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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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면에서 대단하다. 장르적 특성에 따른 탄탄한 구성,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긴장감 넘치는 전개 등등.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간단히 언급해야만 할 것은 소설 하나를 쓰기 위해 이 작가가 했을 엄청난 양의 공부와 노고에 대한 찬사일 것이다. 물론 잘 짜여진 미스터리의 구축의 과정에 투여될 엄청난 양의 노고 역시 대단한 것이기는 하지만, 지리학과 인류학적 지식으로부터 수학, 컴퓨터 관련 공학 지식, 바이러스학, 면역학, 생화학, 분자생물학 등에서 이루어진 지식의 발전을 망라하는 온갖 지식들이 잘 버무려진 전지구적 규모의 서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투여되었을 시간과 공에 비하자면 차라리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질 지경이다. 특히 광의의 생물학에 대한 지식의 제시는 아마 동종 학문에 대한 전공자라고 해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상당히 정확한 것이다(하이즈먼 리포트나 폐포상피세포 경화증과 같은 허구를 예외로 하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독서 과정에서 전공 지식이 없는 일반인이라고 해서 이야기가 지루하다고 생각할만한 시간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지식을 잘 버무려낸, 인류의 '종말/새로운 시작'에 관한 잘 구축된 이야기가 시종일관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런 '시종일관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잘 쓰여진 이야기라는 것은 소설이라는 장르적 구축물에 있어 한 가지 흠결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런 과정에 함몰된 독자는 이런 지성의 향연을 즐기는 가운데 '생각 없음'이라는, 어찌보면 역설적인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이 놀랍도록 광범위한 지식을 드러내는 지성적 허구에서 몇 가지 생각해 볼 문제들을 짚어보기로 하자. 말하자면, 이 지식과 미스터리(다시 말해, 알 수 없음, 단적인 신비)의 공존이라는 모순을 포함하는 향연으로부터 찾을 수 있는 인간에 대한 물음, 좀 더 특정하여, 인간의 진화와 관련된 문제들을 말이다.  


진화, 새로운 것 - 끔찍한 것 또는 선물


진화라는 것은 일종의 변화다. 그리고 그 변화의 결과는 당연히 어떤 새로운 것의 도래일 수 밖에 없다.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소설이 제시하는 미스터리의 중심에는 어떤 전대미문의 것, 인간이라는 종을 멸종 시킬지도 모르는 새로운 것, 바로 인간의 지성을 넘어서는, 그것도 무한할 정도로 넘어서는 지성적 능력의 진화의 주인공이 된 한 아이가 자리하고 있다. 현대 암호의 근간을 이루는 소수(素數) 계산, 지금까지의 과학기술로는 불가능한 프로테인 3차원 구조 및 세포신호 체계를 예측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수퍼 컴퓨터로도 해내지 못하는 기상 이변의 정확한 예측 등의 능력을 보이는 이 새로운 인류, 기존의 인류와는 다른 인간종에 대해, 기존의 인간들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먼저, 이 새로운 인류를 괴물로 보는 방식, 이 아이가 자라고 그와 같은 능력을 가진 괴물들이 늘어나고, 진화의 최정점이라는 고정된 자리에 머무르는, 진화가 정체된 인간들을 밀어낼 것이라는 두려움, 사실상 그러한 두려움은 실체적 학문으로부터 어떤 근거를 끌어오는데, 이것은 고고학 및 진화론의 관점에서 역사 이전에 현생 인류의 조상이 네안데르탈인들의 멸종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과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들, 즉 제노사이드의 화석적 증거다. 


제노사이드(genocide), 종의 절멸, 한 종의 씨를 말려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제노사이드가 의미하는 바다. 이 소설 속에서 이 제노사이드라는 말은 중첩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먼저 어떤 새로운 인간종으로서의 한 아이를 죽인다면, 그것은 한 생물종의 절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생각할 때, 만일 새로운 인간종이, 과거 현생 인류의 조상들이 네안데르탈인들을 죽였던 것처럼, 현재 지구 상에 존재하는 인류를  쓸어버린다는 잠재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떤 한 사람에게는 자손을 퍼뜨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에서, 만일 한 사람을 죽인다면, 그것 자체로 어떤 (가능적 차원의) 제노사이드가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gen-'이라는 어근은 원래 '씨' 또는 종을 뜻하는 말이다.)  지구 상에 만연한 전쟁, 특히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아무런 목적도 없이 진행되고 있는 학살에서 우리는 제노사이드를 보게 되며, 그리고 현재 인간종의 정점에서 전지구적 지배권을 행사하는 체제 자체가 바로 이 살인 또는 제노사이드를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다음으로 제시될 수 있는  선택지는 어찌 보자면 좀 더 단순한 것일 수 있는데, 말하자면 이 새로운 인류를 있는 그대로 그의 능력을 어떤 선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지는 어떤 의미에서 보다 수동적인 태도를 통해 받아들여야 할 어떤 것으로, 우리는 그러한 예를 어쩌면 <성서>라는 책으로부터, 여러 민족들의 아버지가 되었던 한 인물의 손님에 대한 영접, 즉 환대의 이야기로부터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창세기에 기록된 아브라함이 천사들을 맞아들일 때, 그들은 기본적으로 그의 지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는 자들이므로, 그들이 적인지 혹은 자신에게 어떤 좋은 소식을 전하러 온 자들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환대의 이야기에는 어떤 겹침이, 적과 친구의 겹침이, 손님과 주인이 서로를 적대하는 동시에 환대하는 겹침이, 그런 의미에서 어떤 동시성의 모순이 상존한다. 


