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플라톤 <국가> 강의, 6

 

 

 

우리는 철학자의 주체적 개입과 이 개입의 언어와의 관계가 철학자를 그의 타자로서의 소피스트로부터 구별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이 관계는 이제 진리의 문제로 열리며진리는 철학의 조건들의 문제와 철학자의 타자라는 문제에 대한 철학자의 이중적 관계를 지시한다.

 

 

 

바로 이어서 이런 역설에 주목하도록 하자진리라는 말은 철학의 조건들로부터 단수적인/복수적인 대립을 통해 기능한다는 역설에 말이다실제로철학의 조건들즉 진리의 절차들은 철학을 공가능하게 만드는 진리를 생산하지만철학은 진리를 생산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철학적 진리에 대해 말할 것이다한편으로는 그렇지만(우리는 이를 다시 고찰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진리라는 말은 의견이라는 말에 대한 대립을 통해 파악될 것이다의미와 진리 사이의 대립은 철학자에게 주요한 대립으로 드러날 것이며철학자는 의미와 진리를 보존하는 관계들에 관한 분리적 가설을 만들어 진리를 의미에 대한 돌파를 위한 단독성으로 제시한다오늘날철학 한다는 것은 무한하게 의미를 생산하는 해석학의 편재에 대항하는 싸움이다.

 

 

 

우리는 앞서 각자가 철학자소피스트 혹은 누구이건 자신의 의견을 가진다는 점에 대해 언급했다의견은 유통되는 것의 체제에 따라 기능한다우리는 우물의 깊이를 재는 것처럼 의견을 재어본다그러나 철학자에게 있어소피스트라는 철학의 모방자는 의견에 대한 사랑을 조직한다이러한 진리와 의견 사이의 철학적 분유에서소피스트는 순전히 의견의 편에만 서지 않는데왜냐하면 그가 의견을 조직하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아이러니한 관계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플라톤이 소피스트적 논법에 대해 <<의견에 대해 부분적으로 아이러니한 그 기술>>이라는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오로지소피스트는 끊임 없이 의견에 대한 사랑(philo-doxa)를 유지하는 언어의 체제를 만들어내고 이를 완전하게 다듬는다철학자 자신은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 즉 예지 혹은 진리를 유지하며이 때문에 그의 과제를 더욱 어렵게는 아닐망정 최소한 더욱 위험한 것으로 만든다다시 말해서주체성의 결정즉 그들 각자의 욕망이 드러내는 철저한 차이는 그들의 각자의 담론을 구속한다그들 각자의 담론을 판별하는 것은 그러한 결정이며 텍스트들이 아니다.  

 

 

 

따라서진리(네 가지 유적인 절차)이 있다는 조건 아래 철학자는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며이에 반해 소피스트들은 언어의 표면 위에 의견에 대한 사랑을 조직한다무엇이 이러한 사유에 있어 근본적인 문제의 주체적 형상이 될 것인가그것은 사유가 여전히 결정되지 않은 연령에 있는 형상으로서의 젊은이들(jeunesse)이들의 사유는 타락과 관계될 것이다플라톤의 첫 번째 대화편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편에서 보자면 극도의 폭력에 의해 점철된 분유의 장면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잘 살펴야만 한다이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의 담론에 대한 논증이라는 관점에서 식별불가능하다이를테면누가 소피스트이고누가 철학자인가그것은 말하기 매우 어려운 사안이다물론이런 것은 사실이다소피스트와 철학자 양자 모두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기 원하지만이것은 두 가지 상반된 타락이라는 점 말이다. 소피스트의 고정된 목표는 철학자의 목표가 그렇듯 젊은 세대에 적합한 만족스럽고 매력적인 비결정으로부터 유래하는 사유의 비결정을 끝장내는 것이며이것이 바로 타락이라는 말의 의미인 것이다본질적으로이러한 젊은이들의 형상은 그러한 사유의 무책임에 따른다사유의 비결정이 모든 정해진 사실에 직면하는 전적인 과단성을 만들어낼 때 말이다이러한 사유의 무책임은 우선 사회체들(cors sociaux)의 정립을 중단하기에 사회체들은 법을 제정한다사유의 젊음은 또한 이중적인 아직 아님(pas encore)을 구성한다아직 아님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허용하는 상태화된(etatise아직 아님을 말이다플라톤이 등장시키는 이 형상은 경험적인 젊음의 형상이 아니다물론그들은 사유의 젊음이 없는 젊은이들일 수 있다사유의 젊음그것은 무한성을 인식하는 계기이며즉 실재적인 것이 엄격한 한도 안에서 혹은 유한한 것 안에서 가능하고 파악할 수 있음을 인식하는 계기인 것이다필연적으로 초과의 욕망 혹은 의지가 아니라 초과의 가정인 것이다마찬가지로소피스트로서의 철학자는 초과적인 사유의 연령을 나타내는 형상으로서의 젊은이들과 대결에서이러한 초과의 가정이라는 사안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모든 타락은 초과적인 것의 타락이라는 동일한 사실에서 말이다.

 

 

 

소피스트는 형식들의 무한한 가변성으로 제시된 모든 사회적인 것을 통해 초과적인 것을 타락시키는데 열중한다달리 말해서매우 궤변적이며 무한히 열거되는 언어유희들은 공약불가능한 것에 대한 용기(容器)로 기능한다무한은 그 척도를 다양한 언어 안에서 얻게 된다초과의 지점에서소피스트가 공약불가능한 것을 처리하는 방식은 무한한 언어유희의 체계 내부에 대한 뛰어난 능력(virtuose)의 교육을 제시하는 것이다소피스트가 말 건네는 것은 젊은이들의 초과를 이루는 유희적 차원즉 열정적인 사유의 무책임에 고유한 형상으로서의 유희이다소피스트는 언어유희의 뛰어난 궤변을 통해 그리고 그러한 궤변으로부터 유희를 사회화한다이런 의미에서소피스트들은 사회체에 봉사하며그들이 언어의 기술적 숙달을 달성함으로써 선/상품의 봉사(service des biens)를 위해 사회화되도록 하는 그것에 봉사한다따라서 소피스트들이 받는 수업의 대가는 초과에 내재적인 유희적 초과를 막는 대가이다말하자면이러한 유희적 요소는 소피스트가 고안한 것이 아니다소피스트적 논변은 뛰어난 능력(virtuose)을 통해 비결정을 타락시키며그것은 전형적으로 능력에 따른 타락이다.

 

 

 

철학자는 무책임 자체로부터 책임을 만들어내려 한다그의 의도는 초과를 단독적인 책임으로 억류보존보호하려는 것이다그런 것이 철학적 책임인데왜냐하면 철학자가 알기에 아직 아님(pas encore)의 체제에서 감지되지만유지 혹은 충실성 – 사회적 능력(virtuosites)이라는 규범에서 볼 때 처음에는 뛰어나기 보다 미숙할 수 밖에 없는 – 의 보호 아래 들어가는 그러한 무책임은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철학자가 말 건네는 것은 매우 진지한 자들엄숙함사유의 신중함이라는 [소피스트의반대편이며이에 따라 초과적인 것은 탈국지화(delocalise되고/상품의 봉사로부터 떨어져나가며요컨대 사회화 불가능해 지는 것이다철학자는 있는 그대로의 유희적 요소를 타락시키는데 전념하는데그 이유는 그러한 요소가 무책임으로서의 무책임을 재현하기 때문이다유희적 무책임을 말이다철학자는 역설적인 주체화에 대한 정립을 시도한다말하자면책임으로서 현시되는 무책임을 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이와 같이철학자가 무책임의 후견을 통해 젊은이들에 충실한 지속성을 조직하는데 반해소피스트는 교육/교양(bildung소설을즉 탁월한 능력의 실효성을 통해 세계로 돌아서는 지속적인 형성을 선택한다소피스트의 교육적 도식에 반하여철학자의 파이데이아(paideia)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어떤 것은 박탈되어 있는 채로 남으며그것을 진지하며 신중한 불만의 요소로 조직한다그러나 이 근본적인 박탈은 어떻게 보호될 수 있는가이런 점에 관해플라톤에 의해 시험된 근본적인 비관론를 표명해야만 한다플라톤에 따르면핵심적으로소피스트는 모든 일에서 돈을 번다는 것이다뛰어난 능력의 매혹이 그런 결과로 이어지며그러한 매혹을 가로질러/상품의 봉사로부터 이익을 얻는다그렇다면 아직 아님의 이중적 체제가즉 아직 아님(pas encore)이 소피스트적 함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의 아직(encore)이 되지 않으며이에 따라 그것이 중단의 긴급성에 있지 않도록 하기 위란 방법은 어떤 것인가달리 말해서어떻게 하면 무책임함을 유지하면서도 영원한 젊음이라는 허구에 머물지 않을 수 있는가제기된 문제들은 결정적인 대답이 주어지지 않은 채로 아포리아로 이어지는 플라톤의 첫 번째 대화편들에서플라톤이 등장시킨 젊은이들은 단적으로 젊은 시기에 있는 그들의 사유의 존재를 분유하는 형상들이다무책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이러한 무책임을 이차적인 책임의 보호 아래 위치시켜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우리는 <국가/정체> 6 496b에서 어떤 순간을 상기해야 한다바로 플라톤이 어떤 사람들이 젊은이들 이외의 철학자들 – 단적인 철학자들진정으로 완전한 자격을 갖춘 철학자들 – 일 수 있는 예외적인 조건들을 열거하는 순간을 말이다그러한 조건들이 철학자의 출현과 영구성을 촉진하기는 하지만즉각적으로 철학자를 설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도록 하자.

