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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52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홍서연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 피에르 아덴스(Pierre Athens)*는 모든 맛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왕이다. 가장 탁월한 음식 비평가인 그의 손을 거쳐 각종 식당들은 새로운 명성을 얻기도 하고 영락의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그의 손이 쓰는 글, 각종 잡지와 신문들의 음식 비평란에 자리한 그의 글에 의해 어떻게 평가를 받는가에 따라서 말이다. 요식업계 업주들 그리고 요리사들을 지배하는, 그리고 그의 뒤를 잇고자 하는 새로운 미식 비평가들의 추앙을 얻는, 그는 식탁을 정복하는 군주다. 물론 그의 욕망(gourmandise)는 단순히 식탁에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자다. 사회적 자본, 경제적 자본, 그리고 아내 안나 이외의 여자들, 수위실을 지키고 있는 르네(바르베리의 다음 작품 <고슴도치의 우아함>에서 중심적인 인물)가 혐오하는 모든 것을 가진 '부자'. 그러나 모든 것을 소유한 '주인'도 비켜갈 수 없는 것, 바로 죽음이 그를 찾아온다. 그는 왕이다. 죽어가는 왕이다. 그리고 마침내 피에르 아덴스의 총아 조르주는 말한다. "왕은 죽었다. 왕 만세."**
48시간이 남아있는 그의 삶, 그 남겨진 시간 동안, 그는 기억을 돌이킨다. 기억 속의 가장 좋은 맛을 찾아서, 최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삶이 남긴 궤적을, 그 기억의 편린들을 되짚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이 지고한 왕, 그러나 지금은 죽어가고 있는 이 '주인(le maitre)'이 남기는, 이 취향 또는 맛(gout)의 '그리스도'가 남기는 '골고다의 길'과 '최후의 만찬'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기억을 찾기 위해 필사적이며, 그리고 그를 둘러싼 신민들은 애도의 감정에 취해있음을 보지만, 불경스럽게도 우리에게는 몇 가지 묻고 싶은 것들이 있다.
2.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질문이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우리가 가진 질문들 보다 더 이전의 질문들이 있지는 않은가? 말하자면 이 소설 자체가, 이 맛의 주인이 자신이 찾고자 하는 맛 또는 욕망이 무엇인지에 대해 반복적으로 묻고 있지 않은가? 주인은 말한다.
그러나 이것도 내가 찾는 것은 아니다. 나는 왕이 되어 벌였던 향연들의 화려함 속에 잊히고 묻힌 감각들을 기억에 노출시켰고 내 소명을 향한 첫걸음을 소생시켰으며 내 어린 영혼의 향기를 살려 냈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다. 이제 촉박한 시간이 내 최종적인 실패의 불분명하지만 무서운 윤곽을 그려 보인다. 나는 포기하고 싶지 않다. 기억하기 위해 이루 말할 수 없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이처럼 나를 비웃는 그것이 결국 맛없는 음식이라면?
주인이 무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주인은 알고 있는 사람이다. 방대한 지식을, 모든 지식을 가지며,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자가 바로 라깡이 말하는 '주인의 형상'임을 우리는 잊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묻고 있다. 무엇인가를, 그의 욕망이 무엇인가를, 그의 삶의 경험 속에서 가장 좋았던 맛이 무엇인가를 묻고 또 묻는다. 그리고 심지어 그 물음으로 인해 그의 이름 피에르(pierre)가 의미하는 바***와는 달리 흔들리는 감정 상태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주인은 묻는 사람이 아니라 대답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반복적인 물음은 오히려 '히스테리증자의 형상'에 해당한다. "진리는 내 입을 통해서 말하고, 나는 여기 있어요. 당신은 알고 있을 테니, 내가 누구인지 말해봐요." 주인이 모든 지식을 동원해 아무리 대답을 해 봐도, 그 대답은 결코 히스테리증자의 물음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일종의 분열과 겹침이다. 소설을 잘 살펴 보면 피에르 아덴스가 화자로 등장하는 장에서는 언제나 각 장의 말미에 떨어진 공간(혹은 간극)이 존재한다. 기억을 더듬는 지식의 주인과 이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는 히스테리증자의 분열을 상징하는 간극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 듯이 이 두 형상은 한 사람에게서 유래한 것이며 결코 서로 떨어지지 못한다. 물음도 그에 대한 대답도 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여기에서 우리는 겹침을 본다.
3. 이 분열/겹침에는 대결이 있다. 하나에서 나온 둘, 이 둘의 관계는 결국 불화, 갈등, 대결일 수 밖에 없다. 두 같은 것(double)은 언제나 한 편의 소멸을 요구한다. 대결, 그로 인한 일종의 나선적인 변증법적 운동. 그렇다면 이 대결의 승자는 어느 편인가? 이에 대한 답은 어느 편도 아니라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결국 이 죽어가는 주인은 찾고 있던 신적인 맛에 마침내 도달한다. 슈케트(chouquette), 바로 그가 찾던 지복의 쾌락의 이름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지양 또는 승화 또는 숭고(sublimation)를 보게 된다.
