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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ㅣ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사이에 있는 것들. 쉽게 바뀌는 것들.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여전히 내 마음을 잡아끈다.
내게도 꿈이라는 게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는
마음을 잡아끄는 그 절실함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
그를 처음 만난 건 김혜리 기자의 <진심의 탐닉> 인터뷰를 통해서다. 그땐 그닥 끌리지 않았는데... 아마도 소설가가 패딩을 입고 찍은 사진 때문이란 생각을 해 본다. 소설가라면, 겨울이라면, 따뜻한 스웨터를 입어야 한다는 이 근거없는 고정관념..
김천역 빵집 아들 김연수, 평생 빵을 먹고 살아선지 도넛과 같이 채워도 채울 수 없는 동그란 구멍의 슬픔을 간직한 소설가.
소설가 김연수를 <청춘의 문장들>이라는 에세이집으로 처음 만났다.
그에게도 여지없이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간 청춘의 한때가 있었다. 달랐던 건 그를 소설가를 키운 중국, 일본, 한국의 오래된 명문장들이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어느 해설집을 읽는 것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 그의 이야기에 빠져본다.
이석원의 에세이를 읽고 “보통의 존재(독자편)”으로 글을 쓰려고 마음먹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는데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을 읽고 어느새 나도 모르게 생활글을 쓰고 있었다. 잊혀진 기억의 따뜻함을 김연수를 통해 깨달았고 그 착한 깨달음을 통해 순간들을 기록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내가 좋아하는 이석원, 이병률과 마찬가지로 김연수 역시 참 많은 사연이 있었고 당시를 회상해 내는 세밀한 기억력이 있었다. 특히, 김연수가 더욱 특별한 것은 그와 함께한 수많은 문장들이다. 문장들은 김연수의 사색과 사연들이 어우러져 쉽게 독자화 되었다. 내가 언제라도 인용할 수 있는 문장들을 넘어, 나 자신의 상태를 글자로 표현해낼 수 없는 한계를 좀더 넓혀줬다고나 할까. 특히, 일본의 시조 하이쿠 등 시조를 깊게 음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소설가 김연수는 사람들에게 묻지 않고 타인의 감정과 사연을 유추해 보려는 사람이었고 그의 노력은 기억의 유품과도 같은 사물의 기억에서 출발하곤 한다.
애당초 채워지지 않을 그는 곧 사라질 많은 것들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항변한다. 그리고 살면서, 사랑하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일들의 경험을 문학을 통해 재현하고 그 일을 하면서 완전히 소진되고 더 소진될 수 있기에 글을 쓴다고 한다. 소설가 김연수의 아름다운, 때로는 웃음까지 주는 명문장들을 만나보자.
“서른 살 너머까지 살아 있을 줄 알았더라면 스무 살 그 즈음에 삶을 대하는 태도는 뭔가 달랐을 것이다.”
“지새야할 숱한 밤과 피워야 할 많은 연탄불”
“공터에 선 내게 질문은 버린 사람을 찾을 수 없는 쓰레기처럼 몰려들었다.”
"시간이란 한순간의 일이 오랫동안 기억되는 과정이다."
진중한 그의 삶의 태도는 남자들은 다한다는 군부대 이야기에서 자빠질만한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예컨대 그 회로에 '학점을 잘 받으면 장학금을 받을 수도 있다' 이런 긍정적인 문장이 입력되면 곧바로 “웃기고 자빠졌네”라는 응답과 함께 먹통이 된다."
"내가 배치받은 부대는 전쟁이 터지면 울진 지역으로 상륙해 지리산을 최종 목적지로 태백산맥을 타고 내려오는 북한군 특수부대를 담배 한 대 피울 정도의 시간만큼만 저지시킨 뒤, 예비군들에게 인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담배 한 대 피울 시간이라고는 하지만 방위병 주제에 북한군 특수부대를 막는다는 것도 웃겼던데다가...."
그가 소개한 문장 중에 기억에 남는 구절을 기록해 본다.
"주인이 집을 물가에 지은 뜻은 물고기도 나와서 거문고를 들으람이라 " - 정조때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네 분이 쓴 <사가시선>
“봄빛 짙어 이슬 많고, 땅 풀려 풀 돋다. 산깊고 해 긴데, 사람 자취 고요하니 향기만 쏜다. - 추사“
“아이는 구급자를/못 쫓아왔네” - 하이쿠
잊혀진 것들의 멈춘 기억이 얼마나 따뜻한가를 알려주는 소설가 김연수,
그를 만나며 순간의 감정과 지나치는 풍경도 소홀히 할 수 없다.
한번도 관심 가져본적 없는 시조들이 전하는 자연과 삶의 깨달음은 그가 아니면 전해받지 못할 일이다.
어떤 사람이 소설가가 되는지 관심있는 사람이나, 글을 쓰고자 하는 분들, 특히 아름다운 문장력을 구사하는 데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추천한다.
그의 책을 덮자마자 그의 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들었다. 나는 지금 김연수에 빠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