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가 병구에게 나 사랑하냐고 눈물을 흘리며 묻는다. 병구는 순이를 진짜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에 망설이는 건 병구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다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이를 마음 놓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부고니아 때문에 다시 한번 본 [지구를 지켜라]는 블랙코미디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말이 맞는다는 걸 새삼 느꼈다. 영화 내내 말도 안 되는 코미디와 유머가 장착되어 있지만, 슬프고 안타깝고 감정이 무너지는 이야기가 영화를 말하고 있다.
강만식의 비인간적인 모습과 행태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탈을 쓰고 인간을 유린하고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고 인간을 죽이는 인간. 그런 인간이 인간 사회 속에서 인간인 척하면서 살아간다.
이는 기생수를 관통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괴물은 살기 위해 먹이인 인간을 먹지만, 인간은 인간을 먹지도 않으면서 같은 종족인 인간을 괴롭히고 죽이는가.
강만식이 만취해서 대리를 불러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그게 바로 강만식의 외계 언어였고, 잡혀 있을 때 5분이나 소변을 보는 것 또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병구가 쓰는 괴상한 헬멧은 아버지가 광부로 늘 헬멧을 쓰고 탄광을 캐러 다니는 모습 때문에 아버지를 잊지 않기 위해서 헬멧을 썼다. 탄광이 무너져도 머리를 보호할 수 있는 헬멧, 외계인에게도 보호막이 되는 건 헬멧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강만식이 대리기사에게 이 세상은 다 내 거야!라고 하는 말을 왜 했는지 알 수 있다.
순이는 인간 사회에서는 루저처럼 보일지 몰라도 병구가 쉽게 잡지 못하는 강만식 외계인을 손쉽게 잡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순이의 능력을 보여주는 장면이 강만식의 피부를 벗겨낸다고 순이와 병구가 때수건으로 피부를 박박 문지르는데, 병구는 있는 힘껏 문지르는 것에 비해 순이는 술렁술렁 문지른다. 그러나 순이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너무 많이 벗겨냈나?라고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벌통은 태백에서 스텝들이 직접 벌을 키우며 촬영을 했다. 그래서 간식으로 벌꿀을 먹어가며 촬영을 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많은 영화를 오마주 했다. 드레스 투 킬의 손바닥 장면이나, 인간의 역사를 설명하는 부분의 첫 장면은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오버 더 레인 보우, 벌떼는 히치콕의 영화를, 블레이드 러너 등.
영화는 어둡고 호러 가득한 이야기지만 순이가 등장하면 영화는 웃음꽃으로 바뀐다. 순이를 비롯한 형사, 서커스 단원 등 여러 캐릭터가 등장하면 코믹과 유머가 어두운 호러를 덮어 버린다.
영화는 떠도는 말처럼 아주 잘 만들었고 재미있고 평단의 호평을 받았지만, 포스터라든가, 잘못된 홍보 등으로 7만인가? 관객 동원으로 망하고 만 영화가 되었다. 하지만 다시 보면 장준환 감독의 세계를 잘 알 수 있다.
예고편 https://youtu.be/I4pb5upKzao?si=LPeKwo03Mf5LQQg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