우리 환상 깊숙이 자리 잡은, 진정한 나 자신만이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중심점인 슈케트는 나를 살게 하고 존재하게 하는 힘의 승천이었다.... 그토록 오랜 방황 끝에 나는 죽음의 시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슈케트를 다시 발견한다.... 문제는 먹는 것도, 사는 것도 아니고 그 이유를 아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슈케트의 이름으로, 아멘. 나는 죽는다.
슈케트란 마치 '성령'과도 같은 것이며, 그의 삶의 힘이었다. 슈케트는 숭고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견 그의 마지막 삶의 변증법적 운동은 히스테리증자의 물음에 만족스러운 대답에 이른 듯 하다. 말하자면 주인과 히스테리증자의 최후의 대결이 마치 주인이 답을 제시하여 이 최종 심급에서 승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슈케트란 무엇인가? 양배추(chou)를 닮아서 이름 붙여진 과자, 그것도 안에 크림이 들어간 슈크림(chou a la creme) 보다도 못한 그저 밀가루로 만든 슈 위에 설탕을 뿌려 놓은 것이다. 심지어 그는, 그것도 모자라, 제대로 된 음식점 르노트르(Lenotre)에서 만든 것도 아닌, 가장 대중적인 마트에서 파는, 습기로 설탕이 녹아내려 눅눅해지고 끈적거리는 그런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기억한다. 그가 이와는 다른 말을 하고 있음을.
그런데 만약 이처럼 나를 비웃는 그것이 결국 맛없는 음식이라면? 프루스트의 그 가증스러운 마들렌, 저주받은 흐릿한 오후의 산물인 산만하고 기묘한 과자, 최대의 모욕처럼 한 숟가락의 차 속에 남아 습기를 빨아들이는 마들렌 조각처럼 내 기억은 어쩌면 결국 하찮은 음식에 연결되어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거기 얽힌 감정만이 소중한 음식. 산다는 것의 알 수 없는 선물을 계시해 줄지도 모르는 음식.
그가 항상 슈에 대해 반대하는, "파괴적인 보복성의 비평"을 썼음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슈케트는 프루스트의 마들렌 보다 더 '가증스러운' 어떤 것이다. 주인은 비록 만족스러운 대답에 이르지만 그것은 극도의 자기 부정의 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3항 변증법이라는 완전한 삼각형적 운동의 좌초를, 그리고 변증법적 운동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네번째 4항을, 한편으로 '성령'의 지위에 올려지는 슈케트라는 '비어있는 이름'에 속한 어떤 다른 차원을 보게 된다. 바로 주인의 자기 부정, 우리 모두의 삶 또는 현실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을, 역설, 비일관성, 혹은 공백이라 명명할 수 있는 것을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성자'의 형상을, '최후의 만찬'을 열고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게 된다.
4. 그리스도, 어떤 그리스도인가? 칸트와 그의 뒤를 이은 헤겔이 제시하는 미학적 차원의 그리스도인가? 분명히 그는 일종의 예술적 천재다. 그리고 무엇보다 칸트의 취미판단 혹은 <판단력 비판>은 취향 혹은 '맛'을 둘러싸고 구축된다. 모든 사람의 공감을 얻는, 그들과 공유할 수 있는 공통감(sensus communis)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재능 혹은 선물(gift)를 받은 자다. 그런 천재는 분명 미학적인 무한 또는 초월적인 것의 육화로서의 의미를 지니며,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그런 미학적인 '그리스도'가 아닌 또 다른 의미에서의 '그리스도'를 본다. 어떤 영웅의 모습을, 그가 욕망하는 것이, 그가 끝까지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 설령 그가 가장 혐오하는 것, 또는 추문(scandal) 또는 십자가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 그런 영웅의 형상. 소설의 후반부에는 일종의 '골고다의 길'이 나타난다.
'날것'이라는 장에서 드러나는 왕의 감정적 동요는 '거울'이라는 장에서 제시되는 타인의 식사의 완전함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진다. '거울'에서, 그는 데트레르 삼촌이 칩거하는 오두막을 방문하는데, 거기에서 삼촌은 완전함에 한없이 가까운 모습으로 새우와 쌀을 조리하고, 그가 보는 앞에서 포도주와 함께 완전함에 가까운 식사를 한다. "먹는 것은 쾌락의 행위이고 이 쾌락을 글로 쓰는 것은 예술 활동이지만 진정한 단 하나의 예술 작품은 결국 타인의 식사다." 그러나 완전한 식사, 그것은 '거울'에 비친 모습과 같이 재현적인, 타인에 의해 투영된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가 이 장 이전에 추구하던 욕망 역시 바로 이러한 타자적인 투사(projection)에 의한 것이었을 뿐이다. 물론 소설에서 이에 대한 자기 고백이 나오지는 않지만, 이후에 그가 가게 될 골고다의 길, 자기 부정의 길은 바로 자신의 욕망이 타자에 비친 욕망이라는 인식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거울'이라 명명된 장 이후에 그가 찾아헤매이는 것들이 과연 무엇인가? 그는 자신의 주인으로서의 지위에 어울리는, 다시 말해 자신이 원하는 '그것(the thing)'이 아닌 타자들이 그의 지위에 투영하는 모든 진미를 쫓아가지 않는다. 그가 따라가는 길은 평범한 것들, 즉 '빵', 어떤 '농가'에서 농민들과 함께 하는 시골식 식사, 녹인 버터와 함께 구운 미국식 '토스트', 미식가의 입맛을 돋우는 포도주가 아닌 술꾼들의 친구 '위스키', '아이스크림', 수퍼마켓에서 살 수 있는 평범한 '마요네즈',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시'와도 같은 슈케트로 이루어진 (적어도 미식가로서의) 그가 부정하고 싶은 가장 평범한 음식들의 경로일 뿐이다.*****
5.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마치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익히 들어왔던 우화 '벌거벗은 임금님'의 자기고백과도 같은 것이다. 자신의 근원적인 결핍과 욕망에 대한 탐구 그리고 동시에 자기고백. 하지만 그는 정직하다. 최소한 자신의 욕망에 정직하다. 그리고 타인에게 정직하다.
