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80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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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추리소설

<장미의 이름>은 실패한 탐정의 이야기 또는 불완전한 추리소설이다.* 범인을 잡지 못한, 문제가 되었던 책을 찾지도, 수도원의 화제 사건을 막지도 못한 탐정 혹은 수사관의 이야기를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적 특성에서 보자면 결코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럼에도 어떤 의미를 지닌다. '중세의 가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늙은 수도사의 입을 통해 에코가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결코 녹록치 않은 철학적/신학적 주제들을 다루면서도 오늘날의 상황 내에서 일정 이상의 시의성을 가지고 있다. 

이 책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그러니까 아마 지난 겨울이었을 것이다. 한 일년쯤지났을려나... 대학 시절 항상 남들은 생각하지도 않는 골치아픈 문제들을 가지고 함께 검토하던 어찌 보면 나만큼이나 얼빠진 녀석이 이 책을 다시 보고 있다고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어쨌든 자연스럽게 <장미의 이름>에서 검토할 수 있는 여러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던 기억이 있다. 참고로 그 친구는 당시 소설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던 요아킴이라는 세대주의자에게서 발단한 종교논쟁, 그러니까 베네딕트 파였던 그에게서 시작된 프란체스코 파 내의 갈등과 승인된 교회 조직 바깥의 평신도 공동체들, 그리고 더 나아가 카타리 파와 같은 이단들에 관심을 가지고 추적 중이었고, 내 경우에는 그런 여러가지 정황들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철학의 문제와 관련된, 예를 들자면 진리의 문제나 일자와 다수의 문제에서, 그리고 플라톤주의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관련된 이야기를 끌어나갔던 듯 하다. 그리고 결국 무언가 이 생각들을 정리할 글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벌써 그 때로부터 거의 1년이 흘렀다. 이것저것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하던 차에 이 책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뜨고 있는 <나는 꼼수다>라는 팟캐스트 때문이다. 바로 웃음의 문제, 이 책에서 제시된 일견 소설을 전개를 위해 곁다리로 등장하는 듯한 이 문제.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 특히 이 이야기를 그저 추리물 정도로 생각한다면 - 별 것 아닌 이 문제는 실상 소설 전체를 관통하여 청빈 문제나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2권(희극론) 그리고 정치 문제에 닿아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이 소설과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현실이라는 비극, 웃음, <나꼼수> 현상

약간은 뜬금없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의 상황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도록 하자. 바로 이 비극적인 현실에 대한 의미를 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정치 상황은 어떤 변동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어느 시절이 그렇지 않았겠는가? 문제는 일련의 그런 가능성들과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정치가 정말로 변했던가 하는 것이다. 4.19, 80년 서울의 봄, 5.18, 87년 민주운동 등으로 대변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언제나 사라져 버린 가능성, 혹은 모호한 파국으로 귀결되었을 뿐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건설된 이후로, 아니 더 나아가 식민지 이후로, 이 나라를 지배하는 자들이 교체된 사례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는 더 이상 지배의 교체 혹은 더 나아가 지배의 폐지가 아닌 관리적 차원에 속하게 되었으며,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혹은 포화)은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또는 의회 자본주의의 공고화에 이르게 된다. 실제로 민영기업의 CEO 출신 대통령의 선출이 바로 이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징후라 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의 정치적 현실은 비극이다. 언제나 법의 저편에 있는(그러나 동시에 법에 의해 실현되어야만 하는) 정의는 그 가능성마저도 찾기 힘든 것이 되어버렸고,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변화를 희구하면서도 동시에 변화의 불가능성에, 다시 말해 정치적 좌절과 무기력함에 빠져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웃음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관리나 경영이 되어버린 정치에 대한 비웃음, 사람들에게 더 이상의 희망을 주지 못하는 의회정치에 대한 비웃음 말이다. 웃음은 - 그것이 어떤 형태의 웃음이 되었던 간에 -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 현실이 되어버린 비극을 볼 때 혹은 그 비극과 스스로를 동일시 하게 될 때, 사람들은 좌절에 빠져 변화의 가능성을 꿈꿀 수 없게 되지만, 그 비극 속에서 웃음의 요소를 찾아내어 마음껏 웃을 수 있을 때, 바로 그 비극적 동일시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할 공간을 얻게 된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근/현대적인 연극들로부터 이런 요소들을 찾을 수 있는데, 비극 속에 혼재된 희극적 요소의 효과를 브레히트는 '거리두기(distancing, 소격효과)'라 명명했던 바 있다.  

<나꼼수>가 제시하는 긍정적인 측면은 바로 이런 측면에 있다. 물론 <나꼼수>는 동시에 일정 이상의 한계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들이 제시하는 정치는 과거로부터 반복적인 실패를 보였고, 이미 포화되어 버린 재현적 정치(혹은 대의 정치)의 차원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현재 <나꼼수>는 현실의 비극적 무기력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끌어내어, 이들이 더 이상 비극의 '희생양'이 아니라 현실을 뒤집을 수 있는 '사자'가 되도록 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분명 웃음은 두 가지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먼저 비극적 동일시에서 빠져나와 관리 혹은 경영의 차원에 속한 현실 정치로부터 거리를 두게 만드는 측면에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힘을 주어 '양이 사자가 될 때까지 일어서고 또 일어서'게 한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장미의 이름>에서 드러나는 '웃음의 문제' 

그렇다면 중세 말엽 유럽에서, 특히 수도원에서 웃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당연히 금기시 되는 것이었다. 사실 이 웃음의 금기는 플라톤에 대한 전통적 해석과 연관된 신플라톤주의적 신학(호르헤가 대변하는)과 연관된다. 아마도 여기에는 종교와 철학 사이의 모종의 공모가 있었을 터인데, 어쨌든 플라톤의 저작들을 살펴볼 때 글자 그대로의 해석을 하게 되면 플라톤은 웃음을 금기시 하고 있다. 말하자면 웃음은 인간의 영혼을 좀먹어 들어가 인간이 웃음이라는 감정의 격동에 탐닉하게 하여 올바른 몸가짐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 사실 신학적으로는 이 문제가 더 우위에 있을 것인데 - 예수의 웃음이라는 문제가 거론된다. 신플라톤주의적 학설에 따를 때 신의 아들 예수는 거룩하며 당연히 삼가고 근엄한 태도를 유지하는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그런 해석이 말이다.

문제는  먼저 성인들의 증거나 그리고 원전상의 증거가 이에 반대한다는 점이다. 장서관에서 있었던 호르헤와의 논쟁에서 윌리엄은 우선 아벨라르 성인의 자만을 힐난하는 호르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호르헤 수도사, 내가 그런 말씀에 찬성할 줄 알았던가요? ...  아시겠지만, 이성에 반하는 불합리한 명제의 권위를 무화시키는 데 웃음은 아주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웃음이란 사악한 것의 기를 꺽고 그 허위의 가면을 벗기는 데 요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 마우루스 이야기를 아시겠지요. 이교도들이 이 성인을 끓는 물에다 넣었을 때 이분은 목욕물이 어째서 이렇게 차냐고 불평했습니다. 이교도 형리는 그 말을 믿고 거기에다 손을 넣었다가 그만 병신이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믿음의 적들을 우스갯거리로 만들어 버리신 순교 성인의 쾌거라고 아니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어서 아무리 그렇다라도 그리스도는 웃지 않았으니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호르헤에게 최후의 일격(coup de grace)을 날린다.

글쎄요. 나는 그렇게 안 봅니다. 바리사이 인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셨을 때, 화폐는 거기에 새겨진 형상의 임자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을 때, 재담하시면서, <투 에스 페트루스Tu es petrus>**라고 하셨을 때, 내 보기에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당황케 하고 제자들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시려고 우스갯소리를 하신 것 같습니다. 가야파에게 <그것은 네 말이다>라고 하셨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재담을 하신 것이지요.... 

분명 웃음은 "이성에 반하는 불합리한 명제의 권위를 무화시키는데 ... 아주 좋은 무기가" 될 수 있다. 그것은 플라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아아카시 싱(Aakash Singh)이라는 학자의 논문은 우리가 너무나도 근엄한 것으로 생각해 마지않는 플라톤의 국가/정체(politeia) 편에 얼마나 많은 웃음거리 - 조롱, 힐란, 농담을 모두 합쳐서 - 가 들어있는지에 대해 말한다. 플라톤이 그려내고 있는 소크라테스는 결코 시종일관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플라톤은 웃음을 사용하여 '의견의 체제' 혹은 통상적이고 전통적인 주류의 의견들이 논리에서 벗어남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노선은 플라톤이 그리고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맞섰던 현자들 또는 소피스트들(sophistes)이 대변하는 전통과 당대의 지식에 맞서는 방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웃음의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정치와 직결될 수 있다.

청빈 문제 혹은 usus facti(사실상의 사용) 논쟁

<장미의 이름>의 상황에서 당시의 정치와 관련되는 논쟁은 바로 usus facti 혹은 사실상의 사용에 관한 논쟁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소유물을 가졌는가 아니면 그리스도가 가졌던 것은 사용을 위한 것이었을 뿐 소유로 볼 수 없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논쟁이다. 왜 이 문제가 정치의 문제와 연관되는지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당시 유럽의 상황에 대한 별도의 논의가 필요한데, 잠시 개략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당시 유럽사회는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인해 많은 귀족들의 봉토가 왕에게 귀속되는 과정에 있었다. 당연히 세속적인 왕권은 강화되고 그에 반해 교황권은 약화 일로에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중에 서양 역사에서 '아비뇽 유수기'라고 명명되는 1307년부터 1376년까지의 약 70년간 교황이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 지역에 머무르게 되는 기간이 있었는데, <장미의 이름>에서 전개되는 사건들이 일어나는 시기는 1327년으로 이 기간에 속한다. 

이 시기에 전개된 이 그리스도의 청빈에 관한 논쟁이 정치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일단 당시 프란체스코 파가 제기했던 그리스도가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살았다는 주장에 대해 교황청이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교황칙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교회 역시 소유를 포기하고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런 과정에서 교황청으로 대변되는 카톨릭 교회는 권력을 잃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말하자면 교황청은 이런 성서 해석을 따라 재산과 권력을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재산을 가졌던 것이다(예수에게 와서 영원한 생명을 구했던 부자 청년처럼). 따라서 이런 의견을 내놓았던 프란체스코 파에 속한 학자들은 이단으로 단죄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하지만 당시 교황권을 억누르고자 하는 반대 세력인 세속 왕권이 이 일단의 학자들의 의견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겠다고 여겼는지 이들을 비호하고 나선다. 소설 내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이 이탈리아 북부의 한 베네딕트 파 수도원에 모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이런 상황 내에서 프란체스코 파에 속한 미켈레를 필두로 한 황제 측 사절단과 델 포제토 추기경 및 베르나르 기를 필두로 한 아비뇽 측 사절단이 이 수도원에 모여 논의하게 된 것은 바로 이 그리스도의 청빈이라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된 자들은 이들만이 아니다. 요아킴이라는 이름의 한 베네딕트 파 수사가 주장했던 세대론적인 종말의 주장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이탈리아 반도의 다양한 이단 종파들, 즉 카타리 파, 보고밀 파, 특히 이 소설의 등장 인물들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돌치노 파 등등의 민중신앙적 운동들을 빼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교회와 세속 권력기관들을 습격하는 급진적인 활동을 수행했던 것은 이 자발적인 가난을 부정하고 세속 권력과 함께 부를 축적하는 교회의 행태를 부정하는 측면과 결코 양분할 수 없는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들 이단들에게 어떤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윌리엄의 모습이다.  

