형식이라도 있는 듯한 인식의 틀이 때론 내가 품을 수 있는 사유의 범위를 스스로 경계 지을 때가 있다.
그 틀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듯이 나는 그렇게 정형화된 사람으로 만족하며 지내지 않았나 싶다. 그럼에도 빗겨나가는 상황에 당혹스러워 바보같이 뭐가 잘못된 것인지 몰라 또 헤맨다.
실패를 주워담고 정말 잘 해보고 싶기에 시간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기대해본다.


에메렌츠와 그녀를 둘러싼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차이를 통해 그동안 내가 지닌 감정의 틈새를 채우고 있던 편견들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서 자신의 본질 너머 펼쳐진 세계를 들여다봄으로써 ‘나’가 에메렌츠를 이해하듯, 나 역시도 타인을 이해하는 마음을 배워본다. 그리고 역시나 안심하는 순간 나와 이 책 속의 ‘나’는 실수를 하고 상처를 입힌다.

(P. 118) 지금은 알고 있지만, 그때에는 알지 못했다. 애정은 온화하고 규정된 틀에 맞게, 또한 분명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누구를 대신해서도 그 애정의 형태를 내가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어느 날, 에메렌츠와 가장 가까웠던 여성인 ‘폴레트’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서둘러 나는 이 소식을 전하지만 놀라지도 않은 채, 까던 콩을 마저 정리할 뿐인 그녀.
목을 매달고 생을 마감한 그녀의 선택은 부다페스트에서 지긋지긋하게 보았던 총살과 교살의 대상이었던 포로들을 떠올리게 했다.

나를 둘러싼 당연하게만 여긴 행복들과 요리하고 청소를 해주는 도움들, 그리고 누군가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 그동안 ‘다림질하는 여자’인 폴레트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었을까. 다른 사람들이 예배 시간을 갖는 동안 그들의 옷가지를 다림질해야 했기 때문에 교회를 나갈 수 없었던 폴레트.

남의 사정은 생각도 않고 뒤에서는 수군대며 ‘거만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독감으로 모든 것이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삶을, 스스로 마감한 그녀의 선택은 자신이 원한 것일까.
아니면 선택당한 것일까.


에메렌츠는 불특정 적에 대해 모호한 위협을 하는 인물들 중심에 선 사람처럼, 육체의 노동으로 먹고살기 바빴던 노동자 계급으로서 사회가 이들에게 요구했던 것들, 권력을 가진 자들이 계급을 통해 누려온 것들을 끄집어내고, ‘나’는 인민권력의 대표자로서 그녀의 생각을 바꾸게 할 논리가 없기에 가까이에서 멀찍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평등한 공동체적인 삶이라 주장하는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와도 그녀를 이해시킬 수 없었다. 홍조 띤 핏기 있는 얼굴로 살아본 적이 없었을 에메렌츠가 이제 노동이 힘들어질 노파가 되어 평화를 원하는 세상을 믿을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세상을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저 빗자루질하는 사람과 그것을 시키는 사람으로만 나뉘는 고정된 세계관을 갖은 에메렌츠.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처참한 상황 속, 지하실에다가 총에 맞은 독일군 옆에 소련군까지 나란히 숨겨준 것을 보면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을 그녀도 이해한 채, 단지 공포에 질려 땀으로 범벅되어 있는 비참한 몰골의 사람들을 구원했을 뿐이다.

(P. 162) 이 노파에게는 최소한 국가의식이 아니라 그 어떤 종류의 의식도 없으며, 번득이는 머리가 빛나기는 하지만 희미한 증기 아래에서 그럴 뿐이었다. 그 모든 것에 대한 극심한 갈증과 그 많은 능력은 무위에 그칠 뿐.


이 책은 서정적인 문장에서 느낄 수 있는 서보 머그더의 따뜻한 감성이 담긴 소설의 옷을 입은 철학책과도 같았다.
그래서인지 밝고 화사함은 없지만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은, 왠지 따뜻함이 느껴지는 이 책의 표지 색상이 더욱 와 닿고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 간의 관계를 담은 책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을 벗어나, 한 장 한 장 가볍게 넘기기 어려울 만큼 마음을 무겁게 했다.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시절.
자신들의 필요로 손을 뻗었다가 거두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만나봤을 에메렌츠는 아마 사람에게 더 이상의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을 택하고, 문을 굳게 닫아버린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한 사건이 벌어지고 나는 에메렌츠에게 오랜 시간 아슬아슬하게 혼자만의 세계에서 이어붙여 오고 있던 것들을 원치 않는 난도질과 끌어당김으로 무너지게 했고 좌절감을 안겼다.
20년의 세월 동안 함께 해 준 그녀를 향한 ‘죄의식’을 가진 채, 시간이 흘러 나는 삶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때론 엄마이자 친구이자 영혼을 나눈 동반자였던 이제는 세상을 떠나버린 에메렌츠의 삶과 끝자락을 가늠해본다.


