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집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시간의 문제 - 정체 혹은 운동의 부재와 관련된 

 

시간의 문제는 지금까지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들 중 하나였다. 사물의 변화와 운동과 관련하여, 이에 대한 파악은 시간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고요한 집>은 바로 시간의 문제와 관련하여 터키의,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어떤 정지 혹은 정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를 제공한다.  

 

물론 모든 이야기들이 그렇듯, 이 소설에도 시간의 흐름과 이에 따른 소설상의 인물들의 움직임들이 있다. 시간이 되었기에(여름이 되어 할머니를 방문할 시간이 되었기에) 파룩, 닐귄, 메틴은 이스탄불 근교에 위치한 파트마의 집을 방문하고, 파트마는 이들을 기다리며, 이 집의 하인으로 일하고 있는 레젭은 이들의 방문을 위해 집을 준비한다. 작고한 아버지 도안의 묘소 방문, 역사학을 전공하여 조교수로 일하는 파룩의 지역사 탐구, 좌파 지식인 닐귄의 해변 방문과 그녀 뒤를 따라 다니는 극우파 민족주의자 하산의 비행들, 미국의 물질문명을 동경하며 철없이 부잣집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메틴, 모든 인물들이 시간의 틀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이동 및 행동을 놓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의 흐름 이외에, 다른 시간이 있다. 일상적 생활과 다른, 그 틀을 벗어나는, 그로 인해 어떤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는 시간. 그러한 시간은 우리가 어떤 '사건'이라는 말로 나타내는 단절의 시간, 즉 그 시점의 앞과 뒤로 역사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말하자면 사건의 시간이 말이다.  

 

고요한 ... - 소설 자체가 드러내는 결과 

 

<고요한 집>은 왜 고요한가? 어쩌면 답은 매우 단순하다. 운동 혹은 변화가 없이 정체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소설의 액면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이야기 해보자. '고요한' 집은 일종의 결과다. 하산의 폭행으로 인해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닐귄, 그 집은 이 죽음으로 인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상태에, 슬프기도 하지만 단지 슬픔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빠진다.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하고, 레젭은 이층에서 파트마가 부르는데도 올라가지도 않으며, 파트마는 그녀대로 자신의 과거의 노스탤지어(nostalgia)로 빠져들 뿐이다. 여기에서 시간은 글자 그대로 멈추어버린다. 그 누구도 어떤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찾아오는 정적, 고요, 바로 이와 함께 소설의 흐름 혹은 시간의 흐름은 종결된다. 물론 이 죽음을 하나의 사건으로, 사건적 시간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평가는 이 소설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적어도 이 소설 자체에만 국한하여 말할 때, 이 사건은 소설의 시간적 흐름을 멈추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혁명주의자 닐귄과 극우파 민족주의자 하산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단순한 치정 범죄로만 읽는다면 소설이 펼쳐내는 이야기를 너무나 협소하게 읽는 방식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이 집안에 대해, 혹은 터키의 근대에 대해 이야기 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 집 - 터키적 근대성과 그의 자식들

 

이 집안의 가계도를 그려 보자면, 셀라하틴을 정점으로, 아들 도안과 셀라하틴의 서자들인 레젭, 이스마엘, 삼대째로 파룩, 닐귄, 메틴 그리고 이스마엘의 아들인 하산이 있다.  

 

셀라하틴은 의사이며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고 터키의 근대화 및 변화를 주창했던 지식인이었다. 그로 인해 그는 이스탄불 근교의 한 작은 도시로 쫓겨난다. 거기에서 그는 서구의 근대화 혹은 지식의 완성에 대항하는 터키만의 지식 혹은 백과사전의 기약없는 완성을 위해 매진한다. 

 

어쨌든 그와 파티마 사이에서 태어난 도안의 자식들인 파룩, 닐귄, 메틴은 어떤 의미에서 터키 근대성의 적자들이다. 

 

- 파룩은 더 이상 대문자 역사(History)를 쓸 수 없는 오늘날의 정황 내에 처한 터키 지식인의 모습이다. 하나의 역사, 즉 어떤 하나의 이름 아래(여기에서는 터키라는 큰 이름 아래) 위치하는 대문자 역사는 모든 각각의 이야기들(histories)을 유일한 관점으로 서술하는 것인데, 우리가 아는 것처럼, 서구의 지성사는 2차 대전과 아우슈비츠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그 차마 말할 수 없는 범죄로 인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마치 미셸 푸코의 지식에 대한 고고학의 연구 방식을 보이는 파룩의 지역사 연구 장면은 각각의 이야기 혹은 작은 역사를 써나가는 오늘날의 경향을 보여준다.

 

- 닐귄은 좌파, 혁명주의자다. 분명히 좌파 혹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적 운동의 궤적은 근대와 함께한다. 아니 근대를 그 발단으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공산주의는 근대성의 자식들 중 하나다. 닐귄은 공산주의적 지식인의 그러한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 메틴은 서양의 특히 미국의 자본주의적 풍요를 동경한다. 그 역시도 자신이 동경하는 서양적 자본주의를 위해서라면 전통 따위는 상관이 없는 자인데, 우리는 역사에서 자유주의자들(liberals)이라고 분류되는 자들에게서 이런 경향을 본다.(사실 자유주의자들 보다는 오히려 방종주의자들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들 셋 이외에 하산이 있다. 그는 셀라하틴의 서자들 중 도안이 준 돈을 받아 복권가계를 운영하는 이스마엘의 아들이다.

 

- 사실 앞에서 이야기 한 적자들 이외에 서출인 하산도 역시 터키라는 하나의 '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민족주의는 일종의 근대적 발명품이다. 유럽에서 근대적 국가가 탄생하기 이전에 유럽의 각 지역은 같은 말을 쓰고, 비슷한 종교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엄연히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사는 다른 지역이었다. 심지어 가까운 지역에서 그런 경향이 있었는데, 근대적 국민 국가 혹은 민족 국가가 들어서면서, 이를 해소하고 인민의 역량을 한 곳으로 집중하기 위해 도입하게 된 이데올로기가 바로 민족주의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독일 나치즘을 들 수 있다(아리아인들의 순혈주의 및 고대 민족신화 발굴). 이러한 내세우기 어려운 측면으로 보자면, 민족주의는 일종의 근대성의 서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민족주의자 하산이 셀라하틴의 서출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이라 볼 수 있다. 

 

다시 '... 고요한' - 다시 그 질문으로

 

집안의 가계도를 보자면 정체 혹은 운동의 부재라는 것은 단지 소설에서 액면으로 드러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바로 터키의 근대화 혹은 사회의 철저한 변화라는 의미에서의 운동의 부재가 더욱 크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먼저 파룩과 같은 포스트모던적 파편화의 지식인들이 실행하는 작업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그 역시도 할아버지 셀라하틴과 같이 자신의 백과사전을 쓰고 있는 것일 수 있지만, 그에게 있어 이 작업의 의미는 셀라하틴이 자신의 작업에 부여했던 의미와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 오늘날 문화를 통해 자신의 나라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 적다. 셀라하틴 베이의 백과사전적인 손자들은 그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 자신의 백과사전을 쓰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가 심지어 생각의 수입자라는 측면에서도 셀라하틴 베이 만큼이나 급진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그 누구도 내가 셀라하틴 베이 같은 사람들을 경시한다고 생각하기를 원치 않는다.(오르한 파묵, <The Other Colors>, p131. 영문판 위키피디아 인용문을 재인용함.)  

 

파묵 자신의 말처럼, 셀라하틴의 작업은 사회를 보다 급진적으로, 철저히 변화시키고자 하는 갈망에서 나온 것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의도는 존중되어야 한다. 

 

닐귄이 재현하는 좌파 지식인들의 경우, 그 운동의 힘이 너무나 미약하고 대중과 연결되지 못했고(닐귄과 하산의 적대), 메틴과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애초에 자신의 나라의 상황 따위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서구적 자본주의의 풍요로움에만 관심을 가지는 자들이며, 하산이 재현하는 이슬람을 바탕에 둔 종교적 민족주의가 관심을 가지는 유일한 변화는 과거로의 회귀, 즉 반동적 운동에 다름 아니다. 결국 그 집의, 혹은 적어도 이 책이 쓰여질 당시 터키의 고요함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드러난다. 운동 또는 시간의 부재와 같은 어떤 것을 유발하는 무기력함, 편안함, 혹은 슬픔과 과거의 기억들에 둘러싸여, 그들은 닐귄의 죽음에도 할말을 잃은 채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트마의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책, 독서, 마차여행의 기억으로 이 글을 맺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 하다. 반복되는, 그렇기에 즐거운, 그러나 결코 돌아오지는 않을 시간에 대한 기억으로... 