윌리엄과 호르헤 -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대 신플라톤주의

기실 윌리엄도 그 성향으로 볼 때 토마스 아퀴나스의 호교론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에서 벗어난 인물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대하게 되는 그는 오히려 매우 영국적인, 경험론적인 근대인의 모습을 띄고 있다. 분명 자연학적 지식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는 그는 이베리아 출신의 장님 수사 호르헤와, 토마스 아퀴나스와 여러 학자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용을 통한 신학적 축적으로 인해 뒷방으로 밀려난 신플라톤주의적 경향을 대변하는 호르헤와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윌리엄과 호르헤가 벌이는 웃음 논쟁 역시 바로 이런 대립과 결을 함께 한다. 호르헤가 다른 수사들이 볼 수 없도록 막고 있었던 장서관의 책, 독을 발라 보는 사람마다 손가락과 혀에 검은 자국을 남기고 죽어가도록 했던, 그리고 종국에는 스스로 독이 발린 책장들을 삼키고 죽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 책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 <희극론>이기 때문이다. 

장서관에서 치뤄지는 윌리엄과 호르헤의 마지막 대결 장면에서, "희극을 논하고 웃음을 찬양한 서책은 얼마든지 있소. 왜 하필이면 이 서책이 유포되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하게 되었던가요?"라는 윌리엄의 질문에 호르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가 이 서책의 저자였기 때문이오.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은 하나같이 기독교가 수세기에 걸쳐 축적했던 지식의 일부를 먹어 들어갔오.... 오늘날에 와서는 성자와 선지자들까지 신봉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 철학자의 일자 일언이 바야흐로 세상의 형상을 바꾸어 놓기에 이르렇어요. 이 서책이 공공연한 해석의 대상이 되는 날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어 놓으신 마지막 경계를 기어이 넘게 되고 말 것이오.

호르헤는 겁을 먹고 있다. 웃음을 비웃는 그가 바로 이 웃음에 대한 책이, "웃음이 예술로 과대 평가되어 있고, 식자들의 마음이 열리는 세상의 문으로 과장되어" 있는 책이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에 대해서 말이다. 호르헤가 이어사 말하는 것은 교회적 권위의 실추에 대한 것이다. 범부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신에 대한, 교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스스로 주인으로 여김으로써 그 주종 관계를 역전시킬 수도 있는" 가능성, 말하자면 그는 바로 이러한 가능성을, 즉 이름도 없는 범부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호르헤와 묘하게 겹쳐지는 상이 있지는 않은가. 오늘날의 정치는 - 전 세계적으로 -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경제적 실패에 대한, 테러에 대한 공포를 퍼뜨리는 보수적 정치 세력에 의해, 그리고 보수적 언론에 의해, 우리와 같이 이름없는 '범부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지난 약 2세기 동안의 인류의 정치적 진보를 되돌리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작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은 호르헤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두려움'의 유포자들이라는 점이다. 

장서관의 화제 - 일자적 진리의 소멸과 새로운 시대의 알림

호르헤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없앤다(정확히 말하면 먹어버린다). 그러나 그 책은 사라졌을 망정 시대는 분명히 변했다. 당시 시대적 난맥상을 드러내는 '중세의 가을'은 지나가고 이후 종교개혁과 계몽의 시대는 분명히 도래했다. 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범부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그 시대적 도래를 알리는 사건이 바로 '장서관'의 화재다. 

우연이었던 아니면 사고였던 간에, 어쨌든 장서관은 화마에 휩싸인다. 당대의 모든 지식의 보고, 유럽의 어느 수도원도 따라갈 수 없는 지식을 대변하는,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서 유일한 진리, 일자적 진리를 대변하는 장서관은 몇일 동안 지속되는 불길 속에서 타버린다. 그리고 화재 이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아드소가 다시 방문한 장서관이 있던 자리들에 오직 지식의 편린들만이, 책의 파편들만이 남아 뒹군다. 하지만 통상적인 해석을 따라 이런 귀결을 단순히 어떤 포스트모던적인 진리의 소멸 정도로만 끝내버리고 지나가기에는 무언가 밋밋하다. 무언가 다른 해석은 있을 수 없는가? 비록 중세적 교회의 권위는 소멸했을 망정 역사는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 해석의 단초를 윌리엄이 은연 중에 내 비치는 '범부들'에 대한, 또는 '이단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서 찾고 싶다.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교회와 하나의 신앙의 시대 이후 도래하는 종교개혁과 계몽의 시대는 보다 세속적이고 다양한 진리들을 생산해냈던 시대다. 말하자면 장서관의 소멸은 일자적 진리가 아닌 다수의 진리가 탄생하고 인정 받는 시대였다는 말이다. 사실 매우 소설 외적인 이야기가 될 수 밖에는 없는 이런 이야기는 유일한 진리의 부정이 결코 진리 자체의 부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진리의 문제

그렇다면 일자적 진리가 아닌 그러한 진리는 어떤 것인가? 나는 이에 대해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주장을 소개함으로써 답하고자 한다.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는 다수의 진리다(정치, 과학, 예술, 사랑). 진리는 우리 주위의 상황 혹은 세계 내에서 인정 받지 못하던 것들(공백)이 어떤 사건을 통해 드러난 이후, 이 사건에 감화된 주체들이 이 사건의 존재를 선언함을 통해 구축해 나가는 일종의 무한한 과정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는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 예를 들어, 한 때 진리로서의 성격을 가졌던 기독교는 예수 사건에 대한 바울의 선언 이후 지속적으로 이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것을 인정받는 과정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제도로서 정착된 이후 이 종교는 과거의 운동적 성격을 접어버리고, 체제와 함께 과거의 것들에만 종속되어 있는 모습을 띄게 된다. 이 때 기독교는 진리로서의 성격을 닫아버린 것이다. 또한 진리는 언제라도 악이 될 수 있다. "장서관은 진리도 증거하고 허위도 증거하는 곳이오!"라는 호르헤의 말은 매우 설득력을 지니는 말이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잔혹행위와 대량학살이 일자적 진리의 이름으로 자행되어 왔던가.***** 바디우는 <윤리학>이라는 저작을 통해 진리가 악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란 확고한 것이 아니라 매우 유약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진리는 결코 위계화된 질서가 아닌 평등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바디우가 말하는 정치적 진리는 더 이상 주인과 예속된 자의 관계가 아닌 평등이라는 이념을 지향한다. 비록 절차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완성되었을지언정 결코 사회적 위계화와 예속의 관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오늘날의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호르헤가 두려움에 떨며 말하는 "스스로 주인으로 여김으로써 그 주종 관계를 역전시킬 수도 있는" 가능성이 도래하게 할 용기를, 말하자면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웃음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윌리엄의 말 그대로 웃음은 "이성에 반하는 불합리한 명제의 권위를 무화시키는 데 아주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으며, "사악한 것의 기를 꺽고 그 허위의 가면을 벗기는 데 요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껏 웃자. 악한 것을 정의롭지 못한 것을, 불합리한 것을 마음껏 비웃으며, 사자가 될 용기를 가지자.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이 시대를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명령이다.

* 윌리엄 수사의 바스커빌이라는 이름은 이런 특성을 대변한다. 셜록 홈즈가 등장하는 <바스커빌의 개>라는 작품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이 문구는 베드로에 대한 말이다. 마태복음 16:18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이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가 시몬에게 베드로 즉 Petrus를 교회를 쌓아올릴 반석으로 말하는 장면이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농담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너는 돌맹이다', 즉 '너는 돌대가리야' 정도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물론 이 발언이 충직한 성격의 베드로를 비하한다기 보다는 그의 성정을 칭찬하는 의미이기는 하나, 여전히 농담으로 볼 수 있다.  
*** Aakash Singh. ≪Laughing at Politics: Rethinking Plato's Republic≫. Dialegesthai. Rivista telematica di filosofia [in linea], anno 6 (2004) [inserito il 30 maggio 2004],http://mondodomani.org/dialegesthai/asi01.htm
**** 플라톤이 그려내는 소크라테스는 argumentum ad absurdum 혹은 reductio ad absurdum이라는 방식으로 부조리에 대해 비웃는다. 이것은 우리가 귀류법이나 간접 증명법이라 말하는 방식인데, 고전 수학의 증명을 담보하는 배중률(principle of excluded middle)과 관련된다.  
***** 우리는 십자군 전쟁 당시 아랍인들의 학살을 자행했던 자들의 구호가 "God wills it!(신이 원하신다!)"였음을 기억한다. 그리고 국가 이데올로기를 위해 혹은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고문 당하고 학살된 자들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 한 가지 덧붙이는 뱀발. 이 책에서 웃음의 문제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말한다면 잔소리가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윤기 선생의 번역이 너무 근엄한 문체로 쓰인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사실 이 문제는 성서나 플라톤 저작집의 국내 번역판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는 문제다. 앞으로 개선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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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방클 2017-06-09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뱀발도 생각거리네요. 웃음의 참기능, 권위주의와 체재의 폭력성에 대항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알리는 내용의 책인데 문체 자체가 너무 권위스럽지 않나..라는 생각이신거죠. 저도 어느 정도는 동의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읽기에 이윤기 선생의 번역이 좀..) 다만 픽션의 문체가 딱딱한지 부드러운지는 꽤나 주관적인것이어서. 이윤기 선생님의 나름 고어(?) 체스러운 번역이 사실 조금 괴팍해서 픽 웃음이 나올 때가 있는데, 그렇게 보면 역설적으로 꽤나 가벼운 것이 그분의 문체가 아닐지 모르겠네요. ^^;;
 
민음사 모던 클래식 52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홍서연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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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에르 아덴스(Pierre Athens)*는 모든 맛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왕이다. 가장 탁월한 음식 비평가인 그의 손을 거쳐 각종 식당들은 새로운 명성을 얻기도 하고 영락의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그의 손이 쓰는 글, 각종 잡지와 신문들의 음식 비평란에 자리한 그의 글에 의해 어떻게 평가를 받는가에 따라서 말이다.  요식업계 업주들 그리고 요리사들을 지배하는, 그리고 그의 뒤를 잇고자 하는 새로운 미식 비평가들의 추앙을 얻는, 그는 식탁을 정복하는 군주다. 물론 그의 욕망(gourmandise)는 단순히 식탁에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자다. 사회적 자본, 경제적 자본, 그리고 아내 안나 이외의 여자들, 수위실을 지키고 있는 르네(바르베리의 다음 작품 <고슴도치의 우아함>에서 중심적인 인물)가 혐오하는 모든 것을 가진 '부자'. 그러나 모든 것을 소유한 '주인'도 비켜갈 수 없는 것, 바로 죽음이 그를 찾아온다. 그는 왕이다. 죽어가는 왕이다. 그리고 마침내 피에르 아덴스의 총아 조르주는 말한다. "왕은 죽었다. 왕 만세."**


48시간이 남아있는 그의 삶, 그 남겨진 시간 동안, 그는 기억을 돌이킨다. 기억 속의 가장 좋은 맛을 찾아서, 최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삶이 남긴 궤적을, 그 기억의 편린들을 되짚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이 지고한 왕, 그러나 지금은 죽어가고 있는 이 '주인(le maitre)'이 남기는, 이 취향 또는 맛(gout)의 '그리스도'가 남기는 '골고다의 길'과 '최후의 만찬'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기억을 찾기 위해 필사적이며, 그리고 그를 둘러싼 신민들은 애도의 감정에 취해있음을 보지만, 불경스럽게도 우리에게는 몇 가지 묻고 싶은 것들이 있다.