 

 

 

망명(exil). 이는 태어난 장소로부터 유배됨을 말한다망명에 오른 채로(en exil), 젊음에 대한 충실성은 가족직업고국이라는 타고난 집단의 압력에서 벗어난다그리고 뛰어난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직위라는 유혹은 훨씬 불분명한 것으로 밝혀지는데왜냐하면 그러한 직위를 얻을 가능성이 훨씬 더 낮아지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익도 야망도 없는 작은 도시에 거주하는 문제이에 대해 우리는 필연적으로 칸트가 살던 쾨니히스베르크나 키르케고르가 살던 암울한 덴마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불안정한 건강(sante praicaire). 주체의 불안정성은 그를 사물의 직접성에 다소간 무관하게 하며소피스트의 뛰어난 기교를 거의 통할 수 없게 만든다그리스 세계에서철학자는 영웅이나 운동선수단순한 웅변가 등이 아닌 그런 사람으로 확인된다철학자라는 주체는 사회적인 명성과 동일시 되지 않는다그는 부분적으로 불안정하거나 상처 입은 자의 이미지와 본질적으로 관련된 사유의 의지를 지닌 자인 것이다.   

 

 

 

자신의 오래된 직업을 버리고 철학으로 향하는 것(aller a la philosophie en delaissant sa profession anterieure). 그것은 때늦은 철학자의 경우인데그는 자신의 출발점에서 멀어지는 고유한 사유의 운동을 통해 두 번째 충실성(fidelite)에 도달한 자이다달리 말해 첫 번째 선택에 대한 배신(infidelite안에소피스트적 교육의 보급에 대한 배신 안에 스스로 정립할 수 있었던 자인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이라는 표징이 나타남소크라테스의 다이몬(demon)에서 나타나는 실존적 역설은 소크라테스가 비타협이라는 부정적 명령에 따른다는 점인데그가 이 명령을 인정하는 것은 그것은 어쨌든 아니다라는 의미에서다그의 다이몬은 뛰어난 능력에 대한 동의의 용이성에서 긍정에 대한 긍정에 의해 정립되는 소피스트적 논변에 보편적인 긍정(oui)의 유혹을 중단시킨다다이몬의 표징은 언제나 반복되는 긍정을언어적인 뛰어난 기교가 다른 사물로 기울 수 밖에 없는 증거를 중단시킨다그것이 아직 미숙한 방식의 사유라고 하더라도 말이다우리는 앞에서 그러한 빠져나감이탈이 젊은이들의 사유의 일차적인 무책임에 책임을 부과하는 이차적인 충실성에 호의적인 조건들의 집합에 유일하게 공통적인 특징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주체성에 대한 철학자의 결정은 상궤를 벗어난 행동으로 제시되며말하자면 그는 사회적 명성에서 빠져나가는 조건들에 종속되는 것이다철학이 있기 위해서는 조건들에 객관적 사건성이 있어야 했으나철학은 하나의 입장(position)이기에 앞서 탈입장(deposition)이며말하자면 철학자는 현행의 의사소통의 중단에 의지한다철학자는 우선 무엇인가 사유를 통해 중지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정립되는 것이다반대로소피스트에게 그것은 지속되어야만 하고 지속될 수 있으며 계속 늘어나는 경향을 보이며어쨌든 그것은 언제나 말하며 모든 사유의 문제는 <<그것이 말한다(ca parle)>>는 사실 안에 사로잡힌 채로 유지된다결론적으로소피스트적 주체성과 철학자적 주체성의 대립에 있어소피스트적 몸짓은 언제나 언어 게임에 뛰어난 끝없는 지속에 대한 도박이며철학자적 몸짓은 중단을적어도 언어에 의해 감춰진 지점을 가정한다이런 사안에 대한 지점에서여러분은 중단의 명령이라는 조건 아래 처한다물론 탁월함과 아이러니의 언어로 영역을 바꿀 수 없다 해도 말이다.

 

 

 

이 중단에 대한 플라톤적 은유는 매우 복잡한 것으로 밝혀지는데그 은유는 깨어있는지 꿈꾸고 있는지낮인지 밤인지의 문제와 관련된다. <<그 사람의 삶은 깨어있는 것인지(upar) 아니면 꿈꾸는 것(onar)인지>> (V, 476d). <<우리는 참된 철학을 캄캄한 낮으로부터 진정한 낮을 향한 영혼(정신ame)의 되돌아감혹은 존재자의 실체를 향한 상승이라 말할 것이네nous appelons vraie philosophie le retournement de l’ame d’une sorte de jour obscur vers le  jour  veritable,  ou  la  montee  vers  la  substance  de  l’etant>>(VII, 521c). <<관건은 어떤 밤과 같이 어두운 낮으로부터 진정한 낮을 향한 영혼의 전환으로말하자면 존재에 이르기까지의 상승인데우리는 이를 진정한 철학이라 부르네il  s’agira  d’operer  la conversion  de  l’ame  d’un  jour  aussi  tenebreux  que  la  nuit  vers  le  jour  veritable,  c'est-a-dire  de l’elever jusqu’a l’etre, et c’est ce que nous appellerons la vraie philosophie>>(바쿠Baccou의 번역). <<그러나 그것은 영혼의 전환으로일종의 밤 같은 낮에서 진정한 낮으로 가는 것이며 실재로 상승하는 길인데우리는 그 길을 바로 진정한 철학이라고 부른다네mais c’est une conversion de l’ame, passant d’une sorte  de jour nocturne au jour authentique et qui est la voie  pour  monter  au  reel,  voie  dont  nous  dirons  precisement  qu’elle  est  philosophie  veritable>>(로뱅Robin).

 

 

 

