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7
글로리아 네일러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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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 전 흙냄새와 메마른 열기로 가득 찼던 8월의 어느 날.
숲에서 느껴지는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에도 더운 열기로 달궈진 흑인 남녀의 몸을 차마 식혀주진 못했다.
오후의 태양처럼 빛나던 풋풋하고 앙큼함을 품은 설레임으로 가득 찬 그 시절속에 흑인 남성 ‘부치’와의 기억을 떠올려 보는 어느새 중년이 되버린 한 여성.

과실치사 사건의 가해자가 된 아들의 보석금을 마련하기 위해 빚을 내고, 살던 집에서 나와 과거에 살았던 곳으로 이사를 온 ‘매티’가 그 때의 향을 맡으며, 마음 속에 묻혀 두었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그녀가 서 있는 이 곳은 도시의 자유로움을 좇아 하나 둘 떠나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기차가 달리고, 버스가 밟는 땅 위에서 세월과 함께 늙어가는 곳이었다.


비 온 뒤 진득해진 땅을 밟고 뛰어 다니는 아이들, 그리고 서로 엉겨붙어 치열하게 사는 어른들. 뿌옇게 김이 올라오는 냄비에서 끓고 있는 훈제 돼지고기 냄새와 날리는 먼지까지 보이는 것 같은 세밀한 문장들이 이 책에 금세 빠져들게 만들었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곳의 시절과 풍경과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그 시절의 향에 너무 취한 것일까. 곧이어 모든 것이 산산조각을 내며 절망감으로 무너지게 만드는 일이 생기고야 만다.


이 책은 1960년대 흑인 인권운동이 시작된 직후의 미국 북부 도시의 빈민가 ‘브루스터플레이스’를 배경으로, 그곳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동성애 혐오, 사회적 격차들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7명의 흑인 여성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전개하여, 그 특징답게 서로가 연결되어 저마다의 사연과 생각들을 들여다봄으로써 여러 관점을 동시에 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뱃속에 아기를 품고 미혼모의 삶을 택해 집을 나와야만 했던 ‘매티’는 이제 중년 여성이 되어, 살아온 인생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위태로운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에게 모진 삶을 지탱하는 힘을 불어 넣어주며 살고 있다.

그 안에는 모성애가 강력하게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남성들에게 얻지 못한 삶의 희망을 기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구축해 나가려는 진취적인 삶의 용기도 필요했을 것이다.


고난이란, 절망만 주는 게 아니라 용기도 주는 것인지 모두들 각자의 방식대로 맞서서 살아가고 있었다. 풍족하지 못한 생활 뒤에 따라오는 역경 속에서도 순간의 평안을 주는 ‘종교’가 있었으며, 등을 두드려주는 ‘자매들’이 있었으며, 자신의 헛된 욕망 앞에 질척거리는 대신 체념이란 빠른 선택으로 지켰던 ‘자존심’이 있었다.

북쪽 끝에서 불어오는 자유를 실은 바람에도 낡은 아파트에 사는 그녀들이 잃지 않았던 것은 서로를 향한 손길과 마음이었다.

과거에 집을 나와 추운 겨울 날, 오고갈데 없는 ‘매티’와 자신의 품에 안긴 어린 아기를 따뜻한 보금자리 속으로 품어준 ‘이바 할머니’처럼 ‘매티’가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성들에게 보여준 이타심이 참 따뜻했다. 그 어떤 지위와 환경의 반짝임보다도 멋있고 대단하고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다. 모진 세월과 자신의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 있었음에도 굳건하게 그들을 끌어안는 인간 본성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만든 인물이다.

