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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평점 :
아픔의 언어들이 쏟아져 나오는 곳.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어둠으로 갇힌 그 곳에서 이름 없는 사람들이 영혼마저 잃은 슬픔의 덩어리를 이고, 해골과 닮은 모습으로 종말을 향해 걸어갔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사람 목숨이, 그들의 영혼들이 타고 남은 재와 이리저리 연고 없이 흘러가는 연기처럼 아무렇지 않게 소실되었다.
(P. 15) 대체 우리가 무엇을 회개하고 무엇을 용서 받아야 한단 말인가? 모두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을 찾아 삶과 작별했다.
이 책의 저자 프리모 레비는 유대계 이탈리아 출신으로 화학과를 졸업 했으며,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가 24살(1943년)에 체포되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P. 163) ˝1941년 토리노에서 최우등으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자유로운 시절 속, 열정과 함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이루었던, 그리고 이루려고 했던 개개인의 목표가 한 순간에 원치 않은 포기를 강요 당했을 때의 절망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억지로 잊으려고 했던 그 시절의 모습이 서서히 배고픔에 밀려 윤곽 조차 희미해져 나의 과거가 아닌 것 같은 마음 마저 들 수 밖에 없는 현실 앞에, 저자가 느꼈을 비참함이 참으로 고통스럽다.
(P. 179) 우리에게 한 시간, 하루, 한 달은, 즉 우리가 가능한 빨리 제거하고 싶었던 이 무가치한 잉여의 물질은 생기 없이, 그리고 항상 너무 느리게 미래로부터 과거로 내려앉았다. 하루하루 생기 있게, 소중하게,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가던 시기가 끝나고 잿빛의 불투명한 미래가 우리 앞에, 마치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서 있었다. 우리에게 이야기는 정지되어 있었다.
이제는 내 것이 아닌 상상 속의 기억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일들이 눈치 없이 불쑥하고 떠오르면 기다리고 있던 우울이 나를 집어 삼키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돌부리에 넘어져도 우울로 직행하지 않고 잠시 제자리 멈춤을 할 줄 안다.
그리고 경계하지 않을 때, 안심하고 있는 내가 또 다시 피할 수 없는 ‘불행’을 맞닥뜨리게 되는 일이 생겨도 예전처럼 낙담만 하고 있지 않는다.
늘 내일이 기대되는 구름 위를 걷는 듯 했던 삶이 평생 이어질거라 여기며 오르막길도 힘든 내색 없이 쉼도 없이 잘만 오르다가 빙판길에 주루룩하고 밑바닥으로 내려간 것 같은 좌절감을 가지게 될 때, 하늘과 주변을 바라보며 걷던 고개가 한없이 숙여지며 바닥만 실컷 원 없이 보며 걸을 때, 정해져 있는 행복이 있었던 사람처럼 나약함을 풍기던 그 때 나는 수용소 관련 책들을 의도적으로 많이 읽었었다.
부족함을 채우듯 지나쳤던 소중함을 조금씩 조금씩 공부하면서 삶의 진정한 가치를 떠올리며 바라본 세상은, 예전에 바라봤던 세상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냄새까지도 달랐다.
끊임없이 멈추지 말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책들을 통해 다시금 느꼈던 것 같다. 발버둥치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도움을 준 책들 중 록산 판이페런의 <아우슈비츠의 자매>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궁핍하지만 사랑이 넘쳤던 유대인 세계의 울타리 속에서 지냈던 두 자매가 시간이 흘러 강제수용소로 이송되는 실화를 담고 있다.
이 책을 거론한 이유는 단 한명의 유대인이라도 아니, 위험에 처한 단 사람이라도 악의 손길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꽁꽁 걸어 잠궜던 문을 열고, 구원의 손길을 건네며 자신의 집으로 피신 시켰던 사람들의 모습과 <이것이 인간인가> 속 자신들에게 곧 닥칠 파멸을 바라보면서도 포악스러움을 잃지 않았던 자들의 대립되는 두 인간성이 공생의 윤리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앞날의 불행이 예상되는 같은 시간속에서 누군가는 선을 그었고, 누군가는 손을 내밀었다.
