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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렌마트 희곡선 - 노부인의 방문.물리학자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5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김혜숙 옮김 / 민음사 / 2011년 2월
평점 :
[뒤렌마트 희곡선] 노부인의 방문, 물리학자들 - 드러나는 현실의 역설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이 두 희곡, <노부인의 방문Der Besuch der alten Dame>과 <물리학자들Physiker>은 단순히 읽어뒤서 좋다거나 읽어서 손해 볼 일이 없을 그런 것이 아니라 읽어두는 편이 좋을 작품들이며, 특히 <노부인의 방문>의 경우 정의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 과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지 의심스럽고, 아마도 그렇지 않다면 과연 그걸 사람이라고 불러야 할지 동물이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스러울 것이다 - 한 번 읽어보는 것이 좋을 그런 작품이다. 얼마 전에 민음사의 배려(연극 공연 이벤트)로 11월 12일까지 공연되는 연극을 보고 와서 무언가 써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쓰는 글이라, 이 글에서는 주로 <노부인의 방문>에 국한하여 생각해 볼 것이다. <물리학자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을 통해 이야기 하기로 한다.
이 희곡 또는 연극은 뒤렌마트가 말하는 그대로 일종의 희극이다. 하지만 비극으로 끝나는 희극이다. 그리고 현실적이지 않은 상황설정으로 인해 일종의 부조리극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과연 연극의 상황 설정이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일까? 애초에 현실 자체가 부조리 혹은 비일관성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을까? 기실 뒤렌마트는 역설을 드러낼 뿐 현실에서 완전히 얼토당토 않은 그런 이야기를 쓰지는 않았다. 부조리극이라는 말에서 이오네스코 류의 그런 극들을 떠올린다면, 그건 너무 많이 나간 생각이다. 이제 먼저 간단히 줄거리에 대해 살펴본 후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해보자.
노부인의 방문과 정의의 요구
쇠퇴해 가는 귈렌이라는 도시가 있다. 한 때 그런대로 괜찮은 소도시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쇠퇴해가는, 공장들이 문을 닫고, 기차들 마저도 완행 열차를 제외하고는 서지 않는 그런 도시. 이 도시에 세계적인 부호가 방문한다. 이 마을 출신의 클레어 자하나시안이란 노부인.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 노부인에게서 무언가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얻어내려고 안달이다. 마침 마을에는 오래전에 노부인과 연인 사이였던, 아직 이 여자가 클라라 베셔라는 이름의 소녀였을 때, 사랑하는 사이였던 한 남자(알프레드 일)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남자에게 기대를 건다. 어떻게든 노부인의 환심을 사 마을의 사정을 개선시키기 위해서.
노부인은 이 소도시에 10억 마르크라는 엄청나게 큰 돈을 쾌척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정의를 사고 싶다는 것. 그녀는 오래 전에 아이를 가진 채로 이 마을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알프레드 일의 아이를. 일은 법정에서 두 증인 - 슈냅스라는 술 한병에 매수된 - 를 내세워 클라라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는 위증을 통해, 그녀가 마을을 떠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는 당시 지금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잡화상 집 딸과 결혼하기 위해, 돈에 눈이 어두워 그런 짓을 했던 것이다. 이제 우크라이나 석유부호의 미망인 클레어 자하나시안으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이 당했던 바로 그 일에 대한 정의를 사고 싶다는 것이다. 바로 알프레드 일의 목숨 - 이를 위해 그녀는 관을 가지고 왔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 거부한다. 그들은 교양있는 사람들이니까.
갑자기 마을의 사정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빚을 내어 물건들을 사고 마을은 갑자기 좋은 옷들과 이전에는 결코 만져볼 수 없었던 물건들로 넘쳐나기 시작한다. 마을은 좋아지고 있다. 모두가 들 떠 있지만 알프레드 일은 불안을 느낀다. 경찰서장(법), 시장(정치), 신부(종교)를 찾아가지만 그들은 그저 일이 망상에 빠져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두려움에 빠진 그는 마을에서 떠나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역에 나와 그를 환송한다/막아선다. 물론 마을 사람들에게서 구체적인 악의를 찾을 수는 없다. 뒤렌마트의 말처럼, 그들은 "일을 죽이겠다고 마음먹고 빚을 쌓아 간 게 아니라, 경솔하게도 모든 게 잘 해결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가 악화되기 시작한다. 마을 대표들이 투자를 제안하고자 방문했을 때, 노부인은 이미 그런 투자에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이미 마을의 모든 땅, 모든 건물, 모든 공장과 광산이 그녀의 것이고, 마을을 쇠락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했던 공장 및 광산 폐쇄는 바로 그녀의 결정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자명해진다. 알프레드 일의 죽음이 없는 이상 마을 사람 모두는 빚더미에 앉게 되는 것이다. 일의 부인과 자식들 마저도. 이제 일의 죽음은 기정사실화 된다. 방법의 문제가 남았을 뿐. 경찰서장은 권총을 주며 자살을 권고하지만 일은 거부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공회에서 결정된 사항에 따라 마을 사람들의 손에 죽는다(정확하게 어떻게 죽는지에 대해서는 특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10억이라는 엄청나게 큰 돈을 마을에 넘겨준 후 일의 시신을 관에 넣어 마을을 떠난다.
