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두를 먹어 버리는 이 골 때리는 영화는, 골 때리는 감독 헤어조크가 실제로 구두를 먹는, 짤막한 다큐 영화다.
구두를 먹게 되는 경위는 헤어조크가 친구였던 초짜 감독 에롤 모리스에게 [너 이 자식아 네가 영화를 만들면 내가 구두를 먹겠다]라고 하는 말 때문이다.
모리스는 보란 듯이 장편 영화를 만들어 낼 뿐 아니라 영화제에 초청을 받기까지 한다. 헤어조크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구두를 조리해서 먹는다. 야채와 허브도 넣고 삶아서 먹는다.
그러면서 중간중간 영화에 대한 질문을 받고 두서없이 대답한다. 예고편 말고 유튜브를 잘 찾아보면 조리한 구두를 먹는? 영상도 있다.
이게 진짜 구두만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이외에 전위적인 퍼포머에 가깝다. 신발이라는 게 영화 속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이 넓고 딱딱하고 고르지 못한 땅바닥을 신발의 밑창 하나에 의지해서 우리는 어디든 다닌다.
누군가 극단적 선택을 하면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떠난다. 영화 [택시운전사]나 [1987]에서도 신발은 단순히 신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많은 영화에서 신발이 클로즈업되는 장면이 있다면 그건 영화 속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보면 된다.
구두를 먹는 영화가 또 한 편 있다. 채플린의 [황금광시대]다. 거기서 채플린은 구두끈을 풀고 밑창과 못을 발라내고 구두를 씹어 먹는다. 두구끈은 포크에 말아서 냠냠 먹는다.
이 장면은 채플린 덕분에 웃음이 나오는 장면이지만 채플린 때문에 너무 슬프다. 극빈한 노동자의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이전의 채플린 영화에서 보여주는 권력을 가진 독재자, 실업과 부조리한 삶의 사회 구조보다는 로맨스에 중점을 두고 있어서 더 슬프다.
아마 헤어조크는 거장답게 이런 모든 의미를 담아서, 채플린의 오마주처럼 보이게 영화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뭐든 할 수 있다를 잘 비틀어서 말해주는 것 같은 짤막한 영화다. 세상을 바꾸는 이 세상 몇 가지 중에 영화가 들어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