 

... 우리가 뒤로 한 길, 생각하면 아주 기분이 좋아지는 과거를 보고 있었다. 정말 좋았던 것은, 손에 들고 있던 그 책 때문에 뒤얽히고 복잡한 과거를 어쩌면 집에서 다시 경험할 수 있을 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 아주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이곳 내 침대에 누워 생각했던 것처럼. 넌 삶을 단 한 번의 그 마차 여행을, 끝나면 다시 시작할 수 없어, 하지만 손에 책 한 권이 들려 있다면, 그 책이 얼마나 복잡하고 모호해도, 다 읽고 나서, 그 모호함과 삶을 다시 이해하기 위해, 원한다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 읽은 책을 다시 읽을 수 있어, 그렇지 않니, 파트마? (p26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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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1. 모든 이야기의 발단은 한 살인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엘레강스' 에펜디라는 한 금박세공 장인의 죽음, 죽은 자의 푸념으로부터, 이미 나흘씩이나 한 빈 우물 바닥을 뒹굴며 썩어가고 있는 그의 푸념으로부터. 일종의 고발, 자신을 죽인 자를 찾아달라는 호소, 그로부터 이 소설을 읽는 지난한 지적 노동은 시작된다. 시종일관 시점의 변화를 통해, 분열적인 말하기를 통해 모든 일어나는 일의 전개를 제시하는 방식의 글에서, 고된 노동과 맞먹는 힘겨움을 느끼지 않을 방법이 있겠는가? (이런 말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이 살인사건의 이야기를 쉽게 풀어내는 방식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1591년(이 소설의 사건들이 벌어지는), 당시의 오토만 제국의 술탄 무라트 3세는 1년 남은 이슬람력 헤지라 1000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형식의 화첩을 제작할 것을 명령한다. 물론 그 화첩의 제작 주체는 세밀화가들이지만 그 화첩의 그림들은 베니스 화가들의, 특히 세바스티아노의 화풍을 받아들여, 원근법을 사용하고, 술탄의 초상 및 각 사물들의 크기를 실물 크기로 그려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 때 술탄의 밀명을 받은 에니시테 에펜디는 궁정화원장 오스만의 가장 성공한 제자들인 엘레강스, 나비, 황새, 올리브 등을 포섭하여 화첩 제작에 나선다. 문제는 이들 중 누군가가 동료인 금박세공 장인 엘레강스 에펜디를 살해한 것. 마침 에니시테의 딸 세큐레를 연모하여 12년 전 동쪽 변방으로 쫓겨났던, 에니시테의 외조카 카라(에니시테는 카라의 이모부)가 화첩 작업을 돕기 위해 이스탄불로 돌아온다. 카라는 에니시테의 일을 도우면서 과부이자 두 아들의 어머니가 된 세큐레와 결혼했으면 하지만, 세큐레의 시동생 핫산 역시 세큐레를 노리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카라는 에니시테로부터 세큐레와의 결혼승락을 받아내지만, 결혼을 앞두고 에니시테도 자신의 집에서 살인자의 흉수에 당하게 되고, 제작된 화첩은 도난 당한다. 칼라는 살인자와 도난 당한 화첩을 찾고 자신의 집안을, 세큐레와 두 아들을 보호하는 책임을 떠맡게 된다. 분명히 살인자는 그의 어린 시절 궁중화원 동학들인 나비, 황새, 올리브 중 한 명이다. 그리고 이 치명적인 연쇄살인의 이유는 세밀화에 대한 의견차다. 카라는 살인자를 찾아서,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고 이들의 그림을 대면해 나가는 힘겨운 여정에 나선다.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정리하게 되면, 무언가 산만하게 분산된 이야기들 - 여러 사람들과 심지어 그림 속의 사물들을 통해 구술되는 듯한 느낌의 - 을 하나로 엮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어 16세기 말의 터키에서 완성에 이른 그리고 동시에 쇠락의 내리막길로 들어선 세밀화라는 예술적 과정에 대해 말하는, 그리고 동시에 사랑의 둘을, 서양과 동양 문화 및 예술의 대립을, 예술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플라톤주의의  대립을 그려내고 있는 놀라운 소설이 어떤 순수함에 대한 집착이 이를 수 밖에 없는 파국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이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소설과 <장미의 이름>이 지닌 공통적인 구도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2. 먼저 추리소설과 지적 노동에 대해서. 노동이라는 말이 과연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소설과 어울리는 말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추리소설은 일종의 유희를 위한 독서의 대상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유희 혹은 여흥을 위한 목적으로 이 책을 집어들었다면, 나는 그러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할 것이다. 

이 소설 중에는 '거의' 전능에 가까운, 매끄럽게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같은 것은 등장하지 않으며, 각 장의 이야기를 담당하고 있는 인물들, 살인자, 두 피살자들, 심지어 그림들 - 개, 나무, 금화, 죽음 등 - 의 철저하게 1인칭에 한정된 비일관적 서술들은 하나의 매끄러운 전체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방해한다. 이 소설이 비록 추리소설의 형식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바로 그런 점에서 전통적인 형식의 추리소설은 아니다. 이 비일관성의 구슬들을 꿰어 하나의 목걸이를 만드는 일은 어떤 비범한 능력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철저하게 독자의 몫으로 떨어지며,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읽는 것 자체가 하나의 노동이다.  

그러나 이 노동에는 단순히 즐거움을 위한 읽기 이상의 가치가 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관점의 변화와 심리적 불안이라는 시험을 통과할 수만 있다면, 이 소설을 읽는 과정으로부터 무엇인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몇 가지 매우 중요한 생각들 또는 사유의 단초들을 말이다.

3. 이 소설을 끌어나가는 중심축은 대립항들 간의 갈등인데, 먼저 사랑이라는 축으로 이끌려 가는 대립항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종의 여러 개의 겹쳐진 삼각형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a. 먼저 사랑스러운 딸을 아끼는 에니시테와 생과부가 된 세큐레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카라가 그려내는 삼각형,
b. 죽은 형을 대신해 절세미인인 형수를 취하려는 핫산(형사취수제는 중동 지방의 오래된 관습이다)과 세큐레, 카라가 그려내는 삼각형,
c. 마지막으로, 정확하게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소설의 말미에서 드러나는 카라의 오랜 친구 올리브 에펜디와 세큐레 그리고 카라가 그려내는 삼각형

을 말이다. 이 세큐레를 대상으로 하는, 그리고 종국에 카라가 승자가 되는 겹쳐져 있는 삼각적 관계들은 모종의 경쟁 및 긴장을 드러내는데, 이로 인해 소설의 전개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된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이 삼각형들의 겹침의 중심에 있는 세큐레가 결코 수동적인 위치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 방물장수 에스테르를 통해 매우 적극적인 개입을 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선택의 주체는 카라가 아니라 세큐레다.(또한 사랑의 매개자 에스테르의 역할을 살펴보는 것 역시 흥미진진한 일이다.) 

어쨌든 카라와 세큐레 간의 사랑은 다른 대립 및 갈등 관계들과 때로는 느슨하게, 그리고 때로는 긴밀하게 엮여나가면서 하나로 꼬아낸 보다 크고 탄탄한 줄을 형성하고 있다.  

4. 사랑이라는 축과 엮이는, 어쩌면 보다 중심적인, 축은 바로 살인사건의 원인이다. 서양의 화풍을 받아들이는 투르크 제국, 그것은 이미 궁정화원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화원들에게, 그리고 그들 중 에니시테 에펜디에 의해 차출된 네 명의 화원들에게, 일종의 충격이 될 수 밖에 없다. 살인사건은 제물이나 명예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이 아니라, 바로 이 문화의 충돌로 인해 빚어진 결과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피상적인 서술이 될 수 밖에 없는데, 보다 깊숙히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거기에는 예술 자체에 대한 의견 혹은 관점의 차이가 자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세밀화가 추구하는 화풍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그것은 오래 전에 동방(중국)으로부터 전래하여, 시라즈와 헤라트라는 지방에서 발전되어 이슬람 권 전체에 퍼진 화풍이다. 지평선이 화폭의 상단에 그려지고, 모든 인물과 사물들은 이차원으로 평면상에 배치된다. 인물들, 특히 여인들은 중국 당나라의 화풍이 그랬듯이, 약간은 퉁퉁하게 하얀 얼굴로 그려지고, 신분에 따라 인물의 크기가 달리 그려진다. 사물들 역시 과거의 고인들의 화풍에 따라 언제나 이상적인 형태로 정형화된다. 그에 반해 서양, 특히 베니스로부터 들어온 화법은 3차원적이다. 마치 현실에서 사물과 풍경을 보듯 모든 것은 가까움과 멂에 따라 음영과 색상이 배치되고, 인물들과 사물들은 신분고하에 관계 없이 동등한 크기로 다뤄진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여기에서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대립을 볼 수 있는데, 말하자면 세밀화가들은 언제나 정형화된, 오래 전부터 내려온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신적인 시선을, 이데아의 바라봄을 추구하는데 반해(따라서 세밀화가들에게 눈멂은 화가로서의 결점이 아니라 보다 순수한 바라봄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것이다), 서양의 화가들은 육안으로 직접 보는 것과 같은 현실적인 것을, 현실의 모방, 즉 (이데아의) 모방의 모방을, 그로부터 오는 눈의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더라도, 살인자가 어떤 종교적인 순수함을 추구하는 자였던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5. 이 소설을 다른 중요한 현대 소설과 매듭지을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수도원을, 특히 수도원 경내의 장서관을 중심으로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펼쳐냈던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을 말이다. 플라톤주의와 교회의 권위를 대변하는 장님 호르헤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속권(俗權)의 도전을 대변하는 윌리엄의 대결은 놀라운 것이다.(혹시라도 아직 읽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물론 <장미의 이름>이 다루고 있는 대결은 결코 예술 자체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 대결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전된 책과 웃음의 문제, 사용권의 문제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럼에도 <장미의 이름>이 그려내는 대립은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이데아'와 '모방의 모방'의 대결이라는 측면에서 <내 이름은 빨강>이 그려내는 대립과 매듭지어질 수 있다. 그리고 두 소설에서 등장하는 이 순수한 플라톤주의자들 - 호르헤와 살인자 - 은 어떤 파국을, 재앙을 불러일으킨다.(<장미의 이름>의 호르헤의 경우, 수도원 및 장서관의 화재로 인한 소실. <내 이름은 빨강>의 살인자의 경우, 두 사람의 목숨 및 자기 자신의 파멸.) 

