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소녀를 사랑하다 올 에이지 클래식
낸시 가든 지음, 이순미 옮김 / 보물창고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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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제목을 당연히 소년, 소녀를 사랑하다고 인식하게 되는 이 편견이 없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머리와 가슴은 또 다르게 나타나 누군가에게 본의아니게 아픔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런 소수자의 입장에서 쓴 책을 읽고 또 읽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그 입장에서 우리를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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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p..313~
위드머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 몇 년이 걸렸단다. 이사벨이 제대를 해야 했던 건 우리가 동성연애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동성연애를 나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었던 거지."
~
"다른 것은 그냥 나쁘지. 그것 뿐이야. 나쁜 것은 항상 극복 할 수 있거든."
위드머 선생님이 덧붙였다.
"너희는 우리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스티븐슨 선생님이 부드럽게 말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다 해도, 제발 이것만은 기억해 주길 바란다. 사람들의 무지한 반응 때문에 절대로, 절대로 너희를 자책하지 마라."
위드머 선생님이 말했다.
"무지가 이기게 놔 두지 마. 사랑이 이겨야 해."
스티븐슨 선생님이 말했다.

^^cf.(포스터 학교에 다닐 때 위드머 선생님은 항상 말했다. 글을 쓸 때는 중요하거나 흥미로운 사건으로 첫 부분을 시작하고 그 다음에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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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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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예전에 읽었던 햇빛이 눈부셔 사람을 죽였다는 이해할 수 없어 기억 깊숙히 남은 그 구절만을 갖고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또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명작은 두고 두고 반복해서 읽어야 하나봅니다.
 
자신의 삶을 제3자적 입작에서 바라보듯이 살아가던 뫼르소는 그저 남들이 어머니를 사랑한는 만큼 사랑했던 어머니의 죽음마저 제3자의 눈으로 슬픔없이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부유하듯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또 봐라봤겠죠. 어머니의 죽음 후로도 삶이 어떻게 굴러가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살다가 우연히 폭력사건에 휘말리고, 또 그냥 우연히 갖게 된 총으로 이마를 찌르는 듯한 햇빛과 그 햇빛을 피할 수 없도록 막고 서있다는 이유로 한 청년을 쏩니다. 그리고 4방 더..