가슴에 옹이가 박힌 채 살아가면서도 오고 갈 데 없는 강아지와 고양이를 향해, 그리고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해 따뜻한 마음을 건네며 살았던 에메렌츠를 떠올리며 위로하듯이,
당신의 마음을 분명히 그녀도 알고 있을 테니, 조금은 편안해지면 좋겠다고 위로를 하며 ‘나’에게 끓인 포도주 한잔을 건네고 싶은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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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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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물결이 치는 잔상까지도 담아낼 만큼 여백없이 꽉 채운 이들의 서사는 혼란과 불편함을 주기도 했지만, 지나칠만큼 불완전했던 감정과 상황에서 공존했던 진솔함과 처참함으로, 헛헛하면서도 안타까웠고 한 인간을 향한 연민을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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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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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읽을 때, 감정이입을 좀 많이 하는 편이다.
책을 읽고 평가를 해야 하는 예리한 눈이 필요하지 않은, 그저 오롯이 독서를 즐기는 눈만이 필요한 사람이기에 책들을 하나씩 꺼내 읽는 그 자체만으로도 온갖 감정을 느낄 수 있어 즐겁고 행복하고 슬프고 아프다.

그런 내가 이번에는 감정이입을 덜 하려고 애썼다.
그 이유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호감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와 다른 사람들의 선택이나 감정들을 그들의 입장에 서서 바라보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책을 읽는 흥미를 잃게 될 것 같았다.

그랬던 내가 마지막 장까지 읽고 이 책을 덮는 순간엔, 가슴 속 깊은 곳부터 아려오듯 올라오는 연민 섞인 울음을 끌어내려야만 했다.


본업은 곡을 쓰고 생업으로 플루트 레슨을 하는 준연.
마흔이 넘어 결혼문제로 어머니와 다툰 후 안 해본 걸, 생각조차 안 했던 걸 해보고 싶어 레슨 광고를 보고 준연을 찾아간 해원.

이제는 도전도, 사랑도 내 맘처럼 쉽지가 않고, 열정이란 것도 예전만큼 뜨겁지 않은,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내 앞에 놓인 선택의 순간들도 지나간 경험들에 빗대어 보며 더 나은 방향, 안전한 방향을 구분하고 조언도 할 수 있는 안목을 갖은 마흔을 넘긴 두 남자의 만남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그리고 이 두 남자 사이에 등장하는 준연의 오랜 친구이자 음악을 관두고 위스키 만드는 일을 하는 여자 하진.


해원은 특히 사랑 앞에 더욱 조심스럽다.
괜히 내색했다가 차게 식는 상대방의 표정 보면서 쪽팔리는 것도 싫고, 앞만 보고 자신의 감정만을 폭발시키며 상대에게 달려가기엔 ‘사랑’이라는 것조차가 이제는 그에게 우선순위에 있는 것도 아닌 듯싶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사랑에는 어차피 시작도 있지만 다 끝이 나게 되어있어라고 단언하는 듯한 해원의 태도는, 어린 시절의 부모에게 얻은 상처와 충만하지 못했던 사랑의 부재가 서로 겹겹이 쌓여 그의 마음들이 퍼석하여진 것임을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그런 그에게 ‘하진’만큼은 달랐다.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 것이다.

해원이 처음 준연을 만났을 때를 떠올려보면, 첫 만남에도 이렇게나 진심일 수가 있나 싶을 만큼 매우 진지했다.
오래되지 않은 사이임에도 어머니 병원비로 준연에게 천만 원을 건네는 해원의 행동에 나는 흠칫 놀랐다. 물론 책에서 묘사되는 준연이가 해원과 마찬가지로 침착하고 가벼워 보이지 않는 우직함을 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쉽게 큰돈을 줄 만큼 서로의 대해 잘 안다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좋았나 보다.
서로의 엇비슷한 면을 발견하는 대화 속에서 진심의 우정을 자아낼 만큼 두 사람에게 짧은 시간의 만남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사람을 향한 외로움도 있었을 것 같다.