플라톤은 우리에게 되돌아감의 이념으로서의 중단의 지점을 제시한다그러나 통용되는 것의 중단은 기원적인 혹은 본래의 자리를 향해첫 번째로 정초적인 그리고 살아있는 영혼에 적합한 자리를 향해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미리 정해진 속성을 향한 귀환이 아니라깨어남을 향한 귀환이며 발명의 양식에 머무르는 것이다진정한 낮을 향해 나갈 때 우리는 그러한 속성을 박탈 당한다우리는 낮의 빛을 향해 되돌아간다달리 말해서그 되돌아감은 같은 낮 – 캄캄한 낮/진정한 낮 – 에 따라 이루어지는데그것은 그 중단 안에 사로잡혀 밤처럼 어두운 낮이라는 첫 번째 자리에서 낮처럼 밝은 낮을 향한 되돌아감으로서 제시된다철학적 중단은 낮의 특성을 정립함으로써 낮의 밝게 갬(eclaircie)을 달성한다그러나 이러한 밝게 갬은 실제로 추방된 자의 고국을 향한 되돌아감이라는 양식에 따른 추방혹은 최초의 자리에 대한 재전유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없다그 되돌아감은 동일한 장소동일한 낮의 장소로 되돌아가는 것이며거기에서 캄캄함밤처럼 어두운 낮은 중지된다또한횔덜린의 표현에서태어난 곳으로의 되돌아감(하이데거의 분석들이 타고난 나라의 신성함의 편에 방점을 찍는)나는 두 인용문들을 연결하여깨어남을 통한 되돌아감 혹은 개방(decloture)을 대립시킨다낮은 그 자체의 고유한 밤의 울타리 안에 있었다이 닫힌 낮은 되돌아감을 통해 낮과 같은 특성으로 열린다영혼의 고양상승향상은 여기에서 그러한 낮의 저편을 향한 초월이라는 의미에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오히려 되돌아 감을 통해 그러한 낮이 그 자체의 존재를 진정한 낮에 배치하는 범위에서 존재하는 것에 대한즉 그것이 지속하는 본질로서 주어지도록 밝은 대낮과 같은 낮에 대한 접근으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플라톤에게 있어 순수한 되돌아감으로 파악된 철학적 중단의 몸짓은 같은 장소에 대한있는 것의 밝게 갬에 대한 혹은 대낮 같은 밝음에 대한 접근을 제공하는 타고나지 않은 되돌아감으로 묘사된다우리의 시대가 진리의 범주로부터 고립되어 있기에철학은 그 자체의 해석적 박물관이 됨으로써 의미의 생산의 끊임없는 지배 아래 떨어진다철학은 더 이상 진리와 의미가 분리되지만 의미에 의해 뒤덮이는 지점을 유지하지 못한다철학은 무의미의 위험에즉 근대적 소피스트들에게 노출된 것이다우리가 목격하는 위험을 측정해야만 한다근대적인 소피스트적 논변의 실제적인 큰 승리를 검토해야만 하는 것이다그것은 바로 언어에서 끊임없는 연속의 체제에서 요컨대 큰 위험으로 기능하는 것이다우리는 상대부분 없이 소피스트적 논변의 편재에 노출되는데이에 대해 뛰어난 능력을 갖춘 소피스트는 분명히 가장 탁월한 행위자지만그렇다 해도우리 시대의 지성이 니체로부터 개방된 반-플라톤주의의 전적인 지배로 제시되는 술책의 장기말일뿐이다그리고 사유에 의해 다뤄지는 모든 문제들에 고유한 언어의 초월적 특성에 관한 일반적 합의는 이런 의미에서 이루어진다실제로 플라톤에 따를 때이 중단이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alesthaton>>, 즉 가장 참된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진실된 것을 주목하면서 언제나 거기에 연관지으며 완벽하게 우호적인 관점으로 관찰함으로써아름다운 것들과 올바른 것들 그리고 좋은 것들과 관련되는 이 세상의 법규들을 정할 수 있거나혹은 그런 법들이 이미 정립되었다면 이를 지키고 보존하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자들>>(VI, 484d) 달리 말해서플라톤 이래모든 근대적인 고전 철학은 그 탐구의 중심에 진리라는 주제를 둔다그런데우리는 오로지 복수이자 이질적인 진리들을 생산하는 독립적인 유적 절차들이 있을 뿐이며철학이 그로부터 귀결되거나 그렇지 않다면 공가능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요컨대어떤 의미에서 낮 같은 밝음의 경험이 우리 근대인들에게 있어 이런 방식으로 명명된 플라톤적 진리에 관련되는 것인가현 국면에서(1989년 말), 이 사안의 해명은 은폐될 수밖에 없다우리가 계속 이해의 지배 아래 무한정 있게 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철학은 해석의 울타리라는 표지 아래 헛되이 그 자체의 끊임없는 해석의 체제로 전환할 것이다니체 이래철학은 감히 더 이상 오늘날 압류된 진리의 범주가 자체의 담론을 집중시킨다고 말할 수 없다왜냐하면 철학에서 유래한 진리의 문제를 말할 수 있는 특성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만일 우리가 철학을 그 분신의즉 그 타자로서의 소피스트적 담론의 지점에서 재구성하고자 한다면철학의 의미심장한 진리를 재발견해야만 한다그러나 이러한 기획이 어렵다는 점이 밝혀지는데실제로 진리는 여러 가지 사건적 단독성들 안에 붙들려 있는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예를 들어그리스에서는 정치의 개입(모세즈 핀리), 수학의 창안(cf. 플라톤테아에테토스에우독소스), 비극의 창조사랑의 마주침(향연갑작스러운 것l’exaiphnes)이 있었다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것들에 관하여무엇이 그 [탁월한진리일 수 있다는 말인가그 진리는 여러 이질적인 진리들에서 파악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사유될 것이다우리는 진리가 실존하지 않음을 정립할 것인데 왜냐하면 오로지 역사성에 기인한 진리들만이 있기 때문이다 [탁월한진리는 역사성의 차원에 실존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 진리의 사건이 없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철학이 진리라 명명하는 것은 비실존의 지점이라고 간주해야할 것이다그렇다면철학에 사건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철학은 어떤 정당성으로 그 자체의 사유의 목적지를 진리라 명명할 수 있는가우리는 진리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언표가 진리 자체의 구성적 언표임을 보일 것이다이러한 검토에 따라우리는 내가 여러분에게 지시하는 다음과 같은 결론들에 이르게 된다.

 

 

 

<<실존하지 않음>>이라는 말이 나타내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탁월한] 진리는 비전이적(intransitive)이다그 진리는 여러 진리들과의 단절의 지점을 지시한다따라서 진리들은 결코 [철학 자체의진리를 제시하지 않는다철학이 증거하는 것은 비전이적 지점이다.

 

2. 그 진리는 탈국지화(delocalisation)를 나타낸다그 진리는 비실존하며심지어 동일한 진리들의 장소에서도 실존하지 않는다.

 

3. 그 진리는 비기획적(aprogrammatique)이다그 진리는 아무것도 제안하지 않으며진리는 미리 정해지지 않는다.

 

4. 그 진리는 주체의 범주에 있어 기획적인 가치이다그 진리는 존재의 범주가 아니지만진리들의 존재는 있다.

 

5. 그 진리는 우연의 작용(fonction)에 연결된다그 진리와 진리들 사이에는 우연이진리의 철학적 관념과 공-기원적인 지점이 삽입된다.   

 

 

 

그렇다면일단알게 된 것을 요약해보자.

 

철학과 소피스트적 논변 사이의 경계선은 불가피하게 주체적 동일시를 경유하는데왜냐하면 수사학적 분석의 엄격한 관점에서 어떤 철학적 텍스트와 어떤 소피스트적 텍스트를 구별하는 특징들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철학자와 소피스트 양자 모두의 공-기원적 귀속을 분해함에 있어우리는 철학자의 주체성에 기인한 형상을 결정하는 철학적 담론을따라서 철학에서 철학자에게로 향하는 필연적인 재귀를 해명할 수 밖에 없다우리가 철학으로 주체적 말하기가 암시하는 하나의 입장을 의미하지만그 입장은 소피스트의 언어적으로 뛰어난 능력(virtuosite)과 겹쳐지지 않는다거기에서 소피스트의 수사학이 언어에 대한 모방적 관계와 겹쳐지지 않음에도 말이다철학의 경계선은 철학자의 주체성에따라서 플라톤이 쓰기로 계획했던 철학자(le Philosophe)라는 제목의 대화편에 개입한다그러므로 철학자의 주체적 성향은 철학자를 존재로서의 존재의 해명(eclaircie)을 향한즉 성향으로서의 존재의 문제에 대한 해명을 향한 타고나지 않은 귀환의 작용에 관여하게 한다철학자의 주체적 태도는 그를 타고난 요소로부터플라톤의 표현으로 말하자면통용되는 의견으로부터 추방시킨다플라톤은 의견에 대한 사랑과 단절하는데바로 거기에 철학과 소피스트적 담론 사이의 경계가 기입되는 것이다이러한 추방은 젊은이들의 최초의 무책임을 후견하여이들의 무책임이 다른 책임에 기인한 사유로 전환하는 것을즉 선/상품의 봉사에 대한 단절을 관건으로 한다소피스트가 무한의 심금으로서의 젊은이들의 최초의 무책임을 우월한 능력으로즉 선/상품과 의견이 유통될 수 있도록 하는 상업적 현실의 원칙을 향해 탈선시키는데 반해철학자는 상업적이지 않은 사유를 제안한다플라톤은 이러한 귀환을 진리로최고로 진실된 것alesthaton탁월한 진리로 명명한다이러한 소피스트적 담론과의 주체적 구별이라는 동일한 관점에서우리는 어떤 이유로 진리의 문제에 대한 철학을 통한 유지라는 새로운 시대의 운명이 펼쳐지는지 심문해야만 한다그리고 한편으로 우리는 진리가 비계획적이고 미리 정해지지 않으며 실존하지 않음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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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사건 - 사랑과 예술과 과학과 정치 속에서
알랭 바디우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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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ic을 `산출적인`이라고 해놓고, forcing은 `촉성`이라고 해놨네요. 그럼 generic하고 식별불가능한 것의 관계는 어떻게 이야기하죠? 그리고 forcing이란 말, 집합의 원소들이 무슨 식물이인가요? `촉성`재배를 하게. 적어도 번역어만 가지고는 언어감각의 부재를 보여주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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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bi 2013-09-30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간을 서두르는 듯한 인상이네요. 저자의 핵심 용어들 번역을 보다 신중하고, 어느 정도 맞춰나가 줘야하는 부분이 필요할 듯 합니다. 출간을 늦추더라도 번역어를 손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바디우 국가/정체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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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6에서플라톤은 어떤 이유로 철학에 있어서 젊은이들에게 가장 많이 주어진 철학적 천성의 고유한 성질들이말하자면 몸의 성질에 대응되는 배우고기억하는 능력정신(영혼ame)의 용기 그리고 고귀함이(494b), <<그들이 경제(economie)와 상업(commerce)에 전념하는 시간으로부터 그들을 분리하는 중간 시기에>>, 젊음의 열정에 의해 부추겨져철학의 가장 높은 부분인 변증술(la dialectique)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별안간 그 요구가 사라지게 하는지에 대해 자문한다(498a). 달리 말해플라톤은 묻고 있는 것은 이런 것이다우리가 어떤 조건들 하에서 철학자로 남을 수 있는가그의 앞에 세워진 장애물들은 육중하다우선 사회적 압력은 젊은이에게 사회의 공리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행사하여 젊은이가 특정한 힘의 가치 상승이라는 이익에 그 재능을 사용하게 할 것이다말하자면,부모들과 시민들은 그의 미래적 힘에 찬사를 보낼 것이다. <<그가 그런 상황에 있는데무엇보다 그가 큰 도시에서 태어나고부유하며고귀한 집안 출신에매력적이며좋은 풍채를 갖추었다면 자네는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가그가 과도한 희망으로 가득해져그리스인들과 이방인들을 다스릴 능력이 있다고 스스로 상상하지 않겠는가그리고그에 더해자신을 높여공허하고 무분별한 자기도취와 오만으로 부풀어오르지 않겠는가?>>(494c)

