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집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시간의 문제 - 정체 혹은 운동의 부재와 관련된 

 

시간의 문제는 지금까지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들 중 하나였다. 사물의 변화와 운동과 관련하여, 이에 대한 파악은 시간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고요한 집>은 바로 시간의 문제와 관련하여 터키의,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어떤 정지 혹은 정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를 제공한다.  

 

물론 모든 이야기들이 그렇듯, 이 소설에도 시간의 흐름과 이에 따른 소설상의 인물들의 움직임들이 있다. 시간이 되었기에(여름이 되어 할머니를 방문할 시간이 되었기에) 파룩, 닐귄, 메틴은 이스탄불 근교에 위치한 파트마의 집을 방문하고, 파트마는 이들을 기다리며, 이 집의 하인으로 일하고 있는 레젭은 이들의 방문을 위해 집을 준비한다. 작고한 아버지 도안의 묘소 방문, 역사학을 전공하여 조교수로 일하는 파룩의 지역사 탐구, 좌파 지식인 닐귄의 해변 방문과 그녀 뒤를 따라 다니는 극우파 민족주의자 하산의 비행들, 미국의 물질문명을 동경하며 철없이 부잣집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메틴, 모든 인물들이 시간의 틀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이동 및 행동을 놓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의 흐름 이외에, 다른 시간이 있다. 일상적 생활과 다른, 그 틀을 벗어나는, 그로 인해 어떤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는 시간. 그러한 시간은 우리가 어떤 '사건'이라는 말로 나타내는 단절의 시간, 즉 그 시점의 앞과 뒤로 역사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말하자면 사건의 시간이 말이다.  

 

고요한 ... - 소설 자체가 드러내는 결과 

 

<고요한 집>은 왜 고요한가? 어쩌면 답은 매우 단순하다. 운동 혹은 변화가 없이 정체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소설의 액면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이야기 해보자. '고요한' 집은 일종의 결과다. 하산의 폭행으로 인해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닐귄, 그 집은 이 죽음으로 인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상태에, 슬프기도 하지만 단지 슬픔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빠진다.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하고, 레젭은 이층에서 파트마가 부르는데도 올라가지도 않으며, 파트마는 그녀대로 자신의 과거의 노스탤지어(nostalgia)로 빠져들 뿐이다. 여기에서 시간은 글자 그대로 멈추어버린다. 그 누구도 어떤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찾아오는 정적, 고요, 바로 이와 함께 소설의 흐름 혹은 시간의 흐름은 종결된다. 물론 이 죽음을 하나의 사건으로, 사건적 시간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평가는 이 소설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적어도 이 소설 자체에만 국한하여 말할 때, 이 사건은 소설의 시간적 흐름을 멈추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혁명주의자 닐귄과 극우파 민족주의자 하산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단순한 치정 범죄로만 읽는다면 소설이 펼쳐내는 이야기를 너무나 협소하게 읽는 방식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이 집안에 대해, 혹은 터키의 근대에 대해 이야기 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 집 - 터키적 근대성과 그의 자식들

 

이 집안의 가계도를 그려 보자면, 셀라하틴을 정점으로, 아들 도안과 셀라하틴의 서자들인 레젭, 이스마엘, 삼대째로 파룩, 닐귄, 메틴 그리고 이스마엘의 아들인 하산이 있다.  

 

셀라하틴은 의사이며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고 터키의 근대화 및 변화를 주창했던 지식인이었다. 그로 인해 그는 이스탄불 근교의 한 작은 도시로 쫓겨난다. 거기에서 그는 서구의 근대화 혹은 지식의 완성에 대항하는 터키만의 지식 혹은 백과사전의 기약없는 완성을 위해 매진한다. 

 

어쨌든 그와 파티마 사이에서 태어난 도안의 자식들인 파룩, 닐귄, 메틴은 어떤 의미에서 터키 근대성의 적자들이다. 

 

- 파룩은 더 이상 대문자 역사(History)를 쓸 수 없는 오늘날의 정황 내에 처한 터키 지식인의 모습이다. 하나의 역사, 즉 어떤 하나의 이름 아래(여기에서는 터키라는 큰 이름 아래) 위치하는 대문자 역사는 모든 각각의 이야기들(histories)을 유일한 관점으로 서술하는 것인데, 우리가 아는 것처럼, 서구의 지성사는 2차 대전과 아우슈비츠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그 차마 말할 수 없는 범죄로 인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마치 미셸 푸코의 지식에 대한 고고학의 연구 방식을 보이는 파룩의 지역사 연구 장면은 각각의 이야기 혹은 작은 역사를 써나가는 오늘날의 경향을 보여준다.

