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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기억하는 [남아 있는 나날]은 동명의 영화였다. 이 영화에 대해 기억하는 이유는 순전히 개인적인 것인데, 내가 좋아하는 배우인 엠마 톰슨이 앤소니 홉킨스와 수퍼맨으로 유명했던 크리스토퍼 리브스가 나온 영화였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 내용은 조금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배우들 때문에 기억을 하는 것 뿐. 다시 이 작품을, 혹은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어찌 보면 기억하지 못하던 내 과거를 다시 상기시키는 작업이었다.
어쨌든 작품 자체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동명 소설은 이 영화의 원작이 되는 소설이다. 기억하기로, 어린 시절에나 봤음에 틀림없는 영화의 원작 소설. 그러니 이 소설에 관해 이야기 할 때, 어떤 기억이라는 문제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적절할 듯 하다. 분명 이 소설은 인생의 완성기에 들어선 한 초로의 노인이 어떤 계기로 여행을 하게 되고, 자신의 삶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티븐슨은 달링턴 홀이라는 영국의 한 대저택을 관리하는 버틀러(butler, 이 책에서는 집사로 표현된)다. 그는 대저택의 집사로서 한 때 수십명의 인력을 운용하던 영락의 시기를 뒤로하고, 운용 인력의 수가 손으로 셀 정도로 줄어들어 버틀러인 자신 마저도 이것저것 잡무들을 해야만 하는 상태에 빠진 달링턴홀을 지키고 있다. 이미 주인도 그가 평생을 모셨던 달링턴 경에서 미국인 자본가 패러데이 씨로 바뀌어 있다.
어느날 갑자기 그에게 여행을 해야만 할 계기가 다가온다. 마침 인력을 충원하기 위해, 과거 달링턴 홀의 하우스 키퍼(housekeeper, 책에서는 총무로 번역되어 있는)였던 켄튼 양 또는 벤 부인을 만나보기 위해서다. 그녀에게 받은 편지에는 분명 무언가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텍스트 이면에는 어떤 메세지가 있는 듯 하다(마치 이시구로가 소설에서 스티븐스의 기억에 대한 주관적 서술을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어떤 것들을 제시하는 것과 유사하게도). 바로 이러한 계기로 그는 주인인 패러데이 씨에게 휴가를 얻어 여행을 떠난다.* 마치 여행을 함께 떠난 길동무라도 된 듯 독자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황혼을 앞둔, 인생의 완성기에 들어선, 하루의 '남아있는 시간'**에 떠나게 된 이 여행은 독자인 우리가 스티븐스와 함께 그의 기억속으로, 과거의 회상으로 떠나도록 한다. 어떤 의미에서 한 사람의 회상이란 그 자체로 하나의 여행이다. 자신에게 있어서는 이미 지나가버린,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의 여행이며, 그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길동무가 된 타자들 - 이 경우에 있어서는 독자들이 될 터인데 - 에게는 자신의 경험 너머의 미지의 것의 광경을 보는, 수동적인 감상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하나의 여행기를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스티븐스의 여행 - 현실적인 여행 그리고 과거의 회상으로의 여행 양자 모두의 의미에서의 - 에 대한 여행으로부터, 한편으로는 즐거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는 불편하기도 한 이 여행으로부터, 우리가 보게 되는 것들에 대해 말해보자.
1. 되돌아 봄에 대하여.
스티븐스가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여행 중에 그의 기억으로의 여행을 떠날 때 행하는 것은 하나의 되돌아 봄이다. 그런데 무엇에 대한 되돌아 봄인가? 과거, 지나가 버린 것, 그렇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되돌아 봄. 되돌아 본다는 것은 삶의 여정에서(또 다른 의미에서의 여행) 뒤에 두고 온 것, 그래서 지금은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성찰이라고 말한다. 여행은 자신이 지금 익숙한 것, 지금 가지고 있기에 무언가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떠남을, 자신의 의식 속에 가득 찬 현재라고 칭해지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생각을 비우고,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해 그리고 다시 그에 의해 현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 혹은 공간을 마련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스티븐스가 자신의 '업무'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의식 속으로 소환해 내고 있는, 그가 (삶의 여정 중에) 두고 온 것은 무엇인가?