 

플라톤은 여기에 소크라테스에게 불충실한 제자 알키비아데스의 초상을 새겨 넣는다그는 실제로 조상의 이름에 따른 가족을 통해 철학적 주체성의 소멸을 실행한다삼부작의 마지막이젊은이가 시작해야만 하며 그리고 종속되어야만 하는 작업이 결여되는데그가 자신의 지적 자산을 탕진하는 철학이라는 활동을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그럼에도만일 젊은이가 첫 번째 장애물에 맞서 저항한다면그 자신을 스승(matire)에게 의탁해야 할 것이다가족 그리고 조상과의 관계의 상궤를 벗어난 위치에서,스승은 젊은 철학 지원자 주위의 특정한 이해관심을 지닌 무리가 흡수할 수 없는 후원자의 기능을 점유한다스승은 공적인 장소에 관해 추구될 것이며 또한 단죄 받을 것이다. <<그렇지바로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누군가가 조용히 다가서서는 진실을 말해 주기를그에게는 지성이 필요한데도 그게 없고그걸 지니기 위해서 노예처럼 수고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면그래 그가 이 말을 선뜻 귀담아 들을 것으로 자네는 생각하는가? […] 하지만그가 천성이 훌륭해서 그리고 그런 말에는 친근한 터여서그걸 다소 알아듣고서는 뜻을 굽혀 철학으로 이끌린다면그의 용도와 동지적 관계를 잃게 될 것으로 생각하는 저들이 무슨 짓을 할 것이라 생각하는가그들은그가 설득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면그에 대해서 무슨 짓인들 그리고 무슨 말인들 하지 않을 것이 없을 것이며또한 그를 설득하는 사람에 대해서는그러지 못하도록 할 수 있기 위해서라면사적으로는 음모를 꾸미고공적으로는 송사를 일으키겠지?>>(494d 후반부 – 494e)

 

여기에서 사적인 삶(소크라테스에 대한 알키비아데스의 유혹)과 공적인 무대에서 스스로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자라고 말하는 스승의 배신이라는 올가미 가운데 사로잡혀 있는 알키비아데스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형상이 나타난다철학 스승의 도제-철학자에게서우리는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이라는 두 가지 고리를 재발견하는데그것은 철학을 변질시키는 압력을 최대로 집중시킨다결정적으로 진정한 철학의 욕망이 부서지고범인들과 야심가들이 철학에 뛰어들 것이다. <<왜냐하면 점유되지 않았지만,아름다운 이름들과 아름다운 장식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감옥에서 탈출하여 신전으로 도망하는 것처럼철학으로 가기 위해 자신들의 전문 기술들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네그들은 자신들의 자질구레한 기술에서 매우 능란한데도 말일세아무리 격하된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철학은 어쨌든다른 기술들에 관하여열등한 자질을 지닌 사람들의 무리와 기계적인 일의 실행으로 인해 정신(영혼ame)이 소진되고 변질되어 버렸으며 또한 동시에 몸이 변형된 자들이 추구하는 탁월한 품격을 보존한다네>>(495d-e). 철학에 대해 공공연히 드러난 관심의 회복은 가짜 스승의 형상을 생산하는 변질된 상황으로 귀결된다이 형상은 보충적인 간계들에 넘겨진 젊은이들을 거짓 희망으로 유혹함으로써 상황을 악화시켜 그들의 사적인 이해관심의 실현에 더욱 쉽게 이르도록 한다. <<그렇지이 교양을 쌓을 자격이 없는 영혼들은그럼에도 철학에 접근하여 정당하지 않은 교제를 하게 될 때우리가 이야기한 것에 따르자면어떤 사유와 어떤 의견을 낳겠는가그 진정한 이름을 말하자면궤변들(소피스트적 논변들)이 아니겠나결코 정당하지 않으며진정한 지혜의 일부라도 결코 포함하지 못하는 그런 것 말일세>>(496c).

 

소피스트적 형상은 절대로 진정한 현실성을 분유하지 않으며오히려 유일하게 젊은이들에 대한 보충적인 속임수로 기능하며은폐된 방식으로유혹의 장치를 완전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실재적인 철학자의 동일성에 이르기 위해서는소피스트적 입장에 대한 해명이즉 철학자의 장소와 자리에 들어가 유사물이라는 거짓 희망을 제시하는 상태에 있는 소피스트의 입장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는 것이 드러난다소피스트는 어떤 자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철학자는 어떤 자인가라는 질문에 대응시킬 수 있는 지형 위에 장소 지어질 수 있는 것으로 귀착되는데실제로 철학은 소피스트라는 이 특정한 타자를 자신의 장 내에 포용하며단지 페리클레스의 아테네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소피스트와 함께 섞여 있기 때문이다.   

 

소피스트는 철학자와 동일한 문제들(정의진리존재)을 다루며동일한 개념들(실체본질이념)을 사용하고철학자와 같이그는 동일한 세속성을 이용한다달리 말해서설명의 질서를 통해 그의 연설(proferation) 그의 전적인 명료함에 의해 떠받쳐진다소피스트적 논변과 스타일은 우리가 진정으로 어디에 그 둘 사이의 명백한 분리가 고정되는지를 보지 못하는 철학의 고유한 담론의 구체성을 만드는 어떤 것과의 매우 강력한 모방으로 들어간다그것이 바로 소피스트적 담론이 철학과 같은 장소로 올 수 있는 이유이며전자는 우리가 철학의 주체적 차원에 관여하는데 있어 필수불가결한(sine qua non)조건 하에서 후자로부터 분리된다그것은 고정시켜야 할 결정적인 지점인데실제로 만일 플라톤이 오늘날특히내 극단적인 의견으로는사람들이 고대와 현대의 소피스트적 담론의 재평가와 옹호에 일조하고 있으며소피스트적 조류가 철학의 흥미로운 조류로 연구되고 있는 오늘날(1989), 철학과 소피스트적 담론 사이의 경계를 그리기 위한 그의 노력들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말이다우리는 따라서 소피스트의 식별불가능성의 원리를 말할 수 있을 것인데왜냐하면 소피스트적 담론과 철학은 언제나 동일한 역사적 조건들 하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프로타고라스고르기아스프로디코스의 담론들은 플라톤적 담론들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연극수학 그리고 사적인 개인의 실존의 최소한의 강도를 가정한다또한위대한 근/현대적 소피스트 비트겐슈타인은 정신분석적인양자역학적인,수리논리적인 근/현대적 혁명들의 시대를 가정한다.

 

만일 주체로서의 철학자가 관계를 존재하는 것으로 사유하며철학하기의 역사적 조건들이 형성되는 그러한 종류로 사유한다면그 조건들은소피스트에게 있어우선 언제나 언어적인 가정즉 언어로서 등재된 가정 내에 있다소피스트는 언어와 언표를 통해즉 모든 사유의 문제가 언어의 문제로 제시되도록 하는정확하게 소피스트적인 것으로 확인될 수 있는 언표를 통해 굴절된 철학의 조건들에 의지한다철학과 소피스트적 담론 사이의 매듭(분절점, noeud)은 언어와 진리의 교차에즉 검증성(정확함, veridicite) – 언어 내에서 진리로부터 작동되는 어떤 것으로서의 검증성 – 과 진리(verite사이의 문제가 제기되는 지점에 할당할 수 있다소피스트는 진리의 문제 – 그가 회의주의로 인해 의견을 달리하는 어떤 것 – 에서 어떠한 자율성도 인식하지 않는다참되게 거리를 둔 판단들의 무-진리(la non verite)와 관련된 회의적 언표는 진리의 정의 하에 철학적 담론으로 정리된다위대한 회의론은 헤겔이정신 현상학le Phenomenologie de l’Esprit에서 그려내는 세계와 같이 비장한 철학이다철학자에게 있어중심적인 문제는 진리의 문제다소피스트에게 있어서진리는 실존하지 않으며오로지 언어를 통한 지배의 문제로 귀착되는 언표들이 있을 뿐이다.