(P. 181) 수용소의 라이히스도이체들(아리아계 독일인,정치범이나 일반죄수)은 위험의 시간들 속에서 혈연과 지연을 확인했다. 이 새로운 요소가 증오와 몰이해의 복잡한 얽힘을 아주 원초적인 수준으로 되돌려 놓았다. 수용소 내부의 전선은 다시 그어졌다.
존재 방식으로 ‘굴복’뿐이었던 수용소 생활의 참상은 자유를 염원하는 우리들에겐 업악된 삶의 고통으로 너무나도 강렬하고 처참하게 다가온다. 더 참혹한 것은 살아 돌아온 자들의 수용소 생활 이후의 삶 속에서도 과거의 비극이 기억으로 달라 붙어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었다.
그 곳과 이 곳. 그 중간 어디쯤에 우두커니 궁금해 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말로써 다 하지 못할 잊고 싶은 기억인 동시에, 알아주길 바라는 혼동된 마음을 담은 과거를 벗어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모 레비는 기록해 나갔다.
사실을 정확히 알려야 했기에.
그들의 만행이 묻히지 않게 하기 위하여.
2017년에 개봉한 <랜드 오브 마인>이라는 영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덴마크군의 포로가 된 독일 소년병들이 덴마크 해변에 묻힌 지뢰를 제거하는 일에 투입되는 실화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어느 날 지뢰 해체 작업 중 형제를 잃은 한 소년병이 비통함에 절규하며 몸부림을 치자 덴마크 군인이 다가와 그 소년의 눈물로 젖은 머리칼을 계속해서 쓰다듬으며 끌어 안아주는 장면이 나온다.
적대국의 군인이 아닌 아버지의 손길만이 존재 했던 그 장면에서 정말 많은 눈물이 흘렀다. 현실의 비극 앞에 독일군을 향한 복수심이 어린 소년병들을 향한 연민으로 변화한 덴마크 군인의 모습, 이것이야 말로 잔인하고 몽매한 자들이 만들어 낸 전쟁의 참상 속에서 보여준 인간의 참된 본성이 아닐까.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에서도 인간의 ‘선’을 느끼게 했던 인물이 있었다. ‘로렌초’ 라는 이탈리아 민간인 노동자가 여섯 달 동안 매일 빵 한 조각과 그가 먹고 남은 배급을 나눠주고 보답 마저 바라지 않았던 것.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불가사의한 일이 생긴 것이다. 프리모 레비는 로렌초의 인간성을 통해 자신이 수용소 안에서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P. 187)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는 이제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형체, 교수대로 향하는 사형수들의 행렬을 목격하게 된다. 비르케나우 화장터의 소각로를 폭파시켰다는 것이 그들의 죄명이다.
시체들을 끌어내는일, 시체들의 금니를 뽑는 일, 시체들을 소각로에 넣는 일 등을 담당한 이 코만도(작업반)에 구성원들이 가스실 및 화장터를 파괴하고 교수형에 처해지자, 나는 이 책 앞부분에서 프리모 레비가 한 말이 떠올려진다.
(P. 58)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리 권한이 없을지라도, 잦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가지 능력만은 남아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계엄령은 칼과 같다며, 칼을 썼다고 무조건 살인은 아니라는 궤변과 함께 선물 받은 책들은 버리고 수천만원의 목걸이는 받아 챙겼던 자들의 모습이 떠올려진다. 이 책의 제목과 함께 말이다.
참담한 상황속에서도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라는 물음 앞에 인간이 지닌 내면의 힘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높였던 이들의 실제 이야기가 담긴, 그 기록을 통하여 인간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었다.
가슴이 뜨거워지게 만드는 책이었다.
자유롭게 읽고, 느끼고, 말할 수 있음에 값진 하루를 보내면서 말이다.
(P. 303)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위임할 때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진짜 선각자와 가짜 선각자를 구별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모든 선각자를 의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들의 주장을 일단 거부하는것이 좋다. 그것의 단순성과 눈부심이 우리를 들뜨게 한다 해도, 무상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편리하다고 생각되더라도 훨씬 더 소박하고 덜 흥분되는 진실, 차근차근,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부와 토론과 추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진실, 확인되고 입증될 수 있는 진실에 만족하는게 훨씬 더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