욕망의 삼각형, 희생제의, 의미화, 그러나 의미화에서 벗어나는 한 사람
손 쉽게 이 희곡 혹은 연극의 내용을 정리해 볼 수 있는 방식은 르네 지라르가 말하는 욕망의 삼각형에 따라 일종의 희생제의의 틀을 가정해 보는 것이다. 지라르에 따를 때, 주체의 대상을 향한 욕망은 일종의 모방 혹은 미메시스에 따른 매개된 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하게 동일한 대상을 욕망하는 경쟁자가 나타나게 되고 주체와 경쟁자 사이에는 갈등 관계가 들어선다. 이 두 주체들 간의 갈등 관계가 심화됨에 따라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고, 사회는 이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일종의 종교적 제의를 통해 외부에서 온 누군가를 희생물로 만든다. 이 때 희생제물이 되는 자는 결코 그를 희생시킨 자들에 대한 복수의 능력이 없어야 하며(말하자면 복수를 해 줄 수 있는 유력한 가족, 단체 등), 희생제의가 끝난 이후 어떤 숭고한 종교적 대상으로 만드는 의미화를 거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희생제의는 어떤 드러난 폭력을 막기 위해 집단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내재적이며 잠재적인 폭력이다.
먼저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노부인, 일, 마을 사람들이 구성하는 삼각형에서 일이 일종의 희생물이 되는 비극적 결말이다. 노부인, 즉 클레어 자하나시안과 일은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정의를 촉구한다. 그리고 그 경쟁에서 상대적으로, 아니 절대적으로 힘이 약한 한 편이, 다시 말해 알프레드 일이 희생물이 된다. 물론 일은 공동체 내부의 사람이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작품의 시작부터 일에 대한 일종의 외부화 혹은 소외가 점증적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종국에 그는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는다. 그는 철저히 외톨이가 된 채로 마을의 공회 장소로 걸어들어간다. 그리고 그 결정에 따라 희생제물이 된다. 이 과정은 철저히 종교적이다(마을 신부가 죽임을 당하러 들어가는 일에게 축성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실제적으로 클라라 베셔에게도, 즉 아직 마을을 떠나기 이전 어린 시절의 노부인에게도 적용되었던 것이다. 그녀가 일의 아이를 가져 그 아이의 친부확인 소송을 했을 때, 그리고 그 소송에서 져 마을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철저하게 외토리였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외면 당했다. 그 때도 두 사람은 동일하게 모종의 정의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 경쟁에서 탈락한 그녀는 희생제물이 되어 마을 떠난다. 물론 그녀의 재산으로 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노부인은 이후 하나의 의미가 된다. 일종의 고정된 기표, 아니 하나의 장소, 모든 것을 소유했기에 더 이상 소유할 것도, 변할 수 있는 것도 없는 부동의 장소.
하지만 이런 구도에서 벗어나는 것이 있다. 바로 정의의 문제, 클레어 자하나시안이 엄청난 돈으로 사고자 했던 정의가, 알프레드 일이 마을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정의가, 혹은 마을 사람들이 일의 죽음을 두고 "정의가 이루어졌다"라고 할 때 그들이 말하는 정의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정의는 같은 것이면서도, 공통적인 것으로 치부하기에는 어딘가 나머지를 남기는 듯 한 느낌을 준다. 과연 이들이 말하는 정의는 무엇인가,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애초에 정의 그 자체는 무엇인가?
