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에덴 2 - 추앙으로 시작된 사랑의 붕괴
잭 런던 지음, 오수연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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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의 방향은 어디를 가리키고 있을까.

노동자 마틴 에덴은 우연히 만난 상류층 여성 루스와 사랑에 빠져 그녀와 어울릴 만한 나 자신을 만들기 위해 축적된 습성을 버리고 허기를 채우듯 지식을 쌓아갔다. 새로운 세계에 금방 눈을 뜬 사람처럼 발견하는 기쁨과 흥분으로 들뜬 그의 열정은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자극이 될 만큼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지만, 너머의 삶에 가닿기 위한 매 순간 쉬지 않는 노력이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기 때문이다.

사유의 세계에서 감행하는 모험보다 더 위대한 것이 사랑의 모험이었다. 세계가 그토록 경이로운 것은 거스를 수 없는 힘에 떠밀려 그것을 구성하는 원자와 분자들 때문이 아니었다. 루스가 그 안에 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가 이제껏 알고, 꿈꾸고, 상상한 것 중에 가장 경이로운 존재였다. (1권 p.137)

그녀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싶었던 열망이 원동력이 되어 묵은 더께를 털어내듯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배움의 노력이 내면을 들여다보고 삶의 본질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지독하게 가난한 삶에서 치열하게만 살았던 마틴이 드디어 그토록 염원하던 상류 사회의 사람들과 지적인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게 된다. 그들은 노동계급 사람들과 사는 동네와 먹는 음식의 차이만 다를 뿐 아니라 분명, 그가 찾고자 하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막연한 기대와 상상이었을까.

동경의 눈빛으로 우러러보던 사람들의 말은 무거운 삶의 짐을 지탱해 줄 바닥짐 하나 없이 몸으로 부딪치며 자신에게 묻은 흙은 스스로 털어버리며 살아온 마틴에게, 아무런 감명을 주지 못했다. 그저 자기 과시로만 가득한 현학적 허세였다. 멀리서 보면 격조는 높아 보이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삶에서 길어 올린 통찰이 아니라 자기 것으로 흡수하지 못한 남의 말만 복제한 알맹이 없는 말들이었다.

자기가 속한 계급의 모든 이들, 그리고 루스의 계급에 있는 이들은 작게 한정된 공식에 따라 작게 한정된 삶을 살아가는 군집적인 존재들이었다. 끼리끼리 모여서 다른 사람의 의견대로 틀에 박힌 삶을 살면서, 그들이 종속된 그 유치한 공식 때문에 개인이 되지 못하고 삶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했다. (p. 63)


마틴과 루스의 사랑, 이것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첫 만남에서 느꼈던 뜨거운 열정, 설렘, 욕망 등의 감정이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마틴은 자신을 향한 루스의 사랑보다는 창조적 자아의 힘이 그의 가슴을 더 뜨겁게 만들었다. 루스 또한 사랑으로 인해 감수해야 하는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는 양가적인 감정에 홀로 고뇌하고 있었다.

지극히 생계와 연관된 현실적인 문제를 말하는 루스의 입장에서는 마틴이 다소 낙관적 편향에 빠진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명석한 두뇌는 분명 천부적인 재능으로 보이긴 하지만, 희망 가득한 계획처럼 모든 게 척척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두 손을 꼭 붙잡고 행복과 성공을 추상적으로 그려보는 것도 나쁠 건 없지만, 루스에게는 당장에 ‘결혼’이라는 목표를 단단하게 받쳐 줄 안전한 길이 중요하다.

마틴과 루스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할 때마다 허탈감이 들었다. 상반되는 입장 표출에 체념하는 기운만 느껴질 뿐이었고, 직접적인 상처만 최대한 피하는 듯한 배려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사랑의 속삭임은 오히려 고단하게만 다가올 뿐이었다.

