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들, 자살하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8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이화연 옮김 / 민음사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인간에게 있어 죽음이란 끝을, 저편이 있지 않은 이상,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마지막을 의미한다. 죽음 앞에 인간의 모든 것은 무력하기만 한 듯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의 경험은 -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죽음의 경험이란 어떤 의미에서라도 기억할 수 없는 것이기에,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타자의 죽음의 경험은 - 끔찍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살이란 어떠 것일까? 특히 아름다운 시절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소녀들의 자살이 던지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25년의 시간이 지나 "여전히 이 나무 위 집에서, 가늘어져 가는 머리카락과 출렁거리는 뱃살을 하고" 리즈번 가의 다섯 자매들을 기억하는 이 중년의 '소년들'에게는 말이다. 

자살의 추억 - 형용모순적 어구  


이 소설은 일종의 '자살의 추억'에 대한 이야기다. 앞에서 이야기 한 그대로 죽음의 경험은 결코 자신의 경험이 될 수 없으므로, 이 자살의 추억이란 어구는 일종의 형용모순을 담고 있다. 애초에 이 소설의 제목이 그렇지 않은가. <The Virgin Suicides>라는 제목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처녀가 자살한다'(우리 말 제목에서처럼 복수가 아니라 단수다)라는 의미, 그리고 '[처녀적인 따라서] 첫 번째 자살들'이라는 두 번째 의미를 말이다. 아마도 다분 이 두 의미의 중첩을 효과를 노렸을 것으로 생각되는 작가의 작법으로부터 우리는 두 가지 의미를 추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처녀가 자살한다'. 이런 의미에 따를 때 자살은 지극히 개별적인 결정이다. 이것은 매우 개인적인 결정의 문제 - 만일 그러한 결정이라는 것이 있다면 - 로, 심리학적인 문제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자살이라는 문제를 대할 때 자살은 하나의 이상 현상이며 어떤 교정해야만 할 충동적인 것으로 처리된다. 그래서 우울증 치료제 같은 것을 처방하기도 하고, 사회가 상정하는 '정상'이라는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갖가지 문화적이고 대체적인 요법들 - 음악 치료, 연극 치료, 미술 치료 등 - 이 동원되기도 한다. 


둘째로, '첫 번째 자살들'. 첫번째라는 말은 항상 어떤 시작 혹은 기원과 연관된다. 리즈번 가 소녀들의 자살, 특히 막내 세실리아의 자살적 충동에는 기원적인 의미가 부여된다. 세실리아와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테레즈, 보니, 마리, 럭스의 자살은 주위로 번져나가는 자살적 충동이라는 전염병(혹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신비한 소문)의 확산을 위한 일종의 기원적 서사가 되는 것이다. 특히 미디어의 원색적인 재현이 더할 수록, 그리고 기자들이 자살한 자매들에게 더욱 친근해져 갈 수록("리포터들은 점차 리즈번 자매들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기 시작했고..."), 자살의 기원적 서사는 리즈번 가의 자매들의 실체나 진상과는 더욱 더 거리를 두게 되었고, 이들이 "왜 자살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리포터들은 매일 밤 방송에서 새로운 일화나 사진을 소개했지만, 그들이 찾아낸 것들은 우리가 아는 진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고, 나중에는 리즈번 자매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런 의미들은 결국 자살을 개인적인 차원으로 환원시킬 뿐이다. 자살의 성향은 정상에서 벗어난 이상 혹은 병이며, 치료되어야 할, 배제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그러나 과연 자살은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국한될 뿐인 어떤 것인가? 이들의 자살은 어떤 사회적인 차원과는 연관이 없을까? 만일 우리가 가족을 일종의 사회적 단위로 생각할 수 있다면, 특히 리즈번 가 자매들이 심각한 억압의 상황 속에 있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자살 - 사회적인 차원에서...


자살은 분명히 일종의 개인적 선택 혹은 결정의 문제를 수반한다. 그렇기에 자살의 선택에는 매우, 지극히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상황 혹은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자살이 항상 개인의 차원에서 이해되곤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어쨌든 문제를 아주 단순하게 놓고 볼 때,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선택의 문제일 것이다. 말하자면 미래를 살아야 할 어떤 희망도 없다는 문제. 


세실리아의 치료를 담당한 호니커 박사는 세실리아에게 "아가, 여기서 뭐하는 게냐? 너는 아직 사는 게 얼마나 끔찍해 질 수 있는지 알만한 나이도 아니잖니"라고 말한다. 세실리아의 답이 압권이다. "분명한 건요, 선생님은 열세 살 소녀가 돼 본적이 없다는 거예요." 이 짧은 대화로부터 우리는 이런 개인적인 어떤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자살의 이유가 있을 수 있음을 보게 된다. 


