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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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년에게 처음 눈길이 멈췄던 것이 어느 날, 어느 때였는지를 나는 지금도 기억할 수 있다”

나의 열여섯 살 때의 모습을 떠올려보니, 누구나가 거쳐가는 과정을 예외 없이 거치면서 손발이 오글거리고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것들이 많았던 것 같다. 특히, 그때는 가족보다 친구가 좋았기에 유독 눈길이 가는 친구와 베프가 되었을 때의 기쁨이란 실로 대기권을 뚫고도 남았다. 그리고 왠지 느낌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저 친구랑 베프가 될 것만 같은 근거 없는 믿음이 주는 확신 같은 거.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열여섯 살 소년들이 이런 찰떡같은 예감을 상기시켜줘서 옛 감성에 너무 젖은 것인지, 그때의 순수함을 찾을 수 없는 타성에 젖은 직장인의 모습을 한 내 모습이 되려 이질감이 들고 영 기분이 그저 그렇다. (흐윽)

1932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사는 짤막하고 투박하며 잉크 물이 든 손을 가진 유대인 소년 ‘한스 슈바르츠’는 같은 반에 전학 온, 희고 티끌 한 점 없는 깨끗한 손을 가진 독일 귀족 소년 ‘콘라딘 폰 호엔펠스’에게 호감을 갖는다. 그리고 슈바르츠도 나처럼 찰떡같은 예감이 들기 시작한다. 감히 손을 내밀기도 어렵기만 한 호엔펠스와 친구가 될 것 같은 예감 말이다. 이미 잘생기고 매력적인 전학생 주변을 하이에나처럼 에워싸는 녀석들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결국 그 녀석들을 제치고 호엔펠스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위대한 시인이 되고 싶었던 슈바르츠가 마침내 친구 이상형에 딱 걸맞은 호엔펠스와 친구가 되었다는 이 설렘과 벅찬 기쁨이 어땠을지는 전하려 애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저 온 천지가 봄이었으니 말이다.

친구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소년이었던 슈바르츠에게 호엔펠스는 ‘희망’이었을 것 같고, 새로운 마음으로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꿈꾸며 ‘행복’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던 것이 아닐까? 그의 진심이 묻어나는 글에서 호엔펠스와의 우정이 슈바르츠의 삶에서 얼마나 귀중했는지를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마음가짐을 얻게 할 만큼 빛나고 소중한 우정이라니... 삶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이라 여기며 행복해하는 모습과 함께 이들이 사는 곳의 아름다움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는 묘사가 이 모든 것을 조금도 훼손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만 가득 차게 만들었다.

나무와 월계수 덤불 사이로 몇 킬로미터씩 뻗어 나간 숲들을, 그리고 절벽이며 성채들, 미루나무들, 포도밭과 오래된 도시들 사이를 유유히 흘러 하이텔베르크와 라인 강을 거쳐 북해로 빠져나가는 네카어 강을 볼 수 있었다. 밤이 내리면 경치는 피렌체의 피에솔레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수천 개의 불빛들, 재스민과 라일략 향기가 실린 따뜻하고 상쾌한 바람, 사방에서 들려오는, 너무 많은 음식으로 졸려 하거나 너무 많은 술로 정열에 취해 만족스러워 하는 시민들의 이야기 소리와 노랫소리와 웃음소리로 마법에 홀린 듯했다. (p. 77)

갖가지 꽃과 나무의 색을 느끼며 사는 인생의 행복이 얼마나 평온하면서도 마음을 부자로 만들어주는지를 알려준다. 저자가 화가로서의 경력을 갖고 있어서인지 자연에 대한 묘사에서 풍경을 스케치하고 색을 입히며, 물감에 없는 색은 두 소년이 보여주는 우정의 반짝임으로 칠하여 완성하듯이 낭만적으로 표현해준다. 그래서인지 평온한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여유를 만끽하는 이 봄이 더 오래 지속되길 바라게 만든다.

