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우 국가/정체 강의
5강
국가 6권에서, 플라톤은 어떤 이유로 철학에 있어서 젊은이들에게 가장 많이 주어진 철학적 천성의 고유한 성질들이, 말하자면 몸의 성질에 대응되는 배우고, 기억하는 능력, 정신(영혼, ame)의 용기 그리고 고귀함이(494b), <<그들이 경제(economie)와 상업(commerce)에 전념하는 시간으로부터 그들을 분리하는 중간 시기에>>, 젊음의 열정에 의해 부추겨져, 철학의 가장 높은 부분인 변증술(la dialectique)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별안간 그 요구가 사라지게 하는지에 대해 자문한다(498a). 달리 말해, 플라톤은 묻고 있는 것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어떤 조건들 하에서 철학자로 남을 수 있는가? 그의 앞에 세워진 장애물들은 육중하다. 우선 사회적 압력은 젊은이에게 사회의 공리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행사하여 젊은이가 특정한 힘의 가치 상승이라는 이익에 그 재능을 사용하게 할 것이다. 말하자면,부모들과 시민들은 그의 미래적 힘에 찬사를 보낼 것이다. <<그가 그런 상황에 있는데, 무엇보다 그가 큰 도시에서 태어나고, 부유하며, 고귀한 집안 출신에, 매력적이며, 좋은 풍채를 갖추었다면 자네는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가? 그가 과도한 희망으로 가득해져, 그리스인들과 이방인들을 다스릴 능력이 있다고 스스로 상상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에 더해, 자신을 높여, 공허하고 무분별한 자기도취와 오만으로 부풀어오르지 않겠는가?>>(494c)
플라톤은 여기에 소크라테스에게 불충실한 제자 알키비아데스의 초상을 새겨 넣는다. 그는 실제로 조상의 이름에 따른 가족을 통해 철학적 주체성의 소멸을 실행한다. 삼부작의 마지막이, 젊은이가 시작해야만 하며 그리고 종속되어야만 하는 작업이 결여되는데, 그가 자신의 지적 자산을 탕진하는 철학이라는 활동을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만일 젊은이가 첫 번째 장애물에 맞서 저항한다면, 그 자신을 스승(matire)에게 의탁해야 할 것이다. 가족 그리고 조상과의 관계의 상궤를 벗어난 위치에서,스승은 젊은 철학 지원자 주위의 특정한 이해관심을 지닌 무리가 흡수할 수 없는 후원자의 기능을 점유한다. 스승은 공적인 장소에 관해 추구될 것이며 또한 단죄 받을 것이다. <<그렇지, 바로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누군가가 조용히 다가서서는 진실을 말해 주기를, 그에게는 지성이 필요한데도 그게 없고, 그걸 지니기 위해서 노예처럼 수고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면, 그래 그가 이 말을 선뜻 귀담아 들을 것으로 자네는 생각하는가? […] 하지만, 그가 천성이 훌륭해서 그리고 그런 말에는 친근한 터여서, 그걸 다소 알아듣고서는 뜻을 굽혀 철학으로 이끌린다면, 그의 용도와 동지적 관계를 잃게 될 것으로 생각하는 저들이 무슨 짓을 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들은, 그가 설득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그에 대해서 무슨 짓인들 그리고 무슨 말인들 하지 않을 것이 없을 것이며, 또한 그를 설득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하도록 할 수 있기 위해서라면, 사적으로는 음모를 꾸미고, 공적으로는 송사를 일으키겠지?>>(494d 후반부 – 494e)
여기에서 사적인 삶(소크라테스에 대한 알키비아데스의 유혹)과 공적인 무대에서 스스로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자라고 말하는 스승의 배신이라는 올가미 가운데 사로잡혀 있는 알키비아데스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형상이 나타난다. 철학 스승의 도제-철학자에게서, 우리는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이라는 두 가지 고리를 재발견하는데, 그것은 철학을 변질시키는 압력을 최대로 집중시킨다. 결정적으로 진정한 철학의 욕망이 부서지고, 범인들과 야심가들이 철학에 뛰어들 것이다. <<왜냐하면 점유되지 않았지만,아름다운 이름들과 아름다운 장식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감옥에서 탈출하여 신전으로 도망하는 것처럼, 철학으로 가기 위해 자신들의 전문 기술들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네. 그들은 자신들의 자질구레한 기술에서 매우 능란한데도 말일세. 아무리 격하된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철학은 어쨌든, 다른 기술들에 관하여, 열등한 자질을 지닌 사람들의 무리와 기계적인 일의 실행으로 인해 정신(영혼, ame)이 소진되고 변질되어 버렸으며 또한 동시에 몸이 변형된 자들이 추구하는 탁월한 품격을 보존한다네>>(495d-e). 철학에 대해 공공연히 드러난 관심의 회복은 가짜 스승의 형상을 생산하는 변질된 상황으로 귀결된다. 이 형상은 보충적인 간계들에 넘겨진 젊은이들을 거짓 희망으로 유혹함으로써 상황을 악화시켜 그들의 사적인 이해관심의 실현에 더욱 쉽게 이르도록 한다. <<그렇지! 이 교양을 쌓을 자격이 없는 영혼들은, 그럼에도 철학에 접근하여 정당하지 않은 교제를 하게 될 때, 우리가 이야기한 것에 따르자면, 어떤 사유와 어떤 의견을 낳겠는가? 그 진정한 이름을 말하자면, 궤변들(소피스트적 논변들)이 아니겠나? 결코 정당하지 않으며, 진정한 지혜의 일부라도 결코 포함하지 못하는 그런 것 말일세>>(496c).