정의의 문제 - 정의 자체가 의미 혹은 상징 체계에서 벗어난 것
노부인은 말한다. "조건을 말하지요. 여러분에게 10억을 주고 정의를 사겠습니다.... 살 수 없는 건 없어요.... 내게는 정의를 향유할 능력이 있어." 일이 샀던 정의 역시 어떤 대가가 있는 것이었다. 그가 노부인에 의해 눈이 멀게 되고 거세된 두 위증자에게 주었던 슈냅스 한 병. 물론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크기의 간극이 존재한다. 하지만 단순히 차이나 정도의 문제가 아닌 있음과 없음의 문제로 인식할 때 그들 각각은 무엇인가와 정의를 바꾼 것이다.
누군가 정의를 말할 때, 또는 요구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개별자 혹은 단독자로서의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세월이 하수상하다', '때가 아니다', 혹은 '시간이 탈구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개별자의 유한한 시간으로, 개별자의 유한한 차원으로, 정의라는 이념은 끌어내려지고, 유한화된다. 클레어 자하나시안과 알프레드 일 두 사람 모두 마찬가지다. 그들이 요구하는 정의는 결국 자신의 문제와 결부된 유한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정의는 결코 그러한 유한의 차원에서 이야기 될 수 없는 것임을. 정의를 말하거나, 구체화하기 어려운 것은 그것이 결코 유한한 차원에만 묶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한한 차원 내에 실현되지 않는다면(가령 법과 같은) 그러한 정의는 그저 말로만 회자되는, 언제나 그 도래가 미뤄지는,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정의일 뿐이다.
그렇기에 정의를 말할 때 결코 법과 분리시켜 이야기 할 수 없다. 하지만 법적인 정의는 과연 정의인가? 클라라 베셔의 판결을 생각해 보라. 결코 불법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법적인 절차와 근거에 의해 내려진 판결을. 클라라 베셔는 그 합법적인 판결로 인해 마을을 떠나게 된다. 알프레드 일의 죽음은 또 어떤가. 마을의 공회는 일종의 관습법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분명히 그 전통 안에서, 만장일치로 의결된 그의 죽음은 결코 불법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 분명히 합법적인 불의라는 점에 대해 다른 말을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불의를 되돌리기 위한 정의의 요구는 어떤 것인가? 클라라 자하나시안은 10억의 돈으로 과거의 불의를 되돌릴 정의를 사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돈으로 살 수 있는 정의, 거래가능한, 유통가능한, 상품과 같은 정의는 되돌려 줄 수 있는*, 보상가능한 물건과 같은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보상적/징벌적 정의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복수, 또는 서로에게 유통되는 또는 순환되는 폭력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게다가 그런 폭력 또는 복수의 효과는 단순히 알프레드 일을 향한 것만도 아니다. 10억이란 돈에 사람의 목숨을 팔아치운 귈렌 시민들에게도 동일하게 향하고 있다.
* 여기에서 되돌려 준다는 말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은 물건이나 돈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돌려준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지만, 복수를 의미할 수도 있다.
오히려 우리가 이 '우화'에서 정의에 근접한 어떤 것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은 알프레드 일의 태도의 변화일 것이다. 그는 이 모든 일들을 마치 운명과 같이 받아들이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결코 운명이 아니며, 그는 이 어떤 운명과도 같은 의미화에서 빠져나간다. 이것은 결코 그가 어딘가로 도망쳤다거나, 시민들의 결정을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동료 시민들에게 불의한 자로 취급받고 희생제물 또는 인신공양(homo sacer)이 될 지언정, 결코 자살을 선택하지 않는다. 만일 차라리 경찰서장이 건넨 권총으로 자살하는 길을 택했더라면 그는 귈렌 시민들에게 좋은 이웃으로 기억되어, 어떤 의미로 남았을 것이다. 단순히 카프리 섬의 별장의 정원을 장식하는 노부인 자하나시안의 수집품으로서만이 아니라 말이다. 그는 마치 소포클레스의 영웅이 그랬던 것처럼 의미화의 체계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의 최후의 장면은 의미심장하다.(오이디푸스 콜로노스에서 오이디푸스의 죽음의 장면이 불명확하듯이, 일의 최후 역시 분명하지 않다.) 정의란 오히려 그런 것이다. 무한의 영역에 속하기에 결코 유한한 지식의 체계 내에서 잡히지 않는 것.