얼마 전, 필리아님이 올려주신 <횔덜린의 광기> 리뷰를 감명 깊게 읽었는데, 특히 ‘거주하는 삶’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오래 머물렀다. 그런 이유로 ‘프리드리히 횔덜린’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마침 슈바르츠와 호엔펠스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 횔덜린이라고 한다. 그가 정신 착란에 시달리며 36년 동안 은둔하며 지냈던 튀빙겐에 있는 탑을 내려다보며 두 소년이 횔덜린의 시 「반평생」을 낭송하는 장면에서, 어떤 마음을 품고 시를 낭송했을지 상상해보니 왠지 가슴 한 켠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적어본다.


노란 배들이 매달리고
들장미 가득 심긴
땅이 호수에 비치니.
너희 고귀한 백조들은
키스로 물을 마시며
신성하고 냉철한 물 속에
네 머리를 담그누나.

아아, 나는 어디에서 이 겨울에
꽃들을 찾을 수 있을 거나
또 햇빛과 지상의 그림자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거나.
깃발들이 덜컹거리는
바람 속에서 벽들은
말 없이 차갑게 서 있는데.


시를 통해 내가 느낀 감정선이 슈바르츠와 호엔펠스에게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서야 그토록 원하던 친구와 우정을 쌓기 시작하면서 느끼는 행복감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싶었던 유대인 소년 슈바르츠가 이상과 현실을 고뇌하는 마음, 그리고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할 만한 환경에서 살아온 귀족 소년 호엔펠스가 맞닥뜨리게 될 현실이 그려지는 듯했기 때문이다.

여러 경험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성장해 나가야 할 청소년기에는 흔들림이 없을 거라 스스로 장담하며 고집스럽게 내세운 신념조차 흔들리고 무너지는 반복이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더욱이 광기와 분노로 가득 찬 세상에서는 어른들조차 혼란의 연속이 아닌가. 시내와 학교에서 나치즘의 상징 하켄크로이츠를 쉽게 볼 수 있게 되었고, 유대인을 향한 모욕과 경멸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슈바르츠와 호엔펠스 각자가 가진 신념이 충돌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들의 순수한 우정을 바라보며 안도감을 갖지 못하고 안타까움과 불안함을 가진 채 읽어내려가야만 했다.

두 소년의 심리가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분명했지만, 서문과 추천사에 쏟아진 찬사만큼의 감정까지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순수하고 단순한 시선으로 그 시대를 바라보고 서로의 관심사에 더 흥미를 느끼며 우정을 쌓아갔던 초반부의 이야기들이 아름다웠고 좋았다. 그래서 슈바르츠와 호엔펠스가 사랑하는 횔덜린의 시를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고, 그런 이유로 <횔덜린의 광기>와 함께 읻다 출판사의 횔덜린 시선집 <생의 절반>을 주문했다. 시집은 서너 권 정도 읽어본 게 전부인 나의 해석 수준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진입 장벽이 높게만 느껴져 감히 시선을 두지 못했는데,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궁금한 마음에 처음으로 진지하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내겐 특별한 사건(?)이 아닐 수 없게 되었다.

빛바랜 종이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책장을 넘기는 동안, 독일의 경제 회복을 위해 유대인의 재산을 강탈하고 수단으로써 이용하며 더 많은 희생양을 원했던 히틀러와 나치의 잔인함을 정면으로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무엇을 앗아갔는지를 확인시켜주고 인간다움을 아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운 이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저자는 조화로운 삶을 위해 ‘가치 있는 삶’에 뜻을 두고 그 마음을 담아 이 책의 결말을 정한 것이 아닐까?라는 혼자만의 짧은 생각을 해보았다. 계절과 함께 흘러가고 변화되는 주어진 삶, 그저 처한 운명에 따라 어떻게든 살아가면서도 인간이 잃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는 나 자신을 실패자로 본다. 그것이 정말로 문제가 되어서가 아니다. 영원의 상 아래에서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다 실패자들이니까. (p.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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