2. 사랑(의 가능성): 켄튼 양과 그녀에 얽힌 일들.
켄튼 양에 대한 혹은 벤 부인과의 마추침은 처음부터 순탄치는 않았다. 그녀는 직무에 열중하는 그의 삶에 있어 일종의 혼란을 초래하는 요인이다. 예를 들자면, 켄튼 양이 그의 집무실에 꽂아 두었던 꽃을 떠올려 보라. 그리고 그녀는 그들의 기억의 초기에는 어떤 의미에서 약간은 치졸해 보일 법한 권력 다툼을 하기도 한다. 당시 달링턴 홀에는 스티븐스의 아버지가 버틀러로서는 은퇴한 후 스티븐스와 함께 하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스티븐스에게 있어 아버지는 위대한 중간 관리자의 전형, 그가 지향해야할 존엄성(dignity)*** 사표였는데,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는 동시에 그의 약점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노쇠해가고 있었고,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실수들이 드러낸다. 그 아버지의 존엄성(dignity). 스티븐스 주니어가 기억하는 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삶. 한 때 달링턴 홀의 하우스키퍼였던 켄튼 양이 그를 불러 이야기 했던 정원에 가만히 서서 무언가를 찾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해 보라: "마치, 떨어뜨린 귀한 <보석>을 찾고 있던 사람처럼."
그러나 이런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던 켄튼 양과의 관계개선이 진행 된 이후, 켄튼 양은 목석과 같이 자기 직무에만 충실한 이 버틀러에게서 어떤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것은 스티븐스의 주관적인 서술에만 의존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의 회상에서, 그의 지나가 버린 것으로 떠나는 여행에서, 그가 의식적으로(또는 무의식적으로) 기억하지 않는 어떤 나머지를 보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신은 언제나 직무에만 충실했으며 사랑은 그저 그녀의 일방적인 감정이었을 뿐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듯한 스티븐스의 이야기에서도, 이 감정이 사랑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상호적이었음을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은 인생이 텅 빈 허공처럼 내 앞에 펼쳐집니다' - 여기서도 다시 '남아있는 시간' 문제 혹은 소설의 제목이 등장하는데 - 이라는라는 문구가 적힌 켄튼 양의 편지는 스티븐스가 그녀를 향해 떠나는 몇 일간의 여행의 계기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의 사랑의 가능성을 차단했던 것일까.
스티븐스가 달링턴 홀에서 영국의 수상과 독일 대사 그리고 달링턴 경의 회합이 있었던 그 밤에 대해 - 켄튼 양이 달링턴 홀을 떠나기 전, 그녀가 스티븐스에게 거의 처절하다고 할 법한 방식으로 마지막까지 그녀를 붙잡을 기회를 주었음에도, 그런 이후에 눈물 흘리는 그녀를 보았음이 확실하다고 생각했음에도, '최고의 신사들'을 모시는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기 위해 그녀를 외면 했던 바로 그 밤에 대해 -,
그 순간에 누가 의심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집사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세상의 저 위대한 중심축에 거의 도달했다는 것을. 그 때 거기에 서서 그날 저녁의 사건들, 즉 그 시각까지 있었던 일들, 그리고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것들을 되씹어 보자니, 내가 그 때까지 살아오면서 성취했던 모든 것들의 요약 판인 양 느껴졌다. 그날 밤 나를 고무시켰던 그 승리감을 나로선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라는 평소의 그 답지 않은 방식으로, 약간은 흥분한 투의 이야기를 펼쳐놓는 것을 보자면, 그의 사랑을 막았던 것은 결국 그 자신이 그렇게나 바라마지 않던 (버틀러로서의) 존엄성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3. 달링턴 경에 대한 충성 그리고 시대적 전환의 문제.