2.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질문이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우리가 가진 질문들 보다 더 이전의 질문들이 있지는 않은가? 말하자면 이 소설 자체가, 이 맛의 주인이 자신이 찾고자 하는 맛 또는 욕망이 무엇인지에 대해 반복적으로 묻고 있지 않은가? 주인은 말한다.


그러나 이것도 내가 찾는 것은 아니다. 나는 왕이 되어 벌였던 향연들의 화려함 속에 잊히고 묻힌 감각들을 기억에 노출시켰고 내 소명을 향한 첫걸음을 소생시켰으며 내 어린 영혼의 향기를 살려 냈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다. 이제 촉박한 시간이 내 최종적인 실패의 불분명하지만 무서운 윤곽을 그려 보인다. 나는 포기하고 싶지 않다. 기억하기 위해 이루 말할 수 없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이처럼 나를 비웃는 그것이 결국 맛없는 음식이라면? 


주인이 무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주인은 알고 있는 사람이다. 방대한 지식을, 모든 지식을 가지며,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자가 바로 라깡이 말하는 '주인의 형상'임을 우리는 잊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묻고 있다. 무엇인가를, 그의 욕망이 무엇인가를, 그의 삶의 경험 속에서 가장 좋았던 맛이 무엇인가를 묻고 또 묻는다. 그리고 심지어 그 물음으로 인해 그의 이름 피에르(pierre)가 의미하는 바***와는 달리 흔들리는 감정 상태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주인은 묻는 사람이 아니라 대답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반복적인 물음은 오히려 '히스테리증자의 형상'에 해당한다. "진리는 내 입을 통해서 말하고, 나는 여기 있어요. 당신은 알고 있을 테니, 내가 누구인지 말해봐요." 주인이 모든 지식을 동원해 아무리 대답을 해 봐도, 그 대답은 결코 히스테리증자의 물음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일종의 분열과 겹침이다. 소설을 잘 살펴 보면 피에르 아덴스가 화자로 등장하는 장에서는 언제나 각 장의 말미에 떨어진 공간(혹은 간극)이 존재한다. 기억을 더듬는 지식의 주인과 이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는 히스테리증자의 분열을 상징하는 간극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 듯이 이 두 형상은 한 사람에게서 유래한 것이며 결코 서로 떨어지지 못한다. 물음도 그에 대한 대답도 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여기에서 우리는 겹침을 본다.


3. 이 분열/겹침에는 대결이 있다. 하나에서 나온 둘, 이 둘의 관계는 결국 불화, 갈등, 대결일 수 밖에 없다. 두 같은 것(double)은 언제나 한 편의 소멸을 요구한다. 대결, 그로 인한 일종의 나선적인 변증법적 운동. 그렇다면 이 대결의 승자는 어느 편인가? 이에 대한 답은 어느 편도 아니라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결국 이 죽어가는 주인은 찾고 있던 신적인 맛에 마침내 도달한다. 슈케트(chouquette), 바로 그가 찾던 지복의 쾌락의 이름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지양 또는 승화 또는 숭고(sublimation)를 보게 된다. 


우리 환상 깊숙이 자리 잡은, 진정한 나 자신만이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중심점인 슈케트는 나를 살게 하고 존재하게 하는 힘의 승천이었다.... 그토록 오랜 방황 끝에 나는 죽음의 시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슈케트를 다시 발견한다.... 문제는 먹는 것도, 사는 것도 아니고 그 이유를 아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슈케트의 이름으로, 아멘. 나는 죽는다.


슈케트란 마치 '성령'과도 같은 것이며, 그의 삶의 힘이었다. 슈케트는 숭고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견 그의 마지막 삶의 변증법적 운동은 히스테리증자의 물음에 만족스러운 대답에 이른 듯 하다. 말하자면 주인과 히스테리증자의 최후의 대결이 마치 주인이 답을 제시하여 이 최종 심급에서 승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슈케트란 무엇인가? 양배추(chou)를 닮아서 이름 붙여진 과자, 그것도 안에 크림이 들어간 슈크림(chou a la creme) 보다도 못한 그저 밀가루로 만든 슈 위에 설탕을 뿌려 놓은 것이다. 심지어 그는, 그것도 모자라, 제대로 된 음식점 르노트르(Lenotre)에서 만든 것도 아닌, 가장 대중적인 마트에서 파는, 습기로 설탕이 녹아내려 눅눅해지고 끈적거리는 그런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기억한다. 그가 이와는 다른 말을 하고 있음을.


그런데 만약 이처럼 나를 비웃는 그것이 결국 맛없는 음식이라면? 프루스트의 그 가증스러운 마들렌, 저주받은 흐릿한 오후의 산물인 산만하고 기묘한 과자, 최대의 모욕처럼 한 숟가락의 차 속에 남아 습기를 빨아들이는 마들렌 조각처럼 내 기억은 어쩌면 결국 하찮은 음식에 연결되어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거기 얽힌 감정만이 소중한 음식. 산다는 것의 알 수 없는 선물을 계시해 줄지도 모르는 음식.


그가 항상 슈에 대해 반대하는, "파괴적인 보복성의 비평"을 썼음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슈케트는 프루스트의 마들렌 보다 더 '가증스러운' 어떤 것이다. 주인은 비록 만족스러운 대답에 이르지만 그것은 극도의 자기 부정의 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3항 변증법이라는 완전한 삼각형적 운동의 좌초를, 그리고 변증법적 운동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네번째 4항을, 한편으로 '성령'의 지위에 올려지는 슈케트라는 '비어있는 이름'에 속한 어떤 다른 차원을 보게 된다. 바로 주인의 자기 부정, 우리 모두의 삶 또는 현실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을, 역설, 비일관성, 혹은 공백이라 명명할 수 있는 것을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성자'의 형상을, '최후의 만찬'을 열고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게 된다.  


4. 그리스도, 어떤 그리스도인가? 칸트와 그의 뒤를 이은 헤겔이 제시하는 미학적 차원의 그리스도인가? 분명히 그는 일종의 예술적 천재다. 그리고 무엇보다 칸트의 취미판단 혹은 <판단력 비판>은 취향 혹은 '맛'을 둘러싸고 구축된다. 모든 사람의 공감을 얻는, 그들과 공유할 수 있는 공통감(sensus communis)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재능 혹은 선물(gift)를 받은 자다. 그런 천재는 분명 미학적인 무한 또는 초월적인 것의 육화로서의 의미를 지니며,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그런 미학적인 '그리스도'가 아닌 또 다른 의미에서의 '그리스도'를 본다. 어떤 영웅의 모습을, 그가 욕망하는 것이, 그가 끝까지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 설령 그가 가장 혐오하는 것, 또는 추문(scandal) 또는 십자가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 그런 영웅의 형상. 소설의 후반부에는 일종의 '골고다의 길'이 나타난다. 


'날것'이라는 장에서 드러나는 왕의 감정적 동요는 '거울'이라는 장에서 제시되는 타인의 식사의 완전함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진다. '거울'에서, 그는 데트레르 삼촌이 칩거하는 오두막을 방문하는데, 거기에서 삼촌은 완전함에 한없이 가까운 모습으로 새우와 쌀을 조리하고, 그가 보는 앞에서 포도주와 함께 완전함에 가까운 식사를 한다. "먹는 것은 쾌락의 행위이고 이 쾌락을 글로 쓰는 것은 예술 활동이지만 진정한 단 하나의 예술 작품은 결국 타인의 식사다." 그러나 완전한 식사, 그것은 '거울'에 비친 모습과 같이 재현적인, 타인에 의해 투영된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가 이 장 이전에 추구하던 욕망 역시 바로 이러한 타자적인 투사(projection)에 의한 것이었을 뿐이다. 물론 소설에서 이에 대한 자기 고백이 나오지는 않지만, 이후에 그가 가게 될 골고다의 길, 자기 부정의 길은  바로 자신의 욕망이 타자에 비친 욕망이라는 인식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거울'이라 명명된 장 이후에 그가 찾아헤매이는 것들이 과연 무엇인가? 그는 자신의 주인으로서의 지위에 어울리는, 다시 말해 자신이 원하는 '그것(the thing)'이 아닌 타자들이 그의 지위에 투영하는 모든 진미를 쫓아가지 않는다. 그가 따라가는 길은 평범한 것들, 즉 '빵', 어떤 '농가'에서 농민들과 함께 하는 시골식 식사, 녹인 버터와 함께 구운 미국식 '토스트',  미식가의 입맛을 돋우는 포도주가 아닌 술꾼들의 친구 '위스키', '아이스크림', 수퍼마켓에서 살 수 있는 평범한 '마요네즈',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시'와도 같은 슈케트로 이루어진 (적어도 미식가로서의) 그가 부정하고 싶은 가장 평범한 음식들의 경로일 뿐이다.***** 


5.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마치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익히 들어왔던 우화 '벌거벗은 임금님'의 자기고백과도 같은 것이다. 자신의 근원적인 결핍과 욕망에 대한 탐구 그리고 동시에 자기고백. 하지만 그는 정직하다. 최소한 자신의 욕망에 정직하다. 그리고 타인에게 정직하다. 


어떻게 이만큼 자기 자신을 배반할 수 있는가? 권력의 부패보다도 더 심한 어떤 부패가 쾌락의 명백성을 이처럼 부인하고 우리가 사랑했던 것을 치욕스럽게 만들고 이처럼 부인하고 우리가 사랑했던 것을 치욕스럽게 만들고 이만큼 우리 기호를 변형시키는가? 나는 열다섯 살이었고 그 나이에 그러하듯이 허기진 배를 안고 학교에서 나오곤 했다. 분별력 없고 야만적이었지만, 오늘에서야 떠올리건대 그때 내겐 마음의 평온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 저작 모두에 그처럼 잔인하게 결핍된 것이다. 오늘 저녁, 슈퍼마켓에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슈케트를 위해서라면 후회 없이, 회한의 그림자도 없이, 애석함의 유혹도 없이 줘 버릴 내 모든 저작.