연극, 연극 이념
지금부터는 연극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한다. 연극으로 무대에 올려진 희곡을 연극으로 본다는 것은 희곡 자체와는 또 다른 것이다. 알랭 바디우는 <비미학>에서, 연극에 고유한 예술적 이념으로서의 연극 이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연극 이념은 대사나 시 안에서는 불완전하다. 이는 연극 이념이 그 안에서는 일종의 영원성 안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 이념은, 영원한 형상 안에 있는 상태로는 아직은 연극 이념이 아니다. 연극 이념은 (짧은) 공연 시간 속으로만 온다." 연극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희곡은 기본적으로 극화되어 무대 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불완전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뒤렌마트의 희곡들 역시 그럴 것이다. 노부인과 일, 경찰서장, 교장선생, 교구 사제를 위시한 모든 마을 사람들의 대사와 몸짓의 우연 속에서, 그리고 우연히 공연을 보러온 관객과의 호흡 가운데 연극은 뒤렌마트가 전달하고자 하는 삶의 역설을 전달한다. 이 희곡은 원래 3막으로 구성된 꽤 긴 연극이다. 그러나 극장에서 본 연극은 약간의 단순화와 압축, 그리고 중요한 대사 및 동작들의 반복을 통해 재해석되었다. 그 효과는 기본적으로 희극인 이 연극의 분위기를 배가했고, 노부인 자하나시안의 잔인함과 유머, 일에 대한 사랑의 기억들을 단순히 희곡을 통해서 보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전달했다. 그런 의미에서 "연출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해석이 아님을 이해해야만 한다. 극 행위는 연극 이념을 완성시킬 수 있는 한 번의 기회이다." 연극은 영화와 달리 매회 다른 것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연극에서는 무대 장치나 배경막 등이 거의 쓰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앉을 자리가 먼저 깔려있고, 이후 노부인이 등장하여 앉게 될 의자만이 등장한다. 무대 우측 앞쪽에 앉은 노부인은 거의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배우들의 몸짓 혹은 의식의 혼란스러운 운동은 일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데 무대의 우와 좌를 두고 배치하여 분명한 대비를 보여주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희극적인 진행을 중심으로 점점 더 고취되는 비극적이고 운명적인 분위기를 끌어올려가는 연극에서 빛났던 것은 단순히 노부인 한 사람의 연기, 혹은 다른 모든 배우들의 잘 짜여진 동작들만이 아니었다. 무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던 관객들 역시 이 과정에 동참하고 있었으니까. "삶과 죽음 사이에 열린 공간 속에서", 이 연극은 "욕망과 정치의 관계 맺음을" 보다 압축적이고 치열하게 사유하고 있었다. 바로 연극을 통해 드러나는 정의의 역설에 대해서 말이다.
물리학자들 - 국가와 과학, 종교적 신비, 권력, 기업,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자본의 지배
이야기는 한 전원적 환경에 세워진 정신병원에서 시작된다. 세 명의 물리학자들, 지금은 미쳐버린, 현업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는 정신과적 징후를 드러낸 세 사람의 물리학자들을 수용하고 있는 정신병원. 한 사람은 스스로를 아인슈타인이라고 생각한다(본명 에른스트 하인리히 에르네스티). 바이얼린을 연주하고 스스로 아인슈타인의 외양을 갖추고 상대성에 관해 말하는 그런 사람. 두 번째 물리학자는 뉴턴이다(본명 헤르버트 게오르크 보이틀러). 그는 가발을 쓰고 자연의 법칙과 수학적 공식화에 대해 말한다. 세 번째 사람은 그 누구도 흉내내지는 않지만 어느날 갑자기 지혜의 왕 솔로몬의 방문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언제나 그의 계시와 지혜에 대해 말하는 물리학자 요한 빌헬름 뫼비우스다.
어느날 마틸데 폰 찬트라는 귀족 배경의 저명한 곱추 정신과 의사가 원장으로 있는 이 병원에서 아인슈타인이 (또는 그를 자처하는 에르네스티가) 여자 간호사를 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수사가 시작된다. 그러나 이 사건도 어찌보면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미 1년 전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뉴턴 또는 보이틀러에 의한). 이 당혹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이 병원은 당국으로부터 원장선생이 그다지 반기지 않을 조치를 요구받게 되는데, 말하자면 이 세사람을 수용하는 이 병원은 이제 남자 간호사들이 환자들을 돌보도록 하고 수용시설에 대한 보안을 강화하는 등의 조치가 그것이다.