그가 사랑(혹은 그 가능성) 마저도 포기하고 선택한 것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함, 그리고 그에 따른 품위였다. 당시 중년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쌓아올렸던, 완성기로 향하고 있는 존엄성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주인에 대한 충성. 사실 어찌 보자면 그의 선택은 그가 하필이면 달링턴 홀에서 벌어졌던 중요한 행사 중에 갑작스럽게 다가온 아버지의 임종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볼 때 이상할 것이 없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중요한 행사란 무엇인가. 1차 대전이 끝난 이후의 달링턴 홀은 일종의 유럽 대륙 국가들의 외교적 각축의 장이었다. 당시의 유럽은 귀족 사회였고, 어느 정도 신분이 되는 귀족들은 국가적, 외교적 문제, 즉 자신들이 관심을 가져야 된다는 생각 - 오블리스 노블리제라는 것은, 삐딱하게 보자면, 자기 일 남에 일 안가리고 감놔라 대추놔라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며, 쉽게 말하자면 좋은 밥 먹고 할 일 없는 귀족들의 시간 죽이기 방식이었다 - 을 하고 살던 시기였다. 이런 맥락에서 당연히 국가의 공적으로 일하는 관리들의 공식적인 회합과는 별도로 영향력있는 귀족들끼리 모여서 유럽의 미래를 논하는 행사가, 특히, 달링턴 홀에서 벌어졌던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스티븐스가 기억하는 달링턴 홀은 당시의 외교의 중심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사실 이시구로는 달링턴 경이라고 하는 실제 인물을 어느 정도는 반영한 소설을 썼다.)
여기에서 시대적 전환의 문제를 포착해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스티븐스의 기억을 따라 떠나는 여행 속에서 우리는 분명 너무나 분명한 변화들을 찾을 수 있다. 가령 바로 눈에 띄는 것은 달링턴 홀의 주인은 달링턴 경에서 미국인 자본가 패러데이 씨로 바뀌어 있다. 그가 운용하는 하인들의 수도 수십명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있다. 스티븐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저명한 가문을 위해 봉직하던 버틀러들의 모임인 헤이스 소사이어티가 없어져 버린 이야기에서도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스티븐스에 따를 때 그 시기의 버틀러들은 '사다리와 같은 위계'를 보았을 뿐이지만, 그 스스로는 그러한 수직적인 위계는 더 이상 없으며 수평적이고, '수레바퀴의 중심'과 같이 돌아가는 세계의 중심에 서는 것이 목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뿐일까? 변화는 과거에만 진행된 것이 아니다. 그가 '남아있는 시간'에 대해 생각하며 떠 올리는 위트넘치는 농담(banter)이라는 것은 이를 통해 새롭게 바뀐 주인에게 봉사한다는 자신의 행위 방식의 변화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단지 스티븐스를 둘러싼 변화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매우 중요하지만, 스티븐스의 주관적인 기억 속에서 약간은 그 중요성이 떨어지는 형태로 제시되는, 그리고 그런 이유로 중요한 변화에 대한 서술이 빠져 있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달링턴 홀의 회합으로 돌아가 보자. 여기에서 짚어낼 수 있는 것은 어떤 아마추어리즘에서 프로페셔널리즘의 시대로의 이행이다. 당시의 유럽은 어찌 보자면 너무나 오래된 역사적 패권 아래 있었다. 즉, 19세기로부터 진행된 영국적 패권 말이다. 그러나 이 패권은 그 텔로스(telos, 완성 혹은 폐기)에 도달해 있었다.
바로 이런 시기에 달링턴 경은 유럽적인 아마추어리즘을, 귀족적인 명예를, 그래서 국가들 간의 리그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공정함을 추구했던 인물이다. 달링턴 홀의 회합도 1차 대전 이후의 불공정한 전후 처리에 대한 그의 지대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그 목적은 당연히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독일의 패전배상금을 현실적인 수준으로 축소 혹은 아예 탕감해 주자는 것이었다. 소설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달링턴 경이 친 독일 인사 혹은 친 나치 인사로 낙인찍히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정황과 관련되는 듯 하다.
