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와 밑줄긋기 사이에 문단을 넣고 싶은데 그런 기능은 없는 모양이다. 















가족 안에서 여성의 수동성은 그 자체로 '생산적'이다. 

... 생략

둘째, 자율성을 완전히 부정당하기 때문에 좌절을 느끼고, 이 좌절을 언제나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연속적인 욕구, 즉 소비 비슷한 것으로 승화해야만 하므로, 여성은 생산적인 존재가 된다. 소비는 여성이 가사노동을 할 때 갖는 강박적인 완벽주의에 정확히 상응한다.

p.47


이 부분이 좀 어렵다. 자율성을 완전히 부정당하기 때문이라는 구절은 노동력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사회자원- 혹은 노동력이기 때문이지만 노동력으로서 기능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읽었다. 하지만 소비 부분이 이해가 잘 안된다. 소비가 어떻게 집안일에서의 완벽주의(페이지를 찾기 어렵지만, 앞에서 굳이 그렇지 않아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집안일에서의 완벽주의를 취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와 상응하는 것일까?

가사노동과 소비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이미 다뤄진 이론이 있는데 내가 그 이론을 전혀 모르는 거라는 느낌이 든다. 


집 안에 뭐가 있어야하는지 여성들에게 말하는 것은 분명 우리 일이 아니다. 아무도 다른 이의 욕구를 규정할 순 없다. 우리는 투쟁을 조직하고, 그 투쟁으로 이런 승화가 불필요해지는 데 관심이 있다. p.47-48


그리고 다음 단락에서...

성적 수동성이 바로 튀어나와서, 이 부분 역시 조금 혼란스러움. 

가사 노동과 성적 수동성이 연결되는 부분이... 


일단 이 부분은 제껴놓고. 

계속 읽다보니 저 소비와 가사노동의 상응관계는 아마도 여성이 가정을 소비의 중심지로 만든다는 공격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다. 여성은 노동력을 재생산해낼 뿐 그 자신이 노동력이 아닌데도 노동력에게 더 많은 소비를 해야하는 자본을 벌어오라고 괴롭힌다는 관념에 대한 반론인 것 같다. 혹은, 여성은 검소해야한다는 압박에 대한 반론이거나. 


가족 안에서 여성이 맡은 역할의 세 번째 측면은, 여성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억압하는 인물, 모든 가족 구성원에게 규율을 강조하는 사람이 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앞서 논의했듯이 여성의 인격이 특수한 유행의 저해를 받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편이라는 폭압, 가정이라는 폭압, 자신의 전 존재가 '영웅적인 어머니와 행복한 아내'라는 이상형을 거부하는데도 그런 이상형이 되고자 고군분투해야하는 폭압 아래에서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p53


아, 나 이 부분 너무 좋았는데-. 

여기 읽으니까 뭐가 떠올랐냐면, 아내에게는 비밀로 아이를 어린이집(유치원?)에 보내지 않고 아이와 둘이서 놀러가면서 아내에게 비밀을 만드는 남편 이야기였다. 그리고, 애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냐며 아내를 힐난하는 남편들의 목소리. 성인 아들을 하나 더 키운다고 한탄하는 아내들의 목소리. 저 폭압을 말하는 문장에 얼마나 많은 몰아세움이 담겨있는지, 읽고 또 읽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썼는지 감탄하고 공감하면서. 


산아 제한 연구가 이토록 더디게 진행되고, 거의 전 세계에서 임신 중절이 금지되고 결국 '치료'목적으로만 허락된 건 우연이 아니다. 일차적으로 이것들을 요구하는 것은 안이한 개혁주의가 아니다. 이런 문제들이 자본주의적으로 관리되면 거듭해서 계급 차별, 특히 여성 차별을 만들어낸다. p.54


 이 부분을 읽자마자 얼마 전에 읽은 멜린다 게이츠의 책이 바로 떠올랐다. 멜린다 게이츠는 여성 생존이 산아 제한, 피임, 임신 중단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자세한 현장의 목소리와 함께 설명한다. 


연결할 생각이 전혀 없이 읽었던 책이었는데 이게 이렇게 연결이 되는구나. 


노동계급가족은 더욱 무너뜨리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노동계급가족이 노동자를 지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자로서, 그리고 노동자라는 이유로 노동계급가족은 자본을 지탱하고 있기도 하다. 노동계급가족은 계급의 유지 및 생존을 좌우하지만, 이때 계급의 유지 및 생존은 계급 자체에 반하여 여성을 희생시킴으로써 가능해진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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