6. 우리가 알듯이, 어떤 순수함에 대한 집착은 언제나 재앙으로 이어진다. 현실에는 결코 순수한 것이 없다. 순수에 대한 집착은 이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의 자리를 현실 속에 마련하기 위해 불순한 것들을 몰아내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종교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비신자들, 또는 보다 그럴듯한 말로 하자면, 이교도들을 살해하는데 전혀 망설이지 않고, 사랑의 순수함에 대한 대한 열정은 완전한 타자로서의 둘이 지닌 각각의 차이를 무화하려 하며, 순수한 정치에 대한 열정은 모든 불순한 자들을 축출하여 정치의 가능성을 독재, 혹은 전제정으로 제한시킨다. 순수함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있어, 자기 이외에 모든 것 또는 모든 이는 그 불순함에 있어 의심의 대상이 되며, 그런 의미에서 순수함에 대한 열정이란 결국 자기애 혹은 자기중심성의 다른 이름이 될 뿐이다.(소설의 말미에서 살인자가 훔쳐간 화첩을 회수했을 때, 그 화첩의 중심에 살인자의 형상이 그려져 있음을 상기해 보라.)

현실 속에서 살아가기, 자신과 다른 타인들과, 자기의 순수성이 아닌 타인의 불순함으로 오염된 세계 속에서 견뎌내기, 그것이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다. 그리고 또한 한편으로 명심해야할 것은 순수함을 추구하는 자를, 그리고 자신의 순수함을 위해 남을 이용하거나, 심지어 쓰러뜨릴 수 있는 자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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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민음사 모던 클래식 58
모옌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놀라운 글쓰기. 가장 대중적인 말하기를, 아니 거의 촌스러운 촌부들의 입을 빌려 어제의 그리고 오늘의 문제를 집어내고 있는 가까운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는 이야기, 이것이 내가 이 <개구리>라는 제목의 훌륭한 소설에 대해 내릴 수 있는 평가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런 평가만으로는 부족한데, 이 소설에는 또한 어떤 시대적 정황과 관련하여 소설가 모옌이 커더우라는 편지의 발신자의 이름을 빌려 전달하는 중국 현대사의 어두운 단면과 시대를 온 힘을 다해 살아나가야 했던 - 다시 말해, 혁명 혹은 근대성이라는 미명 하에 말할 수 없는 끔찍한 행위를 실행해야했던 - 국가 공무원의 회한과 함께 현재 드러나고 있는 제도 및 사회적 모순이,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1. 내용


물론 소설이 오랜 세월의 기억을 담고 있기에 많은 인물들 간의 얽힘들로 인해 결코 단순하지는 않지만, 소설의 내용은 편지의 발신자 커더우가 스기타니 선생이라는 인물에게 보내는 편지가 일종의 연대기의 형식을 따르고 있기에, 그 방식을 따라서 풀어낼 수 있을 듯 하다. 


먼저 이 편지는 고모와 발신자 커더우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모 완신은 중국 공산당의 영웅적 인물 완류푸라는 의사를 부친으로 두고, 그의 뒤를 이어 의료계에 투신하여 조산원 및 산부인과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거의 만명에 달하는 많은 아이를 받아낸다. 고모는 조국을 배신하고 대만으로 날아가 버린 조종사와의 연애에 좌절한 이후 거의 평생을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일과 당의 혁명노선에 헌신적이었다. 


그 이후 문화혁명기에 고모는 엄청난 고초를 겪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결코 꺽이지 않았던 고모의 당에 대한 충성으로 자신의 공무원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해나간다. 그 임무란 다름아닌 계획생육이라는 국가 시책인데, 고모가 이를 위해 실행했던 과업은 선전, 정관수술 및 난소 루핑, 또는 심지어 임신중절이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고모는 엄청나게 많은 새로운 생명들을 지우게 되는데, 심지어 7,8개월 된 아이를 지우는 위험한 수술의 강행으로 인해 산모들이 죽기도 한다.(편지의 발신자 커더우의 첫 아내 왕런메이 역시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흘러, 새로운 자본가 계층이 등장하고, 국가의 계획생육 정책이 두번째 아이를 낳는데 부과하는 벌금이 이들에게 장애가 되지 못하면서, 일종의 사회적 불평등이 야기된다. 심지어는 대리모나 불법적으로 후처를 통해 아이를 가지는 행태가 자행된다.(개구리 양식장은 이를 위한 시설이다.) 한편 그의 고향 마을에는 낭랑(우리로 치면 삼신할머니)을 모신 사당이 들어서고, 그 사당이 명물이 되어 지방 경제를 살리는데 기여하고 있다. 


어쨌든 커더우 역시 늙으막에 둘째 아이(사내 아이)를 가지게 된 기쁨에 뜰뜨고, 고모는 퇴임 이후 자신의 활동에 대한 일종의 회한으로 삶을 살아가고, 일종의 민간신앙에 빠져 자신이 지웠던 태어나보지도 못한 생명들에 대한 초혼(하오다서우 선생과 친허의 점토인형 만들기)으로 여생을 보낸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에는 현재의 자신과 고모가 처한 상황의 모순을 드러내고, 그 와중에서 벌어진 자신의 아내(샤오스쯔)와 대리모(천메이) 사이의 해프닝에 대한 약간은 희화화된 판결이 희곡화되어 제시된다.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았으니, 이제 이야기해 볼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다뤄보자.



2. <개구리>라는 제목 - 왜 고모가 아니라?


이 소설이 취하고 있는 <개구리>라는 제목은 어떤 의미가 있다. 개구리를 의미하는 한자어 와(蛙)라는 말은 갓난쟁이(蛙蛙)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소설 중에 반복적으로 말해지듯이 올챙이들의 생김새는 인간의 정자를 닮아있기도 하다. 이런 동형적인 유비에서, 매우 비과학적인 방식으로, 소설의 화자는 인간의 조상은 원인(원숭이)이 아니라, 개구리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개구리는 생명을 상징한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이 소설은 커더우가 고모에 대해 풀어내는 이야기다. 물론 단지 고모의 이야기만이 아닌 화자와 고모의 얽힌 이야기들을 화자 자신의 입으로 풀어내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화자는 고모에 관한 이야기를 편지로 쓴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 소설은 제목은 고모가 아니라 <개구리>인가?


사실상 이 <개구리>라는 제목의 설정이 보여주는 무엇인가가 있는데, 그것은 개구리와 고모라는 대립항의 설정이 있다는 것이다. 고모는 전근대적인 산파들을 몰아내고, 근대적인 서양의술을 통해 아이들을 받아냈고, 국가를 위해, 혁명의 지속을 위해(제도화된 혁명의 다른 이름은 국가이며, 따라서 이것은 동어 반복이다), 근대화를 위해 계획생육을 실행하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과거에 국가 그 자체였다. 실제로 그녀가 말하고 명령하는 것이 곧 법이었고 국가의 명령이었다. 소설 내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고모와 개구리의 적대는 분명하다.* 

[* 고모는 젊은 시절 조산원 활동을 할 때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여기저기 치이는 개구리를 밟아죽였고, 현에서 계획생육 책임자 역할을 할 때는 개구리 때문에 놀라서 기절 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대립인데, 말하자면 비과학적, 전근대성, 생명을 상징하는 개구리와 과학성, 근대성, 국가를 상징하는 공무원으로서의 고모 사이에 설정되는 대립이다.  


하지만 고모와 개구리의 대립에서 이야기가 끝나지는 않는다. 고모에게는 어떤 내적인 분열이 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 한참 왕성하게 활동하던 고모는 국가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런 고모도 인간이었고, 늙어서 퇴직한 이후에는 - 특히 요즘과 같이 과거의 혁명에 대한 회의가 고개를 드는 시기에 - 자신이 과거에 거쳐왔던 행적에 대한 회환으로 가득하다. 그런 의미에서, <개구리>라는 제목은 단지 개구리와 고모 사이의 대립만이 아니라, 그 대립에서 개구리가 결과적으로 승자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는 점까지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드러나는 새로운 사회적 모순들이 있다.


3. 생명의 승리, 그러나 사회적 모순


그 승리는 커더우의 고향 가오미 둥베이현에서 - 더 나아가 중국에서 - 직접적으로 말해지지는 않지만 공공연한 비밀인 어떤 사회적 모순을 떠안고 있다. 고모의 퇴직은 어떤 의미에서 국가의 공공연한 후퇴를 의미하는데, 말하자면 중국이 수정주의 노선에 의해 자본을 받아들임으로써 수많은 신흥 자본가들 - 그 중의 다수는 국가와 결탁하여 이권을 챙긴 전직 당-관료(샤오사춘으로 대변되는) - 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들은 자본을 무기로 계획생육을, 더 나아가 일반 인민대중이 지켜야만 하는 법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와 함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개구리 양식장을 떠올려보자. 이 시설 혹은 회사가 취하는 이익은 겉으로 말하는 개구리를 사용한 약품 및 기능성 화장품 생산이 아니다. 오히려 불법적인 대리모 위탁으로 돈을 버는 것이 목적으로 하는 회사인 것이다. 바로 이들의 주 고객이 새로이 등장한 자본가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또한 빠질 수 없는 것이 일종의 종교 시설이다. 과거 혁명기에 쇠퇴했던 낭랑묘(娘娘廟)라는 아이를 점지해준다는 신을 모시는 사당은 복원되어 지역의 명물이 되어 있다. 관광객들과 아이를 낳게 해달라는 기도를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 그들에게 물건을 팔아 돈을 버는 상인들. 거기에서 팔리는 물건들 중에는, 퇴직 이후 고모가 하오다서우, 친허 등과 함께 만들어내는 점토 인형들도 있다.  


