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의 붉은 꽁지가 아이의 얼굴을 스치고 해변을 물들였다. 자동차 보닛이 가스레인지처럼 달아올랐고 밤의 달빛이 놀다 들어온 강아지처럼 방구석에 처박힐 때면 그 사람은 레오파드 원피스를 몸에 부착시키고 화장을 했다. 눈썹을 올리고 눈 화장을 하고 립글로스를 발랐다. 그 사람은 늘 어두워지면 외출을 했다.


바다는 거대한 그늘로 더욱 침잠된 비극을 피어오르게 하고 낮 동안 뜨거웠던 열기가 남아 있는 해변의 구석구석에서 비극의 맛을 보려 갯지렁이가 꾸물대는 모습이 몽환적으로 비쳤다.


초초하게 쭈그리고 앉아 다리를 말고 날짜변경선 너머 달의 뒤편에서 웅크리고 있는 그 사람을 생각하면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마음의 가장 연약한 부분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에 잠기곤 했다. 이런 감정을 달래듯 풋사과를 씹었다. 시고 단 맛이 위로처럼 따뜻하고 축축이 목 안으로 차오르고 까닭 모를 눈물이 고여왔다.


오늘 밤은 잠이 오지 않았다. 눈물은 눈으로 나오지 않고 등으로 흘러 기분 나쁘게 셔츠를 적셨다. 수명이 다 된 매미가 더운 어둠 속에서도 엄마엄마 비극적이게 울었다. 그 소리에 정신을 가만히 집중하노라면 내 육체는 아주 얇고 투명한 빛의 막이 되어 집개미가 식탁 위를 오르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저 밖 해안가 가로등의 하얀빛이 고통처럼 얼굴을 뚫고 방구석에 뿌리를 내릴 것만 같아서 눈을 감았다. 해가 숨어 버렸지만 가시지 않는 더위에 눈을 감고 보이는 그 세상에 적응하려 했다. 그럴수록 침착하고 음험하게 끓어오르는 숨 막히는 열기에 냄새나는 입을 벌렸다.


그때 열어 놓은 창문 틈으로 누군가 쳐다보고 있었다. 열기에도 보송한 얼굴을 한 채 예쁜 이마를 드러내고 세상에서 하나뿐인 아름다운 입술을 한 그 사람이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걸 안다. 어룽어룽한 전체적인 얼굴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 사람은 작은 입을 벌려 무엇이라 말을 했다. 나는 몸을 공벌레처럼 말고 조용히 그 사람의 모습을 눈을 감고 바라보았다.


가로등이 땀 내 나는 바람에 흔들리고 갯것들이 귀신같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고 성가시게 갈라진 머리칼이 뾰족하게 주뼛 솟았다가 힘이 풀어지며 바닷속 해초처럼 흐물렁거렸다. 그 사람은 손을 내밀었는데 나는 더욱 내 몸을 마는데 손에 힘을 주었다. 매미 소리가 또 들렸을 때 눈물이 흘렀다. 눈물은 깨진 거울 파편처럼 차디차게 반짝이며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그 사람은 침잠된 비극을 잘 접어서 알 수 없는 소리로 말을 했다. 그 속에는 어쩌면 탄식이나 후회보다 비참함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돌멩이처럼 더 몸을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눈을 뜨려고 하니 마른 눈물에 눈이 붙어버렸고 무덥고 어두운 비극 속으로 어디선가 차가운 빛 한 줄기가 스며들었다. 빛줄기를 타고 끓어오르는 은유를 보았고 은유 속에 울면서 타오르는 그 사람이 있었다.


오정희의 [유년의 뜰]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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