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플라톤 <국가> 강의, 6

 

 

 

우리는 철학자의 주체적 개입과 이 개입의 언어와의 관계가 철학자를 그의 타자로서의 소피스트로부터 구별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이 관계는 이제 진리의 문제로 열리며진리는 철학의 조건들의 문제와 철학자의 타자라는 문제에 대한 철학자의 이중적 관계를 지시한다.

 

 

 

바로 이어서 이런 역설에 주목하도록 하자진리라는 말은 철학의 조건들로부터 단수적인/복수적인 대립을 통해 기능한다는 역설에 말이다실제로철학의 조건들즉 진리의 절차들은 철학을 공가능하게 만드는 진리를 생산하지만철학은 진리를 생산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철학적 진리에 대해 말할 것이다한편으로는 그렇지만(우리는 이를 다시 고찰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진리라는 말은 의견이라는 말에 대한 대립을 통해 파악될 것이다의미와 진리 사이의 대립은 철학자에게 주요한 대립으로 드러날 것이며철학자는 의미와 진리를 보존하는 관계들에 관한 분리적 가설을 만들어 진리를 의미에 대한 돌파를 위한 단독성으로 제시한다오늘날철학 한다는 것은 무한하게 의미를 생산하는 해석학의 편재에 대항하는 싸움이다.

 

 

 

우리는 앞서 각자가 철학자소피스트 혹은 누구이건 자신의 의견을 가진다는 점에 대해 언급했다의견은 유통되는 것의 체제에 따라 기능한다우리는 우물의 깊이를 재는 것처럼 의견을 재어본다그러나 철학자에게 있어소피스트라는 철학의 모방자는 의견에 대한 사랑을 조직한다이러한 진리와 의견 사이의 철학적 분유에서소피스트는 순전히 의견의 편에만 서지 않는데왜냐하면 그가 의견을 조직하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아이러니한 관계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플라톤이 소피스트적 논법에 대해 <<의견에 대해 부분적으로 아이러니한 그 기술>>이라는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오로지소피스트는 끊임 없이 의견에 대한 사랑(philo-doxa)를 유지하는 언어의 체제를 만들어내고 이를 완전하게 다듬는다철학자 자신은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 즉 예지 혹은 진리를 유지하며이 때문에 그의 과제를 더욱 어렵게는 아닐망정 최소한 더욱 위험한 것으로 만든다다시 말해서주체성의 결정즉 그들 각자의 욕망이 드러내는 철저한 차이는 그들의 각자의 담론을 구속한다그들 각자의 담론을 판별하는 것은 그러한 결정이며 텍스트들이 아니다.  

 

 

 

따라서진리(네 가지 유적인 절차)이 있다는 조건 아래 철학자는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며이에 반해 소피스트들은 언어의 표면 위에 의견에 대한 사랑을 조직한다무엇이 이러한 사유에 있어 근본적인 문제의 주체적 형상이 될 것인가그것은 사유가 여전히 결정되지 않은 연령에 있는 형상으로서의 젊은이들(jeunesse)이들의 사유는 타락과 관계될 것이다플라톤의 첫 번째 대화편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편에서 보자면 극도의 폭력에 의해 점철된 분유의 장면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잘 살펴야만 한다이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의 담론에 대한 논증이라는 관점에서 식별불가능하다이를테면누가 소피스트이고누가 철학자인가그것은 말하기 매우 어려운 사안이다물론이런 것은 사실이다소피스트와 철학자 양자 모두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기 원하지만이것은 두 가지 상반된 타락이라는 점 말이다. 소피스트의 고정된 목표는 철학자의 목표가 그렇듯 젊은 세대에 적합한 만족스럽고 매력적인 비결정으로부터 유래하는 사유의 비결정을 끝장내는 것이며이것이 바로 타락이라는 말의 의미인 것이다본질적으로이러한 젊은이들의 형상은 그러한 사유의 무책임에 따른다사유의 비결정이 모든 정해진 사실에 직면하는 전적인 과단성을 만들어낼 때 말이다이러한 사유의 무책임은 우선 사회체들(cors sociaux)의 정립을 중단하기에 사회체들은 법을 제정한다사유의 젊음은 또한 이중적인 아직 아님(pas encore)을 구성한다아직 아님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허용하는 상태화된(etatise아직 아님을 말이다플라톤이 등장시키는 이 형상은 경험적인 젊음의 형상이 아니다물론그들은 사유의 젊음이 없는 젊은이들일 수 있다사유의 젊음그것은 무한성을 인식하는 계기이며즉 실재적인 것이 엄격한 한도 안에서 혹은 유한한 것 안에서 가능하고 파악할 수 있음을 인식하는 계기인 것이다필연적으로 초과의 욕망 혹은 의지가 아니라 초과의 가정인 것이다마찬가지로소피스트로서의 철학자는 초과적인 사유의 연령을 나타내는 형상으로서의 젊은이들과 대결에서이러한 초과의 가정이라는 사안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모든 타락은 초과적인 것의 타락이라는 동일한 사실에서 말이다.

