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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歷史라는 단어를 대할 때 우리는 무심코 어떤 큰 것을 생각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라는 말을 처음으로 대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 학교에서 교과서를 대할 때이기 때문이다. 역사라는 제목을 달고 학생들의 손에 돌려지는 이 책들에는 한 나라의 혹은 지역의 역사가 실려있다. 그런 전차로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는 대부분 일종의 거대 담론으로서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 history라는 단어는 원래 단순히 이야기라는 뜻을 담고 있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진행된 이야기를 뜻하는 말일 뿐이다. 이 책의 제목, <사랑의 역사>에 기입되어 있는 이 역사 - 혹은 보다 분명하게 말해서 이력 - 라는 단어는 후자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 남자의 한 여자에 대한 사랑 이야기, 너무나 오랫동안 가슴 속에 담고 있지만, 그저 멀리서 생각하기만 해야했던 (미완성의) 사랑의 역사,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이 전달하는 의미일 것이다.
유사한 의미에서, 사람들은 대개 필연에 대해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무엇이건 어떤 이유 또는 근거, 그리고 이미 정해져 있는 행로 위에서 이미 정해져 있는 행동을 한다는 그런 생각을 말이다. 과연 사랑도 그런 것일까. 흔히들 하는 시간 떼우기 식 질문으로 이런 것이 있다. 어떤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가? 과연 어떤 두 사람의 사랑은 어떤 초월적인 힘에 의해, 혹은 예정에 의해 - 마치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는 그런 믿음과 같은 의미에서 - 정해지는 것인가?
이전에 읽은 소설들 중에 이런 필연적인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놓은 것이 있었다. 일본의 순수 문학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해변의 카프카>, 그리고 코맥 맥카시가 쓴 <핏 빛 자오선>이 그 두 작품이다. 아버지를 찌른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열 다섯살 소년' 카프카와 고양이와 대화하는 노인 나카타의 만남, 그리고 비록 삶의 여정에서 거친 삶을 살았을지언정 미국적인 서부의 가치를 간직하고 있는 이름 없는 소년과 마치 세상의 모든 악을 채현하고 있는 듯한 능력자 홀든 판사의 만남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둘의 만남이 마치 어떤 필연과 같은 신비한 여정에 이끌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둘의 만남은 둘 중 하나의 소멸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둘의 만남이 종국에는 둘 중 하나의 필연적인 소멸로 이어지는 그러한 만남.
하지만 사랑의 만남은 결코 둘 중 하나의 소멸이나 통합으로 이어지지 않는, 함께 하는 둘을 이루어 내는 그러한 만남이다. 하나와 하나가 만나 '둘'이 되는, 결코 성서의 말씀과 같이 '두 사람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과 같은 저 어딘가에 있는 신이 정해주는 어떤 것이 아니다. <사랑의 역사>에서 그려지는, 그리고 드러나는 두 차례에 걸친 둘의 만남은 한 번은 그저 환경과 같이, 타고난 조건과 같이 주어진 것이었고, 다른 한 번은 결코 생각할 수도 없는 우연의 우연과 같이 이어져 어떤 지연된 약속의 형식으로, 또는 늦게 도착한 우편물과 같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작품에는 모든 이야기의 발단이 된 레오폴트 거스키와 관련하여 둘로 설정된 것들이 추가적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애초에 소설 자체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각각 이어 나가다가 종국에야 그 두 개의 선을 교차시키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먼저 이 소설 <사랑의 역사>를 구성하는 이 두 이야기들에 대해, 그리고 레오 거스키와 관련된 이중적인 둘의 설정과 그의 죽음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철저하게 분리된 듯이 보이는 두 사람의 시점이 있다. 마치 이미 죽은 사람과 같이 무시당하는, 그러나 결코 없는 사람 취급 당하고 싶어하지 않는, 열쇠공 레오폴트 거스키와 아버지를 잃은 지 얼마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빈 자리를 느끼며, 자신의 어머니를 재혼 시키고 싶어하는 알마 싱어의 시점. 그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 채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기묘한,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르는, 연결고리가 있다. 레오 거스키와 알마 싱어의 약한, 그러나 모든 것을 바꿀 힘을 가진 '사랑의 역사'라는 이름의 연결고리.
바로 여기에서 두 명의 알마 - 그의 아들을 낳았지만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버린 알마(메레민스키), 그리고 스페인어로 쓰여진 <사랑의 역사>를 번역하는 어머니에게 새로운 남자를 구해주려는 사명감에 불타던, 그러나 매우 우연한 기회에 다 늙어버린 거스키를 (다시) 만나게 된 소녀 알마(싱어) - 가 제시된다. 거스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그가 책을 쓰게 했던 알마(메리민스키)의 이름을 딴 또 다른 알마(싱어)가 말이다.
하지만 거스키에게는 이 둘이 다가 아니다. 두 자식이, 두 잃어버리 자식이 있다. 물론, 여기에서, 두 자식 중 하나는 사람이 아니라, 그가 오래 전에 친구(리트비노프)에게 맡기고 파기하기를 부탁했으나, 그 친구가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출간했던 (그래서 남의 자식이 된) 그의 작품이며,* 다른 하나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알마는 임신 사실을 알렸으나 그는 편지를 받지 못했고, 아무런 소식이 없는 상황에서 알마는 레오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던) 남의 자식이 되었고, 평생 만난 적도 없이 살아 있다는 것만 알고 있던 아들이다.
* 영어 식 표현에서는 누군가가 만들어 낸 창작물을 아이(baby)라고 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한 아이는 육체적으로 낳은 자식이 아니라, 그가 써낸 작품, '사랑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작품을 지칭한다.