이런 상황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선택 혹은 결정일 것인데, 우리는 이 소설 속에서 어떤 부정적인 선택을, 잠재적인 위험에 대한 제거의 결정을, 마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무기를 제거하기 위해 미국이 이라크를 상대로 일으킨 제국적 전쟁 - 물론 그 전쟁의 목적은 석유 자원이었지만, 적어도 액면 그대로 이야기 하자면 - 에서 볼 수 있었던 추악한 결정의 연장선에 있는 어떤 것이다. 자신의 능동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 혹은 이익의 연장을 위해, 타자를 구분하고 이어서 제거 혹은 배제하는, 즉 구분과 배제의 원칙 말이다.  


인간 동물 - 어떤 진화인가?


자연 선택이라는 것은 자연 속에서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생명체가 살아남으며, 적응하지 못하는 생명체는 도태된다는 가혹할 정도로 단순한 원리에 따른 것이다. 유전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한 개체가 어떤 이상을 일으킨 유전자의 배열에 의해 어떤 놀라운 능력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는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경험적으로 증명된 바 없으므로) 완전히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 인간 개체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때 남는 것은 이 개체의 놀라운 능력 보다는 과연 이 개체가 면역 체계나 다른 기관들의 발달에 있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는가 하는 문제다. 하지만 이런 구구절절한 생각은 옆으로 밀어두기로 하자. 중요한 것은 오히려 자연적인 또는 생물학적 종의 진화 그 자체 보다는 인간의 발전에 대한 물음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그 보다 더한 어떤 것으로, 인간 보다 더 고등한 어떤 새로운 인류로 진화한다면 어떤 모습을 갖출 것인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하이즈먼 리포트'라는 허구적인 과학 보고서에는 이러한 새로운 인간종에, 1. 현생 인류의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탁월한 지능, 2. 탁월한 도덕성, 3. 인간의 5감 이외에 새롭게 얻게 된 제 6감이라는 특성을 부여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인간을 거의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넘어서는 지성적 능력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진행된 인류의 역사 중에서 근현대라는 어떤 특정한 시대적 구분의 시기에, 인간은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다른 생물들 및 자연 환경을 마음 내키는대로 이용해왔다. 서구라는 어떤 특정한 지역에 국한될 수 있을, 하지만 우리 모두가 서구적 사상과 과학 기술을 받아들인 세계 내에 살고 있다는 의미에서 또한 그 특정한 지역에 국한될 수 없는, 이러한 대상에 대한 무자비한 지배 및 관리는 단지 다른 생물종들이나 자연 환경을 향한 것으로 한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프리카 및 아메리카 등의 식민 지배,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행된 무차별적인 노예 사냥이 과거에 펼쳐진 인간적 잔혹성의 역사를 웅변한다. 


하지만 만일 주체-대상의 구도가 바뀐다면, 인간-자연 혹은 인간-동물의 구도가 인간 보다 뛰어난 어떤 다른 존재의 도래로 인해 인간이 대상으로 전락한 x-인간의 구도로 전환된다면? 인간이 다른 생물 및 자연 환경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지성적 능력과 이에 바탕한 지식 축적, 과학 및 기술의 발전이었으므로(그 원인에 있어서나 그 정당화의 근거에 있어서나), 어찌 보자면 이런 전환의 가능성은 당연히 귀결될 수 있는 상상이며, 그 결과는 무시무시한 것이다. 종래의 이전의 인간 종들이 현생 인류의 조상들에 의해 멸종된 것처럼(화석에 의한 증거로부터 유추할 수 있듯이), 인간은 멸종할 수도 있고, 생존한다해도 하등한 종으로 취급되거나 또는 사육될 수도 있다(예를 들어, 영화 <혹성 탈출>).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결코 동물적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자기와 다른 대상(자연 혹은 타자)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위계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위계 속에서 인간은 결국 동물화 혹은 자연화 되는데, 왜냐하면 자연의 원리가 바로 위계라는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과는 달리 만족으로 모른다는 특유한 속성이 있기는 하다.) 자연의 먹이 사슬에서 최상위에 있을 뿐, 만일 인간 보다 더 뛰어난 종이 탄생한다면 언제든 그 위계의 최상위라는 자리는 박탈될 수 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동물일 수 밖에 없다.(새끼 침팬지를 잡아먹던 숫컷 침팬지 무리 그리고 그 침팬지들의 우두머리를 총으로 쏴 죽이던 한 용병을 생각해 보라.) 