 

 

 

소피스트는 형식들의 무한한 가변성으로 제시된 모든 사회적인 것을 통해 초과적인 것을 타락시키는데 열중한다달리 말해서매우 궤변적이며 무한히 열거되는 언어유희들은 공약불가능한 것에 대한 용기(容器)로 기능한다무한은 그 척도를 다양한 언어 안에서 얻게 된다초과의 지점에서소피스트가 공약불가능한 것을 처리하는 방식은 무한한 언어유희의 체계 내부에 대한 뛰어난 능력(virtuose)의 교육을 제시하는 것이다소피스트가 말 건네는 것은 젊은이들의 초과를 이루는 유희적 차원즉 열정적인 사유의 무책임에 고유한 형상으로서의 유희이다소피스트는 언어유희의 뛰어난 궤변을 통해 그리고 그러한 궤변으로부터 유희를 사회화한다이런 의미에서소피스트들은 사회체에 봉사하며그들이 언어의 기술적 숙달을 달성함으로써 선/상품의 봉사(service des biens)를 위해 사회화되도록 하는 그것에 봉사한다따라서 소피스트들이 받는 수업의 대가는 초과에 내재적인 유희적 초과를 막는 대가이다말하자면이러한 유희적 요소는 소피스트가 고안한 것이 아니다소피스트적 논변은 뛰어난 능력(virtuose)을 통해 비결정을 타락시키며그것은 전형적으로 능력에 따른 타락이다.

 

 

 

철학자는 무책임 자체로부터 책임을 만들어내려 한다그의 의도는 초과를 단독적인 책임으로 억류보존보호하려는 것이다그런 것이 철학적 책임인데왜냐하면 철학자가 알기에 아직 아님(pas encore)의 체제에서 감지되지만유지 혹은 충실성 – 사회적 능력(virtuosites)이라는 규범에서 볼 때 처음에는 뛰어나기 보다 미숙할 수 밖에 없는 – 의 보호 아래 들어가는 그러한 무책임은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철학자가 말 건네는 것은 매우 진지한 자들엄숙함사유의 신중함이라는 [소피스트의반대편이며이에 따라 초과적인 것은 탈국지화(delocalise되고/상품의 봉사로부터 떨어져나가며요컨대 사회화 불가능해 지는 것이다철학자는 있는 그대로의 유희적 요소를 타락시키는데 전념하는데그 이유는 그러한 요소가 무책임으로서의 무책임을 재현하기 때문이다유희적 무책임을 말이다철학자는 역설적인 주체화에 대한 정립을 시도한다말하자면책임으로서 현시되는 무책임을 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이와 같이철학자가 무책임의 후견을 통해 젊은이들에 충실한 지속성을 조직하는데 반해소피스트는 교육/교양(bildung소설을즉 탁월한 능력의 실효성을 통해 세계로 돌아서는 지속적인 형성을 선택한다소피스트의 교육적 도식에 반하여철학자의 파이데이아(paideia)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어떤 것은 박탈되어 있는 채로 남으며그것을 진지하며 신중한 불만의 요소로 조직한다그러나 이 근본적인 박탈은 어떻게 보호될 수 있는가이런 점에 관해플라톤에 의해 시험된 근본적인 비관론를 표명해야만 한다플라톤에 따르면핵심적으로소피스트는 모든 일에서 돈을 번다는 것이다뛰어난 능력의 매혹이 그런 결과로 이어지며그러한 매혹을 가로질러/상품의 봉사로부터 이익을 얻는다그렇다면 아직 아님의 이중적 체제가즉 아직 아님(pas encore)이 소피스트적 함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의 아직(encore)이 되지 않으며이에 따라 그것이 중단의 긴급성에 있지 않도록 하기 위란 방법은 어떤 것인가달리 말해서어떻게 하면 무책임함을 유지하면서도 영원한 젊음이라는 허구에 머물지 않을 수 있는가제기된 문제들은 결정적인 대답이 주어지지 않은 채로 아포리아로 이어지는 플라톤의 첫 번째 대화편들에서플라톤이 등장시킨 젊은이들은 단적으로 젊은 시기에 있는 그들의 사유의 존재를 분유하는 형상들이다무책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이러한 무책임을 이차적인 책임의 보호 아래 위치시켜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우리는 <국가/정체> 6 496b에서 어떤 순간을 상기해야 한다바로 플라톤이 어떤 사람들이 젊은이들 이외의 철학자들 – 단적인 철학자들진정으로 완전한 자격을 갖춘 철학자들 – 일 수 있는 예외적인 조건들을 열거하는 순간을 말이다그러한 조건들이 철학자의 출현과 영구성을 촉진하기는 하지만즉각적으로 철학자를 설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도록 하자.