공백의 분출과도 같이, 하나의 섬광과도 같이 계시된 슈케트는 피에르 아덴스에게 있어 하나의 선물(gift)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의 모든 저작을, 그가 교환의 경제 위에 구축한 비평의 왕국을 '후회 없이' 빠져나올 수 있는, 그 왕국의 기초가 된 재능(gift)을  아무런 '애석함의 유혹도 없이' 던져 버릴 수 있는 그런 선물.****** 바로 그런 것이 누군가가 '빈약하다(thin)'는 말로 평하는 이 <맛>이라는 소설이, 결핍과 욕망의 자기고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왕위의 승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저 순전히 왕의 정직함에 대한 찬사를 보낼 것이다. "왕은 죽었다. 왕 만세.(The king is dead. Long live the king.)"        


* 소설에서 그르넬 거리에 위치한 고급 주택의 한켠을 차지한 방에 가만히 누워 기억을 더듬고 있는 한 사람의 이름이다. 이 책에서는 이 이름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는데, 뮈리엘 바르베리의 소설을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몇 가지를 훓터 보고 이 이름을 찾았다. 아마도 바르베리의 다음 소설 <고슴도치의 우아함>에서 제시된 것으로 보인다.  

** 조르주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왕은 죽었다. 왕 만세." 이 말은 만일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면 매우 역설적으로 들리는데, 실은 앞의 왕과 뒤의 왕은 같은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다. 혹시라도 이 말에 맞는 상황을 보고 싶다면, 리들리 스콧의 <로빈 후드>를 보라고 말하고 싶다. 리차드가 죽고 프랑스에서 회수된 왕관이 돌아왔을 때, 리차드의 어머니 엘리노어는 존에게 관을 씌우며 이런 말을 한다. "The king is dead. Long live the king." 그런 의미에서 이 말에서 우리는 조르주의 왕위 계승에 대한 욕망을 본다.

*** 피에르(pierre)는 성서에서 온 이름이다. 예수의 제자 베드로의 이름, 흔들리지 않는 반석 또는 큰 바위를 의미하는 이름. 

**** 어쩌면 프랑스어 판 제목 <Une Gourmandise>가 여성형 명사라는 점과 히스테리증자를 연관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단순히 보자면 이 단어는 식도락, 진미, 욕망을 뜻한다. 하지만 히스테리증자의 형상은 라깡 정신분석에서 남성 보다는 여성으로 상정되며, 이 소설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 '주인'의 지식과 대답 보다는 '히스테리증자'의 물음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여성형 명사라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 어찌 보면, 그가 각 장의 제목으로 만나는 그 평범한 것의 기억들은 '계시'와 같이 떠오른 슈케트를 정점에 두는(또는 십자가로 두는) '그리스도'의 수난과도 같은 것이다.

****** 그런 의미에서 "왕은 죽었다. 왕 만세"라는 조르주의 말을 다시 새겨볼 수 있을 것이다. 그저 액면 그대로라면 왕의 육체적 죽음을 말하는 이 선언은 왕이 스스로 자신의 지위에서 스스로 물러남을, 자신의 왕국을, 교환의 경제를 벗어남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벗어남은 법칙이나 의미를 벗어난 선물인 슈케트에 의해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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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렌마트 희곡선 - 노부인의 방문.물리학자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5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김혜숙 옮김 / 민음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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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렌마트 희곡선] 노부인의 방문, 물리학자들 - 드러나는 현실의 역설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이 두 희곡, <노부인의 방문Der Besuch der alten Dame>과 <물리학자들Physiker>은 단순히 읽어뒤서 좋다거나 읽어서 손해 볼 일이 없을 그런 것이 아니라 읽어두는 편이 좋을 작품들이며, 특히 <노부인의 방문>의 경우 정의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 과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지 의심스럽고, 아마도 그렇지 않다면 과연 그걸 사람이라고 불러야 할지 동물이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스러울 것이다 -  한 번 읽어보는 것이 좋을 그런 작품이다. 얼마 전에 민음사의 배려(연극 공연 이벤트)로 11월 12일까지 공연되는 연극을 보고 와서 무언가 써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쓰는 글이라, 이 글에서는 주로 <노부인의 방문>에 국한하여 생각해 볼 것이다. <물리학자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을 통해 이야기 하기로 한다. 


이 희곡 또는 연극은 뒤렌마트가 말하는 그대로 일종의 희극이다. 하지만 비극으로 끝나는 희극이다. 그리고 현실적이지 않은 상황설정으로 인해 일종의 부조리극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과연 연극의 상황 설정이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일까? 애초에 현실 자체가 부조리 혹은 비일관성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을까? 기실 뒤렌마트는 역설을 드러낼 뿐 현실에서 완전히 얼토당토 않은 그런 이야기를 쓰지는 않았다. 부조리극이라는 말에서 이오네스코 류의 그런 극들을 떠올린다면, 그건 너무 많이 나간 생각이다. 이제 먼저 간단히 줄거리에 대해 살펴본 후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해보자.


노부인의 방문과 정의의 요구


쇠퇴해 가는 귈렌이라는 도시가 있다. 한 때 그런대로 괜찮은 소도시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쇠퇴해가는, 공장들이 문을 닫고, 기차들 마저도 완행 열차를 제외하고는 서지 않는 그런 도시. 이 도시에 세계적인 부호가 방문한다. 이 마을 출신의 클레어 자하나시안이란 노부인.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 노부인에게서 무언가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얻어내려고 안달이다. 마침 마을에는 오래전에 노부인과 연인 사이였던, 아직 이 여자가 클라라 베셔라는 이름의 소녀였을 때, 사랑하는 사이였던 한 남자(알프레드 일)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남자에게 기대를 건다. 어떻게든 노부인의 환심을 사 마을의 사정을 개선시키기 위해서.


노부인은 이 소도시에 10억 마르크라는 엄청나게 큰 돈을 쾌척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정의를 사고 싶다는 것. 그녀는 오래 전에 아이를 가진 채로 이 마을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알프레드 일의 아이를. 일은 법정에서 두 증인 - 슈냅스라는 술 한병에 매수된 - 를 내세워 클라라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는 위증을 통해, 그녀가 마을을 떠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는 당시 지금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잡화상 집 딸과 결혼하기 위해, 돈에 눈이 어두워 그런 짓을 했던 것이다. 이제 우크라이나 석유부호의 미망인 클레어 자하나시안으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이 당했던 바로 그 일에 대한 정의를 사고 싶다는 것이다. 바로 알프레드 일의 목숨 - 이를 위해 그녀는 관을 가지고 왔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 거부한다. 그들은 교양있는 사람들이니까.


갑자기 마을의 사정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빚을 내어 물건들을 사고 마을은 갑자기 좋은 옷들과 이전에는 결코 만져볼 수 없었던 물건들로 넘쳐나기 시작한다. 마을은 좋아지고 있다. 모두가 들 떠 있지만 알프레드 일은 불안을 느낀다. 경찰서장(법), 시장(정치), 신부(종교)를 찾아가지만 그들은 그저 일이 망상에 빠져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두려움에 빠진 그는 마을에서 떠나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역에 나와 그를 환송한다/막아선다. 물론 마을 사람들에게서 구체적인 악의를 찾을 수는 없다. 뒤렌마트의 말처럼, 그들은 "일을 죽이겠다고 마음먹고 빚을 쌓아 간 게 아니라, 경솔하게도 모든 게 잘 해결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가 악화되기 시작한다. 마을 대표들이 투자를 제안하고자 방문했을 때, 노부인은 이미 그런 투자에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이미 마을의 모든 땅, 모든 건물, 모든 공장과 광산이 그녀의 것이고, 마을을 쇠락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했던 공장 및 광산 폐쇄는 바로 그녀의 결정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자명해진다. 알프레드 일의 죽음이 없는 이상 마을 사람 모두는 빚더미에 앉게 되는 것이다. 일의 부인과 자식들 마저도. 이제 일의 죽음은 기정사실화 된다. 방법의 문제가 남았을 뿐. 경찰서장은 권총을 주며 자살을 권고하지만 일은 거부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공회에서 결정된 사항에 따라 마을 사람들의 손에 죽는다(정확하게 어떻게 죽는지에 대해서는 특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10억이라는 엄청나게 큰 돈을 마을에 넘겨준 후 일의 시신을 관에 넣어 마을을 떠난다.


욕망의 삼각형, 희생제의, 의미화, 그러나 의미화에서 벗어나는 한 사람


손 쉽게 이 희곡 혹은 연극의 내용을 정리해 볼 수 있는 방식은 르네 지라르가 말하는 욕망의 삼각형에 따라 일종의 희생제의의 틀을 가정해 보는 것이다. 지라르에 따를 때, 주체의 대상을 향한 욕망은 일종의 모방 혹은 미메시스에 따른 매개된 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하게 동일한 대상을 욕망하는 경쟁자가 나타나게 되고 주체와 경쟁자 사이에는 갈등 관계가 들어선다. 이 두 주체들 간의 갈등 관계가 심화됨에 따라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고, 사회는 이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일종의 종교적 제의를 통해 외부에서 온 누군가를 희생물로 만든다. 이 때 희생제물이 되는 자는 결코 그를 희생시킨 자들에 대한 복수의 능력이 없어야 하며(말하자면 복수를 해 줄 수 있는 유력한 가족, 단체 등), 희생제의가 끝난 이후 어떤 숭고한 종교적 대상으로 만드는 의미화를 거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희생제의는 어떤 드러난 폭력을 막기 위해 집단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내재적이며 잠재적인 폭력이다.


먼저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노부인, 일, 마을 사람들이 구성하는 삼각형에서 일이 일종의 희생물이 되는 비극적 결말이다. 노부인, 즉 클레어 자하나시안과 일은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정의를 촉구한다. 그리고 그 경쟁에서 상대적으로, 아니 절대적으로 힘이 약한 한 편이, 다시 말해 알프레드 일이 희생물이 된다. 물론 일은 공동체 내부의 사람이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작품의 시작부터 일에 대한 일종의 외부화 혹은 소외가 점증적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종국에 그는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는다. 그는 철저히 외톨이가 된 채로 마을의 공회 장소로 걸어들어간다. 그리고 그 결정에 따라 희생제물이 된다. 이 과정은 철저히 종교적이다(마을 신부가 죽임을 당하러 들어가는 일에게 축성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실제적으로 클라라 베셔에게도, 즉 아직 마을을 떠나기 이전 어린 시절의 노부인에게도 적용되었던 것이다. 그녀가 일의 아이를 가져 그 아이의 친부확인 소송을 했을 때, 그리고 그 소송에서 져 마을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철저하게 외토리였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외면 당했다. 그 때도 두 사람은 동일하게 모종의 정의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 경쟁에서 탈락한 그녀는 희생제물이 되어 마을 떠난다. 물론 그녀의 재산으로 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노부인은 이후 하나의 의미가 된다. 일종의 고정된 기표, 아니 하나의 장소, 모든 것을 소유했기에 더 이상 소유할 것도, 변할 수 있는 것도 없는 부동의 장소.


