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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이순원 지음 / 뿔(웅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순원의 「나무」읽고, 사과나무 심은 노모 생각에 울다
<나무의 성장, 그들의 존재 의미>
소설가 이순원이 자꾸만 나를 울린다.
강릉 바우길에서 받은 이순원의 책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이 아빠도 아들도 없는 나를 그렇게 울리더니, 이번 「나무」는 엄마를 떠올리게 하며 아침 댓바람부터 나를 울린다.
추석 때마다 칠순의 노모가 채 익지도 않은 작은 사과를 따와 집떠난 손녀와 막내를 먹인 사과. 가족을 기다리며 노모가 심은 사과나무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였구나.
나무들의 이야기였지만, 결국 누군가가 또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며 심은 나무의 마음이 가슴깊이 전해졌다.
나무의 성장, 그들의 존재 의미
봄을 알리는 여리고도 생생한 연초록잎, 꽃을 피워 화려한 여름, 단단한 열매로 풍성한 가족맞이를 준비하는 가을, 온통 눈 덮힌 겨울 속, 그 자리에 묵묵히 서 또 다른 봄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겨울.
세상에 나무가 없었다면, 사계절을 지금처럼 느낄 수 있었을까.
아니, 세상에 나무가 없었다면, 우리 인간이 존재할 수는 있었을까.
늘 곁에 있었지만, 그저 잠깐 지나쳤던 우리의 나무들의 일상과 한평생이 눈앞에 동화처럼 펼쳐진다. 나무의 성장, 그리고 그들 존재 생명의 의미.
장 지오노가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이야기 했다면, 이순원의 「나무」는 사람이 심은 나무를 통해 나무와 자연의 세상과 그들의 성장,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읽다보면 그게「나무」의 성장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생명의 가치와 나무의 치열한 삶은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힘있는 삶의 지혜와도 같다.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 문학상 수상한 이순원(강릉바우길이사장)의 가족. 성장소설이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 범벅을 만든 이순원 「아들과 함께 걷는 길」에 이은 두 번째 리뷰다. http://blog.daum.net/bada0101/13720255
사계절 치열한 나무의 삶, 여덟살 어린 밤나무의 호기심과 성장과정으로 풀어내
한 곳에 뿌리내린 채 쉴 새 없이 뿌리로 양분을 빨아들이고 한 여름 고개가 빠지도록 잎을 햇살에 내밀고 빛을 모으고서야 꽃을 피운다. 한여름 폭풍우에 약한 꽃은 스스로 떠나보낸 뒤 그제야 겨우 몇 개의 열매를 맺는다. 그마저 짐승과 인간에게 내어주는..이게 수십 년, 수백 년째 반복되는 ‘나무의 삶’이다.
소설은 자신을 심어준 사람과 그 후손들의 가족과 백 년의 시간을 함께 살아온 할아버지 나무(밤나무)가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어린 손자나무의 대화로 이뤄져 있다.
그 할아버지 나무는 보릿고개 굶주림을 참아내며 다섯 말의 밤을 산에 심은 어린 신랑이 신부에게 준 굵고 커다란 밤송이였다.
소설은 첫해부터 굵고 알찬 밤송이를 열리게 하고픈 욕심쟁이 여덟살 난 어린 밤나무(손자나무)가 품은 호기심을 풀어내며,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다.
할아버지 나무가 부엌 밖에 심겨진 사연부터, 마을을 살피며 흉년일수록 더 많은 열매는 맺는 참나무, 꽃샘 추위에 맨 처음 봄을 여는 매화나무, 자신의 몸을 째서 남을 받아들여 열매 맺는 감나무, 제일 늦게 잎을 피우지만 여러번 열매를 맺는 대추, 잘려도 계속 올라오는 닥나무, 그리고 손자나무가 볼품없다 핀박을 주는 냉이, 환한 얼굴로 사랑스런 수선화까지 주변에서 가까이 볼 수 있는 나무와 꽃들.. 그들의 생장에 관한 궁금증을 대화로 풀어내며 다른 나무들의 특징적 생장에 관한 친절한 안내서다. ..
