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멘타 하인학교 (무선)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회사에 다녀본 사람이라면 굴종과 무기력을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벤야멘타 하인학교>를 읽고 난 다음 그 무기력과 복종을 떠올렸다. 이 이야기는 그런 무기력과 복종을 가르치는 학교에 입학한 한 소년의 이야기다. 시대상은 자본주의 질서가 막 구축되기 시작한 독일인 듯 하다. 거리는 화려함과 조급함, 갈망, 고통, 불안 등이 넘실대고 주인공은 부자가 돼서 돈을 물쓰듯 쓰고 싶어한다. 작품에서 주인공의 동기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지만, 주인공은 자신의 욕망에 걸맞지 않게 하인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는 거인같은 벤야멘타씨와 누이동생 벤야멘타양이 있는, 카프카의 부조리극에나 등장할 분위기를 풍기며 복종과 무감각함, 무기력을 가르치는 아니,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 곳이다.

주인공의 동료들은 둔감하고 어딘가 활기와 주체성이 없거나 무언가 결핍된 모습으로 묘사된다. 주인공은 의뭉스럽게 그들을 추켜올리는 것 같으면서도 그들을 조롱하는 것 같다.(“같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내가 이 화자의 심리를 정확히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화자가 과연 10대 소년일까? 예를 들어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은 이런 십대가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야콥 폰 군텐은 마치 신경쇠약에 걸린 성인 소설가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는 부조리한 벤야멘타 학교에 어울리는 부조리한 주인공이다. 철학자 니체가 근대인은 난장이가 되었다고 서술한 적이 있는데, 어쩌면 작가는 그런 난장이들의 군상을, 사람들이 난장이들이 되기 시작한 시대상을 묘사하고 싶었던 걸까. 생도들은 청소를 하면서도왜 그것을 해야만 하는지, 그걸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주인공의 형의 대사는 작가가 그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대중, 그것은 현대판 노예다. 그리고, 개인은 그 굉장한 집단사고의 노예지. 이제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라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많은 , 많은 돈을 벌려고 노력해라.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지만 돈은 아직 건재하다. 모든 것, 모든 것이 파괴되고, 반쪽이 나고, 우아함과 화려함을 빼앗겼다.” 하지만, 형의 충고에는 반전이 있다. “가난하게 경멸받으며 살아. 사랑하는 친구야. 돈생각일랑 떨쳐버려라...부자들은 말이다, 야콥, 불만에 가득 차 있고 불행하단다.”

이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과 인정이고 이 하인학교는 이 돈과 인정이라는 욕망을 가장 궁색한 방식으로 충족시키는 법을 가르친다.(아니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소설의 아이러니는 주인공 화자가 그런 하인학교가 가르치는 무기력과 복종, 둔감함을 칭송을 가장하며 조롱하는 듯 하면서도, 어느 대목에서는 그런 특성들을 진심으로 추켜세운다는 것이다. 이미 시대는 전도되었고, 동료 크라우스가 가지고 있는 둔감함은 다가오는 삶의 폭풍으로부터 그를 지켜줄 것이다. 돈을 기준으로 새로운 위계가 정해질 것이고 이 학교의 생도들은 위대하지 않고”, “단지 작고,가난하고, 종속된, 끊임없는 복종의 의무를 진 난쟁이라는 것을느끼고 있다.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현대의 소시민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굽실거리는 복종은 처음엔 어색했지만 나중에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고, 바뀐 자부심, 명예의 종류는 일하지 않는 것을 자부심에서 치욕으로 만들었다.

소설은 신경질적인 화자의 중얼거림으로 채워져 있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벤야멘타 학교의 위계는 변하기 시작하는데, 학교의 주인 벤야멘타씨와 그의 동생이 주인공에게 진심을 요구하면서(돈과 관련없는 다른 종류의 인정이다.) 주인공과의 역학관계가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주인공은 신경쇠약 직전의 화자 답게 자신을 더 무례하게 다뤄달라고 요구한다. 소설의 마지막 전개는 이해할 수가 없다. 벤야멘타 양은 죽음에 이르고,(원인조차 명확하지 않다.) 벤야멘타씨는 학교를 닫고 주인공과 사막으로 떠난다. 여기서 주인공의 감정선은 따라갈 수가 없다. 하지만, 마지막 주인공의 결심은 동의하게 된다. 그의 조증에 가까운 중얼거림보다 그가 마지막에 한 결심이 그의 삶에 도움이 되리라.

“... 그리고, 난 더 이상 내게 묻지 않는다. 왜냐고. 삶이 원하는 것은 격동적인 움직임이라는 것. 성찰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내가 만약 ...한다면 어떨까?’라는 말로 나를 결박하거나 구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 ‘만약이라는 말도,‘어떨까라는 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이제 이 펜도 던져버리는 거다. 생각하는 삶일랑 이제 집어치운다. 나는 벤야멘타 씨와 함께 사막으로 간다....신은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신에 대한 생각을 한단 말인가? 신은 생각하지 않은 자와 함께 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