물론 자살이 항상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다루어진 것은 아니다. 죽는 것이 사는 것 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 그리고 자살의 사회적 파급력을 미루어 보자면 결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결정으로 치부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음이 사실이니까. 사회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뒤르켐의 <자살론>은 당시 자살이 개인적 차원에서만 다뤄지는 것에 반대하여 자살이라는 현상의 사회적 원인에 대해, 즉 개인적인 차원 혹은 층위를 넘어서는 사회적인 것으로부터 자살이라는 현상을 바라봐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자살론은 여러 지역 및 범주의 통계들을 사용하여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에 비해 - 예를 들어, 여성보다 남성이, 개신교인이 천주교인 보다, 가난한 자들 보다 부자들이, 기혼자들보다 미혼자들이 - 자살률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석으로, 사회의 통합과 규제를 두 축으로 하여, 네 가지 부류의 자살의 형태가 있다는 해석을 제시한다. 사회적 통합이 극도로 낮을 때, 발생하는 높은 이기적 자살, 통합이 극도로 높아질 때 발생하는 이타적 자살, 사회적 규제가 극도로 높을 때 발생하는, 숙명적 자살, 그리고 규제가 극도로 낮을 때 발생하는 아노미적 자살이 그것이다. 


물론 리즈번 가 소녀들의 자살을 위에서 제시된 어떤 유형에 바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먼저 지나치게 자살의 요인을 단순화 시켜 제시된 범주의 탓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고(어쩌면 이것은 사회학 자체가 지니는 일종의 사회 '생리학', 즉 사회를 고치는 의학으로서의 목적에 관련된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곧 이어 이야기 하게 될 다른 이유의 문제인지도 모른다(과연 아무리 복잡한 그리고 철저한 대상적 탐구를 한다고 해서 모든 '퍼즐'을 완전하게 맞출 수 있을까?). 어쨌든 그들의 자살에는 어떤 특정한 사회적 의미가 담겨있다. 70년대의 무기력한 미국, 특히 그 쇠락이 시작되는 표지였던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디트로이트 교외의 백인 중산층 마을)의 몰락이 시작되었던 것이 바로 이 시기였기 때문이다. 


리즈번 씨네 나무가 처형당하는 동안...  나무들이 감춰 줬던 획일성과 더 이상 특별한 느낌을 주지 못하는, 차별화된 건축 양식이라는 낡은 수법으로 만들어진 바둑판 위의 모든 것이 맨언굴을 드러내자, 우리가 살아 온 이 교외의 마을이 얼마나 창의성 없는 곳인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되었다. 


철저한 '대상' 혹은 '사물'로서의 자살, 그리고 신성화


하지만 이 사회적인 것 혹은 객관적인 것을 따지는 지점에 상존하는 문제가 있다. 뒤르켐은 혹은 그가 그 학문의 정립 과정에서 큰 공헌을 했던 소위 사회학이라는 학문은 자살을 일종의 사물로, 관찰을 위한 대상으로 볼 것을 주문한다. 자살을 이미 실행한 자, 자살로 생을 달리한 망자는 완전히 객관화 된 대상으로, 사회적 현상의 담보가 되는 사물로 이해될 뿐이다. 그러나 애초에 이런 시각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머리가 가늘어지고 배가 나오고 있는 '소년들'은 '나무집'에 모여앉아 한 때 리즈번 가 소녀들의 집이었던 '하얀 무덤'을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 하나의 대상들로, 유물들로 이루어진 그들의 콜렉션만이 소녀들에 '대한' 그들의 기억을 담보하는 남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모든 퍼즐 조각을 다 모았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맞춰도 항상 빈 공간이 남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 어떻게도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과 몰락의 일로에 있는 자신들의 옛 동네라는 공간을 조합하여, 그 안에서 소녀들의 기억을 신성화 한다. 


우리가 얘기를 나눈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리 동네의 쇠락이 리즈번 자매들이 자살하고 난 뒤부터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그 애들을 욕했지만 조류가 서서히 바뀌면서 그 애들을 희생양이 아닌 선각자로 여기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 애들이 자살한 개인적 이유, 스트레스 장애니 신경전달물질 결핍이니 하는 것들은 점점 잊어버리고, 대신 그 애들의 죽음을 퇴락을 예견한 선견지명 탓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베여 나간 느릅나무와 가혹한 햇빛, 자동차 산업의 지속적인 쇠퇴에서도 리즈번 자매들의 혜안을 보았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여기에서 우리는 대상화와 신성화의 공모 관계를 발견하게 되는 지도 모른다. 관찰을 위한 거리 두기, 극도의 대상화 가운데 리즈번 가의 소녀들의 자살 혹은 소녀들 자체는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거리를 지닌 일종의 물 자체(Ding ansich)가 되고 있는 것이다. 소녀들은 마치 신화 속의 예언자들 혹은 무녀들과 같은 '선견지명'과 '혜안'을 가진 존재들로 승화된다. 


숙명적 자살


어쩌며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숙명적 자살을 보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자살론>이 제시하는 범주로서의 숙명적 자살이 아닌 - 그러나 동시에 그렇기도 한 - 하나의 신성한 대상으로서의 자살을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잠시 다른 생각을 해 보자. 유제니디스라는 그리스인의 이름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의미의 고정 - 달리 말하자면 기표화 - 에, 대상화에, 그리고 동시에 그 공모관계에 있는 신성화에 저항하는 그리스의 비극에 관해서 말이다.