 

BIS 34 페이지 도식에 대한 주석

 

절대적으로 우선적인 사유의 유형들은 중요한 외부적 범위에 관해 지시된다.

모든 상황은 그저 무한하기에(EE에서 주장된 테제), 정치적 사유는 무한한 책무가 상황들의 가능성들을 명명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개입의 관할 하에 있다.

감각적인 것 예술이 작업적 윤곽 내에 있는 것으로 사유하는 어떤 것이다.

과학은 문자의 힘에 관련한다.

사랑은 강화하는(강도화하는, intensifiante) 사유의 둘에 관련된다.

정치는 상황들의 무한함에 관련된다.

정치예술과학 그리고 사랑은 확실하게 진리의 유적인 절차들로 정의된다.

그에 반해과정들로 결정된 이 네 가지 조건들 하에 자리잡은 철학은 감산적인 입장 내에서 발견된다.

철학은 개입 없이 무한을 다룬다.

철학은 감각(sensibilite없이 감각적인 것(le sensible)을 다룬다.

철학은 수학소(matheme) 없이 문자를 다룬다.

철학은 대상 없이 사랑을 다루며둘의 강렬함(강도)의 체제에 있지 않다.

 

외부적인 원이라는 주변에서 결정된 무한감각적인 것문자들둘이라는 네 점들로부터 시작하여세심하게 분석되어 지적된 네 가지 특성들은큰 외부적 원 아래에서 지시된 언어의 매개로 들어가기에,수용적인 표면 위에 던져진다.

 

언어적 굴절을 통해 파악되기에,

상황의 무한은 언어 게임의 무한한 다수성을 생성한다무한한 수사적 개방성으로서의 언어 게임들의 무한성이라는 테제를 말이다.

감각적인 것은 언어에 그 자체로 이미지들로서의 감각적인 것을 윤곽지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수학소는 규칙적인 기호화를즉 규칙들의 우주를 제공한다.

(deux)은 모순으로 던져진다언어는 모순적인 두 항들을 분배한다.

 

모순규칙들이미지들언어 게임은 언어를 통해 제시될 수 있는 범주들로서소피스트적 담론의 수련에 필요한 조건들이 된다.

언어의 굴절을 통해 파악된 상황들의 무한성은 언어 게임에 의해 뒤섞인 무한성으로부터 다양한 순수성을 부여하며정치는 수사(rhetorique)를 그 본질로 한다.

언어의 매개를 통해 파악된 성의 둘은 그 자체로 감각적인 것을 윤곽지을 수 있는 언어의 능력일 것이며예술은 이미지의즉 미메시스(모방, mimesis)의 지배를 그 본질로 한다.

언어의 매개를 통해 파악된 수학소는 우주에 규칙을 제공한다문자는 규칙 이상으로서는 제시되지 않으며과학은 규칙들을 통해 기호화된 우주를 그 본질로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는 소피스트적 논변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는 소피스트적 논변의 예를 들어보자조건으로부터의 조건을 말이다.

 

a) 이미지들(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그림)

 

2.1. 우리는 우리에게 사실의 그림들을 형상화한다.

2.17. 그 그림이 현실과 공유하여 그것을 자체의 방식대로 – 정확하게 혹은 잘못 – 그려낼 수 있는 어떤 것은 그것의 형상화(모사, figuration)의 형식이다.

논리-철학 논고발리바르 번역(*프랑스어 판).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에서 사유의 연습이라는 유일한 표면(surface)으로 언어 내에서 제시될 수 있는 형상의 이념을 언명한다현실은 그림의 표면으로 들어가야만 하며그러한 그림의 투사(투영, projection)는 언어를 통한 현실과의즉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적 맥락을 통해 구상하게 될 지점과의소통 내에 있다.

 

b) 언어 게임 / 수사

 

언어 게임은 언제나 열린 그리고 전체화할 수 없는 언어 게임의 다양성을 통해즉 비트겐슈타인이 수학과 같은 것으로 나타내 보이고자 노력하는 어떤 것을 통해 구체화되는데왜냐하면 수학은 규칙에 의해 가장 [강력하게통제된 언어 게임이기 때문이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수학이라 명명하는 어떤 것 13 * 14 = 182라는 명제에 대한 수학적 이해가 계산 활동에 관해 우리가 받아들이는 특정한 입장과의 관계 내에 있다는 것이다또는 우리의 삶 안에서우리의 다른 활동들 내에서 … 그 계산을 하는 특정한 입장과의 [관계 내에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나타나는 어떤 것 내에 있는 언어 게임>>.수학의 토대에 관한 고찰들, 7단편 24.

 

<<내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수학이라 명명하는 어떤 것>>, 즉 언어의 표면(surface)에서 이름을 구하는 어떤 것이다수학 – 그것의 다양한 특정한 가능성들을 가지는 – 은 오로지 우리의 삶의 과정을 통해 파악된 입장들과 관계 내에서 사유될 수 있는 것인데예를 들어 우리의 다른 활동들에 관한 계산은,달리 말해오로지 순전한 언어 게임으로서만다른 모든 것을 본 뜬따라서 그것의 모든 일반적 입장이 언어 게임 그 자체의 엄격한 매개체 내에 기입된 언어 게임으로서만 사유될 수 있다

 

c) 규칙의 힘(force)

 

<<어떤 척도를 통해 우리는 언어의 기능을 설명할 수 있을까나는 언어를 지배하지 않는 사람이 언어를 지배할 수 있도록 훈련시킬 수 있다그것을 지배하는 사람에게나는 교육의 양식을 상기시킬 수 있거나 또는특정한 목적에서그에게 그 양식을 설명할 수 있으며따라서 그 전에 언어의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다어떤 척도를 통해 우리는 규칙의 기능을 설명할 수 있을까아직 아무것도 지배하지 않는 사람을 나는 오로지 가르칠 수 밖에 없다그러나 어떻게 나는 나 자신에게 규칙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는가난점은 토대까지 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우리가 눈앞에 둔 토대를 토대로 인식하는 것이다그 토대는 언제나 우리에게 증대된 휴지 없는 깊이를 반영하지만우리는 그러한 깊이를 추구하기에우리는 스스로를 필연적으로 과거의 층위에서 발견하게 된다우리의 질병그것은 설명하기 원하는 것이다당신이 그 규칙을 내면화할 때당신의 노정은 묘사된다>>(고찰들, 6, 31).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게임이라는 관습주의적이며 합의적인 이해를 선택한다유일하게 그리고 절대적으로어떠한 토대도 없이그것의 고유한 규칙에 따라 실행되는 게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다시 말해 규칙의 규정적 형식과 힘 자체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해를 말이다결국우리는 규칙의 입문 수업이라는 과정에 대해 기술하지 않을 수 없는데왜냐하면 규칙을 규정하는 과정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식이 언어에 내재적인 채로 유지되기 때문이다이러한 기술은 규칙의 문제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관계로 드러나며(모든 다른 기술은 철학적인 것이고따라서 우리가 그로부터 치유되어야만 할 질병이기에), 그 기술은 그 자체로 하나의 규칙이다이어서 규정적인 언어 게임에 따르며나에게 규칙의 규제적인 성격을 기술하는 규칙을 제공하는 그러한 규칙을 말이다우리는 언어의 표면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목격하며사유는 언어로부터 빠져나온 순환으로서 실행된다.

 

d) 모순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능력과 무능함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기 위한 모순에 관해 숙고한다그 자체로 규칙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서그 모순은 어떠한 철학적 정당성도 가지지 못한다존재론적으로나변증법적으로나우리는 규칙의 효과 아래 오로지 모순에 대해 걱정할 뿐이다.

 

<< … 우리는 심지어 프레게의 논리가 한 원시인에게 산술적인 명제들의 연역을 위한 도구로서 부여되었다고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그는 거기에 모순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 모순을 연역했으며그로부터 임의적으로 참 또는 거짓인 명제들이 나온다. <<지금까지 수호 천사는 이 길로부터 우리를 보호했>>으며그 외에 당신은 무엇을 바랄 것인가나는 사람들이수호 천사는 당신이 어떤 무엇을 하던 간에 언제나 필요하다고 말할 것으로 생각한다>>(고찰들, 6, 16).