그러나 루이스 상원의원 - 아마도 영화에서, 약간 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직도 수퍼맨의 얼굴로 기억할 크리스 리브스가 맡았던 것으로 기억 되는 - 이 대변하는 미국의 입장은 다르다. 프랑스나 영국은 실질적으로 미국에 엄청난 부채를 떠 안고 있다. 왜냐하면 미국의 전쟁 참여는 전쟁 말미의 막대한 규모의 파병 이외에, 군수물자 및 자금 공급에 있었고, 이것이 대부분 차관의 형태로 공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영국과 프랑스가 패전한 독일로부터 충분한 배상금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시 미국 역시 잿더미가 되어버린 프랑스로부터 그리고 갚을 수 없는 규모의 전쟁 부채를 떠 안게 된 영국으로부터 공여한 자금을 환수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달링턴 홀의 회합에서 바로 이 독일 전후 처리 배상금의 문제로, 루이스 상원의원은 자국 이익을 위해 암약하던 일종의 외교관 혹은 스파이였다. 그는 영국 측 사람들에게는 프랑스가 독일의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투로 말하지만, 뒤로는 프랑스의 고위 외교관 뒤퐁 씨에게 영국인들이 독일을 편들고 있고 프랑스를 욕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두 나라 사이를 이간질한다. 그리고 뒤퐁 씨의 이런 정황을 회합의 마지막 날 만찬 석상에서 영국과 독일 신사들과 숙녀들에게 공개적으로 밝힌다. 그리고 '아마추어리즘'의 시대는 갔고, 프로페셔널의 시대가 왔다는 발언은 바로 루이스 상원의원의 입을 통해 나온 것이다. 아마추어리즘의 고귀함, 명예, 귀족적인 의무(noblis oblige)의 시대는 가고, 프로페셔널의 시대, 다시 말해 미국적 패권 아래 미국적 자본의 이익을 추구하는 그런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루이스 의원의 발언은 그런 시대의 도래를 고지하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과연 스티븐스는 그러한 대단한 일들이 일어나던 그 장에 있었다고, 모스콤비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일종의 의도하지 거짓말을 했던 것과 같이, 그는 외교적으로 중요한 당시의 유럽 정치의 중심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 말이다. 이것은 다음 차례로 기억과 관점의 문제, 특히 이 문제의 원인이 된다고 할 법한 신분의 문제로 이어진다.
4. 기억과 관점의 그리고 신분의 문제.
스티븐스가 풀어놓는 기억은 어떤 묘한 위화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어떤 품위있는 말투와 행동거지를 가진, 어찌보면 교양있는 사람이다. 당연히 그가 모시는 신사분들과 숙녀분들을 대하기 위해 갖춘 상식도 구비하고 있다. 중간자, 이것이면서 동시에 이것이 아닌 직위. 버틀러는 그런 직위다. 위로는 그런 대단한 분들을 근접해서 상대하여 봉사하며, 아래로는 자기보다 낮은 직급의 버틀러들이나 하우스 키퍼, 그리고 하인들을 상대하여 관리자의 입장에 서는 그런 직위.******
이시구로가 스티븐스에게 부여하고 있는 서술 방식, 즉 객관적으로 있었던 과거의 사실들에 대한 1인칭의 주관적인 방식의 서술에 의해 어떤 상당히 재미있는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말하자면 스티븐스가 자신의 충성을 바쳤던 달링턴 경의 과오에 대해 자신의 책임 혹은 연루를 회피하는 듯한 그런 인상이 말이다. 달링턴 경은 독일에 대한 일종의 범유럽적인 명예로움과 공정성의 이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친독일주의자, 심지어는 1차 대전 이후 독일이 다시 2차 대전을 일으키는데 일조한 친나치주의자로 공인된다(혹은 낙인이 찍혀 버린다). 그는 스티븐스의 기억에 따를 때 - 그의 입에서 직접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 유럽적 명예로움에 사로잡힌 늙어버린 시대에, 그 텔로스(완성 또는 종말)에 도달한 시대의 위대한 아마추어였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이런 형태의 서사가 가지는 효과는 바로 이런 주인의 과오에 대한 선긋기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임종, 그리고 사랑(의 기회) 마저도 포기하고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던 인물이지만, 아무도 그를 당시의 달링턴 홀에서의 행사의 가운데에서 기억해주지 않는다. 