그렇다. 자본의 무법성과 편재성과 결탁하여, 언제나 그 모순을 감추어주는 역할을 자임하는 종교, 오래된 공산주의자들의 상투어를 빌려 말하자면 '인민의 아편', 어쩌면 이 소설이 취하고 있는 편지와 희곡이라는 형식이 그러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4. 편지와 희곡이라는 형식


이 소설이 취하고 있는 편지라는 형식의 글쓰기는 항상 누군가를 향하는 것이다. 발신인과 수취인이 있는 형식. 그러나 문제는 이 소설의 허구적 수취인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옮긴이가 밝히고 있듯이, 이 글의 수취인은 분명하지 않다. 스기타니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밝혀진 허구적 인물은 과연 현실의 어떤 특정 인물로 특정될 수 있는 인물인가? 예를 들어, 오예 겐자부로 같은?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왜냐하면 이 글이 공개된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단순히 어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 뿐만 아니라, 소설가 모옌의 자국민들을 포함한 전 세계의 독자들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가 쉽게 우편물이라고 말하는 어떤 것 - 편지나 엽서 같은 - 에는 어떤 방황적인 측면이 있다. 여기저기를 떠돌아 수취인을, 누군지 특정되지 않은 수취인을 향할 때까지, 계속 돌고 돌면서 어떤 확정되지 않은 의미를 생산하는...* 

[* 데리다는 우편물의 이런 측면을 도착방황성(destinerrance)이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했다. 물론 데리다가 이 말을 쓰는 맥락은 밀봉되지 않은 엽서에 대한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 소설이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공개를 위해 출판된 글이라는 측면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편지가 지닌 방황성이란 어떤 매여있는 대상이나 의미가 없기에, 고정되지 않는 의미에, 있는 것이 드러나지 않은 어떤 것에 가닿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편지가 있는 것이 분명치 않은 비실존과, 유령들과, 태어나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영혼들과 닿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방황성을 통해서일 것이다. 고모가 말년에 결혼한 하오다서우 선생과 그녀의 추종자 친허와 함께, 그녀가 지웠던 아이들의 영혼을 불러넣어 만들어내는 인형들. 


희곡 혹은 연극이라는 형식 역시 주목해야 한다. 연극은 일종의 집단적 의례다. 무대가 설치되고, 배우들이 어떤 허구의 이야기를 육화해내며, 이 물질적 실천에 대해 일희일비하는 관객들이 모여 함께 만들어내는 의례. 특히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구성하는 이 집단적 의례를 위한 '글쓰기'가 절정에 달하는 장면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좀 더 명확해진다. 물론 마치 '판관 포청천'을 연상하게 하는 - 그로 인해 웃음을 자아내는 - 판결의 장면은 한 죽은 아이의 어머니(불법적인 방식으로 커더우의 아이를 대신 낳았으나 불행히도 아이가 죽어버린 천메이)와 한 살아있는 아이의 어머니(이후에 기적적으로 커더우의 아이를 가지게 된 늙은 산모 샤오스쯔) 사이의 송사를 다룬다. 그 판결의 결과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희곡 혹은 연극이 다루는 내용이 과거에 자행된 말할 수 없이 끔찍한 행위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는 점은 명확하다. 그 희곡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혹은 더 나아가, 그 희곡의 절정이 되는 판결의 목적은 잘못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한풀이 같은 것, 말하자면 일종의 굿판이 아니냐는 것이다. 계획생육 자체가 아니라 현재의 사회적 모순의 봉합을 위한 굿판.    


5. 소격효과 - 생명이 아니라 다수를 향해


그러나 이런 의구심을 뒤로 하고, 생각해야만 할 것은 옮긴이가 저자의 말을 인용하여 전하고 있는 '소격효과'라는 말이다. 소격효과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거리를 두는 것이다. 연극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로부터, 현실의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로부터 거리를 두게 만드는 것. 현실의 문제로부터 거리를 둘 때, 우리는 그 문제를 보다 명확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바로 이 소설의 간접적인 성격이 드러난다. 복잡하게 꼬인 문제와 대립적인 위치에 서게 될 때, 문제는 오히려 매우 난해한 것이 될 수 있지만, 이 문제에서 거리를 두거나 혹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때, 문제는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며 해결가능한 것이 되기도 한다.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그런 점이다. 분명히 과거 혁명의 실천에는 과오가 있었다. 혁명, 전근대의 타파, 혹은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침습적인 정관 수술, 루프 수술 등은 차치하고서라도, 거의 나올 때가 다 된 아이들을 낙태시키는 말할 수 없이 끔찍한 행위가 자행되었던 것, 그런 행위가 과오라는 점은 누구에게도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이 과오의 인정이 과거로의 회귀가 되어서는 안된다. 새로운 자본가가 등장하여, 국가의 법망을 피해 일반인들은 꿈도 못 꿀 일들을 자본의 힘으로 행하는 새로운 - 그러나 한편으로 과거의 반복일 뿐인 - 신분제 사회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현재를 사는 우리가 지양해야할 어떤 것이다. 편지의 형식 역시 단순히 사라져간 비실존의 소환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바로 이 형식을 통해 언뜻 언뜻 드러나는 사회적 균열의 지점들이 바로 제거되어야할 사회적 모순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구리>라는 제목에 대해서도 다른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생명은 그 자체로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에, 생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은 동어반복적일 수 밖에 없으며, 그런 점에서 개구리를 생명과 연관시키는 것은 진부하다. 개구리는 오히려 '다수'와 연관되어야 한다. 일자로서의 국가에 대립하는 다수로서의 개구리들, 인민대중들, 중요한 것은 신비화된 - 그리고 자본과 결탁하는 - 추상적 생명이 아니라 구체적인 그들 개개인의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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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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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면에서 대단하다. 장르적 특성에 따른 탄탄한 구성,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긴장감 넘치는 전개 등등.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간단히 언급해야만 할 것은 소설 하나를 쓰기 위해 이 작가가 했을 엄청난 양의 공부와 노고에 대한 찬사일 것이다. 물론 잘 짜여진 미스터리의 구축의 과정에 투여될 엄청난 양의 노고 역시 대단한 것이기는 하지만, 지리학과 인류학적 지식으로부터 수학, 컴퓨터 관련 공학 지식, 바이러스학, 면역학, 생화학, 분자생물학 등에서 이루어진 지식의 발전을 망라하는 온갖 지식들이 잘 버무려진 전지구적 규모의 서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투여되었을 시간과 공에 비하자면 차라리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질 지경이다. 특히 광의의 생물학에 대한 지식의 제시는 아마 동종 학문에 대한 전공자라고 해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상당히 정확한 것이다(하이즈먼 리포트나 폐포상피세포 경화증과 같은 허구를 예외로 하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독서 과정에서 전공 지식이 없는 일반인이라고 해서 이야기가 지루하다고 생각할만한 시간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지식을 잘 버무려낸, 인류의 '종말/새로운 시작'에 관한 잘 구축된 이야기가 시종일관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런 '시종일관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잘 쓰여진 이야기라는 것은 소설이라는 장르적 구축물에 있어 한 가지 흠결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런 과정에 함몰된 독자는 이런 지성의 향연을 즐기는 가운데 '생각 없음'이라는, 어찌보면 역설적인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이 놀랍도록 광범위한 지식을 드러내는 지성적 허구에서 몇 가지 생각해 볼 문제들을 짚어보기로 하자. 말하자면, 이 지식과 미스터리(다시 말해, 알 수 없음, 단적인 신비)의 공존이라는 모순을 포함하는 향연으로부터 찾을 수 있는 인간에 대한 물음, 좀 더 특정하여, 인간의 진화와 관련된 문제들을 말이다.  


진화, 새로운 것 - 끔찍한 것 또는 선물


진화라는 것은 일종의 변화다. 그리고 그 변화의 결과는 당연히 어떤 새로운 것의 도래일 수 밖에 없다.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소설이 제시하는 미스터리의 중심에는 어떤 전대미문의 것, 인간이라는 종을 멸종 시킬지도 모르는 새로운 것, 바로 인간의 지성을 넘어서는, 그것도 무한할 정도로 넘어서는 지성적 능력의 진화의 주인공이 된 한 아이가 자리하고 있다. 현대 암호의 근간을 이루는 소수(素數) 계산, 지금까지의 과학기술로는 불가능한 프로테인 3차원 구조 및 세포신호 체계를 예측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수퍼 컴퓨터로도 해내지 못하는 기상 이변의 정확한 예측 등의 능력을 보이는 이 새로운 인류, 기존의 인류와는 다른 인간종에 대해, 기존의 인간들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먼저, 이 새로운 인류를 괴물로 보는 방식, 이 아이가 자라고 그와 같은 능력을 가진 괴물들이 늘어나고, 진화의 최정점이라는 고정된 자리에 머무르는, 진화가 정체된 인간들을 밀어낼 것이라는 두려움, 사실상 그러한 두려움은 실체적 학문으로부터 어떤 근거를 끌어오는데, 이것은 고고학 및 진화론의 관점에서 역사 이전에 현생 인류의 조상이 네안데르탈인들의 멸종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과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들, 즉 제노사이드의 화석적 증거다. 