뫼르소는 전혀 다른 삶에 처하게 됩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평안했던 삶에서.. 제3자로 살것을 강요당하는 재판소에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생사의 결정을 자신의 생각을 배제한체 배심원과 검사, 변호사, 재판관에 의해 결정하게 되는... 자신은 그냥 그 결정을 따라갈 수 밖에 없는 진정한 이방인이 되버린 것을.. 그제야 뫼르소는 자신의 삶의 부조리를 마음 어디에선가 깨닫게 됩니다. 사형전날 그에게 회개를 강권하기 위해 들어온 사제에게 자신의 생각을 퍼부면서  제3자가 아닌 나의 생각을 말하게 됩니다.  그 날 밤 그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는 평안한 마지막 시간을 갖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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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133-
그때, 왜 그랬는지 몰라도, 내 속에서 그 무엇인가가 툭 터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목이 터지도록 고함치기 시작했고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기도를 하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사제복 깃을 움켜잡았다.기쁨과 분노가 뒤섞인 채 솟구쳐 오를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마음속을 송두리째 쏟아 버렸다. 그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다. 그렇지 않고 뭐냐? 그러나 그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 한 가치도 없어.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그에게는 없지 않느냐? 보기에는 내가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 나는 이렇게 살았으나, 또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을 했다. 그러니 어떻단 말인가? 나는 마치 저 순간을 내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될 저 신새벽을 여태껏 기다리며 살아온 것만 같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그 역시 그 까닭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 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토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는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거슨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느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그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운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아니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나와 더불어 그처럼 나의 형제라고 자처하는, 특권 가진 수많은 사람들도 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알아듣겠는가? 사람은 누가나 다 특권 가진 존재다. 세상엔 특권 가진 사람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 역시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그가 살인범으로 고발되었으면서 자기 어머니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받게 된들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말인가? ~~
그가 나가 버린 뒤에, 나는 평정을 되찾았다. 나는 기진맥진해서 침상에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눈을 뜨자 얼굴 위에 별이 보였으니 말이다. 들판의 소리들이 나에게 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밤 냄새, 흙냄새, 소금 냄새가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해 주었다. 잠든 그 여름의 그 희한한 평화가 밀물처럼 내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 갈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 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 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 시간 같았었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 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로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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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에 대한 편지
~뫼르소로 말하자면 그에게는 긍정적인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거부의 자세입니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다분히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자기가 아는 것보다 더 말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도 의미합니다. 뫼르소는 판사들이나 사회의 법칙이나 판에 박힌 감정들의 편이 아닙니다. 그는 햇볕이 내리쬐는 곳의 돌이나 바람처럼(이런 것들은 것말을 하 않아요)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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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88만원세대 새판짜기
우석훈 지음 / 레디앙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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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전작인 88만원 세대보다 먼저 읽게 되었습니다.
한 세대를 정의하는 시대의 아픔을 반영하는 용어 "88만원새대"..
청년실업에 대한 저자와 그의 제자들의 구체적인 대안이 담겨있는 책이었습니다.
제 주위에도 계약직으로 환하게 피어야할 청춘을 음울하게 낚고 있는 젊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참 착찹하고, 지금의 제자리(그나마 정식사원)가 미안스럽기까지 합니다.
무언가 혁명적 대안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게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명제를 던져주는 책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아이들과 미래가 걸린 중요한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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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70
지금 20대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리더와 진, 권력이나 교섭력이 아니라 방살이에 갇힌 친구들과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고, 그러한 사회적 관계의 복원이다. "혼자라야 마음 편하다."는 친구들을 불러낼 수 있는 우정과 그 친구들을 환대할 수 있는 밥상 공동체가 아닐가 싶다. 그런 다음에야 3무 세대란 말을 없앨 수 있고, '88만원 세대'를 한대의 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p.176
~내가 한국 20대들과 만들고 싶은 세계는~최소한 20대들이 창문이라도 달린 방에서 살고, 지하나 반지하방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살게 해주고 싶다. 그리고 전 세대들처럼 인상 구기면서 살지 않고, 명랑하게 웃으면서 늘 재밌는 일들만 하면서 살아가게 해 주고 싶다. 배고프지 않고, 외롭지 않고, 잔인하지 않고, 그러면서 사람들과 충분히 마음을 나누며 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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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페다고지 - 탈토건 시대를 여는 생태교육 생태경제학 시리즈 2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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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교육, 말 처럼 낯설기만하지만 우리가 나아가야 할 교육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과 우리는 떨어질 수 없는 공존공생 관계이지만,
지금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살아가는게 아닌지...
그래서 계속 심각한 환경문제들이 생기고,
우리들은 우리들대로 황폐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사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하루에 한 번도 흙을 밟지 못하는 날이 더 많은 도시인들의 삶이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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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5
고등학생 단계에 이르면 아마도 그들이 만나는 생태적 문제들은 많은 경우 지식이나 지혜의 문제가 아니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즉 실천의 문제에 가가워진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거나, 혹은 '국민경제의 생태적 전환'을 이루기 위한 개개인들의 활동이나 실천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행동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다른 말로는 '생태적 용기'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결국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실천에 옮기는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용기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p.82
~창의성은 상상력에서 나올 수 있으며, 평온한 상태에서 기존에 있지 않은 조합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지금 우리의 교육은 이러한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그러나 20~30년 후 우리가 선진국 경제에 진입한다고 가정하면 그때는 학생 개인의 창의성이 무척 중요한 덕목이 될 것이 뻔하다.
상상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의 원천은 사실 감수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감수성에서부터 창의력과 개성과 같은 미래의 덕목들이 나오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한국의 교육은 감수성과는 거리가 좀 멀다. 창의교육이라고 말은 하지만, 창의성은 산수 문제나 영어 단어 암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덕목이다.