이 소설의 시점을 생각해 보라. 소년들이라는 집단적 화자에 의해 말해지는 이 소설의 중심되는 이야기는 왠지 고대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코러스(합창단)와 묘하게 닮아 있지 않은가.* 비극의 진행은 항상 등장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대화를 통해, 그리고 이들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고 도덕적인 해설을 수행하는 - 달리 말해, 객관성 혹은 대상성의 체제, (신들을 섬기는) 법과 전통을 말하는 - 코러스의 시선과 묘하게 닮아있다. 

*코러스에 대한 아이디어는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이 소설에 대해 위키피디아에 수록된 짧은 논평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음을 밝혀둔다.  


코러스는 극의 진행에 중심 인물은 아닐지라도, 극의 진행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이다. 코러스와 등장인물의 대화, 그리고 코러스가 제시하는 배경에 대한 진술은 분명 극 중에서 등장인물들을 '괄호' 치고 그들을 규정하여 의미를 한정하고 있다. 그러나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 우리는 코러스가 짜맞추는 "퍼즐"을 완전하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인물들을 보게 된다. 운명에 대한 저항으로 결코 대상화 혹은 의미(기표)가 되기를 거부하는 인간, 오이디푸스를, 그리고 인간의 법에 저항하고 동굴에 갇혀 산 죽음(living dead)이 되어버린 안티고네를 말이다. 이런 인물들의 주체적 태도에 의해 코러스의 객관성 혹은 대상성의 체제에 구멍을 뚫는다.

 

분명 리즈번 가 자매들의 자살은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그들은 충분히 그 집에서 나갈 수 있었다. 바로 그들이 자살하던 그 밤에,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의 독립의 순간에... 이 현대적인 비극의 코러스(소년들)이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것은 바람을 뒤쫒는 것처럼 부질없는 일일 뿐이다. 그 자살의 본질은 슬픔이나 수수께끼가 아닌 단순한 이기심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진술은 흔들리고 있다. "그 애들을 편히 잠들게 내버려 둔 채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려 애썼다." 극을 진행하는 대상성의 체제로서의 코러스가, 다시 말해 이 극의 무대 자체가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결코 이 소녀들의 자살을 짜맞춰 완전한 의미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공백, 비일관성


오히려 이 '말할 수 없는' 사건은 일종의 공백을 드러낸다. 소녀들의 죽음 이후에 있었던 사교계의 데뷔 파티에서 소년들은 그들이 만났던 다른 소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술에 취해 우리에게 키스하거나 의자에서 의식을 잃어버리는 그들은 대학교와 남편, 육아, 어렴풋이 느껴지는 불행, 바꿔 말하면 인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인생', 혹은 '어렴풋이 느껴지는 불행'이란 중산층에 속한 보통의 사람들이 보통의 삶으로서 영위하는 그런 삶이 아니던가. 나무들이 사라져 버리자, 갑작스럽게 드러난 그들이 살던 교외의 중산층 마을의, 가장 미국적인, 그러나 아무런 창의성이나 새로운 것이 없는 맨 얼굴, 대상성의 체제 내에, 그들의 삶의 원소들을 하나로 셈하던 상황 속에 포함되어 있지만 결코 셈해지지 않았던 공백 혹은 비일관성이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퍼즐은 조각들을 다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빈 곳'을 남기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자살이란 일종의 징후를 나타낸다. 자살을 개인적인 병증으로 간주하고 치료를 위해 노력하는 (자아)심리학이나 혹은 심리학적 사회학, 또는 자살을 개인적 차원이 아닌 사회적 차원에서의 대상으로 보려 하지만 여전히 사회의 병증으로 간주하는 뒤르켐의 <자살론>을 넘어서는 그런 차원에서의 징후를 말이다. 어쩌면 그런 차원에서 자살은 어떤 정치적인 의미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자살이 그 어느 때보다도 늘어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자살은 과연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가. 실험적인 관점과 서술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말하기 어려운 문제를 붙잡고 씨름한 이 유제니디스라는 작가의 작품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의 꺼리를 던져주고 있다.

** 소녀들의 자살이 어떤 정치적 변전의 계기가 되고 있는 작품이 하나 있다. 오르한 파묵의 <눈>이 바로 그것이다. 작품은 소녀들의 자살에 대한 소문과 폭설로 인한 한 지방 도시의 고립으로 시작된다. 물론 이 소설에서는 자살에 대한 의미 탐구는 이루어지지 않지만, 한 지역의 어떤 정치적, 혁명적 변동의 계기로서 제시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참 한 가지 더. 고백하자면, 이 작품을 읽기가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1999년에 제작된 영화를 먼저 찾아 보고 도움을 얻었다. 소피아 코폴라라는 감독의 작품이다. 상당히 원전에 충실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영화였고, 단 한가지 흠이라면 지나치게 럭스(커스틴 던스트)에게 시선이 맞춰진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소설에서도 럭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다른 리즈번 가 소녀들의 이야기도 같이 제시되고 있는데 영화에서는 지나치게 비중이 치우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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