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피아 : 돈과 마음의 전쟁
우석훈 지음 / 김영사 / 2012년 11월
평점 :
책 자체에 대해 이야기 하기 보다는(예를 들어 줄거리를 이야기 한다던가 하는 방식으로) 이 책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몇 가지를 짚어보도록 하자. 특히 판타지적 장르의 측면에서, 모피아라는 제목에서, 경제학자와 철학자에 대해서, 그리고 정치와 경제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들을 말이다.
1. 대중적 판타지라는 장르
이 소설은 판타지다. 대선이 다가오는 시점에 나온 일종의 경제 판타지. 심지어 그 전개 자체도 마치 무협지를 보는 듯 하다. 마치 고인(高人)을 만나 공력이 증가하고(김수진과의 만남, 사랑, 도움), 어떤 기연(奇緣)에 의해 어떤 위치에 오르는(이현도에 의해 청와대 경제보좌관이 되는 오지환),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고 그 고난을 이겨내는 주인공의 삶의 궤적을 그려내는 이야기.
저자 역시 이 소설이 판타지라는 점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저자 서문). 저자 자신이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정권이 바뀌어도 결코 바뀌지 않았던 권력에 대한 날선 비판을 제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런 방식을 통해서라도 사회의 앞을 향한 운동을 꿈꾼다는 것은 나름 긍정할 부분이다.(조선 시대에도 이런 판타지소설들이 등장했으며, 김만중의 사씨남정기나, 허균의 홍길동전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당연히 이 판타지 장르라는 지적은 그저 이 소설에 대한 폄훼만은 되지 않는다. 바로 그러한 판타지이기에 소설의 흥미는 높아지고, 이 독서의 과정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소설의 설정은 이렇다. 야당에 의해 새롭게 드러선 민주 정권은 경제 개혁 혹은 경제 민주화를 계획한다. 하지만 이전 정권들을 통제했던 경제 관료 출신의 인사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국가의 환율을 뒤흔들겠다는 위협을 가한다. 말하자면 국가 채권과 거의 같은 신용도의 공기업 채권들을 투매해서, 국가 채권의 신용도를 흔들고, 이를 통해 원 환율을 흔들겠다는 위협을 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은행 출신의 경제학자 오지환은 이러한 기도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오늘날 우리가 모피아라고 부르는 자들과 대결하기 위해서.
2. 모피아
모피아라 불리는 관료들, 국가 경제의 방향을 좌지우지 하는 자들, 과거 재정 및 경제 관련 엄무를 담당하던 부처 공무원들, 이 사람들이 자신들과 자신들이 담당하는 업무에서 이익을 볼 수 있는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작태를 부릴 때, 우리는 그들을 모피아라고 부른다.(MOFIA는 Ministry of Finance의 약자인 MOF와 마피아의 합성어.)
하지만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그들은 무엇보다 우선 경제학자들, 즉 소위 세속 철학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경제학자들, 시장과 돈의 흐름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과 철학. 무언가 말이 되지 않는 듯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전혀 맥락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경제학자들, 특히 우리 나라에서 주류라고 불리는 영미권 경제학의 경우, 계보를 따라서 올라가다 보면 '효용(utility)'라는 개념을 앞세워 철학, 특히 윤리학을 구성하고자 했던 공리주의자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에게 '효용'이란 어떤 행위의 결과로 발생하는 쾌락의 양을 따질 때,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더 많은 쾌락을 만들어 내는 것과 관련된 용어였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이라는 오늘날 경제학의 고전이라 회자되는 책 이외에, 전혀 이 책과는 연결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도덕감정론>이라는 책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이 두 책을 연결지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쾌락의 총량을 따지기 위해 등장했던 효용이라는 개념이었다.
경제학은 어떤 의미에서 이런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버리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효용이라는 개념을 윤리나 도덕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규정하는 방식으로 탄생한 학문이다. 이제 경제학자들에게 효용이라는 말은 그저 재화 또는 이익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3. 경제학과 철학의 관계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여전히 철학자로 불린다. 유명한 로버트 하일 브로너의 <세속의 철학자들: 위대한 경제사상가들의 생애, 시대와 아이디어>라는 책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세계의 구조, 운동 원리, 변전에 대해, 그 근본에 대해 탐구하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철학 이야기가 나왔으니 플라톤이 쓴 대화편들에 대해 이야기 해보기로 하자. 적어도 그야 말로 철학자들의 시조라 할 수 있으니 이 세속 철학자가 살아있을 당시에 있었던 풍조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섰던 재판정에 대해서 말이다.