애초는 그런 기억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분명 스티븐스는 자신의 일은 그들의 언사나 그 당시에 논의되었던 일들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직무에 관해 충실한 것이라고 못을 박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달링턴 경의 버틀러로 기억될 뿐이며, 그것은 스티븐스가 켄턴양을 만나러 가는 길에 잠깐의 해프닝으로 들렀던 모스콤비라는 마을에서 그런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에게나 마치 대단한 무용담이나 되는 듯 자랑스럽게 떠들 수 있는 이야기 일 뿐이다.(그 가장도 결국 마을 의사에게 신분이 들통나 약간은 망신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갑작스럽게 의사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꼬박꼬박 붙이던[sirring] 스티븐스의 모습은 분명 당황한 버틀러의 모습 이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스티븐스가 달링턴 홀에서 영국 수상(아마도 로이드 존스였던 듯)과 독일 대사가 만나 밀담을 나누던 그 날, 켄튼 양이 눈물을 보이던 그 날의 기억 속에서 환희에 찬 어조로 끄집어 내는 '집사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세상의 저 위대한 중심축'에 대한 찬탄은 자신에게는 의미있는 것일 수 있겠지만,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약간은 희극적인(동시에 매우 비극적인) 발언이기도 하다.
기억에 대한 서술은 일어났던 일, 지나가버린 일에 대한 3자적인 묘사 혹은 기술을 통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를 전달하는 방식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다. 그의 기억은 자신의 완성에 대한, 자신의 일에 충실했음에 관한 기억이다.(그 외에 도대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그 충실함, 달링턴 경에 대한 충성은 자부심으로 나타난다('수레바퀴의 중심'에 속한다는 자부심). 그러나 그 자부심의 이면에서 나타나는 자신이 포기해야만 했던 것(사랑)에 대한 회한, 그리고 자신이 충실했던 달링턴 경에 대한 의심. 그에 더해 자신의 신분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대저택의 집사는 한편으로 많은 사람들, 일들, 물건들을 관리하는 직위이면서도(자부심을 가질 법한), 다른 한편으로는 고용인이며 주역이 되지 못하는 직위(내세울 수 없는)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시구로의 있었던 일들, 객관적 사실에 대한 스티븐스를 통한 1인칭의 주관적 서술은 스티븐스의 버틀러로서의 직위, 중간자적인 위치를 묘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는 장치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제 소설에서 남은 것은 켄턴 양 혹은 벤 부인과의 만남, 그리고 그 만남 이후에 선창가의 한 벤치에서 만나게 된 노인의 말처럼 여생을 즐김에 대한 문제, 즉 미래에 관한 문제 뿐이다.
5. 미래의 문제: 농담(banter).
켄턴 양과의, 아니 벤 부인과의 만남에서 스티븐스가 얻게 되는 대답은 그녀가 이미 집안에서 있었던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해결을 본 상태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녀는 달링턴 홀로 돌아올 이유가 없다. 그리고 계속되는 몇가지 옛날 이야기들, 그리고 그들 사이의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기억. 마지막으로 벤 부인은 스티븐스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가요, 스티븐스씨? 달링턴 홀로 돌아가면 당신에게는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어쩌면 '남은 인생이 텅 빈 허공처럼 내 앞에 펼쳐집니다'라는 켄턴 양의 편지에 쓰인 문장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스티븐스에 대한 이야기는 아닐까?