하지만 이런 구도에서 벗어나는 것이 있다. 바로 정의의 문제, 클레어 자하나시안이 엄청난 돈으로 사고자 했던 정의가, 알프레드 일이 마을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정의가, 혹은 마을 사람들이 일의 죽음을 두고 "정의가 이루어졌다"라고 할 때 그들이 말하는 정의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정의는 같은 것이면서도, 공통적인 것으로 치부하기에는 어딘가 나머지를 남기는 듯 한 느낌을 준다. 과연 이들이 말하는 정의는 무엇인가,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애초에 정의 그 자체는 무엇인가?


정의의 문제 - 정의 자체가 의미 혹은 상징 체계에서 벗어난 것


노부인은 말한다. "조건을 말하지요. 여러분에게 10억을 주고 정의를 사겠습니다.... 살 수 없는 건 없어요.... 내게는 정의를 향유할 능력이 있어." 일이 샀던 정의 역시 어떤 대가가 있는 것이었다. 그가 노부인에 의해 눈이 멀게 되고 거세된 두 위증자에게 주었던 슈냅스 한 병. 물론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크기의 간극이 존재한다. 하지만 단순히 차이나 정도의 문제가 아닌 있음과 없음의 문제로 인식할 때 그들 각각은 무엇인가와 정의를 바꾼 것이다.


누군가 정의를 말할 때, 또는 요구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개별자 혹은 단독자로서의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세월이 하수상하다', '때가 아니다', 혹은 '시간이 탈구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개별자의 유한한 시간으로, 개별자의 유한한 차원으로, 정의라는 이념은 끌어내려지고, 유한화된다. 클레어 자하나시안과 알프레드 일 두 사람 모두 마찬가지다. 그들이 요구하는 정의는 결국 자신의 문제와 결부된 유한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정의는 결코 그러한 유한의 차원에서 이야기 될 수 없는 것임을. 정의를 말하거나, 구체화하기 어려운 것은 그것이 결코 유한한 차원에만 묶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한한 차원 내에 실현되지 않는다면(가령 법과 같은) 그러한 정의는 그저 말로만 회자되는, 언제나 그 도래가 미뤄지는,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정의일 뿐이다.


그렇기에 정의를 말할 때 결코 법과 분리시켜 이야기 할 수 없다. 하지만 법적인 정의는 과연 정의인가? 클라라 베셔의 판결을 생각해 보라. 결코 불법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법적인 절차와 근거에 의해 내려진 판결을. 클라라 베셔는 그 합법적인 판결로 인해 마을을 떠나게 된다. 알프레드 일의 죽음은 또 어떤가. 마을의 공회는 일종의 관습법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분명히 그 전통 안에서, 만장일치로 의결된 그의 죽음은 결코 불법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 분명히 합법적인 불의라는 점에 대해 다른 말을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불의를 되돌리기 위한 정의의 요구는 어떤 것인가? 클라라 자하나시안은 10억의 돈으로 과거의 불의를 되돌릴 정의를 사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돈으로 살 수 있는 정의, 거래가능한, 유통가능한, 상품과 같은 정의는 되돌려 줄 수 있는*, 보상가능한 물건과 같은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보상적/징벌적 정의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복수, 또는 서로에게 유통되는 또는 순환되는 폭력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게다가 그런 폭력 또는 복수의 효과는 단순히 알프레드 일을 향한 것만도 아니다. 10억이란 돈에 사람의 목숨을 팔아치운 귈렌 시민들에게도 동일하게 향하고 있다. 

* 여기에서 되돌려 준다는 말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은 물건이나 돈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돌려준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지만, 복수를 의미할 수도 있다.


오히려 우리가 이 '우화'에서  정의에 근접한 어떤 것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은 알프레드 일의 태도의 변화일 것이다. 그는 이 모든 일들을 마치 운명과 같이 받아들이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결코 운명이 아니며, 그는 이 어떤 운명과도 같은 의미화에서 빠져나간다. 이것은 결코 그가 어딘가로 도망쳤다거나, 시민들의 결정을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동료 시민들에게 불의한 자로 취급받고 희생제물 또는 인신공양(homo sacer)이 될 지언정, 결코 자살을 선택하지 않는다. 만일 차라리 경찰서장이 건넨 권총으로 자살하는 길을 택했더라면 그는 귈렌 시민들에게 좋은 이웃으로 기억되어, 어떤 의미로 남았을 것이다. 단순히 카프리 섬의 별장의 정원을 장식하는 노부인 자하나시안의 수집품으로서만이 아니라 말이다. 그는 마치 소포클레스의 영웅이 그랬던 것처럼 의미화의 체계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의 최후의 장면은 의미심장하다.(오이디푸스 콜로노스에서 오이디푸스의 죽음의 장면이 불명확하듯이, 일의 최후 역시 분명하지 않다.) 정의란 오히려 그런 것이다. 무한의 영역에 속하기에 결코 유한한 지식의 체계 내에서 잡히지 않는 것.


연극, 연극 이념


지금부터는 연극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한다. 연극으로 무대에 올려진 희곡을 연극으로 본다는 것은 희곡 자체와는 또 다른 것이다. 알랭 바디우는 <비미학>에서, 연극에 고유한 예술적 이념으로서의 연극 이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연극 이념은 대사나 시 안에서는 불완전하다. 이는 연극 이념이 그 안에서는 일종의 영원성 안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 이념은, 영원한 형상 안에 있는 상태로는 아직은 연극 이념이 아니다. 연극 이념은 (짧은) 공연 시간 속으로만 온다." 연극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희곡은 기본적으로 극화되어 무대 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불완전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뒤렌마트의 희곡들 역시 그럴 것이다. 노부인과 일, 경찰서장, 교장선생, 교구 사제를 위시한 모든 마을 사람들의 대사와 몸짓의 우연 속에서, 그리고 우연히 공연을 보러온 관객과의 호흡 가운데 연극은 뒤렌마트가 전달하고자 하는 삶의 역설을 전달한다. 이 희곡은 원래 3막으로 구성된 꽤 긴 연극이다. 그러나 극장에서 본 연극은 약간의 단순화와 압축, 그리고 중요한 대사 및 동작들의 반복을 통해 재해석되었다. 그 효과는 기본적으로 희극인 이 연극의 분위기를 배가했고, 노부인 자하나시안의 잔인함과 유머, 일에 대한 사랑의 기억들을 단순히 희곡을 통해서 보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전달했다. 그런 의미에서 "연출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해석이 아님을 이해해야만 한다. 극 행위는 연극 이념을 완성시킬 수 있는 한 번의 기회이다." 연극은 영화와 달리 매회 다른 것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연극에서는 무대 장치나 배경막 등이 거의 쓰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앉을 자리가 먼저 깔려있고, 이후 노부인이 등장하여 앉게 될 의자만이 등장한다. 무대 우측 앞쪽에 앉은 노부인은 거의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배우들의 몸짓 혹은 의식의 혼란스러운 운동은 일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데 무대의 우와 좌를 두고 배치하여 분명한 대비를 보여주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희극적인 진행을 중심으로 점점 더 고취되는 비극적이고 운명적인 분위기를 끌어올려가는 연극에서 빛났던 것은 단순히 노부인 한 사람의 연기, 혹은 다른 모든 배우들의 잘 짜여진 동작들만이 아니었다. 무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던 관객들 역시 이 과정에 동참하고 있었으니까. "삶과 죽음 사이에 열린 공간 속에서", 이 연극은 "욕망과 정치의 관계 맺음을" 보다 압축적이고 치열하게 사유하고 있었다. 바로 연극을 통해 드러나는 정의의 역설에 대해서 말이다.



물리학자들 - 국가와 과학, 종교적 신비, 권력, 기업,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자본의 지배


이야기는 한 전원적 환경에 세워진 정신병원에서 시작된다. 세 명의 물리학자들, 지금은 미쳐버린, 현업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는 정신과적 징후를 드러낸 세 사람의 물리학자들을 수용하고 있는 정신병원. 한 사람은 스스로를 아인슈타인이라고 생각한다(본명 에른스트 하인리히 에르네스티). 바이얼린을 연주하고 스스로 아인슈타인의 외양을 갖추고 상대성에 관해 말하는 그런 사람. 두 번째 물리학자는 뉴턴이다(본명 헤르버트 게오르크 보이틀러). 그는 가발을 쓰고 자연의 법칙과 수학적 공식화에 대해 말한다. 세 번째 사람은 그 누구도 흉내내지는 않지만 어느날 갑자기 지혜의 왕 솔로몬의 방문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언제나 그의 계시와 지혜에 대해 말하는 물리학자 요한 빌헬름 뫼비우스다. 


어느날 마틸데 폰 찬트라는 귀족 배경의 저명한 곱추 정신과 의사가 원장으로 있는 이 병원에서 아인슈타인이 (또는 그를 자처하는 에르네스티가) 여자 간호사를 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수사가 시작된다. 그러나 이 사건도 어찌보면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미 1년 전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뉴턴 또는 보이틀러에 의한). 이 당혹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이 병원은 당국으로부터 원장선생이 그다지 반기지 않을 조치를 요구받게 되는데, 말하자면 이 세사람을 수용하는 이 병원은 이제 남자 간호사들이 환자들을 돌보도록 하고 수용시설에 대한 보안을 강화하는 등의 조치가 그것이다. 


한편 뫼비우스를 간호하던 여간호사는  전처와 자식들에게 버림받은 그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고 그와 함께 이 수용시설에서 나가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뫼비우스에게 함께 나가서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연구를 계속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뫼비우스의 생각은 다르다. 사실 그는 미친 것이 아니라 어떤 고민이 있는 것이다. 뫼비우스는 기실 물리학적으로 엄청난 성취를 이룬 것이다. 자신이 발견했으나 발표하지 않고 불태워버린 바로 그 이론적 성과가 국가들의 이념적 경쟁에 쓰여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스스로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것을 가장하고 스스로를 정신병원에 가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연민하던 간호사를 목졸라 죽인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어떤 이중적인 반전으로 흐른다. 


1. 그 정신 병원에는 아무도 미친 사람이 없었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은 기실 뫼비우스를 빼내 새로운 무기를 생산하는 기술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파견된 동서방의 스파이들이다(물론 그들도 일정한 성과를 이룬 물리학자들인).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인지한 그들은 스스로의 정체를 드러내고 뫼비우스를 자신의 국가로 데려가려 한다(그들의 원래 이름은 알렉 제스퍼와 조지프 아이슬러). 그러나 뫼비우스는 그들을 설득한다. "우리는 야생동물입니다. 우리를 인류에게 풀어주어서는 안되지요." 그리고 그들 모두는 정신병원에 남기로 한다. 그들의 과학이, 그들이 연구하는 자연의 법칙이, 물리학이 인류를 위협에 처하게 할 무기를 생산하게 될 것임으로. 


