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침에 일찍 눈이 떠졌다. 눈을 뜨니 낯선 방의 기운에 잠시 기분이 묘했다. 언제나 그렇다. 눈을 떴을 때 집이 아닌 경우에 느끼는 낯선 기분은 잠시 머리로 투침하여 눈을 뜨고 방의 분위기에 잠시 젖어들게 만들었다. 늘 잠들었던 우리 집보다 훨씬 좋은 집에서 잠들게 된 낯선 방에서 눈을 떴을 때의 기분은 무척 기묘했다.
창가 커튼 뒤로 아침이 밝아 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낯선 방의 문제점은 너무 포근하다는 점이다. 집에서 일어났을 때 이만큼 포근한 적은 없었다. 집은 겨울에는 외풍이 심하고 두꺼운 내복을 입고 두툼한 이불을 코끌까지 올려 잠들어야 했다.
나는 일어나지 않고 누워서 낯선 방의 포근함을 느꼈다. 방의 냄새도 좋았다. 저 커튼을 걷고 창문을 조금 열고 싶었다. 그러면 새벽 겨울의 냉철한 기운이 화악 들어올 것이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이렇게 따뜻한 방에서 이불을 덮고 얼굴만 내민 채 창문을 열고 차가운 겨울의 모습을 바라보고 싶었다.
외가에서는 방문을 열면 바로 마당이었다. 아궁이로 불을 때서 방 안은 정말 후끈후끈했다. 겨울에 눈이 가득 쌓인 모습을 방에서 이불을 덮고 보는 재미가 있었다. 겨울을 만끽할 수 있었다. 어릴 때 그 기억 때문인지 추운 겨울의 따뜻한 방에서는 꼭 그렇게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옆에서 사촌 동생이 세근세근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직 해가 온전하게 얼굴을 내미려면 한 시간 반은 더 있어야 한다. 시간을 보니 아직 일곱 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절대 이 시간에 깨지 않는다. 낯선 방이라 눈이 뜨였다. 겨울방학이라 목동에 있는 외삼촌 집에 왔다. 집에서 어머니가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기 전에 한 번 다녀오라고 했다. 아직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어머니는 나를 밤 열차에 홀로 태워서 서울로 보냈다. 외가 친척들은 전부 서울과 경기도에 살고 있어서 엄마는 일단 나를 서울로 보내면 겨울 방학이 좀 편했다.
나는 누워서 사촌동생을 봤다. 아직 어린 사촌동생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멀리서 사촌 형이 왔다고 사촌 동생은 신났다고 외숙모에게 들었다. 외숙모는 외삼촌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외숙모는 마치 누나 같았다. 젊고 예뻤다. 세련됐고 보이는 이미지는 차가운데 그런 얼굴과는 다르게 잘 웃었다. 외숙모는 외삼촌의 세 번째 아내였다.
세 째 외삼촌은 정부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정확하게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랐다. 먼저 외숙모들은 아이를 가질 수 없어서 외삼촌과 헤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친척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외삼촌과 외숙모 사이에 두 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사촌동생들은 너무나 귀여웠다. 외삼촌은 아이들이 태어나 비로소 가족이라는 형태를 이룬 것에 대해서 행복한 것도 잠시 백혈구의 문제로 쓰러지게 되었다.
외삼촌은 병실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때 간호를 해야 하는 외숙모가 힘들어서 아이들을 우리 집에서 맡아 주었다. 외숙모는 병간호에 들어갔고 사촌동생들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가 있는 우리 집에서 일 년이나 지냈다. 사촌동생들 중에 막내는 아직 아기에 가까워서 어머니가 안고 업어서 돌봤다. 외삼촌의 병이 다 나아서 아이들과 헤어질 때 막내는 외숙모의 품으로 가지 않으려고 해서 어른들이 많이 웃었다.
외숙모는 늘 나에게 서울에 놀러 오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목동의 외삼톤 집에서 며칠 묵게 되었다. 처음 외삼촌 집에 와서 놀란 것은 거실에 매달려 있는 가오리들이었다. 가오리 십 수 마리가 배를 가른 채 거실의 천장에 가득 매달려 있었다. 그 모습은 지구인에게 잡혀 온 외계 종족의 모습처럼 낯설었다. 거실 한 편에 있는 거대한 진열장에는 양주가 가득했고 그림들도 많았다. 그림은 풍경화나 정물화가 아니라 초현실 그림들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전부 선물이라고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외삼촌은 저녁에만 볼 수 있었다. 외삼촌은 공부를 못하는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외삼촌은 배우지 못한 어머니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사촌동생에게는 부잣집 아이들에게만 있었던 게임기가 잔뜩 있었다. 학원에서 돌아온 사촌동생과 신나게 게임을 하고 있을 때 외삼촌이 퇴근해서 집으로 들어왔다. 이상하지만 외삼촌이 오기 전까지는 모두가 신났는데 외삼촌이 집에 온 이후로는 대체로 조용해졌다.
외삼촌은 영어사전을 다 외울 만큼 공부를 했다. 그래서 공부를 못했던 어머니도, 그리고 나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티를 드러내는 외삼촌을 가끔 만나는 건 무서웠다. 외삼촌은 사촌동생과 게임만 하고 놀기만 하는 나에게 반에서 몇 등 하는지 물었다. 나는 말소리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외삼촌이 무서워 외삼촌 집에서 며칠이나 머물러야 한다니 나는 하루라도 빨리 사촌누나의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