소피스트적 형상은 절대로 진정한 현실성을 분유하지 않으며, 오히려 유일하게 젊은이들에 대한 보충적인 속임수로 기능하며, 은폐된 방식으로, 유혹의 장치를 완전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실재적인 철학자의 동일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소피스트적 입장에 대한 해명이, 즉 철학자의 장소와 자리에 들어가 유사물이라는 거짓 희망을 제시하는 상태에 있는 소피스트의 입장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소피스트는 어떤 자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철학자는 어떤 자인가라는 질문에 대응시킬 수 있는 지형 위에 장소 지어질 수 있는 것으로 귀착되는데, 실제로 철학은 소피스트라는 이 특정한 타자를 자신의 장 내에 포용하며, 단지 페리클레스의 아테네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소피스트와 함께 섞여 있기 때문이다.
소피스트는 철학자와 동일한 문제들(정의, 진리, 존재)을 다루며, 동일한 개념들(실체, 본질, 이념)을 사용하고, 철학자와 같이, 그는 동일한 세속성을 이용한다. 달리 말해서, 설명의 질서를 통해 그의 연설(proferation) 그의 전적인 명료함에 의해 떠받쳐진다. 소피스트적 논변과 스타일은 우리가 진정으로 어디에 그 둘 사이의 명백한 분리가 고정되는지를 보지 못하는 철학의 고유한 담론의 구체성을 만드는 어떤 것과의 매우 강력한 모방으로 들어간다. 그것이 바로 소피스트적 담론이 철학과 같은 장소로 올 수 있는 이유이며, 전자는 우리가 철학의 주체적 차원에 관여하는데 있어 필수불가결한(sine qua non)조건 하에서 후자로부터 분리된다. 그것은 고정시켜야 할 결정적인 지점인데, 실제로 만일 플라톤이 오늘날, 특히, 내 극단적인 의견으로는, 사람들이 고대와 현대의 소피스트적 담론의 재평가와 옹호에 일조하고 있으며, 소피스트적 조류가 철학의 흥미로운 조류로 연구되고 있는 오늘날(1989년), 철학과 소피스트적 담론 사이의 경계를 그리기 위한 그의 노력들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우리는 따라서 소피스트의 식별불가능성의 원리를 말할 수 있을 것인데, 왜냐하면 소피스트적 담론과 철학은 언제나 동일한 역사적 조건들 하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프로디코스의 담론들은 플라톤적 담론들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연극, 시, 수학 그리고 사적인 개인의 실존의 최소한의 강도를 가정한다. 또한, 위대한 근/현대적 소피스트 비트겐슈타인은 정신분석적인, 양자역학적인,수리논리적인 근/현대적 혁명들의 시대를 가정한다.