어떻게 이만큼 자기 자신을 배반할 수 있는가? 권력의 부패보다도 더 심한 어떤 부패가 쾌락의 명백성을 이처럼 부인하고 우리가 사랑했던 것을 치욕스럽게 만들고 이처럼 부인하고 우리가 사랑했던 것을 치욕스럽게 만들고 이만큼 우리 기호를 변형시키는가? 나는 열다섯 살이었고 그 나이에 그러하듯이 허기진 배를 안고 학교에서 나오곤 했다. 분별력 없고 야만적이었지만, 오늘에서야 떠올리건대 그때 내겐 마음의 평온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 저작 모두에 그처럼 잔인하게 결핍된 것이다. 오늘 저녁, 슈퍼마켓에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슈케트를 위해서라면 후회 없이, 회한의 그림자도 없이, 애석함의 유혹도 없이 줘 버릴 내 모든 저작.
공백의 분출과도 같이, 하나의 섬광과도 같이 계시된 슈케트는 피에르 아덴스에게 있어 하나의 선물(gift)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의 모든 저작을, 그가 교환의 경제 위에 구축한 비평의 왕국을 '후회 없이' 빠져나올 수 있는, 그 왕국의 기초가 된 재능(gift)을 아무런 '애석함의 유혹도 없이' 던져 버릴 수 있는 그런 선물.****** 바로 그런 것이 누군가가 '빈약하다(thin)'는 말로 평하는 이 <맛>이라는 소설이, 결핍과 욕망의 자기고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왕위의 승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저 순전히 왕의 정직함에 대한 찬사를 보낼 것이다. "왕은 죽었다. 왕 만세.(The king is dead. Long live the king.)"
주
* 소설에서 그르넬 거리에 위치한 고급 주택의 한켠을 차지한 방에 가만히 누워 기억을 더듬고 있는 한 사람의 이름이다. 이 책에서는 이 이름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는데, 뮈리엘 바르베리의 소설을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몇 가지를 훓터 보고 이 이름을 찾았다. 아마도 바르베리의 다음 소설 <고슴도치의 우아함>에서 제시된 것으로 보인다.
** 조르주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왕은 죽었다. 왕 만세." 이 말은 만일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면 매우 역설적으로 들리는데, 실은 앞의 왕과 뒤의 왕은 같은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다. 혹시라도 이 말에 맞는 상황을 보고 싶다면, 리들리 스콧의 <로빈 후드>를 보라고 말하고 싶다. 리차드가 죽고 프랑스에서 회수된 왕관이 돌아왔을 때, 리차드의 어머니 엘리노어는 존에게 관을 씌우며 이런 말을 한다. "The king is dead. Long live the king." 그런 의미에서 이 말에서 우리는 조르주의 왕위 계승에 대한 욕망을 본다.
*** 피에르(pierre)는 성서에서 온 이름이다. 예수의 제자 베드로의 이름, 흔들리지 않는 반석 또는 큰 바위를 의미하는 이름.
**** 어쩌면 프랑스어 판 제목 <Une Gourmandise>가 여성형 명사라는 점과 히스테리증자를 연관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단순히 보자면 이 단어는 식도락, 진미, 욕망을 뜻한다. 하지만 히스테리증자의 형상은 라깡 정신분석에서 남성 보다는 여성으로 상정되며, 이 소설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 '주인'의 지식과 대답 보다는 '히스테리증자'의 물음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여성형 명사라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 어찌 보면, 그가 각 장의 제목으로 만나는 그 평범한 것의 기억들은 '계시'와 같이 떠오른 슈케트를 정점에 두는(또는 십자가로 두는) '그리스도'의 수난과도 같은 것이다.
****** 그런 의미에서 "왕은 죽었다. 왕 만세"라는 조르주의 말을 다시 새겨볼 수 있을 것이다. 그저 액면 그대로라면 왕의 육체적 죽음을 말하는 이 선언은 왕이 스스로 자신의 지위에서 스스로 물러남을, 자신의 왕국을, 교환의 경제를 벗어남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벗어남은 법칙이나 의미를 벗어난 선물인 슈케트에 의해 가능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