스티븐스는 잠시 동안 바닷가 선창의 어느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다를 보게 된다. 그리고 잠시... 잠시나마 어떤 공허감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그 벤치에서 만난 어느 노인의 말처럼 남은 여생을 즐기며 보내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여생을 즐기며 보내는 자신의 모습. 그리고 그는 농담을 떠올린다. 자신이 최근 어느정도 연습을 해보고 있는 이 농담이라는 새로운 직무의 도구에 대해. 그리고 이내 그의 의식은 달링턴 홀로, 자신의 주인 패러데이 씨에게로, 농담에 익숙해진 자신의 새로운 봉사의 모습으로 향한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웃음(농담)을 도구로 한 직무의 연장 또는 미래에 대한 어떤 씁슬한 웃음? 웃음에 대한 웃음, 농담에 대한 농담을 우리는 보게 된다. 우습게도. 그리고 한편으로는 슬프게도.
여행은 사람을 바꾼다. 어쩌면 기억으로 떠나는 여행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여행은 일상의 생활에 어떤 균열을 내는 혹은 적어도 한 발 떨어져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우리 독자들과 함께 했던 여정에도 전혀 바뀌지 않은 모습을 보일 뿐이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직무에 너무나 충실하다. 그의 인생은 '공허하게 펼쳐(지지)' 않는다/않았다/않을 것이다. 여행과 함께, 삶에서 거리를 두는 방법인, 농담 마저도, 그에게 있어서는 변화하는 시류에 맞춘 직무를 위해 갖추어야 할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그의 삶은 철저하게 자신의 버틀러로서의 직위와 직무만이 가득하다. 결여 혹은 공백이 없는, 완전히 가득 찬, 그러나 자신이 주도하는, 주인이 되는, 주체가 되는 삶이 아니라, 주인을 위해 봉사하고, 대표(혹은 재현)될 뿐인 자신의 직무로 가득 찬... 과연 그런 삶은 어떤 의미로 펼쳐질까? 켄튼 양이 스티븐스에게 던졌던 '당신은 어떤가요, 스티븐스씨? 달링턴 홀로 돌아가면 당신에게는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대해 '남아있는 시간' 동안 과연 스티븐스는 그의 삶에 대해 어떤 대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이상이 이 책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시구로의 서사 스타일은 너무나 복합적인 것들을 어떤 숨겨진 층위들과 개인의 주관적 서술 방식 아래, 그것도 어떤 절제된 미학을 통해 풀어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듯 하다('날 보내지 마'라는 작품에서도 동일한 인상을 받게 된다). 이런 탓에 서평으로 그의 이야기를 다시 살펴보고, 내 방식으로 다시 풀어내는 작업은 너무나 지난한 과정이었다. 한 가지 단선적인 방식으로 보게 된다면(그의 액면의 이야기만을 따라간다면) 이 이야기는 스티븐스의 버틀러로서의 삶에 대한 단선적인 시각만을 따르게 될 뿐이다. 그러나 그 아래, 그의 주관적인 이야기 방식 아래, 그의 사랑(의 가능성), 달링턴 경에 대한 충성, 하지만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달링턴 경의 과오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자신의 직무에 대한 자긍심과 동시에 자괴감. 이 모든 것들이 마치 종합선물 세트와 같이 한번에 터져나온다. 그래서 그냥 읽기는 쉽지만, 읽고 무언가를 써내기는 너무나 어려운 책이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주
* 여기에서는 일종의 번역상의 오류가 드러난다: 21페이지, 첫 문단 네번째 줄부터 아홉번째 줄까지. <언행 불일치를 드러내는 신사는 결코 아니다. 따라서...제의를 번복하지 않으리라는 근거는 없다.> 이 문장은 가만히 띁어보면 앞문장과 뒷문장이 어딘가 논리적으로 이상하다. 소설 상의 맥락으로 보자면, '제의를 번복하리라는 근거는 없다'를 잘 못 옮긴듯 하다.