만일 주체로서의 철학자가 관계를 존재하는 것으로 사유하며, 철학하기의 역사적 조건들이 형성되는 그러한 종류로 사유한다면, 그 조건들은, 소피스트에게 있어, 우선 언제나 언어적인 가정, 즉 언어로서 등재된 가정 내에 있다. 소피스트는 언어와 언표를 통해, 즉 모든 사유의 문제가 언어의 문제로 제시되도록 하는, 정확하게 소피스트적인 것으로 확인될 수 있는 언표를 통해 굴절된 철학의 조건들에 의지한다. 철학과 소피스트적 담론 사이의 매듭(분절점, noeud)은 언어와 진리의 교차에, 즉 검증성(정확함, veridicite) – 언어 내에서 진리로부터 작동되는 어떤 것으로서의 검증성 – 과 진리(verite) 사이의 문제가 제기되는 지점에 할당할 수 있다. 소피스트는 진리의 문제 – 그가 회의주의로 인해 의견을 달리하는 어떤 것 – 에서 어떠한 자율성도 인식하지 않는다. 참되게 거리를 둔 판단들의 무-진리(la non verite)와 관련된 회의적 언표는 진리의 정의 하에 철학적 담론으로 정리된다. 위대한 회의론은 헤겔이정신 현상학le Phenomenologie de l’Esprit에서 그려내는 세계와 같이 비장한 철학이다. 철학자에게 있어, 중심적인 문제는 진리의 문제다. 소피스트에게 있어서, 진리는 실존하지 않으며, 오로지 언어를 통한 지배의 문제로 귀착되는 언표들이 있을 뿐이다.
BIS 34 페이지 도식에 대한 주석
절대적으로 우선적인 사유의 유형들은 중요한 외부적 범위에 관해 지시된다.
- 모든 상황은 그저 무한하기에(EE에서 주장된 테제), 정치적 사유는 무한한 책무가 상황들의 가능성들을 명명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개입의 관할 하에 있다.
- 감각적인 것 예술이 작업적 윤곽 내에 있는 것으로 사유하는 어떤 것이다.
- 과학은 문자의 힘에 관련한다.
- 사랑은 강화하는(강도화하는, intensifiante) 사유의 둘에 관련된다.
- 정치는 상황들의 무한함에 관련된다.
정치, 예술, 과학 그리고 사랑은 확실하게 진리의 유적인 절차들로 정의된다.
그에 반해, 과정들로 결정된 이 네 가지 조건들 하에 자리잡은 철학은 감산적인 입장 내에서 발견된다.
- 철학은 개입 없이 무한을 다룬다.
- 철학은 감각(sensibilite) 없이 감각적인 것(le sensible)을 다룬다.
- 철학은 수학소(matheme) 없이 문자를 다룬다.
- 철학은 대상 없이 사랑을 다루며, 둘의 강렬함(강도)의 체제에 있지 않다.
외부적인 원이라는 주변에서 결정된 무한, 감각적인 것, 문자들, 둘이라는 네 점들로부터 시작하여, 세심하게 분석되어 지적된 네 가지 특성들은, 큰 외부적 원 아래에서 지시된 언어의 매개로 들어가기에,수용적인 표면 위에 던져진다.
언어적 굴절을 통해 파악되기에,
- 상황의 무한은 언어 게임의 무한한 다수성을 생성한다. 무한한 수사적 개방성으로서의 언어 게임들의 무한성이라는 테제를 말이다.
- 감각적인 것은 언어에 그 자체로 이미지들로서의 감각적인 것을 윤곽지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 수학소는 규칙적인 기호화를, 즉 규칙들의 우주를 제공한다.
- 둘(deux)은 모순으로 던져진다. 언어는 모순적인 두 항들을 분배한다.
모순, 규칙들, 이미지들, 언어 게임은 언어를 통해 제시될 수 있는 범주들로서, 소피스트적 담론의 수련에 필요한 조건들이 된다.
언어의 굴절을 통해 파악된 상황들의 무한성은 언어 게임에 의해 뒤섞인 무한성으로부터 다양한 순수성을 부여하며, 정치는 수사(rhetorique)를 그 본질로 한다.
언어의 매개를 통해 파악된 성의 둘은 그 자체로 감각적인 것을 윤곽지을 수 있는 언어의 능력일 것이며, 예술은 이미지의, 즉 미메시스(모방, mimesis)의 지배를 그 본질로 한다.
- 언어의 매개를 통해 파악된 수학소는 우주에 규칙을 제공한다. 문자는 규칙 이상으로서는 제시되지 않으며, 과학은 규칙들을 통해 기호화된 우주를 그 본질로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는 소피스트적 논변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는 소피스트적 논변의 예를 들어보자. 조건으로부터의 조건을 말이다.
a) 이미지들(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그림)
2.1. 우리는 우리에게 사실의 그림들을 형상화한다.