서울시 내에 신축아파트가 자신의 명의로 되어있고, 아버지는 건설회사 대표이고, 뉴스에 상장 대박으로 자주 나왔던 그 회사에서 주가와 재무관리 일을 하는 해원은 풍족한 삶을 살아온 반면, 어머니를 향한 아버지의 폭행이라는 지우지 못할 고통과, 그럼에도 아버지 손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해하지 못할 어머니를 향한 증오가 있는 사람이었다.

하진은 위스키 만드는 일에 매우 열정적인 여성이다.
사랑의 표현을 ‘돈’으로 해결하는 듯한 해원과는 다른 사람이다.
서로 자신과 다른 모습에 끌렸는지 이 둘은 첫 만남부터 호감을 느끼고 사귀게 되었지만, 왠지 어딘가 모르게 해원과 준연 사이 그 중간 어디쯤에서 머무는 듯한 하진.

가난해서 가난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사랑이라는 것을 시작도 하기전에 단념해야만 했던, 해원의 여자친구이기 전에 자신과 오랜 친구 사이였던 하진의 주변을 떠나지 않는, 경제적으로 우월한 해원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 준연.


기대가 결과가 될 때까지 그걸 하는 사람인 해원을 향해 하진이를 잘 부탁한다는 준연의 말이 왠지 신경이 쓰인다.
내 곁에 있는 정말 좋은 사람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진심의 마음이 우러나왔던 그 말에서 쓸쓸함도 보이지만 무언가를 우려하는 사람처럼 불안감을 주기도 했다.


나는 주식에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지만, 굳이 빗대어 표현하자면, 이 책을 향한 내 마음이 주식시장의 변동성만큼이나 불확실함으로 오르락내리락 하여 다소 불안정하게 읽어나가야만 했다. 예측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공감하고 싶지 않을 만큼 내겐 이 사람들이 다 별로였다. 그렇기에 등장인물들에게 생긴 거리감을 쉽게 좁히진 못했다. 달리 말하면 저자가 심리묘사를 매우 섬세하게 잘했다.

시간이 필요했다.

서서히 중후반을 지나 이들이 만들어 낸 서사들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며 그 안에서 발견한 자신의 사랑,기쁨, 절망, 고독함 등 어느 것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든 감정을 쉼 없이 쏟아내는 이들의 모습에서, 곳곳에 공감의 구역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전달된 나의 감정 낙차 때문에 더 선명하게 느낀걸 지도 모르겠다.


항상 위축돼 있었던 유학시절을 보냈던 하진은 그 시절이 그녀를 강인하게 만들었다. 한 사람 몫을 하니까 받을 수 있었던 존중과 대우. 경험해 본 사람들은 모를 수가 없다고 말하는 그녀의 말에 해원도, 나도 끄덕여 본다. 해원은 자신에게 의지하길 바랐지만 그러지 않았던 하진에게 서운하고 불안감을 느낀다.
하지만 쉽지 않았던 유학시절들이 그녀를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걸 다 이해하기엔 그들의 시작점이 달랐다. 살아온 삶이.


어딘가 마음 한구석에 모서리가 있는 준연, 해원, 하진 이 세 명의 삶 속에 들어있는 감정들이 이제 막 피운 꽃봉오리처럼 싱그럽지는 않다. 그것은 살아가게 해주는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얻은 단단함이자 뭘 요구하지 않는, 기대하지 않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이 어렵고 의지도 어렵고 기대하는 마음은 두렵고.

하지만,
그럼에도 진짜 사랑을 찾고 싶은 게 사람이다.

(P. 282) 우리는 자기 얘기에 눈물을 흘릴 줄 모르기 때문에, 대신 눈물 흘려 줄 사람이 필요한지도 몰랐다.


나는 책에 흠집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읽는 편인데, 이 책은 조금은 따뜻한 색의 색연필로 밑줄도 좀 그려주고 싶고, 와 닿는 문장에 예쁜 색의 인덱스도 붙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온기를 주고 싶은 마음이었나 보다.

벽돌같은 책이 품고 있는 이 살벌하게 길고도 긴 글들은 공감이 돼서 짜증이 나고, 시리기도 하고, 헛헛하기도 했다.
이들이 드러내지 않았던 외로움을 모른 척할 수 없을 만큼 나도 이제 서서히 알아가는 나이라서 그런지 읽을수록 마음이 쓰리다. 그리고 점점 가열되어가는 이들의 관계에서 오는 혼란의 감정이 더욱 더 불편해져만 간다.