“나는 자기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자기 부모님의 적개심이 두렵지 않아. 세상 모든 것이 길을 잃고 헤맬지라도, 사랑만은 그렇지 않아. 가다가 나약해져서 맥없이 머뭇대지 않는 한, 사랑은 잘못 갈 수가 없어.” (p. 78)

정말 그럴까. 믿음만 존재한다면 가능한 게 사랑일까?
너무나도 다른 삶에 길든 상태에서 만난 이 두 사람이 과연 짓눌리는 현실의 무게를 ‘함께’ 견딜 수 있을까?
루스의 조언에 늘 따라오는 마틴의 확대 해석은 이따금 숨이 턱턱 막혔다. 지나친 자기 확신이 자만심으로 경계에 이르렀다는 것은 굶주림과 궁핍이 진작에 알려주고 있음에도 말이다.

나는 속 좁은 사람들의 관습적인 도덕을 비웃는 사람입니다. (p. 90)

그럼에도 마틴이 루스를 만나게 된 순간은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던 것 같다. 그는 지긋지긋한 가난한 노동자 계급에서 올려다본 우아하고 고상한 루스와 그녀가 속한 상류 사회를 동경했다. 그녀의 후광이 자신의 결핍을 채워주기를 바라진 않았지만, 그 삶에 가닿기 위해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었고, 결국 그가 가진 글쓰기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 것만큼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순간과 내 삶의 진실을 알게 해주는 순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 아니며, 살아가는 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세상은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날마다 그 아름다움에 대한 해부가 자행되었다. (p. 174)

당장에 주린 배를 채울 걱정뿐이었던 지옥 같은 삶, 내일 눈 뜨는 것조차 고문이라는 생각에 잠들고 싶지 않은 그 순간조차도 고된 노동으로 저절로 눈이 감겨버리는 삶의 반복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삭제되었던 마틴의 인생에 루스와의 만남은 ‘인생의 종’이 울린 순간이라 생각된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집요함을 끌어올리고, 실패에 좌절하는 대신 자신을 위로할 줄도 알았으니 말이다.

마틴이 지식을 채우고 흡수하는 것에 온 에너지를 쏟는 모습은 긍정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지만, 자신의 믿음과 사상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의심하고 밀어내는 태도는 갑갑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안정감 없는 삶 속에서 그동안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채 불안하게 살아오다가 뒤늦게 발견한 것들을 하나하나 삶의 진리로서 단정 짓는 것이 어찌 보면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닌 것 같다.

그런데도 그에게 조심스레 말해주고 싶다.
이론상의 진실과 현실은 늘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모순을 조금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겠느냐고.
마틴처럼 치열하고 맹렬하게 삶을 살아야 할 필요성을 덜 느낀 채, 세상과 사람의 이중성에서 느껴지는 환멸감 따위는 이젠 익숙하게 느껴질 만큼 타성에 젖어가며 평온함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것뿐이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향해 온 힘을 쏟으며 달려가는 동안에는 미처 알지 못하는 것, 그건 막상 내 손에 쥐어지고 나면 내 주변을 채우고 있는 것이 생각처럼 대단히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아마도 어디에도 진리는 없고, 진리에도 진리는 없을 것이다. 진리라는 건 아예 없을 것이다. (p. 236)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절망 속에서 자신을 건져 올린다는 것에 관한 생각을 가장 많이 했던 것 같다. 삶의 방향을 잃었던 시절의 내 마음 한구석을 늘 채우고 있었던 공허함과 다시 마주하는 것이 아리기도 했지만, 나만이 눈치챌 수 있는 현재의 변화에 조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마틴의 삶을 들여다보니,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아니, 현실을 왜곡시키면서까지 소유하려고 했던 것이 나에게 아무런 가치를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라는 걸 예상하지 못해 다시 극복하려고 애썼던 내 과거의 모습이 떠올려진다.

그 무엇도 나를 채워줄 수 없다는 생각에 도무지 앞날이 보이지 않고, 보고 싶지 않은 격앙된 감정으로 내 몸이 바닥에 미세하게 보이는 틈 사이로 아예 녹아 들어가 없어져 버리면 좋겠다 싶을 만큼의 무너짐에도 어느새, 바깥 공기와 차단해 버린 블라인드를 뚫고 들어오는 햇살이 그럭저럭 괜찮게 느껴지고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다시 밖으로 나가 걸으면서 온 세상을 채우고 있는 움직임과 소리에 ‘이런 삶도 괜찮아.’라고 받아들이기까지의 고난과 내가 선택한 적당한 아름다움을 보았던 그날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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