2.17. 그 그림이 현실과 공유하여 그것을 자체의 방식대로 – 정확하게 혹은 잘못 – 그려낼 수 있는 어떤 것은 그것의 형상화(모사, figuration)의 형식이다.
논리-철학 논고, 발리바르 번역(*프랑스어 판).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에서 사유의 연습이라는 유일한 표면(surface)으로 언어 내에서 제시될 수 있는 형상의 이념을 언명한다. 현실은 그림의 표면으로 들어가야만 하며, 그러한 그림의 투사(투영, projection)는 언어를 통한 현실과의, 즉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적 맥락을 통해 구상하게 될 지점과의, 소통 내에 있다.
b) 언어 게임 / 수사
언어 게임은 언제나 열린 그리고 전체화할 수 없는 언어 게임의 다양성을 통해, 즉 비트겐슈타인이 수학과 같은 것으로 나타내 보이고자 노력하는 어떤 것을 통해 구체화되는데, 왜냐하면 수학은 규칙에 의해 가장 [강력하게] 통제된 언어 게임이기 때문이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수학이라 명명하는 어떤 것, 즉 13 * 14 = 182라는 명제에 대한 수학적 이해가 계산 활동에 관해 우리가 받아들이는 특정한 입장과의 관계 내에 있다는 것이다. 또는 우리의 삶 안에서, 우리의 다른 활동들 내에서 … 그 계산을 하는 특정한 입장과의 [관계 내에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나타나는 어떤 것 내에 있는 언어 게임>>.수학의 토대에 관한 고찰들, 7부, 단편 24.
<<내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수학이라 명명하는 어떤 것>>, 즉 언어의 표면(surface)에서 이름을 구하는 어떤 것이다. 수학 – 그것의 다양한 특정한 가능성들을 가지는 – 은 오로지 우리의 삶의 과정을 통해 파악된 입장들과 관계 내에서 사유될 수 있는 것인데, 예를 들어 우리의 다른 활동들에 관한 계산은,달리 말해, 오로지 순전한 언어 게임으로서만, 다른 모든 것을 본 뜬, 따라서 그것의 모든 일반적 입장이 언어 게임 그 자체의 엄격한 매개체 내에 기입된 언어 게임으로서만 사유될 수 있다.
c) 규칙의 힘(force)
<<어떤 척도를 통해 우리는 언어의 기능을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언어를 지배하지 않는 사람이 언어를 지배할 수 있도록 훈련시킬 수 있다. 그것을 지배하는 사람에게, 나는 교육의 양식을 상기시킬 수 있거나 또는, 특정한 목적에서, 그에게 그 양식을 설명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전에 언어의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다. 어떤 척도를 통해 우리는 규칙의 기능을 설명할 수 있을까? 아직 아무것도 지배하지 않는 사람을 나는 오로지 가르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어떻게 나는 나 자신에게 규칙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는가? 난점은 토대까지 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눈앞에 둔 토대를 토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 토대는 언제나 우리에게 증대된 휴지 없는 깊이를 반영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깊이를 추구하기에, 우리는 스스로를 필연적으로 과거의 층위에서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질병, 그것은 설명하기 원하는 것이다. 당신이 그 규칙을 내면화할 때, 당신의 노정은 묘사된다>>(고찰들, 6부, 31절).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게임이라는 관습주의적이며 합의적인 이해를 선택한다. 유일하게 그리고 절대적으로, 어떠한 토대도 없이, 그것의 고유한 규칙에 따라 실행되는 게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다시 말해 규칙의 규정적 형식과 힘 자체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해를 말이다. 결국, 우리는 규칙의 입문 수업이라는 과정에 대해 기술하지 않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규칙을 규정하는 과정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식이 언어에 내재적인 채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은 규칙의 문제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관계로 드러나며(모든 다른 기술은 철학적인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그로부터 치유되어야만 할 질병이기에), 그 기술은 그 자체로 하나의 규칙이다. 이어서 규정적인 언어 게임에 따르며, 나에게 규칙의 규제적인 성격을 기술하는 규칙을 제공하는 그러한 규칙을 말이다. 우리는 언어의 표면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목격하며, 사유는 언어로부터 빠져나온 순환으로서 실행된다.
d) 모순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능력과 무능함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기 위한 모순에 관해 숙고한다. 그 자체로 규칙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서, 그 모순은 어떠한 철학적 정당성도 가지지 못한다. 존재론적으로나, 변증법적으로나. 우리는 규칙의 효과 아래 오로지 모순에 대해 걱정할 뿐이다.
