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은 오빠는 나를 번쩍 들어올려 짐칸에 앉혔다. 그러고는 안장에 엉덩이를 붙이지도 않고 힘주어 페달을 밟았다. 리듬을 타고 오른쪽 왼쪽, 올라갔다 내려가는 오빠의 등에 뺨을 붙이고 있노라면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이렇듯 경쾌하고 신날 것 같았다.
큰집 마당에 홀로 서서 나는 예감했다. 오빠와 나의 시간들이 끝났다는 것을.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이상하게 미안하고 무참했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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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짓가랑이에 붙은 먼지 한톨조차 인간의 시원이라 중히 여겨 함부로 털어내지 않았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마침내 그 시원으로 돌아갔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참으로 아버지답게. 마지막까지 유머러스하게. 물론 본인은 전봇대에 머리를 박는 그 순간에도 전봇대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민중의 한걸음, 한걸음이 쌓여 인류의 역사를 바꾼다는 진지한 마음으로 아버지는 진지하게 한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다만 거기, 전봇대가 서 있었을 뿐이다. 무심하게, 하필이면 거기. 이런젠장. - P16

자줏빛 들국화 몇송이가 아버지 겨드랑이 부근에서 수줍게 고개를 까닥인 때도 있었다. 먹지도 못할 맹감이나 들국화를 꺾을 때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인 아버지도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바위처럼 굳건한 마음 한가닥이 말랑말랑 녹아들어 오래전의 풋사랑 같은 것이 흘러넘쳤을지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아버지 숨이 끊기고 처음으로 핑 눈물이 돌았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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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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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된 마음의 공감을 통한 치유의 시간속에서 뒤두었던 초라한 그 시절의 나를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해 홑으로 시간을 흘려버린 우매한 내가 이 책을 통해 다시금 확인한 내 삶의 본질은 역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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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간절한 마음이 전부였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건만 이제는 서로를 비추는 두 개의 거울처럼, 서로의, 서로에 대한 기억들만이 원망의 목소리도 흐느낌도 한숨 소리도, 웃음소리도 없이 순수한 묵음으로 남아있을 뿐이니. - P173

거기에는 그저 어둠뿐이었어. 세상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그저 캄캄한 밤바다. 그런데 가만히 바라보노라니까 그 어둠 속에도 수평선이 있어서 어둠과 어둠이 그 수평선을 가운데 두고 서로 뒤섞이는 거였어.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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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인생도 바꿀 수 있지 않겠어? 누가 도와주는 게 아니야. 이걸 다 우리가 할 수 있어. 우리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어. 그게 나의 믿음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찾아와. 그것도 자주. 모든 믿음이 시들해지는 순간이 있어. 인간에 대한 신뢰도 접어두고 싶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때가. 그럴때가 바로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 - P121

그가 늘 믿어온 대로 인생의 지혜가 아이러니의 형식으로만 말해질 수 있다면, 상실이란 잃어버림을 얻는 일이었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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