 

여기에서원시인의 도입 – <<지금까지>> 수호 천사가 매우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 제공해왔던 모순의 식별이라는 규칙을 결여한 – 은 참과 거짓에 대한 식별 없이 무엇이든 연역할 것이다반면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철학은 다른 언어 게임들과 다를 바 없는그러나 순수한 무의미를 규칙으로 삼는 비일관적인 언어 게임이다. <<철학의 의미>>는 무의미에 사로잡힌 언어 게님이다철학의 수호 천사는 이상한 것을 치키는 천사인 것이다

 

소피스트와 철학자는 동일한 조건들 아래 그리고 동일한 결정들 내에 있다그러나 그들은 그들 각자가 언어 위에 지탱하는 테제에 대한 관계로부터 각각의 단독적인 입장에 선다철학자에게 있어언어는 철학의 조건이 아닌데왜냐하면 만일 언어가 모든 의미의 효과를 물질적 지지대로서 운반한다면그것은 언어 자체로부터 진리가 유도되지 않기 때문이다철학은 따라서 언어의 문제를 무력화시킬 것이며,이로부터 소피스트적 논변은 모든 명제를 굴절시키는 절대적인 필터를 만들어낸다철학은 언어를 통해 실존하지만 언어를 무력화시키는데왜냐하면 언어가 참과 거짓에 무관한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것은 진리들을 생산하는 – 따라서 참과 거짓에 무관하지 않은 입장에 있는 – 네 가지 조건들에 관련한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잠정적으로 무력화의 테제를 지지하면서철학은 우리에게 실제로 소피스트적 논변이 철학자에게 물려준 언어의 문제에 대한 그의 현실적인 관계를 지시하는 부정적인 관계에 따른 언어를 무력화시킨다동일한 사물의 경험에서 무엇이 언어의 철학자를 만드는가(훗설)? 언어는 도구가투명한 매질이 될 수 있는가플라톤은 언어의 문제를 다루는 대화편 크라틸로스에서 그에 관하여 철학에서 우리가 사물들을 말들로부터 떼어내는 테제를 정립한다소피스트는 언어의 편재라는 테제를 주장한다우리는 언제나 그를 언어 안에 있는 언어의 주인으로 재현할 수 있다그러나 철학자는 그의 무력화하는 그리고 도구적인 입장과 연결된 언어에 대한 당혹감에 사로잡혀 있는 주인이다그런데내가 전에 여러분에게 이야기 했듯이철학자는 소피스트가 바로 철학에 대한 언어적 모방을 통해 그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는 이상그가 소피스트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소피스트로부터 구분된다그들 간에는 무자비한 분쟁이 있는데왜냐하면 소피스트적 논변이 철학이 존재하기 위해 제거해야만 하는 그러한 세계의 지점을 구성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언어 내에 자리 한 분쟁이다프로이트의 정식을 돌려 말하자면, <<이 소피스트가 있는 곳에 철학자는 반드시 도래한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라도 좋은 것이며심지어 소피스트의 방법 마저 상관없다그러므로 우리는 언어가 분유되는 것으로 발견되는 그리고 철학자와 소피스트의 명백하게 비식별적인 성격 – 정확하게 그들 사이의 근본적인 적대에 의해 규정되는 – 이 위치한 적대의 축을 마주하게 된다오로지 철학자를 소피스트와 대립하게 하는 치명적인 불화만이 식별가능성을 허용하며 철학자가 본질적으로 구별적인 어떤 것을 제거하기 바라는 이 세계의 유일한 지점에 일어난다고 가정한다그런데이 가정은그것이 암시하는 분쟁이 유일하게 소피스트적 논변에 속한 영역에서 일어난다고 가정하지 않는 이상순수하게 형식적인 기준들에 따라 실행될 수 없다말하자면우리는 두 가지의 차별적인 언어 게임들 사이의 수사적 대결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따라서담론들 이외에말로 표현된 적대적 장면에서 내재적으로 읽을 수 없는 주체적 요소가 개입할 수 밖에 없으며그것은 바로 이어지는 요소즉 철학자와 소피스트가 동일한 것을 욕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것은 두 가지의 이질적인 사랑이다필로소피아(philosophia)지혜에 대한 사랑필로독사(philodoxa)의견의 기술들에 대한 사랑소피스트편의 마지막에서플라톤은 압축적이며 복잡한 정식으로 소피스트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따라서, (1) 모순되는 말을 하는 기술을 지니고, (2) 교묘한 형식 하에, (3) 의견의 모방적 기술로, (4) 전적으로 모방하는 자, (5) 외양과 관련된 부분에 있으며, (6) 그 자신이 모상(시뮬라크르)을 만드는 기술에서 나와자신의 부분을 위해 (7) 구어적 일부를 (8) 눈속임으로, (9) 신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으로, (10) 그러한 생산을 보존하는 자우리가 진정한 소피스트에 대해 <<거기에 그 가계가 있고거기에 그 혈통이 있다>>(일리아드, 6, 211)고 단언할 때내가 보기에우리는 분명히 전적으로 참된 것을 말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뱅(Robin) 번역판번역자에 의해 결정된 소피스트의 열 가지 요소들.

 

바디우에 의해 주어진 번역: <<의견의 기술을 지닌 아이러니한 부분에 의지하여 모순적 담론을 제작하는 그 모방담론의 위신을 창조하는 행위에 있어 신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부분그리고 시뮬라크르의 종류를 통해이미지들을 생산하는 기술에 속한 부분바로 여기에 우리가 진정한 소피스트의<<일족과 혈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소피스트는 수사학 교사로서의 정치가다.

소피스트는 목적 없는 이미지들을 생산하는 시인이다.

소피스트는 [과학을규칙의 전횡으로 환원하는 과학자즉 도착적인 논리학자다.

소피스트는 모순의 언어적 난관 안에서 둘을 전복시키는 애인이며그에게 있어 사랑은 논쟁이다.

소피스트적 욕망은 의견의 기술을 조직하기를 원한다(사랑한다, aime). 그가 바라는(aime) 것은 우리가 그의 의견을 사랑하는 것즉 언어 안에서 가용한 고갈시킬 수 없는 의미를 사랑하는 것이다의미와 의견들에 대한 사랑(필로독사[philodoxa])은 상반되는 동시에 같은 사안에 대해 진리와 지혜의 사랑을 가진다(필로소피아[philosophia]).

주체적 긴장이라는 폭력적인 요소 – 철학자를 소피스트로부터 식별할 수 있게 하는 – 는 진리의 절차들의 실효성과 의미에 의해 일반화된 해석 사이의 대립이라는 표지 아래 언어를 관건으로 삼는다철학은 진리들의 효과적인 성격을 소피스트가 행하는 의미의 보편적 해석에 대립시킨다.

 

우리는 이 긴 우회 끝에이제 국가/정체 6496 bc을 참조하게 된다.(박종현 번역판 참조강의록에 맞춰 약간 변경함.) 바로 소피스트들이다시 말해 의견의 해석자들이 모습을 드러내는그러나 거기에서 참의 효과적인 절차들로부터 검증된 지성을 위해 투쟁하는 자들 또한 머무르는 지점을 말이다여기에서 플라톤은 그의 원숙기에 이런 종류의 투쟁자들이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을 요구하는가?

 

<<매우 빈약하게 그럴 거야아데이만토스그러니까 철학과 적절하게 교류할 수 있는 몇 사람만이 남게 되겠지아마도 고귀하고 훌륭하게 양육된 성격의 소유자가 망명으로 인해서 남게 된 터에그를 파멸시키는 자들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성향에 따라 철학에 머물게 되거나또는 위대한 혼을 지닌 자가 작은 나라에 태어나 국사를 경시하여 깔보게 되는 경우에 그렇겠지또한 어쩌면 훌륭한 성향을 지니고 있어 의당 다른 분야의 기술을 경시한 나머지 이에서 철학으로 옮겨가는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고.>>

 

망명에 나서가나변변치 않은 나라에 속하거나불안정한 건강 상태에 있거나다른 것을 하나가 결국 뒤늦게 철학으로 옮겨가는 것여기에 다이몬의 징후(영적인 징후, signe demonique)에 의해 드러난다는다시 말해 부정적인 명령에 의해 떠밀린다는 사실을 더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의 동료인 테아게스의 고삐가 제어할 수도 있겠지테아게스의 경우 철학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기엔 다른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지만신병의 조리가 그로 하여금 정치를 하지 못하고 주저앉게 만들었기 때문이야하지만 내 경우즉 다이몬의 징후는 언급할 것이 못 된다네왜냐하면 지나간 사람들 중에 다른 그런 예를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서.>> 플라톤은 여기에서 퇴각의탈선의 조건들을 전달하며요컨대 철학자의 실존적 결단을 상궤를 벗어나는 방식으로 규정한다이 조건들은 감산적인 조건들이며진리에 가 닿은 젊은이들의 열정에 대한 충실성의 조건들이다무르익은 시기에 철학자로 남아일반화된 소피스트적 논변을 회피할 자는 왜곡되고 감산적인 조건들을 통해 젊은이들의 격정에 충실한 채로 남아있을 능력이 있는 자일 것이다다시 말해자유로운 무책임으로부터 활기를 얻는 자는 진리의 무한에 이르는그리고이 움직임의 추상적 진폭 안에서가족적 이익과 국가의 유한한 고리를 무릅쓰고철학이 그것의 지속의 실존 가운데 가능한 정체가 되도록 할 것이다.