플라톤 생전의 아테네는 소피스트적 가치에 사로잡혀 있는 사회였다. 말하자면 교육을 통한 능력 향상과 이에 의한 입신양명이라는 가치에 말이다. 그들은 같은 사안을 두고도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그것도 아주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는 교육자들이었다. 언제나 지록위마(指鹿爲馬) 할 자세가 되어있는, 말하자면 언제나 자신의 원칙을 바꿀 수 있는 그들에게도 하나의 불변의 원칙은 있었다. 바로 자신의 안위와 이익이라는 원칙 말이다.
당연히 사회 내에서 소피스트들은 지탄의 대상이었다. 정치가들은 소피스트들의 교육, 자신의 이익을 위한 교육에 대해 비판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가 소피스트들로부터 배운 혹은 적어도 소피스트들과 같은 계열의 웅변술로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교육의 경향은 시에, 특히 호메로스의 서사시들에 기초한 것이었다. 뭉뚱그려 말해서, 그 사회 자체가 하나의 소피스트적 교육의 장이었고, 바로 그 안에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델피의 신전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신탁을 받았던 사람, 그러나 이러한 소피스트적 교육의 장에서 통용되는 말에는 전혀 익숙하지 않았던 사람, 일종의 외국인으로서의 소크라테스가 말이다. 철학은 이런 방식으로, 자기의 이익을 위하는 자들과의 대결을 통해 탄생했다.
그렇다면 경제학의 경우에는 어떨까? 이 세속 철학자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일견 철학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버린 듯 보이는 학문은? 이 <모피아>라는 책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질문이다. 이 경제학자 대 경제학자의 대결을 그린, 모든 사람들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경제학자와 자신의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소수의 무리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경제학자 간의 투쟁을 그린 허구 속에서 끌어낼 수 있는 질문. 왜 이런 질문을 해야 하는가? 오늘날에도 경제학적 수치와 이론들로 무장하고 곡학아세(曲學阿世) 하는 무리들이 넘쳐나고 있고*, 그 뒤에는 이들의 궤변적 변설로 엄청난 이익을 보는 몇몇 소수의 사람들(재벌과 이들에게 기생하는 정치권)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비록 좀 지나치게 대결구도를 끌고 간 면이 없지는 않으나, 오히려 그런 방식으로 선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 있다는 말이다.
[* 예를 들어, 레이거노믹스를 이론적으로 뒷받침 했던 데마고그들의 공급측면 경제(Supply side economics). 부시 정권 역시 이 경제 이론에 기반하여 감세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거의 수명을 다한 현 정권과 그 정권과 공생했으나 그 수명이 다한 지금은 그 정권을 교체하겠다는 궤변을 풀어내고 있는 여당 대선 후보의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운다)'라는 슬로건을 기반하고 있는 이론이기도 하다. 쉽게 말하자면, 세금을 줄이면 대기업 및 재벌에게 투자 여유분이 생겨서 투자를 많이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세수와 일자리가 더 많이 생긴다는 이야기인데,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미국에서 부시 정권 8년,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거짓말이었다는 것이 증명된 궤변일 뿐이다.]
4. 정치와 경제의 관계
기실 별 생각 없이 정치와 경제라는 주제를 보게 되면 둘을 연관시켜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경제학자들은 모두의 이익을 혹은 효용을 생각할 것인지 아니면 몇몇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그들로부터 얻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복무할 것인지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둘로 갈리게 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경제학자들이 국가의 경제정책을 운영하는데 있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게 된다.
특히 수출 지향적 경제 정책으로 일관했던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 정책을 담당했던 당사자들의 지향점은 분명했다. 바로 수출 대기업들과 재벌이라 불리는 자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 경기부양이라는 미명 하에 대규모 토건 사업을 담당했던 토건족 및 건설 관련 관료들의 이익이라는 지향점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앞에서 경제학에 대해 물었던 질문 이외에 하나의 추가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현행적인 경제 운영 방식으로부터 듣게 되는,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탐욕을 부추기는 궤변을 그대로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이를 전환하여 다른 방향으로 - 물론 그 길은 여렵고 힘든 것인데, 지금까지 가 본적이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 가기 위한 선택을 할 것인가?
그레이터 풀(더 큰 바보, greater fool)이라는 말이 있다. 금융 경제 쪽에서 쓰는 말인 이 말은 유가증권 시장에서 비싸게 사서(buy long) 싸게 파는(sell short), 다시 말해 손해보는 거래를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시장에서 모두의 지향점은 바로 이 그레이터 풀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 용어의 용법을 한정된 영역에 가두지 말고, 밖으로 열게 되면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자신의 더 큰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익을 공유하는 방향을 취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레이터 풀이라는 말을 듣게 될 사람들이 할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조금만 마음을 바꾸면 언제든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경제학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투표권을 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대중적 금융 판타지를 통해 궁극적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바로 그런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의 탐욕을 이길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