 

 

 

망명(exil). 이는 태어난 장소로부터 유배됨을 말한다망명에 오른 채로(en exil), 젊음에 대한 충실성은 가족직업고국이라는 타고난 집단의 압력에서 벗어난다그리고 뛰어난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직위라는 유혹은 훨씬 불분명한 것으로 밝혀지는데왜냐하면 그러한 직위를 얻을 가능성이 훨씬 더 낮아지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익도 야망도 없는 작은 도시에 거주하는 문제이에 대해 우리는 필연적으로 칸트가 살던 쾨니히스베르크나 키르케고르가 살던 암울한 덴마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불안정한 건강(sante praicaire). 주체의 불안정성은 그를 사물의 직접성에 다소간 무관하게 하며소피스트의 뛰어난 기교를 거의 통할 수 없게 만든다그리스 세계에서철학자는 영웅이나 운동선수단순한 웅변가 등이 아닌 그런 사람으로 확인된다철학자라는 주체는 사회적인 명성과 동일시 되지 않는다그는 부분적으로 불안정하거나 상처 입은 자의 이미지와 본질적으로 관련된 사유의 의지를 지닌 자인 것이다.   

 

 

 

자신의 오래된 직업을 버리고 철학으로 향하는 것(aller a la philosophie en delaissant sa profession anterieure). 그것은 때늦은 철학자의 경우인데그는 자신의 출발점에서 멀어지는 고유한 사유의 운동을 통해 두 번째 충실성(fidelite)에 도달한 자이다달리 말해 첫 번째 선택에 대한 배신(infidelite안에소피스트적 교육의 보급에 대한 배신 안에 스스로 정립할 수 있었던 자인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이라는 표징이 나타남소크라테스의 다이몬(demon)에서 나타나는 실존적 역설은 소크라테스가 비타협이라는 부정적 명령에 따른다는 점인데그가 이 명령을 인정하는 것은 그것은 어쨌든 아니다라는 의미에서다그의 다이몬은 뛰어난 능력에 대한 동의의 용이성에서 긍정에 대한 긍정에 의해 정립되는 소피스트적 논변에 보편적인 긍정(oui)의 유혹을 중단시킨다다이몬의 표징은 언제나 반복되는 긍정을언어적인 뛰어난 기교가 다른 사물로 기울 수 밖에 없는 증거를 중단시킨다그것이 아직 미숙한 방식의 사유라고 하더라도 말이다우리는 앞에서 그러한 빠져나감이탈이 젊은이들의 사유의 일차적인 무책임에 책임을 부과하는 이차적인 충실성에 호의적인 조건들의 집합에 유일하게 공통적인 특징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주체성에 대한 철학자의 결정은 상궤를 벗어난 행동으로 제시되며말하자면 그는 사회적 명성에서 빠져나가는 조건들에 종속되는 것이다철학이 있기 위해서는 조건들에 객관적 사건성이 있어야 했으나철학은 하나의 입장(position)이기에 앞서 탈입장(deposition)이며말하자면 철학자는 현행의 의사소통의 중단에 의지한다철학자는 우선 무엇인가 사유를 통해 중지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정립되는 것이다반대로소피스트에게 그것은 지속되어야만 하고 지속될 수 있으며 계속 늘어나는 경향을 보이며어쨌든 그것은 언제나 말하며 모든 사유의 문제는 <<그것이 말한다(ca parle)>>는 사실 안에 사로잡힌 채로 유지된다결론적으로소피스트적 주체성과 철학자적 주체성의 대립에 있어소피스트적 몸짓은 언제나 언어 게임에 뛰어난 끝없는 지속에 대한 도박이며철학자적 몸짓은 중단을적어도 언어에 의해 감춰진 지점을 가정한다이런 사안에 대한 지점에서여러분은 중단의 명령이라는 조건 아래 처한다물론 탁월함과 아이러니의 언어로 영역을 바꿀 수 없다 해도 말이다.