2. 그러나 곧 이어 드러나는 다른 하나의 사실. 곱추 병원장 폰 찬트 박사가 미쳤다는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솔로몬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내 서재에서 처음 나타났지요.... 왕의 입이 열리고 시녀인 나와 말하기 시작했어요. 왕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고 그 옛날 지상에서 누렸던 권력을 되찾으려 했어요. 그래서 뫼비우스가 왕의 이름으로 땅을 지배하도록 그에게 자신의 지혜를 드러냈던 것입니다. 하지만 뫼비우스는 왕을 배신했어요.... 황금의 왕은 명령을 내렸어요. 뫼비우스를 파면시키고 대신 지배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뫼비우스를 마취시키고 솔로몬 왕의 계시 내용을 사진 찍었어요. 마지막 페이지를 갖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처음에는 약간의 발명 내용만을 표절했습니다.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요. 자금을 모아 거대한 공장들을 세웠어요.... 나는 강력한 기업체를 구축했어요. 여러분, 이제 난 '가능한 모든 발명들의 체계'를 활용할 작정이에요."


그들은 이중적인 트랩에 빠진 것이다. 먼저 그들이 연구한 물리학이, 인류의 가장 위대한 성과들 중 하나인 과학이 국가에 예속되어 인류를 파멸에 몰아넣을 무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묶어 버린 올가미, 그리고 종교적 신비 혹은 광휘(솔로몬)와 연관된 산업 자본의 권력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는 또 하나의 올가미. 결국 그들은 무력하다. 그들은 이제 국가의 통제를 넘어선 자본의 전지구적 지배라는 무한한 과정에 쓰여지는 그저 또 하나의 장기말이 되었을 뿐인 것이다.* 

* 여기에서 생각해 볼 것은 한 사람의 천재 혹은 비범한 능력을 지닌 한 사람의 영웅에 대한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물리학자>는 이 시대에 대한 묵시적 통찰을 담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이 지닌 역설, 모순, 혹은 비일관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시작되지만 그 누구도 미치지 않은, 그러나 모두가 미친 지극히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 병원장 폰 찬트 박사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과 마찬가지로 난 미치지 않았어요."


오늘날 생각이라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범죄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뫼비우스와 그의 동료 물리학자들이 그런 태도를 드러낸다(어쩌면 뒤렌마트 자신도). 뫼비우스 자신의 과학적 발견은 하나의 범죄로, 우리 시대를 망칠 것으로 취급되며, 뫼비우스 자신은 사람들을 해칠, 그래서 우리에 갇혀야만 될 '맹수'로 스스로를 취급하고 있지 않는가? 물론 이런 부정적인 태도에 찬성할 수는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과학적 발견이 아니라, 그의 발견의 영향력이 국가 혹은 자본에 의해 사용되는 것이다. 바로 이 국가 혹은 자본에 종속된 과학에 대해 우리는 우리 시대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를 따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모든 과학적 창안은 산업화 혹은 보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돈벌이를 위한 기술이 되고, 모든 예술은 그 자체의 사유를 잃어버린 즉물적인 문화산업이 되며, 사랑은 '안전한 사랑'을 표방하는 결혼 중개 회사들과 모든 이기주의의 근저에 있는 가족주의의 결합이 된다. 물론 정치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의 현실 정치는 오늘날 제도적으로 가장 완성된 단계에 들어갔으나, 민주주의라는 이념이 거의 완전하게 자본과 이 자본을 보호하는 법에 종속되고 있는 역설에 빠져있다(기본적으로 법이 사회의 안전을, 사유재산의 안전 목표로 한다는 의미에서). 오늘날 '생각이 없는 이념'만을 유일한 이념으로 삼는 우리의 현실 정치가 의회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과 공모하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뒤렌마트의 희곡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를 가진다. 바로 역설을 통해 현실을, 바로 모든 복잡하고 불순한 것들을 정제한 실재에 관한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를 말이다. 뒤렌마트는 <물리학자들>에 첨부한 부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 역설 속에 현실이 드러난다. 20. 역설과 마주 선 사람은 현실에 노출된다." 그의 희곡 혹은 연극이 드러내는 역설, 그 역설은 부조리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으며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상징계의 질서에 구멍을 내는 것이다. 이 지극히 개별적인 한 인간, 단독자와 관련된 역설은 사실상 모든 사람과 연관된다. "16. 물리학의 내용은 물리학자의 일이고, 그 영향은 모든 사람의 일이다."


결국 뒤렌마트가 물리학 영향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국가와 자본이다. 우리는 이 희곡을 통해 뒤렌마트의 생전에나 지금에나 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의 역설을 바로 보게 된다. "21. 극작법은 관객을 현실에 노출시키는 전략을 쓸 수 있지만, 현실에 저항하거나 현실을 극복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 현실의 역설을 알게 되었다면, 결코 그것에 저항하고 극복하는 일에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된다. 결국 모든 일에 있어 문제는 두려워 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과학에 있어 과학적 발전 그리고 발견이 결코 한 사람의 천재 혹은 과학자에게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듯이(그 사후적인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정치에 있어서도 정치적 창안은 단 한 사람의 영웅 혹은 정치가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뒤렌마트에 따르자면, "17. 모든 사람과 관련되는 일은 모두가 함께 할 때만 해결할 수 있다. 18. 모든 사람과 관련되는 일은 혼자서 해결하려는 개별적인 시도는 무엇이든 실패하게 마련이다."

** 여기에서 떠올리게 되는 것은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의 비유다. 동굴 안에 묶여 있던 한 사람이 바깥을 보고 그의 동료들에게 알리는 이야기. 그러나 생각해 보자면 먼저 바깥을 본 사람을 따라 나섰던 동굴 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순순히 따라나올리는 없을 것이다. 동굴 바깥의 눈부심은 괴로운 것이고, 차라리 동굴 안에 투사된 영상을 보는 편이 더 편하고 좋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지금 당장에 부닥치게 될 여러 고민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슬라보예 지젝이 월 스트리트 시위 현장에서 행한 연설에 대해, 어떤 한 사람이 "대체 전략가들은 어디에 있는가?", 다시 말해 운동을 이끌 혹은 정치의 노선을 제시할 지도자 또는 정치가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 지젝은 이에 대해 직접적인 답변을 피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완전히 관련 없는 소리라고 할 법한 대답을 했다. 왜 그랬을까.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모든 개별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해 나가야할 생각에 달려있다. "생각이 가능한 것은 언젠간 생각되기 마련이에요." 물론 매우 다른 맥락에서 한 말이기는 하지만, 종교적 신비에 미쳐버린 우리의 병원장 폰 찬트 박사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 혹은 이념 혹은 이데아는 실천을 낳는다. 그 실천은 실패할 수도 있다. 그 실천은 결코 이전에는 없었던, 다시 말해 성공해 본 적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실패를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그 실패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 생각해 보면,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공고한 체제들 역시 과거에는 없는 것이었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그런 것이 중세의 왕이나 귀족들이 통치하던 시절에 가당키나 한 것이었던가. 


이 연극은 현실의 역설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현실을 구성하는 것들이 결코 하나로 셈해질 수 없다는 점을 드러낸다는, 즉 현실이 비일관적으로 구성된다는 의미에서, 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이념을 드러내는, 읽는 이에게 - 그리고 만일 연극으로 공연된다면 관객에게 - 충격을 주는 좋은 연극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희곡을 그저 아직 시간화 되지 않은 '영원한 형상'으로만 대했기에 어떤 고유한 연극적 이념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혹시라도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연극으로 다시 보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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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들, 자살하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8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이화연 옮김 / 민음사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인간에게 있어 죽음이란 끝을, 저편이 있지 않은 이상,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마지막을 의미한다. 죽음 앞에 인간의 모든 것은 무력하기만 한 듯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의 경험은 -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죽음의 경험이란 어떤 의미에서라도 기억할 수 없는 것이기에,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타자의 죽음의 경험은 - 끔찍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살이란 어떠 것일까? 특히 아름다운 시절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소녀들의 자살이 던지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25년의 시간이 지나 "여전히 이 나무 위 집에서, 가늘어져 가는 머리카락과 출렁거리는 뱃살을 하고" 리즈번 가의 다섯 자매들을 기억하는 이 중년의 '소년들'에게는 말이다. 

자살의 추억 - 형용모순적 어구  


이 소설은 일종의 '자살의 추억'에 대한 이야기다. 앞에서 이야기 한 그대로 죽음의 경험은 결코 자신의 경험이 될 수 없으므로, 이 자살의 추억이란 어구는 일종의 형용모순을 담고 있다. 애초에 이 소설의 제목이 그렇지 않은가. <The Virgin Suicides>라는 제목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처녀가 자살한다'(우리 말 제목에서처럼 복수가 아니라 단수다)라는 의미, 그리고 '[처녀적인 따라서] 첫 번째 자살들'이라는 두 번째 의미를 말이다. 아마도 다분 이 두 의미의 중첩을 효과를 노렸을 것으로 생각되는 작가의 작법으로부터 우리는 두 가지 의미를 추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처녀가 자살한다'. 이런 의미에 따를 때 자살은 지극히 개별적인 결정이다. 이것은 매우 개인적인 결정의 문제 - 만일 그러한 결정이라는 것이 있다면 - 로, 심리학적인 문제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자살이라는 문제를 대할 때 자살은 하나의 이상 현상이며 어떤 교정해야만 할 충동적인 것으로 처리된다. 그래서 우울증 치료제 같은 것을 처방하기도 하고, 사회가 상정하는 '정상'이라는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갖가지 문화적이고 대체적인 요법들 - 음악 치료, 연극 치료, 미술 치료 등 - 이 동원되기도 한다. 


둘째로, '첫 번째 자살들'. 첫번째라는 말은 항상 어떤 시작 혹은 기원과 연관된다. 리즈번 가 소녀들의 자살, 특히 막내 세실리아의 자살적 충동에는 기원적인 의미가 부여된다. 세실리아와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테레즈, 보니, 마리, 럭스의 자살은 주위로 번져나가는 자살적 충동이라는 전염병(혹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신비한 소문)의 확산을 위한 일종의 기원적 서사가 되는 것이다. 특히 미디어의 원색적인 재현이 더할 수록, 그리고 기자들이 자살한 자매들에게 더욱 친근해져 갈 수록("리포터들은 점차 리즈번 자매들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기 시작했고..."), 자살의 기원적 서사는 리즈번 가의 자매들의 실체나 진상과는 더욱 더 거리를 두게 되었고, 이들이 "왜 자살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리포터들은 매일 밤 방송에서 새로운 일화나 사진을 소개했지만, 그들이 찾아낸 것들은 우리가 아는 진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고, 나중에는 리즈번 자매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런 의미들은 결국 자살을 개인적인 차원으로 환원시킬 뿐이다. 자살의 성향은 정상에서 벗어난 이상 혹은 병이며, 치료되어야 할, 배제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그러나 과연 자살은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국한될 뿐인 어떤 것인가? 이들의 자살은 어떤 사회적인 차원과는 연관이 없을까? 만일 우리가 가족을 일종의 사회적 단위로 생각할 수 있다면, 특히 리즈번 가 자매들이 심각한 억압의 상황 속에 있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자살 - 사회적인 차원에서...