<< … 우리는 심지어 프레게의 논리가 한 원시인에게 산술적인 명제들의 연역을 위한 도구로서 부여되었다고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거기에 모순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 모순을 연역했으며, 그로부터 임의적으로 참 또는 거짓인 명제들이 나온다. <<지금까지 수호 천사는 이 길로부터 우리를 보호했>>으며, 그 외에 당신은 무엇을 바랄 것인가? 나는 사람들이, 수호 천사는 당신이 어떤 무엇을 하던 간에 언제나 필요하다고 말할 것으로 생각한다>>(고찰들, 6부, 16절).
여기에서, 원시인의 도입 – <<지금까지>> 수호 천사가 매우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 제공해왔던 모순의 식별이라는 규칙을 결여한 – 은 참과 거짓에 대한 식별 없이 무엇이든 연역할 것이다. 반면,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철학은 다른 언어 게임들과 다를 바 없는, 그러나 순수한 무의미를 규칙으로 삼는 비일관적인 언어 게임이다. <<철학의 의미>>는 무의미에 사로잡힌 언어 게님이다. 철학의 수호 천사는 이상한 것을 치키는 천사인 것이다.
소피스트와 철학자는 동일한 조건들 아래 그리고 동일한 결정들 내에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각자가 언어 위에 지탱하는 테제에 대한 관계로부터 각각의 단독적인 입장에 선다. 철학자에게 있어, 언어는 철학의 조건이 아닌데, 왜냐하면 만일 언어가 모든 의미의 효과를 물질적 지지대로서 운반한다면, 그것은 언어 자체로부터 진리가 유도되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은 따라서 언어의 문제를 무력화시킬 것이며,이로부터 소피스트적 논변은 모든 명제를 굴절시키는 절대적인 필터를 만들어낸다. 철학은 언어를 통해 실존하지만 언어를 무력화시키는데, 왜냐하면 언어가 참과 거짓에 무관한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진리들을 생산하는 – 따라서 참과 거짓에 무관하지 않은 입장에 있는 – 네 가지 조건들에 관련한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잠정적으로 무력화의 테제를 지지하면서, 철학은 우리에게 실제로 소피스트적 논변이 철학자에게 물려준 언어의 문제에 대한 그의 현실적인 관계를 지시하는 부정적인 관계에 따른 언어를 무력화시킨다. 동일한 사물의 경험에서 무엇이 언어의 철학자를 만드는가(훗설)? 언어는 도구가, 투명한 매질이 될 수 있는가? 플라톤은 언어의 문제를 다루는 대화편 크라틸로스에서 그에 관하여 철학에서 우리가 사물들을 말들로부터 떼어내는 테제를 정립한다. 소피스트는 언어의 편재라는 테제를 주장한다. 우리는 언제나 그를 언어 안에 있는 언어의 주인으로 재현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자는 그의 무력화하는 그리고 도구적인 입장과 연결된 언어에 대한 당혹감에 사로잡혀 있는 주인이다. 그런데, 내가 전에 여러분에게 이야기 했듯이, 철학자는 소피스트가 바로 철학에 대한 언어적 모방을 통해 그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는 이상, 그가 소피스트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소피스트로부터 구분된다. 그들 간에는 무자비한 분쟁이 있는데, 왜냐하면 소피스트적 논변이 철학이 존재하기 위해 제거해야만 하는 그러한 세계의 지점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 내에 자리 한 분쟁이다. 프로이트의 정식을 돌려 말하자면, <<이 소피스트가 있는 곳에 철학자는 반드시 도래한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라도 좋은 것이며, 심지어 소피스트의 방법 마저 상관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어가 분유되는 것으로 발견되는 그리고 철학자와 소피스트의 명백하게 비식별적인 성격 – 정확하게 그들 사이의 근본적인 적대에 의해 규정되는 – 이 위치한 적대의 축을 마주하게 된다. 