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든 이야기의 발단은 한 살인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엘레강스' 에펜디라는 한 금박세공 장인의 죽음, 죽은 자의 푸념으로부터, 이미 나흘씩이나 한 빈 우물 바닥을 뒹굴며 썩어가고 있는 그의 푸념으로부터. 일종의 고발, 자신을 죽인 자를 찾아달라는 호소, 그로부터 이 소설을 읽는 지난한 지적 노동은 시작된다. 시종일관 시점의 변화를 통해, 분열적인 말하기를 통해 모든 일어나는 일의 전개를 제시하는 방식의 글에서, 고된 노동과 맞먹는 힘겨움을 느끼지 않을 방법이 있겠는가? (이런 말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이 살인사건의 이야기를 쉽게 풀어내는 방식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1591년(이 소설의 사건들이 벌어지는), 당시의 오토만 제국의 술탄 무라트 3세는 1년 남은 이슬람력 헤지라 1000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형식의 화첩을 제작할 것을 명령한다. 물론 그 화첩의 제작 주체는 세밀화가들이지만 그 화첩의 그림들은 베니스 화가들의, 특히 세바스티아노의 화풍을 받아들여, 원근법을 사용하고, 술탄의 초상 및 각 사물들의 크기를 실물 크기로 그려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 때 술탄의 밀명을 받은 에니시테 에펜디는 궁정화원장 오스만의 가장 성공한 제자들인 엘레강스, 나비, 황새, 올리브 등을 포섭하여 화첩 제작에 나선다. 문제는 이들 중 누군가가 동료인 금박세공 장인 엘레강스 에펜디를 살해한 것. 마침 에니시테의 딸 세큐레를 연모하여 12년 전 동쪽 변방으로 쫓겨났던, 에니시테의 외조카 카라(에니시테는 카라의 이모부)가 화첩 작업을 돕기 위해 이스탄불로 돌아온다. 카라는 에니시테의 일을 도우면서 과부이자 두 아들의 어머니가 된 세큐레와 결혼했으면 하지만, 세큐레의 시동생 핫산 역시 세큐레를 노리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카라는 에니시테로부터 세큐레와의 결혼승락을 받아내지만, 결혼을 앞두고 에니시테도 자신의 집에서 살인자의 흉수에 당하게 되고, 제작된 화첩은 도난 당한다. 칼라는 살인자와 도난 당한 화첩을 찾고 자신의 집안을, 세큐레와 두 아들을 보호하는 책임을 떠맡게 된다. 분명히 살인자는 그의 어린 시절 궁중화원 동학들인 나비, 황새, 올리브 중 한 명이다. 그리고 이 치명적인 연쇄살인의 이유는 세밀화에 대한 의견차다. 카라는 살인자를 찾아서,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고 이들의 그림을 대면해 나가는 힘겨운 여정에 나선다.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정리하게 되면, 무언가 산만하게 분산된 이야기들 - 여러 사람들과 심지어 그림 속의 사물들을 통해 구술되는 듯한 느낌의 - 을 하나로 엮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어 16세기 말의 터키에서 완성에 이른 그리고 동시에 쇠락의 내리막길로 들어선 세밀화라는 예술적 과정에 대해 말하는, 그리고 동시에 사랑의 둘을, 서양과 동양 문화 및 예술의 대립을, 예술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플라톤주의의 대립을 그려내고 있는 놀라운 소설이 어떤 순수함에 대한 집착이 이를 수 밖에 없는 파국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이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소설과 <장미의 이름>이 지닌 공통적인 구도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2. 먼저 추리소설과 지적 노동에 대해서. 노동이라는 말이 과연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소설과 어울리는 말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추리소설은 일종의 유희를 위한 독서의 대상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유희 혹은 여흥을 위한 목적으로 이 책을 집어들었다면, 나는 그러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할 것이다.
이 소설 중에는 '거의' 전능에 가까운, 매끄럽게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같은 것은 등장하지 않으며, 각 장의 이야기를 담당하고 있는 인물들, 살인자, 두 피살자들, 심지어 그림들 - 개, 나무, 금화, 죽음 등 - 의 철저하게 1인칭에 한정된 비일관적 서술들은 하나의 매끄러운 전체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방해한다. 이 소설이 비록 추리소설의 형식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바로 그런 점에서 전통적인 형식의 추리소설은 아니다. 이 비일관성의 구슬들을 꿰어 하나의 목걸이를 만드는 일은 어떤 비범한 능력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철저하게 독자의 몫으로 떨어지며,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읽는 것 자체가 하나의 노동이다.
그러나 이 노동에는 단순히 즐거움을 위한 읽기 이상의 가치가 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관점의 변화와 심리적 불안이라는 시험을 통과할 수만 있다면, 이 소설을 읽는 과정으로부터 무엇인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몇 가지 매우 중요한 생각들 또는 사유의 단초들을 말이다.
3. 이 소설을 끌어나가는 중심축은 대립항들 간의 갈등인데, 먼저 사랑이라는 축으로 이끌려 가는 대립항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종의 여러 개의 겹쳐진 삼각형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a. 먼저 사랑스러운 딸을 아끼는 에니시테와 생과부가 된 세큐레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카라가 그려내는 삼각형,
b. 죽은 형을 대신해 절세미인인 형수를 취하려는 핫산(형사취수제는 중동 지방의 오래된 관습이다)과 세큐레, 카라가 그려내는 삼각형,
c. 마지막으로, 정확하게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소설의 말미에서 드러나는 카라의 오랜 친구 올리브 에펜디와 세큐레 그리고 카라가 그려내는 삼각형
을 말이다. 이 세큐레를 대상으로 하는, 그리고 종국에 카라가 승자가 되는 겹쳐져 있는 삼각적 관계들은 모종의 경쟁 및 긴장을 드러내는데, 이로 인해 소설의 전개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된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이 삼각형들의 겹침의 중심에 있는 세큐레가 결코 수동적인 위치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 방물장수 에스테르를 통해 매우 적극적인 개입을 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선택의 주체는 카라가 아니라 세큐레다.(또한 사랑의 매개자 에스테르의 역할을 살펴보는 것 역시 흥미진진한 일이다.)