도태되지 않기 위해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떠밀림에 그대로 떨어져도 봤었고 다시 나 자신을 끌어오려도 봤었던, 그렇기에 매일매일 마음조차 바빴던 나와, 모든 사람이 자신의 가슴속에 얼기설기 얽혀있는 감정들을 이 책에서 발견하는 순간만큼은 공감의 쓴웃음 한번 지어보지 않았을까 싶다.

이 공감에 가닿을 때까지 고단함도 물론 있었지만 그렇기에 준연, 해원, 하진의 감정들이 더 선명하고 강력하게 다가왔다.
아직은 정돈되지 않은 내 마음속에 말이다.


열정을 넘어 집착으로 이어지는 욕망의 감정이 고통을 줬어도 어쩌면 그렇기에 내가 서서히 이 책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걸 지도 모르겠다.

읽는동안 속이 타들어 가서 술이라도 한잔 넘기면서 미간에 주름 세우고 인상 좀 쓰고 싶어졌다. 피우지 않는 담배 일지언정 크게 들이마시고 연기를 한숨 삼아 푸~~~우 하고 복잡한 감정들을 다 내뱉고 싶은 심정도 들었다. ‘님아 그 강을 건너가지 마오’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여러 번 들락날락했다. 감정 폭력을 당한 기분이 들어서 중간마다 고비도 있었다.


(P. 499) 인생이란 희극도 비극도 아니고 촌극이라는 걸. 짤막짤막한, 아무 의미도 깊이도 없고 그저 지푸라기 잡듯 지폐를 붙잡아 보려 서로 밀치고 깨물고 할퀴고 때리는, 도대체 왜들 그렇게 천박하고 구질구질하게 사느냐는 말밖에 안 나오는 촌극.

이득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하는 게 인간이라고 말하는, 한 때는 경멸의 대상이었던, 그리고 돈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대물림해준 아버지와 지옥이라 여기던 집에서 끔찍이 싫어한 서재에 나란히 앉아 위스키를 마시며 돈이 주는 쾌락을 말하고, 도망치지 말고 도망치게 하라는 말을 들으며 해원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가 하는 말을 자르지 않고 중간에 나오지도 않은 걸 보면, 이해하고 있던 중일까? 또 다른 힘을 얻는 중이었을까? 그 돈이 주는 권력이 옳았음을 인정하고 있었을까?


해원은 페달을 밟았다. 짓밟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장 증오했던 아버지에게 먼저 손을 내밀게 할 만큼, 사랑했던 하진 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짓밟고 뭉개버리고 연기로 날려버리고 나면 자신이 꿈꾸던 장면처럼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 날이 분명 올 것이라 믿었다.
자신에게 의지할 수 있도록 그녀의 모든 걸 앗아간 이후에 말이다. 이것이 해원에게는 희열이고 사랑이었다.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봤던 준연은 더는 친구가 아니라 걸림돌일 뿐이었다. 그런 준연에게 손길을 건네는 하진을 바라보는 일이 해원을 미치게 하였다. 사랑하니까 존중하고 싶지만, 사랑하기에 그녀 곁에서 준연이 떨어져 나가줬으면 좋겠다.

(P. 515) 이 사랑은 운명 같은 것이 아니었다. 운명 그 자체였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열어젖힌, 내가 시작했고 내가 완성하려는 사랑.


작은 물결이 치는 잔상까지도 담아낼 만큼 여백 없이 꽉 채운 이들의 서사는 혼란과 불편함을 주기도 했지만, 지나칠 만큼 불완전했던 감정과 상황에서 공존했던 진솔함과 처참함으로, 헛헛하면서도 안타까웠고 한 인간을 향한 연민을 느끼게 했다.

단순한 집착이 광기에 옷을 입고 통제할 수 없는 소유욕으로 분별력을 잃게 하고 책임질 수 없는 상황까지 만들어냈다.
한 여자를 향한 남자의 욕망이 결국 산산 조각나는 자신을 마주하게 하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부자 아버지 밑에서 풍족함으로 과잉된 삶을 살아왔던 해원에게 없던 것은 사랑 하나였다. 이런 사랑이 결여 된 사람이 운명처럼 사랑을 느낀 한 여자를 향한 집착은 인간이기에 그 사랑을 갈구했던 것이며, 또 인간이기에 죄의식을 느끼게 했다.

암초에 부딪혀 좌초되는 배처럼, 서서히 무너져가는 해원의 내밀한 감정에서 그의 선택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이제 해원은 더는 피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했다.
헤어짐을, 죽음을.

(P. 586) 모든 것이 다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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