어떤 계기에서인지는 모르나 레오폴트의 아들이며,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작가로서의 영예를 얻은 아이작 모리츠는 자신에게 생면부지의 생부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사랑의 역사'라는 책을 썼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작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 전에 아버지의 책을 읽고 싶었기에, 그는 책의 번역을 맡기게 된다. 일종의 우연. 그 책은 딸에게 알마라는 이름을 준, 리프비노프가 이디시어로부터 스페인어로 번역해 놓은 책을 사랑했기에 그 이름을 '다시' 살려 낸 다비드 싱어의 아내, 그러니까 알마 싱어의 어머니에게 던져진다.
어린 알마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알마의, 그러니까 마치 유령과도 같이 없어지지 않고 그녀의 이름 속에 남아 있는 알마의 기억에 다가가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마치 필연과도 같은 우연을 통해서다. 괴물을 쫓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괴물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그리고 유령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유령의 생각을 이어받는 것이다. 어린 소녀 알마는 그녀의 아버지 데이비드 싱어가 지어준, 혹은 물려준, 그녀의 이름의 흔적을 따라 알마 메레민스키의 삶의 궤적을 뒤쫓는다. 어머니가 번역하고 있는 스페인어 판 '사랑의 역사'를 단초를 따라 추적한 그 궤적의 끝에는 레오 거스키가 있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한 가지 흥미로운 결론에 다다른다. 두 자식 모두 알마(메리민스키)를 통해 태어나고, 알마(싱어)를 통해 레오에게 돌아온다는 것.
그러나 소설 속의 더블(짝패)이 언제나 그렇듯 둘은 공존하지 못한다. 아이작 모리츠는 그의 아버지의 작품의 영어판 번역을 의뢰한 그 순간에 이미 죽어가고 있었고, 읽는 동안에도 이미 죽어가고 있었고, 그리고 완전히 번역되기도 전에 죽었다. 리트비노프가 옮겨 놓은 아버지 레오폴트 거스키의 부고, 고인 또는 장차 죽게 될 사람의 부고를 보기도 전에 말이다. 레오의 아들에게 아버지는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 부고를 읽기 전에는... 아버지의 다른 아들, 그와 동일하게 아버지에게서 빼앗긴 다른 아들을 대한 그의 삶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는 것이다.
유령과 함께, 이미 오래 전에 죽어버린 브루노와 함께, 살아가는 레오 거스키의 삶은 어쩌면 이미 스스로 부고를 작성했다는 의미에서 그 자신이 유령인지도 모를, 스스로의 말처럼 알마에 대한 사랑 속에 소진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새로운 만남이, 하지만 이것을 과연 사랑의 만남이라 부를 수 있을지 의아해지는, 어떤 위로의 만남이 주어진다. 마치 어떤 지연된 우편물과 같은, 이미 오래 전에 성취되었어야 했지만 이루지지 않은, 그러나 마치 어떤 언젠가는 꼭 성취되어야 할 약속과 같은 만남, 바로 같지만 결코 같을 수 없는 알마와의 만남이 말이다. 그리고 분명히 이 만남은 일종의 위로의 만남이며, 사랑의 만남이다.(그것이 아무리 부적절하고, 추문을 일을킬 수 있는, 모든 상식에서 벗어난 만남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애초에 사랑이란 것이 그런 것이 아니던가?)
이 만남은 과연 필연일까? 모든 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까? 마치 필연 속에 설정되어 있던 모든 것인 듯한 이 이야기의 전개는 어떤 신비한 무엇인가를 상정하고 있는 듯한 니콜 크라우스의 이야기 방식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하지만 모든 회고적인 방식의 서사는, 이미 겪은 것을 되돌아보는 역사의 서술은 어떤 다른 가능성들을 모두 배제할 수 밖에 없는 그러한 것이다. 말하자면 일관적인 서사의 방식을 위해 다른 가능적인 경로들을 잘라내는 것, 일종의 서사적 재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역사가들은 이러한 유일한 경로에 대해 꽤 잘 알려진 말을 하곤 한다. 역사에는 그럴 수도 있었다는 것은 없다.)
어떤 기억과 유산/상속의 문제에 천착하는 이 작가의 역량으 분명 최고의 것이다. 소설의 전개와 문체, 어디에도 나무랄 것이 없고 오히려 칭찬을 받아 마땅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일종의 귀향서사로서의 이 소설 - 자식이,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쓴 작품이 아버지에게 돌아온다는, 그리고 떠나간 여인이 차이(differance)**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온다는 의미에서의 귀향서사 - 에서, 작가는 지나치게 어떤 필연에, 신비한 분위기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다음 작품 <그레이트 하우스>는 이런 측면에서 진일보한 작품이라 생각된다. 물론 여전히 유대인의 유산/상속의 문제에 집착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는 적어도 이러한 필연성이나 서사의 일자적 재현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바라는 것은 - 그녀의 작품을 높이 사는 독자로서 - 이제 다음 작품에서는 이런 문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는 작가를 보고 싶다는 것이다. 어쩌면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 differance, 차이(差移) 혹은 차연(差延)은 다르다와 연기하다를 합해 놓은 데리다가 만들어낸 일종의 말장난이다. 영어에서는 differ(다르다)와 defer(연기하다)가 별개로 되어 있지만 프랑스어에서는 differer로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는데, 데리다는 말의 전달에서 시간적인 지연으로 인해 어떤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말이다. 이 소설의 내용에서 적용해 보자면, 알마에 대한 사랑은 시간의 지연을 통해 같은 것이지만 다른 것으로 레오에게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