 

우리가 얻은 지식을 요약해보자.

철학은 여섯 가지 다른 지위에 대한 결정의 집합이다.

네 가지 조건들과학예술정치사랑

철학의 네 가지 조건들은 진리의 절차들이며다시 말해 진리의 역사적 형상들이다철학이 펼쳐지기 위해 이러한 다양한 참된 것의 체제들에 대한 효과적인 생산이 있어야만 했다그런 일이 그리스에서 첫 번째로 일어났고거기에서 이 네 가지 조건들이 철학에 의해 공존하능하게 되었다.

이 네 가지 조건들은 존재의 사유(도식 외부에 있는 원)에 뿌리내린 무한(상황들), 감각적인 것문자들(수학소), (양성[sexes])이라는그리고 이 절차들이 분배되는 것들에 관한 사건적 규정에 호소한다따라서예를 들어사랑은 종합 없는 그리고 비-변증법적인 순수한 둘의 형상이 발생하게 한다.

하나의 원소(요소): 언어. 비록 언어는 철학의 조건들이 아니지만그럼에도 언어는 규정적인 성격이 아니라 물질적인 성격을 지닌 원소적 결정으로 남는다말하자면철학은 이 원소 내에서 펼쳐지게 된다.

다른 원소소피스트철학에는 그것과 전적으로 다른 형상이 대응한다철학에 대한 모방을 통해 성립하는 소피스트적 논변이 말이다철학과 동일한 사안에 그리고 동일한 규정들에 자리하여소피스트적 논변은 그 단독적인 이타성의 입장을 재현하며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동일한 규정들을 여과한다.따라서감각적인 것의 투사로서의 그림의 이미지무한의 투사로서의 수사법문자의 힘의 투사로서의 규칙의 힘둘의 투사로서의 모순이 귀결된다.

이를 축으로 하는 언표는 다음과 같다소피스트에게 있어모든 사유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로 환원된다철학자에게 있어모든 진정한 사유의 문제는 저항하는 것즉 그 문제는 언어의 문제로 귀착되거나 환원되지 않도록 저항하는 것이다사유에는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어떤 것도 없다철학은 잔여의 테제를 지지한다.

소피스트적 논변에 있어잔여는 반드시 치료법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병든 사유의 징후로서 나타나는 망상적인 생산물이다.

철학과 소피스트적 논변 사이의 분리라는 문제는 전적으로 언어의 문제 위에 설정된다잔여가 있다는 것이 참이라면 언어에 대한 사유의 관계는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까?

이 분리의 관건은 바로 언어와 관련한 사유의 빼내기를 둘러싸고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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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 올라온 글이다. 

 

http://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21221132213

 

베터니 휴즈라는 저자의 <아테네의 변명>(원제: The Hemlock Cup - Socrates, Athens, and the Search for the Good Life )이라는 제목의 책에 대한 서평인데... 그냥 넘어갈 수 없어서 그냥 몇 마디 적어본다. 

 

서평자가 옮긴 책의 내용으로 보자면, 이 책은 "번역판 제목에서 시사하듯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아 '독배'를 마셔야 했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다룬 책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차용한 것이지만 그것만 다룬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전부터 아테네 역사를 살피면서 그의 사형 배경과 민주주의의 의미 등 묵직한 주제를 흥미롭게 다뤘다."

 

서평자에 따를 때, 이 BBC 다큐멘터리 제작을 지휘한 역사학자가 저술한 책은 역사 이상의 생생함을 전달하기도 한다. 기원전 399년 5월 소크라테스가 헴록 혹은 독미나리에서 뽑은 독액을 마시기 위해 감옥을 나설 때 보았을 아테네의 풍경, 세세하게 묘사된 매우 공정한 아테네의 배심원 뽑기 과정, 소크라테스의 고발인들의 기소장에 들어있던 불경죄라는 심각한 범죄로 인해 500인이나 되는 배심원들이 나서야 했던 정황 등이 묘사된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재판 과정에서 배심원들을 상대로 보였던 오만한 태도라던가, 애제자 알키비아데스의 시켈리아 원정 실패 및 스파르타에 대한 투항, 당시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패한 아테네는 여기저기서 사람들에게 끈덕지게 질문을 해대는 등애 같은 인물이 아니라 영웅을 필요로 했다는 정황  등, 소크라테스에게는 전혀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었다는 이야기나, 특히 데몬(daimon)이라는 자기 내부의 목소리에 대한 발언 역시 다신교 사회였던 아테네에서는 넘길 수 없는 범죄로 비춰졌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결론은 "아테네 군중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들이 고상한 말로 군중의 의지를 꺾을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군중이, 법정이, 전능한 민주주의가 누군가를 제거하고 싶다면 진실이 그들 편이든 아니든, 그들에게는 그럴 힘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서평자는 이 결론에 민주정체 혹은 민주주의라는 것의 한계에 대한 성찰을 결부시키고 있다.

 

그런데 어딘가 석연치 않다. 책의 원제에 달린 부제, '소크라테스, 아테네, 그리고 좋은 삶에 대한 탐색'이라는 문구는 왠지 아테네가 소크라테스를 죽일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 하고는 뭔가 거리가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 책에 대한 서평 기사를 찾아봤다. 몇 가지 읽어 본 결과 뉴욕 타임즈에 실린 서평 기사가 가장 책 내용을 충실하게 정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http://www.nytimes.com/2011/02/20/books/review/Isaacson-t.html?pagewanted=all

 

사실 내용 정리만 보자면 별 차이가 없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어딘가 방향이 다르다. 뉴욕 타임즈의 서평은 프레시안 기사를 쓴 서평자의 논조와는 달리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에 대한 이야기들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다. 특히 저자 본인의 옥의 티라고 할 수 있는 책 자체의 문제점들에 대해서...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가 <변명>의 마지막에서 했던 말의 번역에 대한 지적 등. 

 

그래서 더 책을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서평자의 의도가 그런 것이었다면 나름 성공을 거둔 셈이 될지도 모르겠다), 왠지 이 프레시안에 실린 서평은 출판사가 잡은 제목 <아테네의 변명>이라는 문구에 붙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 본인은 정작 소크라테스의 삶 자체 - 플라톤이 그려낸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소위 역사적 소크라테스, 역사적 예수 논쟁에서 말하는 같은 의미에서 - 를 그리고 싶었을 뿐인데(특히 그의 죽음을 중심에 두고), 왠지 프레시안 서평자의 글의 결론이 글자 그대로 <아테네의 변명>, 즉 소크라테스를 죽인 이유에 대한 아테네의 변명처럼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도 민주주의의 선택이니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발언이라는 그런 방식의 해석 말이다. 


책을 전문적으로 읽는 사람 마저 이렇게 당할 수 있다면...(물론 그게 의도한 바였을 수도 있다.) 이거야 말로 심각한 번역 오류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물론 책을 다 읽어 보기 전에는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겠지만...) 책 제목 하나 이상하게 잡아 놓은 것 때문에 저자의 의도가 완전히 이상한 방향으로 읽을 수 있다면 말이다. 물론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는 자유다. 하지만 책의 기획 과정에서 어떤 의도되었던 의도되지 않았던 오류가 있었고, 그로 인한 묵과할 수 없는 오독이 있다면... 글쎄 이것도 그냥 취향의 문제로 치부하고 넘어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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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아 : 돈과 마음의 전쟁
우석훈 지음 / 김영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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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자체에 대해 이야기 하기 보다는(예를 들어 줄거리를 이야기 한다던가 하는 방식으로) 이 책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몇 가지를 짚어보도록 하자. 특히 판타지적 장르의 측면에서, 모피아라는 제목에서, 경제학자와 철학자에 대해서, 그리고 정치와 경제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들을 말이다.