오로지 철학자를 소피스트와 대립하게 하는 치명적인 불화만이 식별가능성을 허용하며 철학자가 본질적으로 구별적인 어떤 것을 제거하기 바라는 이 세계의 유일한 지점에 일어난다고 가정한다. 그런데, 이 가정은, 그것이 암시하는 분쟁이 유일하게 소피스트적 논변에 속한 영역에서 일어난다고 가정하지 않는 이상, 순수하게 형식적인 기준들에 따라 실행될 수 없다. 말하자면, 우리는 두 가지의 차별적인 언어 게임들 사이의 수사적 대결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담론들 이외에, 말로 표현된 적대적 장면에서 내재적으로 읽을 수 없는 주체적 요소가 개입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바로 이어지는 요소, 즉 철학자와 소피스트가 동일한 것을 욕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의 이질적인 사랑이다. 필로소피아(philosophia), 지혜에 대한 사랑, 필로독사(philodoxa), 의견의 기술들에 대한 사랑. 소피스트편의 마지막에서, 플라톤은 압축적이며 복잡한 정식으로 소피스트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따라서, (1) 모순되는 말을 하는 기술을 지니고, (2) 교묘한 형식 하에, (3) 의견의 모방적 기술로, (4) 전적으로 모방하는 자, (5) 외양과 관련된 부분에 있으며, (6) 그 자신이 모상(시뮬라크르)을 만드는 기술에서 나와, 자신의 부분을 위해 (7) 구어적 일부를 (8) 눈속임으로, (9) 신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으로, (10) 그러한 생산을 보존하는 자. 우리가 진정한 소피스트에 대해 <<거기에 그 가계가 있고, 거기에 그 혈통이 있다>>(일리아드, 6권, 211)고 단언할 때, 내가 보기에, 우리는 분명히 전적으로 참된 것을 말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뱅(Robin) 번역판, 번역자에 의해 결정된 소피스트의 열 가지 요소들.
바디우에 의해 주어진 번역: <<의견의 기술을 지닌 아이러니한 부분에 의지하여 모순적 담론을 제작하는 그 모방, 담론의 위신을 창조하는 행위에 있어 신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부분, 그리고 시뮬라크르의 종류를 통해, 이미지들을 생산하는 기술에 속한 부분, 바로 여기에 우리가 진정한 소피스트의<<일족과 혈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소피스트는 수사학 교사로서의 정치가다.
소피스트는 목적 없는 이미지들을 생산하는 시인이다.
소피스트는 [과학을] 규칙의 전횡으로 환원하는 과학자, 즉 도착적인 논리학자다.
소피스트는 모순의 언어적 난관 안에서 둘을 전복시키는 애인이며, 그에게 있어 사랑은 논쟁이다.
소피스트적 욕망은 의견의 기술을 조직하기를 원한다(사랑한다, aime). 그가 바라는(aime) 것은 우리가 그의 의견을 사랑하는 것, 즉 언어 안에서 가용한 고갈시킬 수 없는 의미를 사랑하는 것이다. 의미와 의견들에 대한 사랑(필로독사[philodoxa])은 상반되는 동시에 같은 사안에 대해 진리와 지혜의 사랑을 가진다(필로소피아[philosophia]).
주체적 긴장이라는 폭력적인 요소 – 철학자를 소피스트로부터 식별할 수 있게 하는 – 는 진리의 절차들의 실효성과 의미에 의해 일반화된 해석 사이의 대립이라는 표지 아래 언어를 관건으로 삼는다. 철학은 진리들의 효과적인 성격을 소피스트가 행하는 의미의 보편적 해석에 대립시킨다.
우리는 이 긴 우회 끝에, 이제 국가/정체 6권, 496 bc을 참조하게 된다.(박종현 번역판 참조, 강의록에 맞춰 약간 변경함.) 바로 소피스트들이, 다시 말해 의견의 해석자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그러나 거기에서 참의 효과적인 절차들로부터 검증된 지성을 위해 투쟁하는 자들 또한 머무르는 지점을 말이다. 여기에서 플라톤은 그의 원숙기에 이런 종류의 투쟁자들이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을 요구하는가?