p.146
~만약 그 분야를 아주 오래 가르친 사람이거나 최고의 권위자라면 지식을 전달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혜를 갖게 해주는 것은 그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교육받는 이들이 어리면 어린 대로, 나이가 많으면 많은 대로 나름의 지혜가 필요하다. 무론 내가 생각하는 지혜는 '영악스러움'과는 다르다. 자신을 평온하게 하고, 세상을 평온하게 하는 것을 지혜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 영악스러움은 자신도 불편하게 하고 결국에는 세상도 불편하게 만들게 되는 듯하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가 만약에 생태계의 안녕을 돌보는 것이라면, 그것을 생태적 지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지혜가 과연 교육으로 터득횔 수 있는 일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 시각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중학교 교육에서라면 학생들에게 지혜를 갖출 수 잇는 기회를 최대한 제공해야 할 것이다.

pp.154-
 ~한국의고등학생들을 우리는 으레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물론 대학생도 '아이들'이라고 불리는 형편이다. 그리고 그 고등학생들에게 그저 잠시 죽어 있으라는 듯이 모든 것을 참고, 나중에 대학에 가면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한다. 이것이 지금 한국 고등학교 교육의 현실이다. 인권, 민주주의, 평등, 호혜성, 이 모든 것이 한국의 고등학생들에게는 '유예된 가치'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한국 교육의 실패에 크든 작든 영향을 끼친 공범자다.
~
정상적인 공교육 내에 있는 평균적인 고등학생들에게 '용기'라는 덕목이 요구되는 경우는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인내'이고 '경쟁'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
수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도 가장 억압받으면서 자신들의사회적 삶을 수탈당하는 존재가 바로 고등학생들이다. 정작 용기라는 덕목이 십대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덕목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그 덕목은 보통의 선생님들과 부모님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pp.204-
~생태교육은 직설적으로 표현해 반에서 뒤에서 5등 하는 친구들을 배제하거나 따돌리지 않는 교육이라는 점이다. 생태교육은 아주 잘사는 지역의, 반에서 5등 하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이 아니며, 또 그런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 같다. 게토 혹은 슬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경제적으로 소외된 지역, 도저희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하는 어려운 농촌 지역, 그런 곳에서 생태교육은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다.
앞의 5등을 바라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뒤에 있는 5등에게도 자신이 존재할 이유를 찾아주거나 혹은 함께 찾아가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생태교육이다. 경쟁 위주의 경제학이 앞에 있는 5등들을 대상으로 대화한다면, 생태경제학은 뒤에 서 있는 5등들에게 말을 걸고, 들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소외되지 않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p.233
~교육에 관한 얘기는 아무리 작더라도 한 인간에 대한 얘기이고, 그 작은 우주의 형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인이 채 되기 전에 관한 이야기이고, 아주 자은 변화로도 그 개인과 개인들로 구성된 우주 하나가 바뀔 만큼 큰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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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스쿨 악플 사건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4
도리 힐레스타드 버틀러 지음, 이도영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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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중학교 1학년생이 적극 추천해서 잡은 책이었습니다.
술술 넘어가서 금방 다 읽어버렸습니다.
제이비와 아무르가 학교신문에서 쓸 수 없었던 진짜 하고싶은 이야기들을 쓸 수 있는 공유의 장으로 개설한 <트루먼의 진실>이란 싸이트가 과거에 왕따당했던 상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장으로 악용되면서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입니다.
학교의 킹카에서 하루 아침에 왕따로 전락하는 릴리가 이 싸이트의 최대 피해자가 됩니다.
인터넷의 위력이 악플의 위력이 얼마나 한 사람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해주는 좋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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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88 <트레버>
마이클 선생님은 "인터넷에서는 누구든지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있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보이는 것은 진정한 자신이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나는 선생님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에서 보이는 나야말로 진정한 나라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보이는 나는 거짓이다. 생각해보라. 사람들은 대부분 카멜레온 같다. 각각 다른 사람 앞에서 서로 다른 행동을 한다. 어느 것이 진정한 '나'란 말인가?
아무도 당신을 지켜보지 않을 때, 혹은 아무도 당신이 누구인지 모를 때...... 그 모습이 진정한 당신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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