 

 

 

이 중단에 대한 플라톤적 은유는 매우 복잡한 것으로 밝혀지는데그 은유는 깨어있는지 꿈꾸고 있는지낮인지 밤인지의 문제와 관련된다. <<그 사람의 삶은 깨어있는 것인지(upar) 아니면 꿈꾸는 것(onar)인지>> (V, 476d). <<우리는 참된 철학을 캄캄한 낮으로부터 진정한 낮을 향한 영혼(정신ame)의 되돌아감혹은 존재자의 실체를 향한 상승이라 말할 것이네nous appelons vraie philosophie le retournement de l’ame d’une sorte de jour obscur vers le  jour  veritable,  ou  la  montee  vers  la  substance  de  l’etant>>(VII, 521c). <<관건은 어떤 밤과 같이 어두운 낮으로부터 진정한 낮을 향한 영혼의 전환으로말하자면 존재에 이르기까지의 상승인데우리는 이를 진정한 철학이라 부르네il  s’agira  d’operer  la conversion  de  l’ame  d’un  jour  aussi  tenebreux  que  la  nuit  vers  le  jour  veritable,  c'est-a-dire  de l’elever jusqu’a l’etre, et c’est ce que nous appellerons la vraie philosophie>>(바쿠Baccou의 번역). <<그러나 그것은 영혼의 전환으로일종의 밤 같은 낮에서 진정한 낮으로 가는 것이며 실재로 상승하는 길인데우리는 그 길을 바로 진정한 철학이라고 부른다네mais c’est une conversion de l’ame, passant d’une sorte  de jour nocturne au jour authentique et qui est la voie  pour  monter  au  reel,  voie  dont  nous  dirons  precisement  qu’elle  est  philosophie  veritable>>(로뱅Robin).

 

 

 