제노사이드(genocide), 종의 절멸, 한 종의 씨를 말려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제노사이드가 의미하는 바다. 이 소설 속에서 이 제노사이드라는 말은 중첩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먼저 어떤 새로운 인간종으로서의 한 아이를 죽인다면, 그것은 한 생물종의 절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생각할 때, 만일 새로운 인간종이, 과거 현생 인류의 조상들이 네안데르탈인들을 죽였던 것처럼, 현재 지구 상에 존재하는 인류를  쓸어버린다는 잠재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떤 한 사람에게는 자손을 퍼뜨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에서, 만일 한 사람을 죽인다면, 그것 자체로 어떤 (가능적 차원의) 제노사이드가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gen-'이라는 어근은 원래 '씨' 또는 종을 뜻하는 말이다.)  지구 상에 만연한 전쟁, 특히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아무런 목적도 없이 진행되고 있는 학살에서 우리는 제노사이드를 보게 되며, 그리고 현재 인간종의 정점에서 전지구적 지배권을 행사하는 체제 자체가 바로 이 살인 또는 제노사이드를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다음으로 제시될 수 있는  선택지는 어찌 보자면 좀 더 단순한 것일 수 있는데, 말하자면 이 새로운 인류를 있는 그대로 그의 능력을 어떤 선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지는 어떤 의미에서 보다 수동적인 태도를 통해 받아들여야 할 어떤 것으로, 우리는 그러한 예를 어쩌면 <성서>라는 책으로부터, 여러 민족들의 아버지가 되었던 한 인물의 손님에 대한 영접, 즉 환대의 이야기로부터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창세기에 기록된 아브라함이 천사들을 맞아들일 때, 그들은 기본적으로 그의 지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는 자들이므로, 그들이 적인지 혹은 자신에게 어떤 좋은 소식을 전하러 온 자들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환대의 이야기에는 어떤 겹침이, 적과 친구의 겹침이, 손님과 주인이 서로를 적대하는 동시에 환대하는 겹침이, 그런 의미에서 어떤 동시성의 모순이 상존한다. 


이런 상황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선택 혹은 결정일 것인데, 우리는 이 소설 속에서 어떤 부정적인 선택을, 잠재적인 위험에 대한 제거의 결정을, 마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무기를 제거하기 위해 미국이 이라크를 상대로 일으킨 제국적 전쟁 - 물론 그 전쟁의 목적은 석유 자원이었지만, 적어도 액면 그대로 이야기 하자면 - 에서 볼 수 있었던 추악한 결정의 연장선에 있는 어떤 것이다. 자신의 능동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 혹은 이익의 연장을 위해, 타자를 구분하고 이어서 제거 혹은 배제하는, 즉 구분과 배제의 원칙 말이다.  


인간 동물 - 어떤 진화인가?


자연 선택이라는 것은 자연 속에서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생명체가 살아남으며, 적응하지 못하는 생명체는 도태된다는 가혹할 정도로 단순한 원리에 따른 것이다. 유전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한 개체가 어떤 이상을 일으킨 유전자의 배열에 의해 어떤 놀라운 능력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는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경험적으로 증명된 바 없으므로) 완전히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 인간 개체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때 남는 것은 이 개체의 놀라운 능력 보다는 과연 이 개체가 면역 체계나 다른 기관들의 발달에 있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는가 하는 문제다. 하지만 이런 구구절절한 생각은 옆으로 밀어두기로 하자. 중요한 것은 오히려 자연적인 또는 생물학적 종의 진화 그 자체 보다는 인간의 발전에 대한 물음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그 보다 더한 어떤 것으로, 인간 보다 더 고등한 어떤 새로운 인류로 진화한다면 어떤 모습을 갖출 것인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하이즈먼 리포트'라는 허구적인 과학 보고서에는 이러한 새로운 인간종에, 1. 현생 인류의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탁월한 지능, 2. 탁월한 도덕성, 3. 인간의 5감 이외에 새롭게 얻게 된 제 6감이라는 특성을 부여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인간을 거의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넘어서는 지성적 능력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진행된 인류의 역사 중에서 근현대라는 어떤 특정한 시대적 구분의 시기에, 인간은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다른 생물들 및 자연 환경을 마음 내키는대로 이용해왔다. 서구라는 어떤 특정한 지역에 국한될 수 있을, 하지만 우리 모두가 서구적 사상과 과학 기술을 받아들인 세계 내에 살고 있다는 의미에서 또한 그 특정한 지역에 국한될 수 없는, 이러한 대상에 대한 무자비한 지배 및 관리는 단지 다른 생물종들이나 자연 환경을 향한 것으로 한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프리카 및 아메리카 등의 식민 지배,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행된 무차별적인 노예 사냥이 과거에 펼쳐진 인간적 잔혹성의 역사를 웅변한다. 


하지만 만일 주체-대상의 구도가 바뀐다면, 인간-자연 혹은 인간-동물의 구도가 인간 보다 뛰어난 어떤 다른 존재의 도래로 인해 인간이 대상으로 전락한 x-인간의 구도로 전환된다면? 인간이 다른 생물 및 자연 환경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지성적 능력과 이에 바탕한 지식 축적, 과학 및 기술의 발전이었으므로(그 원인에 있어서나 그 정당화의 근거에 있어서나), 어찌 보자면 이런 전환의 가능성은 당연히 귀결될 수 있는 상상이며, 그 결과는 무시무시한 것이다. 종래의 이전의 인간 종들이 현생 인류의 조상들에 의해 멸종된 것처럼(화석에 의한 증거로부터 유추할 수 있듯이), 인간은 멸종할 수도 있고, 생존한다해도 하등한 종으로 취급되거나 또는 사육될 수도 있다(예를 들어, 영화 <혹성 탈출>).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결코 동물적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자기와 다른 대상(자연 혹은 타자)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위계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위계 속에서 인간은 결국 동물화 혹은 자연화 되는데, 왜냐하면 자연의 원리가 바로 위계라는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과는 달리 만족으로 모른다는 특유한 속성이 있기는 하다.) 자연의 먹이 사슬에서 최상위에 있을 뿐, 만일 인간 보다 더 뛰어난 종이 탄생한다면 언제든 그 위계의 최상위라는 자리는 박탈될 수 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동물일 수 밖에 없다.(새끼 침팬지를 잡아먹던 숫컷 침팬지 무리 그리고 그 침팬지들의 우두머리를 총으로 쏴 죽이던 한 용병을 생각해 보라.) 


만일 인간의 자연적인 또는 동물적인 측면에서의 진화와 구분되는 어떤 인간에게 고유한 의미에서의 진화를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자연적 위계와 구분되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인간의 동물적 조건, 심지어 자기 보존과 이익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는,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인간의 (동물적) 본능에서 벗어난 인간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든 자신에게 사회적으로 그리고 국가적으로 부과된 고정된 자리에서 벗어나 운동과 변화를 추동하고자 하는 인간, 즉 인간 주체일 것이다. 바로 이런 시각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보자.


정신의 운동 - 인간 주체의 운동


물론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새로운 인류의 탄생이라는 허구적 단초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의 단초는 각 인물들이 이 '알 수 없는 것의 일어남'에 대한 각각의 반응으로 이어진다.


먼저 어떤 반동적 주체의 형상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연히 이 식별불가능한 사건을 통제하여, 어떤 잠재적 위험의 싹을 제거하기 위한 반응을 하는 정치가 및 관료들이 바로 이 반동적 주체의 형상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모호한 주체 혹은 몽매주의적 주체의 형상이 있다. 새로운 인류의 탄생에 대해, 그 아이의 질적으로 다른 능력에 대해, 경의를 보내며 심지어 그 능력을 신비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다. 그러한 태도는 인간이 실행할 수 없는 소수(素數) 계산 능력, 프로그래밍 능력, 일반적인 언어와는 다른 논리를 가진 언어 등, 이 새로운 실재를 어떤 신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가 가진 모든 능력을 신학화 한다(예를 들어, 보고서를 썼던 하이즈먼이나 인류학자 피어스, 겐토 박사[아버지] 같은 인물).   


이 어떤 알 수 없는 탄생에, 사건에 충실한 주체는 어떤 의미에서 용병들 그리고 겐토와 이정훈이라는 제약을 담당했던 학생들일 것인데, 이들은 이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둘러싼 지구적 스케일의 플롯 속에서, 지구적 관리 체제로부터 비자발적으로 배제된 후, 이 아이의 능력에 대한 모종의 신학화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이유로 인해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기 때문이다(용병들의 경우, 단지 자신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인간과 다르지만 또한 있는 그대로의 인간인 한 연약한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겐토와 정훈의 경우, 난치병으로 고통받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어떤 의미에서, 이 새로운 인류를 제거하려 했던 자들이 이 어린아이에게 붙였던 '누스(정신, Nous)'라는 이름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인데, 말하자면 이 '정신'은 (아프리카의 정글이라는) 자신의 자리를 떠나 (지구적) 운동을 통해 (일본에 위치한 자신의 동족이라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라지는 원인' - 이들은 일본 사회로 숨어들어가며, 이들이 만들어낸 '기프트'라는 제약 프로그램 역시 사라진다는 의미에서 - 으로 인해 인간 자체가 행하는 어떤 변증법적인 그리고 주체적인 운동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 속에서, 헤겔이 말하는 그대로, 자신을 부정하고 원래의 자리를 떠나 결국 자신으로 돌아가는 부정성의 운동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오히려 생물학적 진화의 주인이 된 새로운 인류가 아니라 오히려 종래의 인류, 현재 더 이상의 발전이 없는 듯 보이는, 자신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듯 보이는 현재의 인류다. 