특히, 아기를 잃고 영혼마저 죽어버린 듯 상실과 슬픔에 힘들어하는 여성 ‘시엘’을 위해 그녀의 어머니 대신, 그녀를 버리고 간 남편 대신, 상처의 고름을 씻겨 내듯이 목욕을 시켜주고, 그녀가 고통의 신음을 내며 눈물을 흘릴 수 있도록 , 그 슬픔을 밖으로 쏟아낼 수 있도록 곁에 있어주는 모습에서는 참으려고 해도 목이 뻐근하고 아파오는 통증을 느끼며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중산층의 자녀로써 풍족한 삶을 버리고 빈민층 거주지역 브루스터로 이사를 온 여성 ‘키스와나 브라운’은 흑인 인권운동에 열심인 혁명적인 여성이다. 허름한 이 아파트와 사람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역할을 하는 그녀는, 현실적 조언을 하는 엄마와의 갈등에도 팽팽하게 맞선다. 물론, 딸을 사랑하는 만큼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기에 현실 모녀(?)의 불꽃튀는 대화는 힘들이지 않고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다양한 삶의 고통과 아픔의 경험을 가진 이들에게 자신의 삶의 일부분으로 조금씩 차지했을 그들의 우정.
이렇게 서로 버팀목이 되어 지낼 수 있었던 그 힘은 무엇일까?


조금만 세대를 올라가도 잔혹한 노예무역으로 강제이주 당하며 유럽인들의 노예가 되고, 백인우월주의 속에서 유대감을 가질 수 없었던 흑인들이, 이 열등감과 설움을 이어받아 어느 한쪽 귀퉁이에서 더이상 떨어져 나갈 수 없기에 서로가 서로의 손과 발목을 묶어 단단한 큰 덩어리로써 연대를 구축해 나가려는 ‘한’이 그 힘을 만들어낸 것일까?


누군가는 찬란한 시기 속에서 부를 축적하며 배를 채웠겠지만, 그 속에서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고 파는 물건처럼 지냈어야 할 생명의 존엄이 사라진 피눈물의 시기를 겪은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같은 마음으로 더 나은 삶을 위해 똘똘뭉쳐 이어나가려는 이유가 오로지 ‘생존’을 위한 투쟁이란 것은 가슴아픈 일로써 떠올려 지지만, 때때로 아픔과 설움이 만들어 낸 ‘연대의 힘’일지언정 그들의 단단한 결속이 부럽기도 하다. 사실 우리들의 현 삶은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사람들과는 점점 다른 형태와 가치관으로 멀어져가고 있다. 이들처럼 ‘상호 부조’하며 사는 것이, 어느 순간 점점 불편하고 때론 부담으로 느끼며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게 되버리지 않았나.

(물론,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자들의 결속은 그 무엇보다 빠르긴 하다. 우리들은 오랜시간 지켜 봤으며, 지금도 지켜보고 있다.)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받은 적이 없다는 듯,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성들은 자신들과는 다른 형태의 사랑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동성애를 향한 차별을 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

사회와 사람들로부터 내쳐지는 레즈비언 커플 ‘테레사’와 ‘로레인’ 이 두 여성을 향해 이기죽거리는 사람들.
물론 모든 이들이 비난을 하고 차별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침묵’으로 소외감을 느끼게 하고 차별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공동체의 결속 그 안에서도 또 다른 차별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면 국적이나 인종도 상관 없이 악순환이 돌고 도는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참 씁쓸하다.

자신들이 오래도록 일궈 놓은 울타리의 안락함을 침범 당한 듯, 새로운 이들의 유입에 배타적으로 대하는 무리들은, 우리들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 삶에서는 꼭 인종이나 사회적 지위, 성 정체성 등 뿐만 아니라, 일상 곳곳에서 여러 이유가 만들어 낸 ‘차별’이 존재한다.

자신이 믿고 싶은대로 그려놓은 허상의 심판대 위에 올려놓은 누군가가 단 한명도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심판대 위에 올려진게 내가 아니라고 자신할 수 없음에도 말이다.


편견과 차별에서 오는 상처는 깊다.
그 상처를 더욱 곪아가게 하는 것은 침묵이 아닐까.
현재를 받아들이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만이 최선인 것일까.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으로써 이들이 겪은 사연들은 분명 갈길이 멀게 느껴지는 막막함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모두를 끌어안는 ‘매티’가 있고, 다듬어지지 않은 공동체 속에서도 분투하며 소외된 구석에서 사람들의 손을 붙잡아 끌어 올리는 ‘키스와나’가 있었으며, 사람들에게 차별을 당하는 상처입은 ‘로레인’에게 말벗이 되어주던 ‘벤’과 같은 존재가 있었기에 현실의 좌절감에도 모든 희망을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열정과 베푸는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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