어쨌든 카라와 세큐레 간의 사랑은 다른 대립 및 갈등 관계들과 때로는 느슨하게, 그리고 때로는 긴밀하게 엮여나가면서 하나로 꼬아낸 보다 크고 탄탄한 줄을 형성하고 있다.
4. 사랑이라는 축과 엮이는, 어쩌면 보다 중심적인, 축은 바로 살인사건의 원인이다. 서양의 화풍을 받아들이는 투르크 제국, 그것은 이미 궁정화원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화원들에게, 그리고 그들 중 에니시테 에펜디에 의해 차출된 네 명의 화원들에게, 일종의 충격이 될 수 밖에 없다. 살인사건은 제물이나 명예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이 아니라, 바로 이 문화의 충돌로 인해 빚어진 결과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피상적인 서술이 될 수 밖에 없는데, 보다 깊숙히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거기에는 예술 자체에 대한 의견 혹은 관점의 차이가 자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세밀화가 추구하는 화풍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그것은 오래 전에 동방(중국)으로부터 전래하여, 시라즈와 헤라트라는 지방에서 발전되어 이슬람 권 전체에 퍼진 화풍이다. 지평선이 화폭의 상단에 그려지고, 모든 인물과 사물들은 이차원으로 평면상에 배치된다. 인물들, 특히 여인들은 중국 당나라의 화풍이 그랬듯이, 약간은 퉁퉁하게 하얀 얼굴로 그려지고, 신분에 따라 인물의 크기가 달리 그려진다. 사물들 역시 과거의 고인들의 화풍에 따라 언제나 이상적인 형태로 정형화된다. 그에 반해 서양, 특히 베니스로부터 들어온 화법은 3차원적이다. 마치 현실에서 사물과 풍경을 보듯 모든 것은 가까움과 멂에 따라 음영과 색상이 배치되고, 인물들과 사물들은 신분고하에 관계 없이 동등한 크기로 다뤄진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여기에서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대립을 볼 수 있는데, 말하자면 세밀화가들은 언제나 정형화된, 오래 전부터 내려온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신적인 시선을, 이데아의 바라봄을 추구하는데 반해(따라서 세밀화가들에게 눈멂은 화가로서의 결점이 아니라 보다 순수한 바라봄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것이다), 서양의 화가들은 육안으로 직접 보는 것과 같은 현실적인 것을, 현실의 모방, 즉 (이데아의) 모방의 모방을, 그로부터 오는 눈의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더라도, 살인자가 어떤 종교적인 순수함을 추구하는 자였던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5. 이 소설을 다른 중요한 현대 소설과 매듭지을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수도원을, 특히 수도원 경내의 장서관을 중심으로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펼쳐냈던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을 말이다. 플라톤주의와 교회의 권위를 대변하는 장님 호르헤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속권(俗權)의 도전을 대변하는 윌리엄의 대결은 놀라운 것이다.(혹시라도 아직 읽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물론 <장미의 이름>이 다루고 있는 대결은 결코 예술 자체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 대결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전된 책과 웃음의 문제, 사용권의 문제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럼에도 <장미의 이름>이 그려내는 대립은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이데아'와 '모방의 모방'의 대결이라는 측면에서 <내 이름은 빨강>이 그려내는 대립과 매듭지어질 수 있다. 그리고 두 소설에서 등장하는 이 순수한 플라톤주의자들 - 호르헤와 살인자 - 은 어떤 파국을, 재앙을 불러일으킨다.(<장미의 이름>의 호르헤의 경우, 수도원 및 장서관의 화재로 인한 소실. <내 이름은 빨강>의 살인자의 경우, 두 사람의 목숨 및 자기 자신의 파멸.)
6. 우리가 알듯이, 어떤 순수함에 대한 집착은 언제나 재앙으로 이어진다. 현실에는 결코 순수한 것이 없다. 순수에 대한 집착은 이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의 자리를 현실 속에 마련하기 위해 불순한 것들을 몰아내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종교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비신자들, 또는 보다 그럴듯한 말로 하자면, 이교도들을 살해하는데 전혀 망설이지 않고, 사랑의 순수함에 대한 대한 열정은 완전한 타자로서의 둘이 지닌 각각의 차이를 무화하려 하며, 순수한 정치에 대한 열정은 모든 불순한 자들을 축출하여 정치의 가능성을 독재, 혹은 전제정으로 제한시킨다. 순수함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있어, 자기 이외에 모든 것 또는 모든 이는 그 불순함에 있어 의심의 대상이 되며, 그런 의미에서 순수함에 대한 열정이란 결국 자기애 혹은 자기중심성의 다른 이름이 될 뿐이다.(소설의 말미에서 살인자가 훔쳐간 화첩을 회수했을 때, 그 화첩의 중심에 살인자의 형상이 그려져 있음을 상기해 보라.)
현실 속에서 살아가기, 자신과 다른 타인들과, 자기의 순수성이 아닌 타인의 불순함으로 오염된 세계 속에서 견뎌내기, 그것이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다. 그리고 또한 한편으로 명심해야할 것은 순수함을 추구하는 자를, 그리고 자신의 순수함을 위해 남을 이용하거나, 심지어 쓰러뜨릴 수 있는 자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