1. 대중적 판타지라는 장르

이 소설은 판타지다. 대선이 다가오는 시점에 나온 일종의 경제 판타지. 심지어 그 전개 자체도 마치 무협지를 보는 듯 하다. 마치 고인(高人)을 만나 공력이 증가하고(김수진과의 만남, 사랑, 도움), 어떤 기연(奇緣)에 의해 어떤 위치에 오르는(이현도에 의해 청와대 경제보좌관이 되는 오지환),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고 그 고난을 이겨내는 주인공의 삶의 궤적을 그려내는 이야기. 

저자 역시 이 소설이 판타지라는 점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저자 서문). 저자 자신이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정권이 바뀌어도 결코 바뀌지 않았던 권력에 대한 날선 비판을 제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런 방식을 통해서라도 사회의 앞을 향한 운동을 꿈꾼다는 것은 나름 긍정할 부분이다.(조선 시대에도 이런 판타지소설들이 등장했으며, 김만중의 사씨남정기나, 허균의 홍길동전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당연히 이 판타지 장르라는 지적은 그저 이 소설에 대한 폄훼만은 되지 않는다. 바로 그러한 판타지이기에 소설의 흥미는 높아지고, 이 독서의 과정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소설의 설정은 이렇다. 야당에 의해 새롭게 드러선 민주 정권은 경제 개혁 혹은 경제 민주화를 계획한다. 하지만 이전 정권들을 통제했던 경제 관료 출신의 인사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국가의 환율을 뒤흔들겠다는 위협을 가한다. 말하자면 국가 채권과 거의 같은 신용도의 공기업 채권들을 투매해서, 국가 채권의 신용도를 흔들고, 이를 통해 원 환율을 흔들겠다는 위협을 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은행 출신의 경제학자 오지환은 이러한 기도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오늘날 우리가 모피아라고 부르는 자들과 대결하기 위해서.

2. 모피아

모피아라 불리는 관료들, 국가 경제의 방향을 좌지우지 하는 자들, 과거 재정 및 경제 관련 엄무를 담당하던 부처 공무원들, 이 사람들이 자신들과 자신들이 담당하는 업무에서 이익을 볼 수 있는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작태를 부릴 때, 우리는 그들을 모피아라고 부른다.(MOFIA는 Ministry of Finance의 약자인 MOF와 마피아의 합성어.) 

하지만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그들은 무엇보다 우선 경제학자들, 즉 소위 세속 철학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경제학자들, 시장과 돈의 흐름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과 철학. 무언가 말이 되지 않는 듯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전혀 맥락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경제학자들, 특히 우리 나라에서 주류라고 불리는 영미권 경제학의 경우, 계보를 따라서 올라가다 보면 '효용(utility)'라는 개념을 앞세워 철학, 특히 윤리학을 구성하고자 했던 공리주의자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에게 '효용'이란 어떤 행위의 결과로 발생하는 쾌락의 양을 따질 때,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더 많은 쾌락을 만들어 내는 것과 관련된 용어였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이라는 오늘날 경제학의 고전이라 회자되는 책 이외에, 전혀 이 책과는 연결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도덕감정론>이라는 책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이 두 책을 연결지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쾌락의 총량을 따지기 위해 등장했던 효용이라는 개념이었다. 

경제학은 어떤 의미에서 이런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버리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효용이라는 개념을 윤리나 도덕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규정하는 방식으로 탄생한 학문이다. 이제 경제학자들에게 효용이라는 말은 그저 재화 또는 이익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3. 경제학과 철학의 관계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여전히 철학자로 불린다. 유명한 로버트 하일 브로너의 <세속의 철학자들: 위대한 경제사상가들의 생애, 시대와 아이디어>라는 책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세계의 구조, 운동 원리, 변전에 대해, 그 근본에 대해 탐구하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철학 이야기가 나왔으니 플라톤이 쓴 대화편들에 대해 이야기 해보기로 하자. 적어도 그야 말로 철학자들의 시조라 할 수 있으니 이 세속 철학자가 살아있을 당시에 있었던 풍조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섰던 재판정에 대해서 말이다. 

플라톤 생전의 아테네는 소피스트적 가치에 사로잡혀 있는 사회였다. 말하자면 교육을 통한 능력 향상과 이에 의한 입신양명이라는 가치에 말이다. 그들은 같은 사안을 두고도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그것도 아주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는 교육자들이었다. 언제나 지록위마(指鹿爲馬) 할 자세가 되어있는, 말하자면 언제나 자신의 원칙을 바꿀 수 있는 그들에게도 하나의 불변의 원칙은 있었다. 바로 자신의 안위와 이익이라는 원칙 말이다. 

당연히 사회 내에서 소피스트들은 지탄의 대상이었다. 정치가들은 소피스트들의 교육, 자신의 이익을 위한 교육에 대해 비판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가 소피스트들로부터 배운 혹은 적어도 소피스트들과 같은 계열의 웅변술로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교육의 경향은 시에, 특히 호메로스의 서사시들에 기초한 것이었다. 뭉뚱그려 말해서, 그 사회 자체가 하나의 소피스트적 교육의 장이었고, 바로 그 안에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델피의 신전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신탁을 받았던 사람, 그러나 이러한 소피스트적 교육의 장에서 통용되는 말에는 전혀 익숙하지 않았던 사람, 일종의 외국인으로서의 소크라테스가 말이다. 철학은 이런 방식으로, 자기의 이익을 위하는 자들과의 대결을 통해 탄생했다.

그렇다면 경제학의 경우에는 어떨까? 이 세속 철학자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일견 철학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버린 듯 보이는 학문은? 이 <모피아>라는 책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질문이다. 이 경제학자 대 경제학자의 대결을 그린, 모든 사람들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경제학자와 자신의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소수의 무리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경제학자 간의 투쟁을 그린 허구 속에서 끌어낼 수 있는 질문. 왜 이런 질문을 해야 하는가? 오늘날에도 경제학적 수치와 이론들로 무장하고 곡학아세(曲學阿世) 하는 무리들이 넘쳐나고 있고*, 그 뒤에는 이들의 궤변적 변설로 엄청난 이익을 보는 몇몇 소수의 사람들(재벌과 이들에게 기생하는 정치권)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비록 좀 지나치게 대결구도를 끌고 간 면이 없지는 않으나, 오히려 그런 방식으로 선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 있다는 말이다.
[* 예를 들어, 레이거노믹스를 이론적으로 뒷받침 했던 데마고그들의 공급측면 경제(Supply side economics). 부시 정권 역시 이 경제 이론에 기반하여 감세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거의 수명을 다한 현 정권과 그 정권과 공생했으나 그 수명이 다한 지금은 그 정권을 교체하겠다는 궤변을 풀어내고 있는 여당 대선 후보의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운다)'라는 슬로건을 기반하고 있는 이론이기도 하다. 쉽게 말하자면, 세금을 줄이면 대기업 및 재벌에게 투자 여유분이 생겨서 투자를 많이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세수와 일자리가 더 많이 생긴다는 이야기인데,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미국에서 부시 정권 8년,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거짓말이었다는 것이 증명된 궤변일 뿐이다.] 

4. 정치와 경제의 관계

기실 별 생각 없이 정치와 경제라는 주제를 보게 되면 둘을 연관시켜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경제학자들은 모두의 이익을 혹은 효용을 생각할 것인지 아니면 몇몇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그들로부터 얻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복무할 것인지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둘로 갈리게 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경제학자들이 국가의 경제정책을 운영하는데 있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게 된다. 

특히 수출 지향적 경제 정책으로 일관했던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 정책을 담당했던 당사자들의 지향점은 분명했다. 바로 수출 대기업들과 재벌이라 불리는 자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 경기부양이라는 미명 하에 대규모 토건 사업을 담당했던 토건족 및 건설 관련 관료들의 이익이라는 지향점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앞에서 경제학에 대해 물었던 질문 이외에 하나의 추가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현행적인 경제 운영 방식으로부터 듣게 되는,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탐욕을 부추기는 궤변을 그대로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이를 전환하여 다른 방향으로 - 물론 그 길은 여렵고 힘든 것인데, 지금까지 가 본적이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 가기 위한 선택을 할 것인가?

그레이터 풀(더 큰 바보, greater fool)이라는 말이 있다. 금융 경제 쪽에서 쓰는 말인 이 말은 유가증권 시장에서 비싸게 사서(buy long) 싸게 파는(sell short), 다시 말해 손해보는 거래를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시장에서 모두의 지향점은 바로 이 그레이터 풀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 용어의 용법을 한정된 영역에 가두지 말고, 밖으로 열게 되면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자신의 더 큰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익을 공유하는 방향을 취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레이터 풀이라는 말을 듣게 될 사람들이 할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조금만 마음을 바꾸면 언제든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경제학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투표권을 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대중적 금융 판타지를 통해 궁극적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바로 그런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의 탐욕을 이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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