만일 인간의 자연적인 또는 동물적인 측면에서의 진화와 구분되는 어떤 인간에게 고유한 의미에서의 진화를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자연적 위계와 구분되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인간의 동물적 조건, 심지어 자기 보존과 이익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는,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인간의 (동물적) 본능에서 벗어난 인간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든 자신에게 사회적으로 그리고 국가적으로 부과된 고정된 자리에서 벗어나 운동과 변화를 추동하고자 하는 인간, 즉 인간 주체일 것이다. 바로 이런 시각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보자.


정신의 운동 - 인간 주체의 운동


물론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새로운 인류의 탄생이라는 허구적 단초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의 단초는 각 인물들이 이 '알 수 없는 것의 일어남'에 대한 각각의 반응으로 이어진다.


먼저 어떤 반동적 주체의 형상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연히 이 식별불가능한 사건을 통제하여, 어떤 잠재적 위험의 싹을 제거하기 위한 반응을 하는 정치가 및 관료들이 바로 이 반동적 주체의 형상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모호한 주체 혹은 몽매주의적 주체의 형상이 있다. 새로운 인류의 탄생에 대해, 그 아이의 질적으로 다른 능력에 대해, 경의를 보내며 심지어 그 능력을 신비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다. 그러한 태도는 인간이 실행할 수 없는 소수(素數) 계산 능력, 프로그래밍 능력, 일반적인 언어와는 다른 논리를 가진 언어 등, 이 새로운 실재를 어떤 신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가 가진 모든 능력을 신학화 한다(예를 들어, 보고서를 썼던 하이즈먼이나 인류학자 피어스, 겐토 박사[아버지] 같은 인물).   


이 어떤 알 수 없는 탄생에, 사건에 충실한 주체는 어떤 의미에서 용병들 그리고 겐토와 이정훈이라는 제약을 담당했던 학생들일 것인데, 이들은 이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둘러싼 지구적 스케일의 플롯 속에서, 지구적 관리 체제로부터 비자발적으로 배제된 후, 이 아이의 능력에 대한 모종의 신학화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이유로 인해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기 때문이다(용병들의 경우, 단지 자신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인간과 다르지만 또한 있는 그대로의 인간인 한 연약한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겐토와 정훈의 경우, 난치병으로 고통받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어떤 의미에서, 이 새로운 인류를 제거하려 했던 자들이 이 어린아이에게 붙였던 '누스(정신, Nous)'라는 이름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인데, 말하자면 이 '정신'은 (아프리카의 정글이라는) 자신의 자리를 떠나 (지구적) 운동을 통해 (일본에 위치한 자신의 동족이라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라지는 원인' - 이들은 일본 사회로 숨어들어가며, 이들이 만들어낸 '기프트'라는 제약 프로그램 역시 사라진다는 의미에서 - 으로 인해 인간 자체가 행하는 어떤 변증법적인 그리고 주체적인 운동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 속에서, 헤겔이 말하는 그대로, 자신을 부정하고 원래의 자리를 떠나 결국 자신으로 돌아가는 부정성의 운동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오히려 생물학적 진화의 주인이 된 새로운 인류가 아니라 오히려 종래의 인류, 현재 더 이상의 발전이 없는 듯 보이는, 자신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듯 보이는 현재의 인류다. 


결국 이 지식과 지구적 차원의 미스터리가 만들어낸 즐거운 조합물로부터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의 진화, 정신의 운동, 제노사이드라는 어떤 동물적 비극을 넘어서는 인간의 고유한 발전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첨언할 것은 여기에서 생각이란 언제나 실천과 같은 것이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들 - 예를 들어, 몇 년 전에 벌어졌던 용산참사와 같은 일이 바로 옆 동네에서 그대로 벌어지고 있다 - 은 끝모를 탐욕과 동물적 수동성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사회의 지배적 체제의 부당함에 저항하는 곳, 바로 사유와 실천이 만나는 그 곳에, 단지 동물적 차원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의 고유한 자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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