플라톤은 우리에게 되돌아감의 이념으로서의 중단의 지점을 제시한다그러나 통용되는 것의 중단은 기원적인 혹은 본래의 자리를 향해첫 번째로 정초적인 그리고 살아있는 영혼에 적합한 자리를 향해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미리 정해진 속성을 향한 귀환이 아니라깨어남을 향한 귀환이며 발명의 양식에 머무르는 것이다진정한 낮을 향해 나갈 때 우리는 그러한 속성을 박탈 당한다우리는 낮의 빛을 향해 되돌아간다달리 말해서그 되돌아감은 같은 낮 – 캄캄한 낮/진정한 낮 – 에 따라 이루어지는데그것은 그 중단 안에 사로잡혀 밤처럼 어두운 낮이라는 첫 번째 자리에서 낮처럼 밝은 낮을 향한 되돌아감으로서 제시된다철학적 중단은 낮의 특성을 정립함으로써 낮의 밝게 갬(eclaircie)을 달성한다그러나 이러한 밝게 갬은 실제로 추방된 자의 고국을 향한 되돌아감이라는 양식에 따른 추방혹은 최초의 자리에 대한 재전유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없다그 되돌아감은 동일한 장소동일한 낮의 장소로 되돌아가는 것이며거기에서 캄캄함밤처럼 어두운 낮은 중지된다또한횔덜린의 표현에서태어난 곳으로의 되돌아감(하이데거의 분석들이 타고난 나라의 신성함의 편에 방점을 찍는)나는 두 인용문들을 연결하여깨어남을 통한 되돌아감 혹은 개방(decloture)을 대립시킨다낮은 그 자체의 고유한 밤의 울타리 안에 있었다이 닫힌 낮은 되돌아감을 통해 낮과 같은 특성으로 열린다영혼의 고양상승향상은 여기에서 그러한 낮의 저편을 향한 초월이라는 의미에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오히려 되돌아 감을 통해 그러한 낮이 그 자체의 존재를 진정한 낮에 배치하는 범위에서 존재하는 것에 대한즉 그것이 지속하는 본질로서 주어지도록 밝은 대낮과 같은 낮에 대한 접근으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플라톤에게 있어 순수한 되돌아감으로 파악된 철학적 중단의 몸짓은 같은 장소에 대한있는 것의 밝게 갬에 대한 혹은 대낮 같은 밝음에 대한 접근을 제공하는 타고나지 않은 되돌아감으로 묘사된다우리의 시대가 진리의 범주로부터 고립되어 있기에철학은 그 자체의 해석적 박물관이 됨으로써 의미의 생산의 끊임없는 지배 아래 떨어진다철학은 더 이상 진리와 의미가 분리되지만 의미에 의해 뒤덮이는 지점을 유지하지 못한다철학은 무의미의 위험에즉 근대적 소피스트들에게 노출된 것이다우리가 목격하는 위험을 측정해야만 한다근대적인 소피스트적 논변의 실제적인 큰 승리를 검토해야만 하는 것이다그것은 바로 언어에서 끊임없는 연속의 체제에서 요컨대 큰 위험으로 기능하는 것이다우리는 상대부분 없이 소피스트적 논변의 편재에 노출되는데이에 대해 뛰어난 능력을 갖춘 소피스트는 분명히 가장 탁월한 행위자지만그렇다 해도우리 시대의 지성이 니체로부터 개방된 반-플라톤주의의 전적인 지배로 제시되는 술책의 장기말일뿐이다그리고 사유에 의해 다뤄지는 모든 문제들에 고유한 언어의 초월적 특성에 관한 일반적 합의는 이런 의미에서 이루어진다실제로 플라톤에 따를 때이 중단이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alesthaton>>, 즉 가장 참된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진실된 것을 주목하면서 언제나 거기에 연관지으며 완벽하게 우호적인 관점으로 관찰함으로써아름다운 것들과 올바른 것들 그리고 좋은 것들과 관련되는 이 세상의 법규들을 정할 수 있거나혹은 그런 법들이 이미 정립되었다면 이를 지키고 보존하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자들>>(VI, 484d) 달리 말해서플라톤 이래모든 근대적인 고전 철학은 그 탐구의 중심에 진리라는 주제를 둔다그런데우리는 오로지 복수이자 이질적인 진리들을 생산하는 독립적인 유적 절차들이 있을 뿐이며철학이 그로부터 귀결되거나 그렇지 않다면 공가능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요컨대어떤 의미에서 낮 같은 밝음의 경험이 우리 근대인들에게 있어 이런 방식으로 명명된 플라톤적 진리에 관련되는 것인가현 국면에서(1989년 말), 이 사안의 해명은 은폐될 수밖에 없다우리가 계속 이해의 지배 아래 무한정 있게 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철학은 해석의 울타리라는 표지 아래 헛되이 그 자체의 끊임없는 해석의 체제로 전환할 것이다니체 이래철학은 감히 더 이상 오늘날 압류된 진리의 범주가 자체의 담론을 집중시킨다고 말할 수 없다왜냐하면 철학에서 유래한 진리의 문제를 말할 수 있는 특성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만일 우리가 철학을 그 분신의즉 그 타자로서의 소피스트적 담론의 지점에서 재구성하고자 한다면철학의 의미심장한 진리를 재발견해야만 한다그러나 이러한 기획이 어렵다는 점이 밝혀지는데실제로 진리는 여러 가지 사건적 단독성들 안에 붙들려 있는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예를 들어그리스에서는 정치의 개입(모세즈 핀리), 수학의 창안(cf. 플라톤테아에테토스에우독소스), 비극의 창조사랑의 마주침(향연갑작스러운 것l’exaiphnes)이 있었다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것들에 관하여무엇이 그 [탁월한진리일 수 있다는 말인가그 진리는 여러 이질적인 진리들에서 파악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사유될 것이다우리는 진리가 실존하지 않음을 정립할 것인데 왜냐하면 오로지 역사성에 기인한 진리들만이 있기 때문이다 [탁월한진리는 역사성의 차원에 실존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 진리의 사건이 없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철학이 진리라 명명하는 것은 비실존의 지점이라고 간주해야할 것이다그렇다면철학에 사건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철학은 어떤 정당성으로 그 자체의 사유의 목적지를 진리라 명명할 수 있는가우리는 진리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언표가 진리 자체의 구성적 언표임을 보일 것이다이러한 검토에 따라우리는 내가 여러분에게 지시하는 다음과 같은 결론들에 이르게 된다.