자살은 분명히 일종의 개인적 선택 혹은 결정의 문제를 수반한다. 그렇기에 자살의 선택에는 매우, 지극히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상황 혹은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자살이 항상 개인의 차원에서 이해되곤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어쨌든 문제를 아주 단순하게 놓고 볼 때,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선택의 문제일 것이다. 말하자면 미래를 살아야 할 어떤 희망도 없다는 문제. 


세실리아의 치료를 담당한 호니커 박사는 세실리아에게 "아가, 여기서 뭐하는 게냐? 너는 아직 사는 게 얼마나 끔찍해 질 수 있는지 알만한 나이도 아니잖니"라고 말한다. 세실리아의 답이 압권이다. "분명한 건요, 선생님은 열세 살 소녀가 돼 본적이 없다는 거예요." 이 짧은 대화로부터 우리는 이런 개인적인 어떤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자살의 이유가 있을 수 있음을 보게 된다. 


물론 자살이 항상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다루어진 것은 아니다. 죽는 것이 사는 것 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 그리고 자살의 사회적 파급력을 미루어 보자면 결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결정으로 치부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음이 사실이니까. 사회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뒤르켐의 <자살론>은 당시 자살이 개인적 차원에서만 다뤄지는 것에 반대하여 자살이라는 현상의 사회적 원인에 대해, 즉 개인적인 차원 혹은 층위를 넘어서는 사회적인 것으로부터 자살이라는 현상을 바라봐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자살론은 여러 지역 및 범주의 통계들을 사용하여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에 비해 - 예를 들어, 여성보다 남성이, 개신교인이 천주교인 보다, 가난한 자들 보다 부자들이, 기혼자들보다 미혼자들이 - 자살률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석으로, 사회의 통합과 규제를 두 축으로 하여, 네 가지 부류의 자살의 형태가 있다는 해석을 제시한다. 사회적 통합이 극도로 낮을 때, 발생하는 높은 이기적 자살, 통합이 극도로 높아질 때 발생하는 이타적 자살, 사회적 규제가 극도로 높을 때 발생하는, 숙명적 자살, 그리고 규제가 극도로 낮을 때 발생하는 아노미적 자살이 그것이다. 


물론 리즈번 가 소녀들의 자살을 위에서 제시된 어떤 유형에 바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먼저 지나치게 자살의 요인을 단순화 시켜 제시된 범주의 탓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고(어쩌면 이것은 사회학 자체가 지니는 일종의 사회 '생리학', 즉 사회를 고치는 의학으로서의 목적에 관련된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곧 이어 이야기 하게 될 다른 이유의 문제인지도 모른다(과연 아무리 복잡한 그리고 철저한 대상적 탐구를 한다고 해서 모든 '퍼즐'을 완전하게 맞출 수 있을까?). 어쨌든 그들의 자살에는 어떤 특정한 사회적 의미가 담겨있다. 70년대의 무기력한 미국, 특히 그 쇠락이 시작되는 표지였던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디트로이트 교외의 백인 중산층 마을)의 몰락이 시작되었던 것이 바로 이 시기였기 때문이다. 


리즈번 씨네 나무가 처형당하는 동안...  나무들이 감춰 줬던 획일성과 더 이상 특별한 느낌을 주지 못하는, 차별화된 건축 양식이라는 낡은 수법으로 만들어진 바둑판 위의 모든 것이 맨언굴을 드러내자, 우리가 살아 온 이 교외의 마을이 얼마나 창의성 없는 곳인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되었다. 


철저한 '대상' 혹은 '사물'로서의 자살, 그리고 신성화


하지만 이 사회적인 것 혹은 객관적인 것을 따지는 지점에 상존하는 문제가 있다. 뒤르켐은 혹은 그가 그 학문의 정립 과정에서 큰 공헌을 했던 소위 사회학이라는 학문은 자살을 일종의 사물로, 관찰을 위한 대상으로 볼 것을 주문한다. 자살을 이미 실행한 자, 자살로 생을 달리한 망자는 완전히 객관화 된 대상으로, 사회적 현상의 담보가 되는 사물로 이해될 뿐이다. 그러나 애초에 이런 시각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머리가 가늘어지고 배가 나오고 있는 '소년들'은 '나무집'에 모여앉아 한 때 리즈번 가 소녀들의 집이었던 '하얀 무덤'을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 하나의 대상들로, 유물들로 이루어진 그들의 콜렉션만이 소녀들에 '대한' 그들의 기억을 담보하는 남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모든 퍼즐 조각을 다 모았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맞춰도 항상 빈 공간이 남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 어떻게도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과 몰락의 일로에 있는 자신들의 옛 동네라는 공간을 조합하여, 그 안에서 소녀들의 기억을 신성화 한다. 


우리가 얘기를 나눈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리 동네의 쇠락이 리즈번 자매들이 자살하고 난 뒤부터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그 애들을 욕했지만 조류가 서서히 바뀌면서 그 애들을 희생양이 아닌 선각자로 여기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 애들이 자살한 개인적 이유, 스트레스 장애니 신경전달물질 결핍이니 하는 것들은 점점 잊어버리고, 대신 그 애들의 죽음을 퇴락을 예견한 선견지명 탓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베여 나간 느릅나무와 가혹한 햇빛, 자동차 산업의 지속적인 쇠퇴에서도 리즈번 자매들의 혜안을 보았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여기에서 우리는 대상화와 신성화의 공모 관계를 발견하게 되는 지도 모른다. 관찰을 위한 거리 두기, 극도의 대상화 가운데 리즈번 가의 소녀들의 자살 혹은 소녀들 자체는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거리를 지닌 일종의 물 자체(Ding ansich)가 되고 있는 것이다. 소녀들은 마치 신화 속의 예언자들 혹은 무녀들과 같은 '선견지명'과 '혜안'을 가진 존재들로 승화된다. 


숙명적 자살


어쩌며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숙명적 자살을 보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자살론>이 제시하는 범주로서의 숙명적 자살이 아닌 - 그러나 동시에 그렇기도 한 - 하나의 신성한 대상으로서의 자살을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잠시 다른 생각을 해 보자. 유제니디스라는 그리스인의 이름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의미의 고정 - 달리 말하자면 기표화 - 에, 대상화에, 그리고 동시에 그 공모관계에 있는 신성화에 저항하는 그리스의 비극에 관해서 말이다.


이 소설의 시점을 생각해 보라. 소년들이라는 집단적 화자에 의해 말해지는 이 소설의 중심되는 이야기는 왠지 고대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코러스(합창단)와 묘하게 닮아 있지 않은가.* 비극의 진행은 항상 등장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대화를 통해, 그리고 이들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고 도덕적인 해설을 수행하는 - 달리 말해, 객관성 혹은 대상성의 체제, (신들을 섬기는) 법과 전통을 말하는 - 코러스의 시선과 묘하게 닮아있다. 

*코러스에 대한 아이디어는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이 소설에 대해 위키피디아에 수록된 짧은 논평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음을 밝혀둔다.  


코러스는 극의 진행에 중심 인물은 아닐지라도, 극의 진행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이다. 코러스와 등장인물의 대화, 그리고 코러스가 제시하는 배경에 대한 진술은 분명 극 중에서 등장인물들을 '괄호' 치고 그들을 규정하여 의미를 한정하고 있다. 그러나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 우리는 코러스가 짜맞추는 "퍼즐"을 완전하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인물들을 보게 된다. 운명에 대한 저항으로 결코 대상화 혹은 의미(기표)가 되기를 거부하는 인간, 오이디푸스를, 그리고 인간의 법에 저항하고 동굴에 갇혀 산 죽음(living dead)이 되어버린 안티고네를 말이다. 이런 인물들의 주체적 태도에 의해 코러스의 객관성 혹은 대상성의 체제에 구멍을 뚫는다.

 

분명 리즈번 가 자매들의 자살은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그들은 충분히 그 집에서 나갈 수 있었다. 바로 그들이 자살하던 그 밤에,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의 독립의 순간에... 이 현대적인 비극의 코러스(소년들)이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것은 바람을 뒤쫒는 것처럼 부질없는 일일 뿐이다. 그 자살의 본질은 슬픔이나 수수께끼가 아닌 단순한 이기심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진술은 흔들리고 있다. "그 애들을 편히 잠들게 내버려 둔 채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려 애썼다." 극을 진행하는 대상성의 체제로서의 코러스가, 다시 말해 이 극의 무대 자체가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결코 이 소녀들의 자살을 짜맞춰 완전한 의미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공백, 비일관성


오히려 이 '말할 수 없는' 사건은 일종의 공백을 드러낸다. 소녀들의 죽음 이후에 있었던 사교계의 데뷔 파티에서 소년들은 그들이 만났던 다른 소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술에 취해 우리에게 키스하거나 의자에서 의식을 잃어버리는 그들은 대학교와 남편, 육아, 어렴풋이 느껴지는 불행, 바꿔 말하면 인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인생', 혹은 '어렴풋이 느껴지는 불행'이란 중산층에 속한 보통의 사람들이 보통의 삶으로서 영위하는 그런 삶이 아니던가. 나무들이 사라져 버리자, 갑작스럽게 드러난 그들이 살던 교외의 중산층 마을의, 가장 미국적인, 그러나 아무런 창의성이나 새로운 것이 없는 맨 얼굴, 대상성의 체제 내에, 그들의 삶의 원소들을 하나로 셈하던 상황 속에 포함되어 있지만 결코 셈해지지 않았던 공백 혹은 비일관성이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퍼즐은 조각들을 다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빈 곳'을 남기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자살이란 일종의 징후를 나타낸다. 자살을 개인적인 병증으로 간주하고 치료를 위해 노력하는 (자아)심리학이나 혹은 심리학적 사회학, 또는 자살을 개인적 차원이 아닌 사회적 차원에서의 대상으로 보려 하지만 여전히 사회의 병증으로 간주하는 뒤르켐의 <자살론>을 넘어서는 그런 차원에서의 징후를 말이다. 어쩌면 그런 차원에서 자살은 어떤 정치적인 의미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자살이 그 어느 때보다도 늘어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자살은 과연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가. 실험적인 관점과 서술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말하기 어려운 문제를 붙잡고 씨름한 이 유제니디스라는 작가의 작품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의 꺼리를 던져주고 있다.

** 소녀들의 자살이 어떤 정치적 변전의 계기가 되고 있는 작품이 하나 있다. 오르한 파묵의 <눈>이 바로 그것이다. 작품은 소녀들의 자살에 대한 소문과 폭설로 인한 한 지방 도시의 고립으로 시작된다. 물론 이 소설에서는 자살에 대한 의미 탐구는 이루어지지 않지만, 한 지역의 어떤 정치적, 혁명적 변동의 계기로서 제시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참 한 가지 더. 고백하자면, 이 작품을 읽기가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1999년에 제작된 영화를 먼저 찾아 보고 도움을 얻었다. 소피아 코폴라라는 감독의 작품이다. 상당히 원전에 충실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영화였고, 단 한가지 흠이라면 지나치게 럭스(커스틴 던스트)에게 시선이 맞춰진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소설에서도 럭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다른 리즈번 가 소녀들의 이야기도 같이 제시되고 있는데 영화에서는 지나치게 비중이 치우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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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歷史라는 단어를 대할 때 우리는 무심코 어떤 큰 것을 생각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라는 말을 처음으로 대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 학교에서 교과서를 대할 때이기 때문이다. 역사라는 제목을 달고 학생들의 손에 돌려지는 이 책들에는 한 나라의 혹은 지역의 역사가 실려있다. 그런 전차로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는 대부분 일종의 거대 담론으로서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 history라는 단어는 원래 단순히 이야기라는 뜻을 담고 있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진행된 이야기를 뜻하는 말일 뿐이다. 이 책의 제목, <사랑의 역사>에 기입되어 있는 이 역사 - 혹은 보다 분명하게 말해서 이력 - 라는 단어는 후자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 남자의 한 여자에 대한 사랑 이야기, 너무나 오랫동안 가슴 속에 담고 있지만, 그저 멀리서 생각하기만 해야했던 (미완성의) 사랑의 역사,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이 전달하는 의미일 것이다.