** 이 제목에 대해서도 약간은 불만이다. 위키피디아에 실린 이 소설에 관한 해설을 참고할 때, Remains of the Day라는 말에는 다섯까지 의미가 있다. 1. 하루의 남아있는 시간, 즉 인생이 황혼기를 의미한다. 2. 대영제국의 남아있는 것, 흔적이라는 의미. 3. 새로운 주인 패러데이 씨에 대한 봉직을 위한 미래('남아있는 나날'이라는 말은 이 의미에만 해당한다). 4. 이시구로가 붙이고 있는 각 챕터의 소 제목들. 5. 프로이트의 '일상의 잔여물' 또는 '나머지'라는 개념. 이 개념은 꿈꾸는 밤 이전의 그 날이 경험들을 지칭하는데, 금지된 바램들에 대한 상징적 표상과 위장에 사용을 나타낸다. '남아있는 나날'이라는 제목은 이 복합적인 의미들 중 3번의 의미만을 포착해 낸다.
*** 이 단어에 대한 번역어 역시 약간은 불만이다. 이 책에서는 품위로 번역하고 있는데, dignity라는 말은 단순한 품위나 품격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히 직위에 대한 혹은 신분에 대한 품위 혹은 품격만이 문제라면, 그가 세째날 저녁에 그의 부주의(휘발류를 넣지 않았던)로 인해 묵어가게 된 모스콤이라는 마을에서 해프닝에 대해 완전히 말할 수 없게 된다. 그 때 있었던 대화에서 해리라는 마을 청년은 dignity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스티븐스가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 즉 정치적 차원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 dignity라는 말에는 세련된 억양이나 교양있는 행동거지라는 뜻만 가지고는 완전히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 나머지(remains)가 있다. 차라리 존엄성이라고 읽게 될 때 발생하는 역설적인 표현이 원작자의 의도이고, 이 편이 더 재미있는 효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이 책의 제목, 'Remains of the day'는 프로이트의 '일상의 잔여물'이라는 개념으로 읽힐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금지된 또는 스스로 금지한 것에 대한 바램 혹은 욕망을 따라 떠나는 여행. 스티븐스의 여행의 본질은 달링턴 홀의 모자라는 인원을 충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공식적인 목적의 이면에 있는, 그가 과거에 놓쳐버린 사랑(의 가능성)을 좇는 것임을 고려해 볼 수 있다.
***** 한 가지 씁쓸한 것은 이런 광경이 어딘지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작년 11월 G20 서울 회의. 물론 이 회의는 공식적인, 국가 원수들의 회합의 장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를 전후하여 국가적 차원의 외교 전문가들의 회의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현재의 세계 정세는 마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보는 듯 하고(세계 패권적 이행기), 아무런 결과도 없이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외교 행사는 어쩌면 명예로운 아마추어리즘 보다 훨씬 좋치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 이 소설의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소설 내부에는 중간, 경계, 혹은 동시성으로 드러나는 것들이 여럿 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제목 Remains of the Day: 액면으로는 저녁을 의미. 저녁은 아직 해가 떠 있지만 곧 해가 떨어질 시간. 중간, 경계 혹은 동시적 시간(낮이면서 밤에 속하는).
- 기억 그 자체: 기억이란 한편으로는 과거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에 대한 이미지로 사람을 기쁘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후회와 회한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동시성에 속하는 것. 그리고 일어난 일들에 대한 기억 하지만 동시에 해석이 될 수 밖에 없는 그런 것.
- 시기: 영국에서 미국으로의 패권적 이행기, 그리고 동시에 유럽적 국제관계 내에 있는 명예 혹은 공정성(아마추어리즘) 으로부터 미국적 경제 혹은 자본의 이익(프로페셔널리즘)으로의 이행기.
- 신분: 관리자이면서 동시에 고용인 신분. 그에 따라 중차대한 외교적 현장에 있으나, 그 주역은 되지 못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