결국 이 지식과 지구적 차원의 미스터리가 만들어낸 즐거운 조합물로부터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의 진화, 정신의 운동, 제노사이드라는 어떤 동물적 비극을 넘어서는 인간의 고유한 발전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첨언할 것은 여기에서 생각이란 언제나 실천과 같은 것이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들 - 예를 들어, 몇 년 전에 벌어졌던 용산참사와 같은 일이 바로 옆 동네에서 그대로 벌어지고 있다 - 은 끝모를 탐욕과 동물적 수동성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사회의 지배적 체제의 부당함에 저항하는 곳, 바로 사유와 실천이 만나는 그 곳에, 단지 동물적 차원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의 고유한 자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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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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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가 기억하는 [남아 있는 나날]은 동명의 영화였다. 이 영화에 대해 기억하는 이유는 순전히 개인적인 것인데, 내가 좋아하는 배우인 엠마 톰슨이 앤소니 홉킨스와 수퍼맨으로 유명했던 크리스토퍼 리브스가 나온 영화였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 내용은 조금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배우들 때문에 기억을 하는 것 뿐. 다시 이 작품을, 혹은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어찌 보면 기억하지 못하던 내 과거를 다시 상기시키는 작업이었다. 


어쨌든 작품 자체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동명 소설은 이 영화의 원작이 되는 소설이다. 기억하기로, 어린 시절에나 봤음에 틀림없는 영화의 원작 소설. 그러니 이 소설에 관해 이야기 할 때, 어떤 기억이라는 문제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적절할 듯 하다. 분명 이 소설은 인생의 완성기에 들어선 한 초로의 노인이 어떤 계기로 여행을 하게 되고, 자신의 삶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티븐슨은 달링턴 홀이라는 영국의 한 대저택을 관리하는 버틀러(butler, 이 책에서는 집사로 표현된)다. 그는 대저택의 집사로서 한 때 수십명의 인력을 운용하던 영락의 시기를 뒤로하고, 운용 인력의 수가 손으로 셀 정도로 줄어들어 버틀러인 자신 마저도 이것저것 잡무들을 해야만 하는 상태에 빠진 달링턴홀을 지키고 있다. 이미 주인도 그가 평생을 모셨던 달링턴 경에서 미국인 자본가 패러데이 씨로 바뀌어 있다.


어느날 갑자기 그에게 여행을 해야만 할 계기가 다가온다. 마침 인력을 충원하기 위해, 과거 달링턴 홀의 하우스 키퍼(housekeeper, 책에서는 총무로 번역되어 있는)였던 켄튼 양 또는 벤 부인을 만나보기 위해서다. 그녀에게 받은 편지에는 분명 무언가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텍스트 이면에는 어떤 메세지가 있는 듯 하다(마치 이시구로가 소설에서 스티븐스의 기억에 대한 주관적 서술을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어떤 것들을 제시하는 것과 유사하게도). 바로 이러한 계기로 그는 주인인 패러데이 씨에게 휴가를 얻어 여행을 떠난다.* 마치 여행을 함께 떠난 길동무라도 된 듯 독자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황혼을 앞둔, 인생의 완성기에 들어선, 하루의 '남아있는 시간'**에 떠나게 된 이 여행은 독자인 우리가 스티븐스와 함께 그의 기억속으로, 과거의 회상으로 떠나도록 한다. 어떤 의미에서 한 사람의 회상이란 그 자체로 하나의 여행이다. 자신에게 있어서는 이미 지나가버린,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의 여행이며, 그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길동무가 된 타자들 - 이 경우에 있어서는 독자들이 될 터인데 - 에게는 자신의 경험 너머의 미지의 것의 광경을 보는, 수동적인 감상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하나의 여행기를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스티븐스의 여행 - 현실적인 여행 그리고 과거의 회상으로의 여행 양자 모두의 의미에서의 - 에 대한 여행으로부터, 한편으로는 즐거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는 불편하기도 한 이 여행으로부터, 우리가 보게 되는 것들에 대해 말해보자.  


1. 되돌아 봄에 대하여. 


스티븐스가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여행 중에 그의 기억으로의 여행을 떠날 때 행하는 것은 하나의 되돌아 봄이다. 그런데 무엇에 대한 되돌아 봄인가? 과거, 지나가 버린 것, 그렇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되돌아 봄. 되돌아 본다는 것은 삶의 여정에서(또 다른 의미에서의 여행) 뒤에 두고 온 것, 그래서 지금은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성찰이라고 말한다. 여행은 자신이 지금 익숙한 것, 지금 가지고 있기에 무언가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떠남을, 자신의 의식 속에 가득 찬 현재라고 칭해지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생각을 비우고,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해 그리고 다시 그에 의해 현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 혹은 공간을 마련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스티븐스가 자신의 '업무'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의식 속으로 소환해 내고 있는, 그가 (삶의 여정 중에) 두고 온 것은 무엇인가?


2. 사랑(의 가능성): 켄튼 양과 그녀에 얽힌 일들. 


켄튼 양에 대한 혹은 벤 부인과의 마추침은 처음부터 순탄치는 않았다. 그녀는 직무에 열중하는 그의 삶에 있어 일종의 혼란을 초래하는 요인이다. 예를 들자면, 켄튼 양이 그의 집무실에 꽂아 두었던 꽃을 떠올려 보라. 그리고 그녀는 그들의 기억의 초기에는 어떤 의미에서 약간은 치졸해 보일 법한 권력 다툼을 하기도 한다. 당시 달링턴 홀에는 스티븐스의 아버지가 버틀러로서는 은퇴한 후 스티븐스와 함께 하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스티븐스에게 있어 아버지는 위대한 중간 관리자의 전형, 그가 지향해야할 존엄성(dignity)*** 사표였는데,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는 동시에 그의 약점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노쇠해가고 있었고,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실수들이 드러낸다. 그 아버지의 존엄성(dignity). 스티븐스 주니어가 기억하는 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삶. 한 때 달링턴 홀의 하우스키퍼였던 켄튼 양이 그를 불러 이야기 했던 정원에 가만히 서서 무언가를 찾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해 보라: "마치, 떨어뜨린 귀한 <보석>을 찾고 있던 사람처럼." 


그러나 이런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던 켄튼 양과의 관계개선이 진행 된 이후, 켄튼 양은 목석과 같이 자기 직무에만 충실한 이 버틀러에게서 어떤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것은 스티븐스의 주관적인 서술에만 의존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의 회상에서, 그의 지나가 버린 것으로 떠나는 여행에서, 그가 의식적으로(또는 무의식적으로) 기억하지 않는 어떤 나머지를 보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신은 언제나 직무에만 충실했으며 사랑은 그저 그녀의 일방적인 감정이었을 뿐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듯한 스티븐스의 이야기에서도, 이 감정이 사랑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상호적이었음을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은 인생이 텅 빈 허공처럼 내 앞에 펼쳐집니다' - 여기서도 다시 '남아있는 시간' 문제 혹은 소설의 제목이 등장하는데 - 이라는라는 문구가 적힌 켄튼 양의 편지는 스티븐스가 그녀를 향해 떠나는 몇 일간의 여행의 계기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의 사랑의 가능성을 차단했던 것일까.

 

스티븐스가 달링턴 홀에서 영국의 수상과 독일 대사 그리고 달링턴 경의 회합이 있었던 그 밤에 대해 - 켄튼 양이 달링턴 홀을 떠나기 전, 그녀가 스티븐스에게 거의 처절하다고 할 법한 방식으로 마지막까지 그녀를 붙잡을 기회를 주었음에도, 그런 이후에 눈물 흘리는 그녀를 보았음이 확실하다고 생각했음에도, '최고의 신사들'을 모시는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기 위해 그녀를 외면 했던 바로 그 밤에 대해 -, 


그 순간에 누가 의심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집사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세상의 저 위대한 중심축에 거의 도달했다는 것을. 그 때 거기에 서서 그날 저녁의 사건들, 즉 그 시각까지 있었던 일들, 그리고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것들을 되씹어 보자니, 내가 그 때까지 살아오면서 성취했던 모든 것들의 요약 판인 양 느껴졌다. 그날 밤 나를 고무시켰던 그 승리감을 나로선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라는 평소의 그 답지 않은 방식으로, 약간은 흥분한 투의 이야기를 펼쳐놓는 것을 보자면, 그의 사랑을 막았던 것은 결국 그 자신이 그렇게나 바라마지 않던 (버틀러로서의) 존엄성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3. 달링턴 경에 대한 충성 그리고 시대적 전환의 문제. 


