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고 맑은 날이 이어진다. 온 세상이 황금빛의 물결을 이루고 모든 풍경이 생명을 가득 채우는 듯 보이는 날들의 연속이다. R.ef의 이별 공식에 햇빛 눈이 부신 날에 이별해 봤니 비 오는 날 보다 더 심해,라는 가사처럼 이렇게 밝고 맑고 청조한 가을의 깨끗한 날에 더 우울하다. 사랑을 잃어버린, 사랑하는 킬리를 잃어버린 타우리엘의 마음처럼 깨끗하지만 우울하다. 우울한 날에는 키리코다. 키리코의 그림 속에는 불길하고 깊은 우울이 가득하기 때문에 나의 어울 따위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키리코의 그림을 보고 난 후 시원한 칼스버그를 마신다.


여자는 화가 나는 일이 있어서 화내는 것이 아니라 화내고 싶어서 화를 내는 거야. 여자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지. 깊고 깊은 바닷속을 인류가 알 수 있나. 그건 알 수 없는 거야. 인류가 바다를 정복하려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될까. 여자의 마음은 바다와 같아. 칼스버그나 마시자.


어느 날 뷔페를 갔다. 그곳의 뷔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닮았다. 무라카미 류를 닮지 않았다. 예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가 만나 이런 대화를 했다. 나는 열 명 중에 한두 명이 나의 글을 좋아해 준다면 족하다고 하루키가 말했다. 하루키 씨는 대단하네요. 나 같으면 열 명이면 열 명이 다 좋다고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기분이 나쁠 텐데.라고 무라카미 류가 감탄하며 말했다. 그래서 칼스버그나 마시자.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어느 곳에선가 이렇게 썼다. 진정한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네 가지를 이루어야 한다. 나무를 심는다, 투우를 한다, 책을 쓴다, 아들을 낳는다.라고. 나는 도대체 뭔가. 헤밍웨이의 글에 따르면 나는 진정한 남자가 아니다. 나는 그저 진정 한 남자일 뿐이다. 그렇게 말한 헤밍웨이는 자신의 글로 구원받지 못했다며 총구멍을 입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세상은 뭔가 불공정한 공평함이 있다. 그러니까 칼스버그나 마시자.


사람들의 등에서 권태가 빠져나간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은 장례식장이다.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은 어깨 위에 단단하게 박혀 힘들어했던 권태를 그리워했다. 고요한 장례식장은 꽤나 이질적이다. 적막과 고요가 장례식장을 가득 메우고 있고 그 틈을 벌리는 것은 냉장고가 우웅 돌아가는 소리뿐이었다. 거슬리는 소음이 소리를 잡아먹고 있었다. 그 사이에 빌리 조엘의 피아노맨이 나왔다. 피아노맨은 모두가 즐거운데 듣고 있으면 눈물이 난다. 이상한 노래다. 칼스버그를 마시는 것 그게 우리가 지금 할 일이다.


잠이란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의 문제다. 잠을 깊이 들지 못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깊은 꿈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일어난다. 비슷한 꿈을 자주 꾼다. 비탈길 위의 자동차가 핸드브레이크가 풀려 슬슬 내려가더니 속력을 내며 어딘가에 가서 쾅하며 박힌다. 꿈속에서 자주 몸이 가렵다. 몸을 긁으면 피가 나고 그 자리에 수선화가 핀다. 나는 수선화를 꺾어서 그녀에게 내민다. 수선화를 받는 순간 그녀는 별이 되어 하늘로 가버린다. 잠에서 깨어나면 아침이 힘겹다. 칼스버그나 마셔야지. 시원하게.


덴마크식 바다가 보이는 퍼브에 앉아 칼스버그 한 잔을 마시며 시저 샐러드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행복이 있다. 이 집의 샐러드가 좋다. 싱싱한 채소에 짜지 않는 베이컨과 로메인과 달걀노른자, 크루통은 바삭하고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가 듬뿍 들어있다. 그걸 먹으며 시원한 칼스버그 한 잔을 마시면 괜찮은 하루다. 하루키 말을 빌리면 맥주를 마시며 적당한 변명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는데 이래도 괜찮은 건가 하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뭐 괜찮겠지.



Billy Joel - Piano Man https://youtu.be/gxEPV4kolz0?si=xO4fH_8bhSGIQwV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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