<<매우 빈약하게 그럴 거야, 아데이만토스. 그러니까 철학과 적절하게 교류할 수 있는 몇 사람만이 남게 되겠지. 아마도 고귀하고 훌륭하게 양육된 성격의 소유자가 망명으로 인해서 남게 된 터에, 그를 파멸시키는 자들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성향에 따라 철학에 머물게 되거나, 또는 위대한 혼을 지닌 자가 작은 나라에 태어나 국사를 경시하여 깔보게 되는 경우에 그렇겠지. 또한 어쩌면 훌륭한 성향을 지니고 있어 의당 다른 분야의 기술을 경시한 나머지 이에서 철학으로 옮겨가는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고.>>
망명에 나서가나, 변변치 않은 나라에 속하거나, 불안정한 건강 상태에 있거나, 다른 것을 하나가 결국 뒤늦게 철학으로 옮겨가는 것, 여기에 다이몬의 징후(영적인 징후, signe demonique)에 의해 드러난다는, 다시 말해 부정적인 명령에 의해 떠밀린다는 사실을 더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의 동료인 테아게스의 고삐가 제어할 수도 있겠지. 테아게스의 경우 철학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기엔 다른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지만, 신병의 조리가 그로 하여금 정치를 하지 못하고 주저앉게 만들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내 경우, 즉 다이몬의 징후는 언급할 것이 못 된다네. 왜냐하면 지나간 사람들 중에 다른 그런 예를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서.>> 플라톤은 여기에서 퇴각의, 탈선의 조건들을 전달하며, 요컨대 철학자의 실존적 결단을 상궤를 벗어나는 방식으로 규정한다. 이 조건들은 감산적인 조건들이며, 진리에 가 닿은 젊은이들의 열정에 대한 충실성의 조건들이다. 무르익은 시기에 철학자로 남아, 일반화된 소피스트적 논변을 회피할 자는 왜곡되고 감산적인 조건들을 통해 젊은이들의 격정에 충실한 채로 남아있을 능력이 있는 자일 것이다. 다시 말해, 자유로운 무책임으로부터 활기를 얻는 자는 진리의 무한에 이르는, 그리고, 이 움직임의 추상적 진폭 안에서, 가족적 이익과 국가의 유한한 고리를 무릅쓰고, 철학이 그것의 지속의 실존 가운데 가능한 정체가 되도록 할 것이다.
우리가 얻은 지식을 요약해보자.
철학은 여섯 가지 다른 지위에 대한 결정의 집합이다.
네 가지 조건들: 과학, 예술, 정치, 사랑
철학의 네 가지 조건들은 진리의 절차들이며, 다시 말해 진리의 역사적 형상들이다. 철학이 펼쳐지기 위해 이러한 다양한 참된 것의 체제들에 대한 효과적인 생산이 있어야만 했다. 그런 일이 그리스에서 첫 번째로 일어났고, 거기에서 이 네 가지 조건들이 철학에 의해 공존하능하게 되었다.
이 네 가지 조건들은 존재의 사유(도식 외부에 있는 원)에 뿌리내린 무한(상황들), 감각적인 것, 문자들(수학소), 둘(양성[sexes])이라는, 그리고 이 절차들이 분배되는 것들에 관한 사건적 규정에 호소한다. 따라서, 예를 들어, 사랑은 종합 없는 그리고 비-변증법적인 순수한 둘의 형상이 발생하게 한다.
- 하나의 원소(요소): 언어. 비록 언어는 철학의 조건들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언어는 규정적인 성격이 아니라 물질적인 성격을 지닌 원소적 결정으로 남는다. 말하자면, 철학은 이 원소 내에서 펼쳐지게 된다.
- 다른 원소: 소피스트. 철학에는 그것과 전적으로 다른 형상이 대응한다. 철학에 대한 모방을 통해 성립하는 소피스트적 논변이 말이다. 철학과 동일한 사안에 그리고 동일한 규정들에 자리하여, 소피스트적 논변은 그 단독적인 이타성의 입장을 재현하며,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동일한 규정들을 여과한다.따라서, 감각적인 것의 투사로서의 그림의 이미지, 무한의 투사로서의 수사법, 문자의 힘의 투사로서의 규칙의 힘, 둘의 투사로서의 모순이 귀결된다.
이를 축으로 하는 언표는 다음과 같다. 소피스트에게 있어, 모든 사유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로 환원된다. 철학자에게 있어, 모든 진정한 사유의 문제는 저항하는 것, 즉 그 문제는 언어의 문제로 귀착되거나 환원되지 않도록 저항하는 것이다. 사유에는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어떤 것도 없다. 철학은 잔여의 테제를 지지한다.
소피스트적 논변에 있어, 잔여는 반드시 치료법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병든 사유의 징후로서 나타나는 망상적인 생산물이다.
철학과 소피스트적 논변 사이의 분리라는 문제는 전적으로 언어의 문제 위에 설정된다. 잔여가 있다는 것이 참이라면 언어에 대한 사유의 관계는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까?
이 분리의 관건은 바로 언어와 관련한 사유의 빼내기를 둘러싸고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