한편 뫼비우스를 간호하던 여간호사는 전처와 자식들에게 버림받은 그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고 그와 함께 이 수용시설에서 나가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뫼비우스에게 함께 나가서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연구를 계속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뫼비우스의 생각은 다르다. 사실 그는 미친 것이 아니라 어떤 고민이 있는 것이다. 뫼비우스는 기실 물리학적으로 엄청난 성취를 이룬 것이다. 자신이 발견했으나 발표하지 않고 불태워버린 바로 그 이론적 성과가 국가들의 이념적 경쟁에 쓰여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스스로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것을 가장하고 스스로를 정신병원에 가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연민하던 간호사를 목졸라 죽인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어떤 이중적인 반전으로 흐른다.
1. 그 정신 병원에는 아무도 미친 사람이 없었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은 기실 뫼비우스를 빼내 새로운 무기를 생산하는 기술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파견된 동서방의 스파이들이다(물론 그들도 일정한 성과를 이룬 물리학자들인).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인지한 그들은 스스로의 정체를 드러내고 뫼비우스를 자신의 국가로 데려가려 한다(그들의 원래 이름은 알렉 제스퍼와 조지프 아이슬러). 그러나 뫼비우스는 그들을 설득한다. "우리는 야생동물입니다. 우리를 인류에게 풀어주어서는 안되지요." 그리고 그들 모두는 정신병원에 남기로 한다. 그들의 과학이, 그들이 연구하는 자연의 법칙이, 물리학이 인류를 위협에 처하게 할 무기를 생산하게 될 것임으로.
2. 그러나 곧 이어 드러나는 다른 하나의 사실. 곱추 병원장 폰 찬트 박사가 미쳤다는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솔로몬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내 서재에서 처음 나타났지요.... 왕의 입이 열리고 시녀인 나와 말하기 시작했어요. 왕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고 그 옛날 지상에서 누렸던 권력을 되찾으려 했어요. 그래서 뫼비우스가 왕의 이름으로 땅을 지배하도록 그에게 자신의 지혜를 드러냈던 것입니다. 하지만 뫼비우스는 왕을 배신했어요.... 황금의 왕은 명령을 내렸어요. 뫼비우스를 파면시키고 대신 지배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뫼비우스를 마취시키고 솔로몬 왕의 계시 내용을 사진 찍었어요. 마지막 페이지를 갖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처음에는 약간의 발명 내용만을 표절했습니다.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요. 자금을 모아 거대한 공장들을 세웠어요.... 나는 강력한 기업체를 구축했어요. 여러분, 이제 난 '가능한 모든 발명들의 체계'를 활용할 작정이에요."
그들은 이중적인 트랩에 빠진 것이다. 먼저 그들이 연구한 물리학이, 인류의 가장 위대한 성과들 중 하나인 과학이 국가에 예속되어 인류를 파멸에 몰아넣을 무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묶어 버린 올가미, 그리고 종교적 신비 혹은 광휘(솔로몬)와 연관된 산업 자본의 권력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는 또 하나의 올가미. 결국 그들은 무력하다. 그들은 이제 국가의 통제를 넘어선 자본의 전지구적 지배라는 무한한 과정에 쓰여지는 그저 또 하나의 장기말이 되었을 뿐인 것이다.*
* 여기에서 생각해 볼 것은 한 사람의 천재 혹은 비범한 능력을 지닌 한 사람의 영웅에 대한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물리학자>는 이 시대에 대한 묵시적 통찰을 담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이 지닌 역설, 모순, 혹은 비일관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시작되지만 그 누구도 미치지 않은, 그러나 모두가 미친 지극히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 병원장 폰 찬트 박사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과 마찬가지로 난 미치지 않았어요."