 

 

 

<<실존하지 않음>>이라는 말이 나타내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탁월한] 진리는 비전이적(intransitive)이다그 진리는 여러 진리들과의 단절의 지점을 지시한다따라서 진리들은 결코 [철학 자체의진리를 제시하지 않는다철학이 증거하는 것은 비전이적 지점이다.

 

2. 그 진리는 탈국지화(delocalisation)를 나타낸다그 진리는 비실존하며심지어 동일한 진리들의 장소에서도 실존하지 않는다.

 

3. 그 진리는 비기획적(aprogrammatique)이다그 진리는 아무것도 제안하지 않으며진리는 미리 정해지지 않는다.

 

4. 그 진리는 주체의 범주에 있어 기획적인 가치이다그 진리는 존재의 범주가 아니지만진리들의 존재는 있다.

 

5. 그 진리는 우연의 작용(fonction)에 연결된다그 진리와 진리들 사이에는 우연이진리의 철학적 관념과 공-기원적인 지점이 삽입된다.   

 

 

 

그렇다면일단알게 된 것을 요약해보자.

 

철학과 소피스트적 논변 사이의 경계선은 불가피하게 주체적 동일시를 경유하는데왜냐하면 수사학적 분석의 엄격한 관점에서 어떤 철학적 텍스트와 어떤 소피스트적 텍스트를 구별하는 특징들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철학자와 소피스트 양자 모두의 공-기원적 귀속을 분해함에 있어우리는 철학자의 주체성에 기인한 형상을 결정하는 철학적 담론을따라서 철학에서 철학자에게로 향하는 필연적인 재귀를 해명할 수 밖에 없다우리가 철학으로 주체적 말하기가 암시하는 하나의 입장을 의미하지만그 입장은 소피스트의 언어적으로 뛰어난 능력(virtuosite)과 겹쳐지지 않는다거기에서 소피스트의 수사학이 언어에 대한 모방적 관계와 겹쳐지지 않음에도 말이다철학의 경계선은 철학자의 주체성에따라서 플라톤이 쓰기로 계획했던 철학자(le Philosophe)라는 제목의 대화편에 개입한다그러므로 철학자의 주체적 성향은 철학자를 존재로서의 존재의 해명(eclaircie)을 향한즉 성향으로서의 존재의 문제에 대한 해명을 향한 타고나지 않은 귀환의 작용에 관여하게 한다철학자의 주체적 태도는 그를 타고난 요소로부터플라톤의 표현으로 말하자면통용되는 의견으로부터 추방시킨다플라톤은 의견에 대한 사랑과 단절하는데바로 거기에 철학과 소피스트적 담론 사이의 경계가 기입되는 것이다이러한 추방은 젊은이들의 최초의 무책임을 후견하여이들의 무책임이 다른 책임에 기인한 사유로 전환하는 것을즉 선/상품의 봉사에 대한 단절을 관건으로 한다소피스트가 무한의 심금으로서의 젊은이들의 최초의 무책임을 우월한 능력으로즉 선/상품과 의견이 유통될 수 있도록 하는 상업적 현실의 원칙을 향해 탈선시키는데 반해철학자는 상업적이지 않은 사유를 제안한다플라톤은 이러한 귀환을 진리로최고로 진실된 것alesthaton탁월한 진리로 명명한다이러한 소피스트적 담론과의 주체적 구별이라는 동일한 관점에서우리는 어떤 이유로 진리의 문제에 대한 철학을 통한 유지라는 새로운 시대의 운명이 펼쳐지는지 심문해야만 한다그리고 한편으로 우리는 진리가 비계획적이고 미리 정해지지 않으며 실존하지 않음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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