“우리가 잎을 오래 가지고 있는 건 잎 밑에 나 있는 겨울눈을 보호하기 위해서란다. 단풍은 비록 볼품없다 해도 우리 밤나무 잎은 내년에 나올 자기 동생들을 마지막까지 생각하는 거지.”(107p)
수선화의 꽃과 비교하며 너무 하다 심을 정도로 핀박주는 손자나무와 냉이의 한판 싸움은 세상을 겉보기로 판단하는 우리 일상의 단면을 아프게 찌른다.
생명을 외적인 하나의 잣대로 판단해 버리는 우리네 일상이 그대로 드러나서. 늦게 잎을 틔우는 게을러 보이는 나무도 작고 소소한 꽃을 피우는 저 냉이도. 저마다의 이유와 태어난 사명이 있고 가치를 지니는데 하물며 우리의 아이들은.. 그런데 우린 어떤 눈으로 그들을 키우고 판단하고 있는가.
"(냉이) 십 년이 되어 마당이 사정이 아무리 고약스럽게 바뀌어도 우리는 우리가 뿌리를 내린 땅을 절대 내 놓지 않아. 우리 후손들을 위해 다른 풀이나 나무들과 맞서 싸우지... 사람들의 손길로 자라는 저 꽃밭의 화초들과는 처음부터 다르다는 거지. 아무 데서나 잘 자란다고 해서 우리의 이름도 들꽃이고. 우리는 어떤 곷과 나무도 모양만 보고 판단하지도 않는단다."(94, 95p)
나무는 아이들보다 빨리 자란다
할아버지 밤나무를 심은 어린신랑인 그는 아랫마을에 삼년 동안 세 번이나 찾아 자두나무를 얻었다. 덕분에 그의 손자와 동네아이들은 과일을 먹을 수 있었다.
물려받은 가난을 당장 벗어나기 어렵지만, 어느 하루만 수고를 하면 아이들은 누군가의 부러움을 받는다. 그런데 정작 숲을 부러워하면서도 나무를 심는 사람은 없는 것, 그 현실에 저자의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우리 집 밤나무 산에 가면 아주 잘생긴 것들 천지라네. 예전에 어떤 미련한 사람은 거기에 묘목도 아니고 밤알을 묻어 숲을 이뤘는데, 칠팔 년 된 묘목을 심어 밤을 따는 거야 금방이고말고 아니겠는가?”
폭풍우와 혹독한 겨울 눈을 맞으며 어린 손자나무가 열매를 맺기까지의 과정은 현실을 바라보는 공정한 눈과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얘야, 첫해의 꽃으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없다. 그건 나무가 아니라 한 해를 살다 가는 풀의 세상에서나 있는 일이란다.”(14p)
"지금 선 자리에 아들 나무가 서 있는 것이 낫다 생각될 때, 나무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이 왔던 세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나무의 치열한 삶을 통해 자연의 숭고함을 일깨우는 저자의 맑고 담백한 언어, 자신의 글에 몸을 바칠 푸른 나무에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겠다는 저자의 약속은 지켜지고 있다.
추석, 자신이 심은 나무과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을 노부모를 생각하며
추석, 할아버지가 손자의 손을 이끌어 자신이 심은 나무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집이 있을까. 자신이 심은 나무의 열매를 먹이는 풍경.
나무들의 이야기는 책을 덮은 뒤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마음, 누군가의 가족과 부모의 마음까지 느끼게 한다.
생각은 우리 엄마집 앞마당에 이르렀다. 이제 엄마보다 노모라 부를 만큼 나 자신도 엄마도 나이가 먹었다.
노모의 앞마당엔 발디딜 틈없이 먹을거리들이 빼곡하다. 그곳엔 한 그루의 사과나무와 포도나무도 있다.
몇년 채 되지 않아 볼품없는 사과나무. 약을 치지 않아 못생기고 벌레먹은. 그런 작은 사과 한알한알을 손녀손자들과 막내딸이 올 때마다 먹인다.
작은 알알의 사과가 풍기는 그 푸릇푸릇한 사과향이 배어오더니 마침내 눈물이 주루룩. 노모의 마음을 이순원의 「나무」가 일깨운 셈이다.
나무를 심는 마음이 노모의 자식 생각하는 마음이겠구나.
그런 노모의 마음도 모른 채, 이것저것 실어주면 짐 많다고 아직도 투털대는 40을 바라보는 막내딸.
아.. 이번 추석엔 엄마가 심은 사과와 포도나무를 보며, 노모의 나무심은 이야기를 도란도란 들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