오늘날 생각이라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범죄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뫼비우스와 그의 동료 물리학자들이 그런 태도를 드러낸다(어쩌면 뒤렌마트 자신도). 뫼비우스 자신의 과학적 발견은 하나의 범죄로, 우리 시대를 망칠 것으로 취급되며, 뫼비우스 자신은 사람들을 해칠, 그래서 우리에 갇혀야만 될 '맹수'로 스스로를 취급하고 있지 않는가? 물론 이런 부정적인 태도에 찬성할 수는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과학적 발견이 아니라, 그의 발견의 영향력이 국가 혹은 자본에 의해 사용되는 것이다. 바로 이 국가 혹은 자본에 종속된 과학에 대해 우리는 우리 시대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를 따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모든 과학적 창안은 산업화 혹은 보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돈벌이를 위한 기술이 되고, 모든 예술은 그 자체의 사유를 잃어버린 즉물적인 문화산업이 되며, 사랑은 '안전한 사랑'을 표방하는 결혼 중개 회사들과 모든 이기주의의 근저에 있는 가족주의의 결합이 된다. 물론 정치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의 현실 정치는 오늘날 제도적으로 가장 완성된 단계에 들어갔으나, 민주주의라는 이념이 거의 완전하게 자본과 이 자본을 보호하는 법에 종속되고 있는 역설에 빠져있다(기본적으로 법이 사회의 안전을, 사유재산의 안전 목표로 한다는 의미에서). 오늘날 '생각이 없는 이념'만을 유일한 이념으로 삼는 우리의 현실 정치가 의회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과 공모하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뒤렌마트의 희곡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를 가진다. 바로 역설을 통해 현실을, 바로 모든 복잡하고 불순한 것들을 정제한 실재에 관한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를 말이다. 뒤렌마트는 <물리학자들>에 첨부한 부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 역설 속에 현실이 드러난다. 20. 역설과 마주 선 사람은 현실에 노출된다." 그의 희곡 혹은 연극이 드러내는 역설, 그 역설은 부조리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으며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상징계의 질서에 구멍을 내는 것이다. 이 지극히 개별적인 한 인간, 단독자와 관련된 역설은 사실상 모든 사람과 연관된다. "16. 물리학의 내용은 물리학자의 일이고, 그 영향은 모든 사람의 일이다."
결국 뒤렌마트가 물리학 영향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국가와 자본이다. 우리는 이 희곡을 통해 뒤렌마트의 생전에나 지금에나 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의 역설을 바로 보게 된다. "21. 극작법은 관객을 현실에 노출시키는 전략을 쓸 수 있지만, 현실에 저항하거나 현실을 극복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 현실의 역설을 알게 되었다면, 결코 그것에 저항하고 극복하는 일에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된다. 결국 모든 일에 있어 문제는 두려워 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과학에 있어 과학적 발전 그리고 발견이 결코 한 사람의 천재 혹은 과학자에게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듯이(그 사후적인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정치에 있어서도 정치적 창안은 단 한 사람의 영웅 혹은 정치가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뒤렌마트에 따르자면, "17. 모든 사람과 관련되는 일은 모두가 함께 할 때만 해결할 수 있다. 18. 모든 사람과 관련되는 일은 혼자서 해결하려는 개별적인 시도는 무엇이든 실패하게 마련이다."
** 여기에서 떠올리게 되는 것은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의 비유다. 동굴 안에 묶여 있던 한 사람이 바깥을 보고 그의 동료들에게 알리는 이야기. 그러나 생각해 보자면 먼저 바깥을 본 사람을 따라 나섰던 동굴 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순순히 따라나올리는 없을 것이다. 동굴 바깥의 눈부심은 괴로운 것이고, 차라리 동굴 안에 투사된 영상을 보는 편이 더 편하고 좋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지금 당장에 부닥치게 될 여러 고민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슬라보예 지젝이 월 스트리트 시위 현장에서 행한 연설에 대해, 어떤 한 사람이 "대체 전략가들은 어디에 있는가?", 다시 말해 운동을 이끌 혹은 정치의 노선을 제시할 지도자 또는 정치가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 지젝은 이에 대해 직접적인 답변을 피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완전히 관련 없는 소리라고 할 법한 대답을 했다. 왜 그랬을까.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모든 개별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해 나가야할 생각에 달려있다. "생각이 가능한 것은 언젠간 생각되기 마련이에요." 물론 매우 다른 맥락에서 한 말이기는 하지만, 종교적 신비에 미쳐버린 우리의 병원장 폰 찬트 박사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 혹은 이념 혹은 이데아는 실천을 낳는다. 그 실천은 실패할 수도 있다. 그 실천은 결코 이전에는 없었던, 다시 말해 성공해 본 적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실패를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그 실패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 생각해 보면,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공고한 체제들 역시 과거에는 없는 것이었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그런 것이 중세의 왕이나 귀족들이 통치하던 시절에 가당키나 한 것이었던가.
이 연극은 현실의 역설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현실을 구성하는 것들이 결코 하나로 셈해질 수 없다는 점을 드러낸다는, 즉 현실이 비일관적으로 구성된다는 의미에서, 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이념을 드러내는, 읽는 이에게 - 그리고 만일 연극으로 공연된다면 관객에게 - 충격을 주는 좋은 연극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희곡을 그저 아직 시간화 되지 않은 '영원한 형상'으로만 대했기에 어떤 고유한 연극적 이념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혹시라도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연극으로 다시 보고 싶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