유사한 의미에서, 사람들은 대개 필연에 대해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무엇이건 어떤 이유 또는 근거, 그리고 이미 정해져 있는 행로 위에서 이미 정해져 있는 행동을 한다는 그런 생각을 말이다. 과연 사랑도 그런 것일까. 흔히들 하는 시간 떼우기 식 질문으로 이런 것이 있다. 어떤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가? 과연 어떤 두 사람의 사랑은 어떤 초월적인 힘에 의해, 혹은 예정에 의해 - 마치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는 그런 믿음과 같은 의미에서 - 정해지는 것인가? 

이전에 읽은 소설들 중에 이런 필연적인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놓은 것이 있었다. 일본의 순수 문학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해변의 카프카>, 그리고 코맥 맥카시가 쓴 <핏 빛 자오선>이 그 두 작품이다. 아버지를 찌른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열 다섯살 소년' 카프카와 고양이와 대화하는 노인 나카타의 만남, 그리고 비록 삶의 여정에서 거친 삶을 살았을지언정 미국적인 서부의 가치를 간직하고 있는 이름 없는 소년과 마치 세상의 모든 악을 채현하고 있는 듯한 능력자 홀든 판사의 만남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둘의 만남이 마치 어떤 필연과 같은 신비한 여정에 이끌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둘의 만남은 둘 중 하나의 소멸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둘의 만남이 종국에는 둘 중 하나의 필연적인 소멸로 이어지는 그러한 만남. 

하지만 사랑의 만남은 결코 둘 중 하나의 소멸이나 통합으로 이어지지 않는, 함께 하는 둘을 이루어 내는 그러한 만남이다. 하나와 하나가 만나 '둘'이 되는, 결코 성서의 말씀과 같이 '두 사람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과 같은 저 어딘가에 있는 신이 정해주는 어떤 것이 아니다. <사랑의 역사>에서 그려지는, 그리고  드러나는 두 차례에 걸친 둘의 만남은 한 번은 그저 환경과 같이, 타고난 조건과 같이 주어진 것이었고, 다른 한 번은 결코 생각할 수도 없는 우연의 우연과 같이 이어져 어떤 지연된 약속의 형식으로, 또는 늦게 도착한 우편물과 같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작품에는 모든 이야기의 발단이 된 레오폴트 거스키와 관련하여 둘로 설정된 것들이 추가적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애초에 소설 자체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각각 이어 나가다가 종국에야 그 두 개의 선을 교차시키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먼저 이 소설 <사랑의 역사>를 구성하는 이 두 이야기들에 대해, 그리고 레오 거스키와 관련된 이중적인 둘의 설정과 그의 죽음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철저하게 분리된 듯이 보이는 두 사람의 시점이 있다. 마치 이미 죽은 사람과 같이 무시당하는, 그러나 결코 없는 사람 취급 당하고 싶어하지 않는, 열쇠공 레오폴트 거스키와 아버지를 잃은 지 얼마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빈 자리를 느끼며, 자신의 어머니를 재혼 시키고 싶어하는 알마 싱어의 시점. 그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 채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기묘한,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르는, 연결고리가 있다. 레오 거스키와 알마 싱어의 약한, 그러나 모든 것을 바꿀 힘을 가진 '사랑의 역사'라는 이름의 연결고리. 

바로 여기에서 두 명의 알마 - 그의 아들을 낳았지만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버린 알마(메레민스키), 그리고 스페인어로 쓰여진 <사랑의 역사>를 번역하는 어머니에게 새로운 남자를 구해주려는 사명감에 불타던, 그러나 매우 우연한 기회에 다 늙어버린 거스키를 (다시) 만나게 된 소녀 알마(싱어) - 가 제시된다. 거스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그가 책을 쓰게 했던 알마(메리민스키)의 이름을 딴 또 다른 알마(싱어)가 말이다. 

하지만 거스키에게는 이 둘이 다가 아니다. 두 자식이, 두 잃어버리 자식이 있다. 물론, 여기에서, 두 자식 중 하나는 사람이 아니라, 그가 오래 전에 친구(리트비노프)에게 맡기고 파기하기를 부탁했으나, 그 친구가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출간했던 (그래서 남의 자식이 된) 그의 작품이며,* 다른 하나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알마는 임신 사실을 알렸으나 그는 편지를 받지 못했고, 아무런 소식이 없는 상황에서 알마는 레오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던) 남의 자식이 되었고, 평생 만난 적도 없이 살아 있다는 것만 알고 있던 아들이다. 

* 영어 식 표현에서는 누군가가 만들어 낸 창작물을 아이(baby)라고 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한 아이는 육체적으로 낳은 자식이 아니라, 그가 써낸 작품, '사랑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작품을 지칭한다.


어떤 계기에서인지는 모르나 레오폴트의 아들이며,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작가로서의 영예를 얻은 아이작 모리츠는 자신에게 생면부지의 생부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사랑의 역사'라는 책을 썼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작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 전에 아버지의 책을 읽고 싶었기에, 그는 책의 번역을 맡기게 된다. 일종의 우연. 그 책은 딸에게 알마라는 이름을 준, 리프비노프가 이디시어로부터 스페인어로 번역해 놓은 책을 사랑했기에 그 이름을 '다시' 살려 낸 다비드 싱어의 아내, 그러니까 알마 싱어의 어머니에게 던져진다.   


어린 알마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알마의, 그러니까 마치 유령과도 같이 없어지지 않고 그녀의 이름 속에 남아 있는 알마의 기억에 다가가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마치 필연과도 같은 우연을 통해서다. 괴물을 쫓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괴물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그리고 유령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유령의 생각을 이어받는 것이다. 어린 소녀 알마는 그녀의 아버지 데이비드 싱어가 지어준, 혹은 물려준, 그녀의 이름의 흔적을 따라 알마 메레민스키의 삶의 궤적을 뒤쫓는다. 어머니가 번역하고 있는 스페인어 판 '사랑의 역사'를 단초를 따라 추적한 그 궤적의 끝에는 레오 거스키가 있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한 가지 흥미로운 결론에 다다른다. 두 자식 모두 알마(메리민스키)를 통해 태어나고, 알마(싱어)를 통해 레오에게 돌아온다는 것. 


그러나 소설 속의 더블(짝패)이 언제나 그렇듯 둘은 공존하지 못한다. 아이작 모리츠는 그의 아버지의 작품의 영어판 번역을 의뢰한 그 순간에 이미 죽어가고 있었고, 읽는 동안에도 이미 죽어가고 있었고, 그리고 완전히 번역되기도 전에 죽었다. 리트비노프가 옮겨 놓은 아버지 레오폴트 거스키의 부고, 고인 또는 장차 죽게 될 사람의 부고를 보기도 전에 말이다. 레오의 아들에게 아버지는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 부고를 읽기 전에는... 아버지의 다른 아들, 그와 동일하게 아버지에게서 빼앗긴 다른 아들을 대한 그의 삶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는 것이다. 


유령과 함께, 이미 오래 전에 죽어버린 브루노와 함께, 살아가는 레오 거스키의 삶은 어쩌면 이미 스스로 부고를 작성했다는 의미에서 그 자신이 유령인지도 모를, 스스로의 말처럼 알마에 대한 사랑 속에 소진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새로운 만남이, 하지만 이것을 과연 사랑의 만남이라 부를 수 있을지 의아해지는, 어떤 위로의 만남이 주어진다. 마치 어떤 지연된 우편물과 같은, 이미 오래 전에 성취되었어야 했지만 이루지지 않은, 그러나 마치 어떤 언젠가는 꼭 성취되어야 할 약속과 같은 만남, 바로 같지만 결코 같을 수 없는 알마와의 만남이 말이다. 그리고 분명히 이 만남은 일종의 위로의 만남이며, 사랑의 만남이다.(그것이 아무리 부적절하고, 추문을 일을킬 수 있는, 모든 상식에서 벗어난 만남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애초에 사랑이란 것이 그런 것이 아니던가?) 


이 만남은 과연 필연일까? 모든 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까? 마치 필연 속에 설정되어 있던 모든 것인 듯한 이 이야기의 전개는 어떤 신비한 무엇인가를 상정하고 있는 듯한 니콜 크라우스의 이야기 방식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하지만 모든 회고적인 방식의 서사는, 이미 겪은 것을 되돌아보는 역사의 서술은 어떤 다른 가능성들을 모두 배제할 수 밖에 없는 그러한 것이다. 말하자면 일관적인 서사의 방식을 위해 다른 가능적인 경로들을 잘라내는 것, 일종의 서사적 재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역사가들은 이러한 유일한 경로에 대해 꽤 잘 알려진 말을 하곤 한다. 역사에는 그럴 수도 있었다는 것은 없다.) 

어떤 기억과 유산/상속의 문제에 천착하는 이 작가의 역량으 분명 최고의 것이다. 소설의 전개와 문체, 어디에도 나무랄 것이 없고 오히려 칭찬을 받아 마땅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일종의 귀향서사로서의 이 소설 - 자식이,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쓴 작품이 아버지에게 돌아온다는, 그리고 떠나간 여인이 차이(differance)**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온다는 의미에서의 귀향서사 - 에서, 작가는 지나치게 어떤 필연에, 신비한 분위기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다음 작품 <그레이트 하우스>는 이런 측면에서 진일보한 작품이라 생각된다. 물론 여전히 유대인의 유산/상속의 문제에 집착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는 적어도 이러한 필연성이나 서사의 일자적 재현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바라는 것은 - 그녀의 작품을 높이 사는 독자로서 - 이제 다음 작품에서는 이런 문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는 작가를 보고 싶다는 것이다. 어쩌면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 differance, 차이(差移) 혹은 차연(差延)은 다르다와 연기하다를 합해 놓은 데리다가 만들어낸 일종의 말장난이다. 영어에서는 differ(다르다)와 defer(연기하다)가 별개로 되어 있지만 프랑스어에서는 differer로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는데, 데리다는 말의 전달에서 시간적인 지연으로 인해 어떤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말이다. 이 소설의 내용에서 적용해 보자면, 알마에 대한 사랑은 시간의 지연을 통해 같은 것이지만 다른 것으로 레오에게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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