그가 사랑(혹은 그 가능성) 마저도 포기하고 선택한 것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함, 그리고 그에 따른 품위였다. 당시 중년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쌓아올렸던, 완성기로 향하고 있는 존엄성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주인에 대한 충성. 사실 어찌 보자면 그의 선택은 그가 하필이면 달링턴 홀에서 벌어졌던 중요한 행사 중에 갑작스럽게 다가온 아버지의 임종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볼 때 이상할 것이 없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중요한 행사란 무엇인가. 1차 대전이 끝난 이후의 달링턴 홀은 일종의 유럽 대륙 국가들의 외교적 각축의 장이었다. 당시의 유럽은 귀족 사회였고, 어느 정도 신분이 되는 귀족들은 국가적, 외교적 문제, 즉 자신들이 관심을 가져야 된다는 생각 - 오블리스 노블리제라는 것은, 삐딱하게 보자면, 자기 일 남에 일 안가리고 감놔라 대추놔라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며, 쉽게 말하자면 좋은 밥 먹고 할 일 없는 귀족들의 시간 죽이기 방식이었다 - 을 하고 살던 시기였다. 이런 맥락에서 당연히 국가의 공적으로 일하는 관리들의 공식적인 회합과는 별도로 영향력있는 귀족들끼리 모여서 유럽의 미래를 논하는 행사가, 특히, 달링턴 홀에서 벌어졌던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스티븐스가 기억하는 달링턴 홀은 당시의 외교의 중심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사실 이시구로는 달링턴 경이라고 하는 실제 인물을 어느 정도는 반영한 소설을 썼다.)


여기에서 시대적 전환의 문제를 포착해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스티븐스의 기억을 따라 떠나는 여행 속에서 우리는 분명 너무나 분명한 변화들을 찾을 수 있다. 가령 바로 눈에 띄는 것은 달링턴 홀의 주인은 달링턴 경에서 미국인 자본가 패러데이 씨로 바뀌어 있다. 그가 운용하는 하인들의 수도 수십명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있다. 스티븐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저명한 가문을 위해 봉직하던 버틀러들의 모임인 헤이스 소사이어티가 없어져 버린 이야기에서도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스티븐스에 따를 때 그 시기의 버틀러들은 '사다리와 같은 위계'를 보았을 뿐이지만, 그 스스로는 그러한 수직적인 위계는 더 이상 없으며 수평적이고, '수레바퀴의 중심'과 같이 돌아가는 세계의 중심에 서는 것이 목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뿐일까? 변화는 과거에만 진행된 것이 아니다. 그가 '남아있는 시간'에 대해 생각하며 떠 올리는 위트넘치는 농담(banter)이라는 것은  이를 통해 새롭게 바뀐 주인에게 봉사한다는 자신의 행위 방식의 변화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단지 스티븐스를 둘러싼 변화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매우 중요하지만, 스티븐스의 주관적인 기억 속에서 약간은 그 중요성이 떨어지는 형태로 제시되는, 그리고 그런 이유로 중요한 변화에 대한 서술이 빠져 있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달링턴 홀의 회합으로 돌아가 보자. 여기에서 짚어낼 수 있는 것은 어떤 아마추어리즘에서 프로페셔널리즘의 시대로의 이행이다. 당시의 유럽은 어찌 보자면 너무나 오래된 역사적 패권 아래 있었다. 즉, 19세기로부터 진행된 영국적 패권 말이다. 그러나 이 패권은 그 텔로스(telos, 완성 혹은 폐기)에 도달해 있었다. 


바로 이런 시기에 달링턴 경은 유럽적인 아마추어리즘을, 귀족적인 명예를, 그래서 국가들 간의 리그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공정함을 추구했던 인물이다. 달링턴 홀의 회합도 1차 대전 이후의 불공정한 전후 처리에 대한 그의 지대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그 목적은 당연히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독일의 패전배상금을 현실적인 수준으로 축소 혹은 아예 탕감해 주자는 것이었다. 소설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달링턴 경이 친 독일 인사 혹은 친 나치 인사로 낙인찍히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정황과 관련되는 듯 하다.


그러나 루이스 상원의원 - 아마도 영화에서, 약간 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직도 수퍼맨의 얼굴로 기억할 크리스 리브스가 맡았던 것으로 기억 되는 - 이 대변하는 미국의 입장은 다르다. 프랑스나 영국은 실질적으로 미국에 엄청난 부채를 떠 안고 있다. 왜냐하면 미국의 전쟁 참여는 전쟁 말미의 막대한 규모의 파병 이외에, 군수물자 및 자금 공급에 있었고, 이것이 대부분 차관의 형태로 공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영국과 프랑스가 패전한 독일로부터 충분한 배상금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시 미국 역시 잿더미가 되어버린 프랑스로부터 그리고 갚을 수 없는 규모의 전쟁 부채를 떠 안게 된 영국으로부터 공여한 자금을 환수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달링턴 홀의 회합에서 바로 이 독일 전후 처리 배상금의 문제로, 루이스 상원의원은 자국 이익을 위해 암약하던 일종의 외교관 혹은 스파이였다. 그는 영국 측 사람들에게는 프랑스가 독일의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투로 말하지만, 뒤로는 프랑스의 고위 외교관 뒤퐁 씨에게 영국인들이 독일을 편들고 있고 프랑스를 욕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두 나라 사이를 이간질한다. 그리고 뒤퐁 씨의 이런 정황을 회합의 마지막 날 만찬 석상에서 영국과 독일 신사들과 숙녀들에게 공개적으로 밝힌다. 그리고 '아마추어리즘'의 시대는 갔고, 프로페셔널의 시대가 왔다는 발언은 바로 루이스 상원의원의 입을 통해 나온 것이다. 아마추어리즘의 고귀함, 명예, 귀족적인 의무(noblis oblige)의 시대는 가고, 프로페셔널의 시대, 다시 말해 미국적 패권 아래 미국적 자본의 이익을 추구하는 그런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루이스 의원의 발언은 그런 시대의 도래를 고지하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과연 스티븐스는 그러한 대단한 일들이 일어나던 그 장에 있었다고, 모스콤비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일종의 의도하지 거짓말을 했던 것과 같이, 그는 외교적으로 중요한 당시의 유럽 정치의 중심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 말이다. 이것은 다음 차례로 기억과 관점의 문제, 특히 이 문제의 원인이 된다고 할 법한 신분의 문제로 이어진다.


4. 기억과 관점의 그리고 신분의 문제. 


스티븐스가 풀어놓는 기억은 어떤 묘한 위화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어떤 품위있는 말투와 행동거지를 가진, 어찌보면 교양있는 사람이다. 당연히 그가 모시는 신사분들과 숙녀분들을 대하기 위해 갖춘 상식도 구비하고 있다. 중간자, 이것이면서 동시에 이것이 아닌 직위. 버틀러는 그런 직위다. 위로는 그런 대단한 분들을 근접해서 상대하여 봉사하며, 아래로는  자기보다 낮은 직급의 버틀러들이나 하우스 키퍼, 그리고 하인들을 상대하여 관리자의 입장에 서는 그런 직위.****** 


이시구로가 스티븐스에게 부여하고 있는 서술 방식, 즉 객관적으로 있었던 과거의 사실들에 대한 1인칭의 주관적인 방식의 서술에 의해 어떤 상당히 재미있는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말하자면 스티븐스가 자신의 충성을 바쳤던 달링턴 경의 과오에 대해 자신의 책임 혹은 연루를 회피하는 듯한 그런 인상이 말이다. 달링턴 경은 독일에 대한 일종의 범유럽적인 명예로움과 공정성의 이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친독일주의자, 심지어는 1차 대전 이후 독일이 다시 2차 대전을 일으키는데 일조한 친나치주의자로 공인된다(혹은 낙인이 찍혀 버린다). 그는 스티븐스의 기억에 따를 때 - 그의 입에서 직접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 유럽적 명예로움에 사로잡힌 늙어버린 시대에, 그 텔로스(완성 또는 종말)에 도달한 시대의 위대한 아마추어였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이런 형태의 서사가 가지는 효과는 바로 이런 주인의 과오에 대한 선긋기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임종, 그리고 사랑(의 기회) 마저도 포기하고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던 인물이지만, 아무도 그를 당시의 달링턴 홀에서의 행사의 가운데에서 기억해주지 않는다. 애초는 그런 기억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분명 스티븐스는 자신의 일은 그들의 언사나 그 당시에 논의되었던 일들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직무에 관해 충실한 것이라고 못을 박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달링턴 경의 버틀러로 기억될 뿐이며, 그것은 스티븐스가 켄턴양을 만나러 가는 길에 잠깐의 해프닝으로 들렀던 모스콤비라는 마을에서 그런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에게나 마치 대단한 무용담이나 되는 듯 자랑스럽게 떠들 수 있는 이야기 일 뿐이다.(그 가장도 결국 마을 의사에게 신분이 들통나 약간은 망신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갑작스럽게 의사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꼬박꼬박 붙이던[sirring] 스티븐스의 모습은 분명 당황한 버틀러의 모습 이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스티븐스가 달링턴 홀에서 영국 수상(아마도 로이드 존스였던 듯)과 독일 대사가 만나 밀담을 나누던 그 날, 켄튼 양이 눈물을 보이던 그 날의 기억 속에서 환희에 찬 어조로 끄집어 내는 '집사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세상의 저 위대한 중심축'에 대한 찬탄은 자신에게는 의미있는 것일 수 있겠지만,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약간은 희극적인(동시에 매우 비극적인) 발언이기도 하다.  