 

- 닐귄은 좌파, 혁명주의자다. 분명히 좌파 혹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적 운동의 궤적은 근대와 함께한다. 아니 근대를 그 발단으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공산주의는 근대성의 자식들 중 하나다. 닐귄은 공산주의적 지식인의 그러한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 메틴은 서양의 특히 미국의 자본주의적 풍요를 동경한다. 그 역시도 자신이 동경하는 서양적 자본주의를 위해서라면 전통 따위는 상관이 없는 자인데, 우리는 역사에서 자유주의자들(liberals)이라고 분류되는 자들에게서 이런 경향을 본다.(사실 자유주의자들 보다는 오히려 방종주의자들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들 셋 이외에 하산이 있다. 그는 셀라하틴의 서자들 중 도안이 준 돈을 받아 복권가계를 운영하는 이스마엘의 아들이다.

 

- 사실 앞에서 이야기 한 적자들 이외에 서출인 하산도 역시 터키라는 하나의 '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민족주의는 일종의 근대적 발명품이다. 유럽에서 근대적 국가가 탄생하기 이전에 유럽의 각 지역은 같은 말을 쓰고, 비슷한 종교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엄연히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사는 다른 지역이었다. 심지어 가까운 지역에서 그런 경향이 있었는데, 근대적 국민 국가 혹은 민족 국가가 들어서면서, 이를 해소하고 인민의 역량을 한 곳으로 집중하기 위해 도입하게 된 이데올로기가 바로 민족주의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독일 나치즘을 들 수 있다(아리아인들의 순혈주의 및 고대 민족신화 발굴). 이러한 내세우기 어려운 측면으로 보자면, 민족주의는 일종의 근대성의 서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민족주의자 하산이 셀라하틴의 서출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이라 볼 수 있다. 

 

다시 '... 고요한' - 다시 그 질문으로

 

집안의 가계도를 보자면 정체 혹은 운동의 부재라는 것은 단지 소설에서 액면으로 드러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바로 터키의 근대화 혹은 사회의 철저한 변화라는 의미에서의 운동의 부재가 더욱 크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먼저 파룩과 같은 포스트모던적 파편화의 지식인들이 실행하는 작업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그 역시도 할아버지 셀라하틴과 같이 자신의 백과사전을 쓰고 있는 것일 수 있지만, 그에게 있어 이 작업의 의미는 셀라하틴이 자신의 작업에 부여했던 의미와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 오늘날 문화를 통해 자신의 나라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 적다. 셀라하틴 베이의 백과사전적인 손자들은 그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 자신의 백과사전을 쓰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가 심지어 생각의 수입자라는 측면에서도 셀라하틴 베이 만큼이나 급진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그 누구도 내가 셀라하틴 베이 같은 사람들을 경시한다고 생각하기를 원치 않는다.(오르한 파묵, <The Other Colors>, p131. 영문판 위키피디아 인용문을 재인용함.)  

 

파묵 자신의 말처럼, 셀라하틴의 작업은 사회를 보다 급진적으로, 철저히 변화시키고자 하는 갈망에서 나온 것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의도는 존중되어야 한다. 

 

닐귄이 재현하는 좌파 지식인들의 경우, 그 운동의 힘이 너무나 미약하고 대중과 연결되지 못했고(닐귄과 하산의 적대), 메틴과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애초에 자신의 나라의 상황 따위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서구적 자본주의의 풍요로움에만 관심을 가지는 자들이며, 하산이 재현하는 이슬람을 바탕에 둔 종교적 민족주의가 관심을 가지는 유일한 변화는 과거로의 회귀, 즉 반동적 운동에 다름 아니다. 결국 그 집의, 혹은 적어도 이 책이 쓰여질 당시 터키의 고요함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드러난다. 운동 또는 시간의 부재와 같은 어떤 것을 유발하는 무기력함, 편안함, 혹은 슬픔과 과거의 기억들에 둘러싸여, 그들은 닐귄의 죽음에도 할말을 잃은 채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트마의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책, 독서, 마차여행의 기억으로 이 글을 맺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 하다. 반복되는, 그렇기에 즐거운, 그러나 결코 돌아오지는 않을 시간에 대한 기억으로... 

 

... 우리가 뒤로 한 길, 생각하면 아주 기분이 좋아지는 과거를 보고 있었다. 정말 좋았던 것은, 손에 들고 있던 그 책 때문에 뒤얽히고 복잡한 과거를 어쩌면 집에서 다시 경험할 수 있을 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 아주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이곳 내 침대에 누워 생각했던 것처럼. 넌 삶을 단 한 번의 그 마차 여행을, 끝나면 다시 시작할 수 없어, 하지만 손에 책 한 권이 들려 있다면, 그 책이 얼마나 복잡하고 모호해도, 다 읽고 나서, 그 모호함과 삶을 다시 이해하기 위해, 원한다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 읽은 책을 다시 읽을 수 있어, 그렇지 않니, 파트마? (p26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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