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적 개념으로서 확률은 픽션과 얼마만큼 관련이 있을까?

전적으로라고 할 만큼 관련이 있다는 게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왜냐하면 그 개념에 정통한 저명 역사가 이언 해킹이 언급한대로, 확률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로 세계를 그려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p.28 


첫 챕터를 읽기 시작하고 눈이 번쩍 뜨여서 자세를 바로잡고 읽기 시작했다. 

이 책 굉장히 흥미로운데, 이 저자는 소설가이자 사회인류학자, 영문학자다. 

기후위기를 다루는 책의 첫 챕터 제목이 왜 문학인지 이해를 못한 상태에서 읽어내려가다가 깊이 납득한 것이다. 기후위기가 왜 문학의 소재가 되기 어려운지를 설명하기 위해 처음에는 이상 기후의 이야기를 꺼내고, 이후 문학의 패러다임을 설명하고, 문학 뿐 아니라 과학에도 영향을 미치는 근대적 세계관을 설명한 후 마침내 기후위기로 접근하고 있다. 

아미타브 고시는 예술은 예술가 개인의 예술성, 과학은 사실과 논리에 근거한 진리처럼 여겨지기 쉽지만 예술도 과학도 결국은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내러티브란 본질적으로 어느 면에서 나머지와 다르거나 그로부터 두드러지는 순간 또는 장면을 서로 연결하면서 전개된다. 당연히 이러한 순간이나 장면은 예외적인 것들의 예다. 

소설 역시 이런 식으로 펼쳐지지만, 다른 것과 구별되는 형식상의 특징이 있다. 다름 아니라 내러티브의 동력으로 기여하는 그러한 예외적 순간들에 대한 은폐다. 이는 이탈리아의 문학이론가 플아코 모레티가 '필러 fillers' 라고 부른 것을 끼워 넣음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 모레티에 따르면 "필러는 흡사 제인 오스틴에게 더없이 중요했던 '훌륭한 예절' 처럼 작용한다. 필러도, 훌륭한 예절도 모두 삶의 서사성을 통제하고 존재에 정규성, 즉 양식을 부여하고자 고안된 기제다. 소설은 바로 이 같은 기제를 통해 세상을 만들어낸다. 내러티브의 정반대로 기능하는 나날의 일상적 디테일을 통해서 말이다." 이렇게 근대 소설은 "전례없는 사건은 배경으로 밀어내고 나날의 일상을 전경으로 끌어내는" 식의 변화를 겪었다. p.30


전례에 없는 사건 - 즉 기후위기, 지구 기온 상승, 녹는 빙하, 갑작스런 사이클론 등의 느리면서도 거대한 자연의 사건들은 이렇게 세상에서 배제되고, 자연스럽지 않은 사건처럼 여겨져 점점 소설에서 다뤄지지 않는 것.


다시 말해 기후위기에 대해서 문학에서 잘 다루지 못하는 것은 한 개인의 문제, 기후위기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시대의 세계관에 관련한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순수 소설이라는 대저택 내에서는 아무도 대륙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 그 같은 규모의 관련성과 사건은 그럴 법해 보이지 않을 뿐더러 소설이라는 한정된 시야 내에서는 터무니없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 하지만 인류세의 지구는 바로 도무지 상상하기 힘들만큼 광대한 힘이 좌우하는 , 피할 수 없는 집요한 연속성의 세계다. 순다르반스를 침범하는 물이 마이애미 해변도 덮친다. [...] 물론 기후와 지질학이라는 힘이 우리 삶과 무관한 시대는 한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 힘이 이렇듯 무자비하리만큼 직접적으로 우리를 압박한 시대도 없었다. p.86


2부의 역사에서는 기후위기를 논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끌려나오는 근대성 개념이 서구 고유의 것인 양 다뤄진다는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매우 거칠게 요약... ), 아시아 출신이기에 첨예하게 느낄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2부에서 인용하고 다루는 책들이 몹시 궁금했는데 비서구권 책들은 거의 번역이 안되거나, 되더라도 7,80년대에 된 후 근래에는 별로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자의 책들 역시 대혼란의 시대 외에는 구해보는 게 쉽지 않고, 번역되지 않은 책도 많다. 

소금 도시 너무 읽어보고 싶은데 읽을 수가 없어서 안타깝네!! 


중국의 석탄, 유정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버마(=미얀마)의 석유 채굴 이야기도 대단히 흥미로운데, 내가 얼마나 동남아시아에 무지한지 새삼 깨닫다. 서구권 외에 돌려지는 동양권에 대한 시선이 중국과 일본에만 머물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외의 나라들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근대성 이야기하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제국주의 역시 따라나와야지. 

그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저자가 언급하는 책들을 다 읽을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아쉬워. 


3부는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기후위기를 다룬다. 

기후 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결국 사람들의 도덕심에 호소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기후변화의 공적 정치는 그 자체로 도덕적, 정치적인 것이 어떻게 해서 마비상태에 이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다. 최근에 수많은 활동가와 관심있는 사람들은 기후변화를 도덕적 이슈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 다른 모든 민주적 통치자원이 동나고 오직 그 찌꺼기인 '도덕'만 남은 듯한 형국이다. 


기후변화 이슈에 대한 이러한 틀 지우기는 한 가지 커다란 미덕을 지닌다. 그것은 국제적 기후변화 관료주의가 그 이슈에 부과해온 경제적 언어(비용 이익 언어)를 단호히 배격한다는 점이다. [...] 만약 기후변화라는 위기를 주로 개인의 양심에 제기하는 문제로 바라본다면 진지함이나 일관성은 불가피하게 정치적 입자을 판단해줄 시금석이 된다. 이는 다시 부인론자로 하여금 활동가들이 개인적으로 선택한 생활방식을 지적함으로써 그들을 위선자라고 몰아붙이게끔 만들 수 있다. [...] 


"당신은 기후변화 때문에 무엇을 포기하셨죠? 당신이 감수한 희생은 뭔가요?" [...] 그가 일순 얼어붙음으로써 분명한 것마저 제대로 말할 수 없게 된 것은 정치와 도덕이 손잡은 결과였다. 기후변화의 규모는 더없이 방대하므로 집단적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행동화하지 않으면 개인의 선택은 거의 무용지물이다. p.177 


먼 이야기가 아니라 이것 역시 바로 지금, 여기의 이야기지. 


관련된 논문도, 책도 많은데다 시간과 공간을 아주 넓은 범위로 다뤄서 책 자체는 얇지만 사고를 따라가느라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두고두고 다시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생각하고, 요새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 읽는 책마다 언급되는데 번역된 김에 완독해야겠다고도 생각이 든다. 


여기까지 쓰는데 글을 네 번 날렸다... 

하... ㅠㅠ

















언급된 책들 중에서 장바구니에 담아둔 책들. 

그리고 관련해서 읽으려고 담은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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