기억에 대한 서술은 일어났던 일, 지나가버린 일에 대한 3자적인 묘사 혹은 기술을 통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를 전달하는 방식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다. 그의 기억은 자신의 완성에 대한, 자신의 일에 충실했음에 관한 기억이다.(그 외에 도대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그 충실함, 달링턴 경에 대한 충성은 자부심으로 나타난다('수레바퀴의 중심'에 속한다는 자부심). 그러나 그 자부심의 이면에서 나타나는 자신이 포기해야만 했던 것(사랑)에 대한 회한, 그리고 자신이 충실했던 달링턴 경에 대한 의심. 그에 더해 자신의 신분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대저택의 집사는 한편으로 많은 사람들, 일들, 물건들을 관리하는 직위이면서도(자부심을 가질 법한), 다른 한편으로는 고용인이며 주역이 되지 못하는 직위(내세울 수 없는)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시구로의 있었던 일들, 객관적 사실에 대한 스티븐스를 통한 1인칭의 주관적 서술은 스티븐스의 버틀러로서의 직위, 중간자적인 위치를 묘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는 장치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제 소설에서 남은 것은 켄턴 양 혹은 벤 부인과의 만남, 그리고 그 만남 이후에 선창가의 한 벤치에서 만나게 된 노인의 말처럼 여생을 즐김에 대한 문제, 즉 미래에 관한 문제 뿐이다.


5. 미래의 문제: 농담(banter).


켄턴 양과의, 아니 벤 부인과의 만남에서 스티븐스가 얻게 되는 대답은 그녀가 이미 집안에서 있었던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해결을 본 상태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녀는 달링턴 홀로 돌아올 이유가 없다. 그리고 계속되는 몇가지 옛날 이야기들, 그리고 그들 사이의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기억. 마지막으로 벤 부인은 스티븐스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가요, 스티븐스씨? 달링턴 홀로 돌아가면 당신에게는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어쩌면 '남은 인생이 텅 빈 허공처럼 내 앞에 펼쳐집니다'라는 켄턴 양의 편지에 쓰인 문장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스티븐스에 대한 이야기는 아닐까? 


스티븐스는 잠시 동안 바닷가 선창의 어느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다를 보게 된다. 그리고 잠시... 잠시나마 어떤 공허감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그 벤치에서 만난 어느 노인의 말처럼 남은 여생을 즐기며 보내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여생을 즐기며 보내는 자신의 모습. 그리고 그는 농담을 떠올린다. 자신이 최근 어느정도 연습을 해보고 있는 이 농담이라는 새로운 직무의 도구에 대해. 그리고 이내 그의 의식은 달링턴 홀로, 자신의 주인 패러데이 씨에게로, 농담에 익숙해진 자신의 새로운 봉사의 모습으로 향한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웃음(농담)을 도구로 한 직무의 연장 또는 미래에 대한 어떤 씁슬한 웃음? 웃음에 대한 웃음, 농담에 대한 농담을 우리는 보게 된다. 우습게도. 그리고 한편으로는 슬프게도.


여행은 사람을 바꾼다. 어쩌면 기억으로 떠나는 여행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여행은 일상의 생활에 어떤 균열을 내는 혹은  적어도 한 발 떨어져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우리 독자들과 함께 했던 여정에도 전혀 바뀌지 않은 모습을 보일 뿐이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직무에 너무나 충실하다. 그의 인생은 '공허하게 펼쳐(지지)' 않는다/않았다/않을 것이다. 여행과 함께, 삶에서 거리를 두는 방법인, 농담 마저도, 그에게 있어서는 변화하는 시류에 맞춘 직무를 위해 갖추어야 할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그의 삶은 철저하게 자신의 버틀러로서의 직위와 직무만이 가득하다. 결여 혹은 공백이 없는, 완전히 가득 찬, 그러나 자신이 주도하는, 주인이 되는, 주체가 되는 삶이 아니라, 주인을 위해 봉사하고, 대표(혹은 재현)될 뿐인 자신의 직무로 가득 찬... 과연 그런 삶은 어떤 의미로 펼쳐질까? 켄튼 양이 스티븐스에게 던졌던 '당신은 어떤가요, 스티븐스씨? 달링턴 홀로 돌아가면 당신에게는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대해 '남아있는 시간' 동안 과연 스티븐스는 그의 삶에 대해 어떤 대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이상이 이 책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시구로의 서사 스타일은 너무나 복합적인 것들을 어떤 숨겨진 층위들과 개인의 주관적 서술 방식 아래, 그것도 어떤 절제된 미학을 통해 풀어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듯 하다('날 보내지 마'라는 작품에서도 동일한 인상을 받게 된다). 이런 탓에 서평으로 그의 이야기를 다시 살펴보고, 내 방식으로 다시 풀어내는 작업은 너무나 지난한 과정이었다. 한 가지 단선적인 방식으로 보게 된다면(그의 액면의 이야기만을 따라간다면) 이 이야기는 스티븐스의 버틀러로서의 삶에 대한 단선적인 시각만을 따르게 될 뿐이다. 그러나 그 아래, 그의 주관적인 이야기 방식 아래, 그의 사랑(의 가능성), 달링턴 경에 대한 충성, 하지만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달링턴 경의 과오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자신의 직무에 대한 자긍심과 동시에 자괴감. 이 모든 것들이 마치 종합선물 세트와 같이 한번에 터져나온다. 그래서 그냥 읽기는 쉽지만, 읽고 무언가를 써내기는 너무나 어려운 책이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 여기에서는 일종의 번역상의 오류가 드러난다: 21페이지, 첫 문단 네번째 줄부터 아홉번째 줄까지. <언행 불일치를 드러내는 신사는 결코 아니다. 따라서...제의를 번복하지 않으리라는 근거는 없다.> 이 문장은 가만히 띁어보면 앞문장과 뒷문장이 어딘가 논리적으로 이상하다. 소설 상의 맥락으로 보자면, '제의를 번복하리라는 근거는 없다'를 잘 못 옮긴듯 하다.


** 이 제목에 대해서도 약간은 불만이다. 위키피디아에 실린 이 소설에 관한 해설을 참고할 때, Remains of the Day라는 말에는 다섯까지 의미가 있다. 1. 하루의 남아있는 시간, 즉 인생이 황혼기를 의미한다. 2. 대영제국의 남아있는 것, 흔적이라는 의미. 3. 새로운 주인 패러데이 씨에 대한 봉직을 위한 미래('남아있는 나날'이라는 말은 이 의미에만 해당한다). 4. 이시구로가 붙이고 있는 각 챕터의 소 제목들. 5. 프로이트의 '일상의 잔여물' 또는 '나머지'라는 개념. 이 개념은 꿈꾸는 밤 이전의 그 날이 경험들을 지칭하는데, 금지된 바램들에 대한 상징적 표상과 위장에 사용을 나타낸다. '남아있는 나날'이라는 제목은 이 복합적인 의미들 중 3번의 의미만을 포착해 낸다. 


*** 이 단어에 대한 번역어 역시 약간은 불만이다. 이 책에서는 품위로 번역하고 있는데, dignity라는 말은 단순한 품위나 품격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히 직위에 대한 혹은 신분에 대한 품위 혹은 품격만이 문제라면, 그가 세째날 저녁에 그의 부주의(휘발류를 넣지 않았던)로 인해 묵어가게 된 모스콤이라는 마을에서 해프닝에 대해 완전히 말할 수 없게 된다. 그 때 있었던 대화에서 해리라는 마을 청년은 dignity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스티븐스가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 즉 정치적 차원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 dignity라는 말에는 세련된 억양이나 교양있는 행동거지라는 뜻만 가지고는 완전히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 나머지(remains)가 있다. 차라리 존엄성이라고 읽게 될 때 발생하는 역설적인 표현이 원작자의 의도이고, 이 편이 더 재미있는 효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이 책의 제목, 'Remains of the day'는 프로이트의 '일상의 잔여물'이라는 개념으로 읽힐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금지된 또는 스스로 금지한 것에 대한 바램 혹은 욕망을 따라 떠나는 여행. 스티븐스의 여행의 본질은 달링턴 홀의 모자라는 인원을 충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공식적인 목적의 이면에 있는, 그가 과거에 놓쳐버린 사랑(의 가능성)을 좇는 것임을 고려해 볼 수 있다.


***** 한 가지 씁쓸한 것은 이런 광경이 어딘지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작년 11월 G20 서울 회의. 물론 이 회의는 공식적인, 국가 원수들의 회합의 장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를 전후하여 국가적 차원의 외교 전문가들의 회의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현재의 세계 정세는 마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보는 듯 하고(세계 패권적 이행기), 아무런 결과도 없이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외교 행사는 어쩌면 명예로운 아마추어리즘 보다 훨씬 좋치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 이 소설의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소설 내부에는 중간, 경계, 혹은 동시성으로 드러나는 것들이 여럿 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제목 Remains of the Day: 액면으로는 저녁을 의미. 저녁은 아직 해가 떠 있지만 곧 해가 떨어질 시간. 중간, 경계 혹은 동시적 시간(낮이면서 밤에 속하는). 

- 기억 그 자체: 기억이란 한편으로는 과거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에 대한 이미지로 사람을 기쁘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후회와 회한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동시성에 속하는 것. 그리고 일어난 일들에 대한 기억 하지만 동시에 해석이 될 수 밖에 없는 그런 것.

- 시기: 영국에서 미국으로의 패권적 이행기, 그리고 동시에 유럽적 국제관계 내에 있는 명예 혹은 공정성(아마추어리즘) 으로부터 미국적 경제 혹은 자본의 이익(프로페셔널리즘)으로의 이행기.

- 신분: 관리자이면서 동시에 고용인 신분. 그에 따라 중차대한 외교적 현장에 있으나, 그 주역은 되지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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