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물에 샤워를 했다가 온몸이 쪼그라드는 느낌이 드는 걸 보니 이제 끝까지 붙들고 있던 여름이 서서히 물러가는 것 같아서 이상한 기분이다. 나의 내부의 한 부분이 텅 비어 버리는 느낌이 든다. 쨍쨍하고 짱짱한 열기 가득한 여름이 가을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시기에는 늘 이런 기분이 든다. 마치 오랫동안 옆에서 함께 일어났던 강아지가 죽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한 여름에는 그렇게 시원하지도 않았던 찬물이 지금은 몹시 차가워서 욕이 나올 뻔했다.


라면을 하나 끓여 먹자. 계란도 하나 넣어서 잘 풀고 휘휘 저어서 맵지 않게 후루룩 먹자.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처음 라면을 혼자 끓여 먹었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초등학생이었을 텐데, 초등학생 때 먹는 라면은 정말 맛있었을 텐데, 도대체 처음은 언제 일까. 집에서 끓여 먹었을 것이다. 처음은 아니지만 라면에 대한 기억이 있다. 내가 저학년일 때, 동생이 배가 고프다고 했다. 오빠 라면 먹고 싶어. 엄마는 시장에 장을 보러 나가셨고 나는 동생을 돌보고 있었는데 동생이 배가 고프다며 라면이 먹고 싶다고 했다.


호기롭게 냄비에 물을 붓고 난로 위에 올려서 라면을 끓였다. 그런데 물이 팔팔 끓지 않고 조금 뜨거운? 정도가 될 뿐이었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물이 팔팔 끓지 않았다. 동생은 배가 고파서 얼굴이 엉망이었다. 나는 그렇게 뜨겁지 않은 물에 면을 집어넣고 스프를 넣었다. 팔팔 끓어야 하는데 면이 조금 뜨거운 물에서 불기만 했다. 그때 어린 나이였지만 좌절했다. 동생이 이렇게나 배가 고프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동생을 위해 라면 하나 제대로 끓여주지 못했다.


이 세상이 망하고 동생과 둘이 남았을 때 나는 동생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나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다. 짜증이 났고 분노가 났다. 면은 불어서 이상한 라면이 되었다. 그러나 어렸던 동생은 뜨겁지 않아서 좋다며 맛있게 먹었다. 그게 사실 별 것도 아닌데 동생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이상하기만 했다.


엄마가 한참 후에 시장에서 오셨고 나는 억울한 마음을 담아 그 이야기를 했다. 내가 난로의 불조절을 잘하지 못해서 물이 팔팔 끓지 않았다. 나는 그때의 기억을 지금까지 생생하게 가지고 있다. 분명 그 이전에 라면을 끓여 먹었을 텐데, 그렇기에 동생에게 라면을 끓여 준다고 라면을 끓였을 텐데 처음의 기억이 없다. 그래서 내가 처음으로 라면을 끓여 먹은 기억은 불조절을 잘못하여 썩 뜨겁지 않은 물에 불리다시피 끓여 먹었던 라면이 자리 잡고 있다.

 

라면에 관한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고 라면은 언제나 맛있다. 친구들과 함께 먹는 라면이 어른들과 함께 먹는 소고기보다 더 맛있다. 라면 속에는 맛뿐만 아니라 같이 먹는 사람과의 유대를 더 돈독하게 만드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 어딘가 캠핑을 갈 때 이것저것, 찌개재료나 탕의 재료를 가지고 가더라도 라면은 꼭 챙긴다.


예전에 제주도에 3일 정도 갔다 온 적이 있었는데 펜션에 머물렀는데 밖에서 음식을 먹는 것을 제외하고는 펜션에서는 라면만 끓여 먹었다. 주로 펜션에서 보냈다. 어딘가 구경을 다니지 않았다. 일행도 전혀 싫어하지 않고 마음이 잘 맞았다. 고기를 굽는다던가, 뭔가를 조리해 먹는 다던가, 전부 귀찮다. 라면이 최고다. 배고플 때 라면만큼 맛있는 것도 없다. 우리는 그랬다.  


3일 동안 어디 돌아다니지 않고 숙소에 머물면서 일행과 책이나 읽고 선텐이나 하고 배고프면 라면 끓여 먹고 잠 오면 덱체어에서 잠들고. 라면이 지겨울 때면 숙소 근처 식당에서 밥 먹고. 일행과 그런 점에서 마음이 잘 맞았다. 둘 다 돌아다니는 것도 별로고, 가지고 갔던 소설이나 읽고 또 읽으며 맥주나 마셨다. 그때 혹시나 해서 차도 렌트를 했지만 거의 몰지 않았다.  


모텔에서 라면을 먹는 맛도 좋다. 어딘가를 가서 숙소를 모텔로 잡아도 뜨거운 물이 나오는 생수기기가 있어서 컵라면을 먹을 수 있다. 모텔은 아무리 잘 꾸며도 모텔만의 냄새가 있다. 모텔만이 가지는, 모텔의 기운이 깃든 냄새가 있다. 붙박이형 대형 티브이, 햇빛완전차단의 커튼, 깨끗하고 갓 세탁한 듯 보이는 하얀 시트와 이불, 그러나 어쩐지 찜찜한. 작은 테이블과 의자, 일회용 세면도구와 모텔이라 알 수 있는 인터폰과 국밥집 전화번호 따위들.


그런 모텔만의 냄새가 있지만 티브이를 보면서 먹는 컵라면은 정말 맛있다. 잠시 모텔만의 냄새를 잊게 만든다. 몇 종류의 컵라면을 먹어봤지만 모텔에서 이상하지만 왕뚜껑이 제일 맛있었다. 왕뚜껑을 먹을 때에는 악착같이 단무지를 같이 사 와서 먹어서 그런지, 왜 다른 날에 다른 컵라면으로 먹을 때에는 단무지를 같이 먹지 않아서 그런지 왕뚜껑이 맛있다. 단무지도 왕뚜껑에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왕뚜껑을 가장 많이 먹었을 때가 군대 있을 때다. 피엑스 병을 하면서 더 많이 먹었던 것 같다. 거기서는 단무지 따위는 없었다. 그저 라면을 후루룩 먹을 뿐이다. 그러나 참기름과 고추장을 조금 풀어서 먹으면 아주 맛있다. 정말 끝내주는 맛이다. 끓여 먹는 라면보다 더 맛있었다. 면회 오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왕뚜껑을 해주니까 다들 맛있어했다.


뽀글이도 많이 해 먹었다. 이번 신병 2에서 비빔면 뽀글이 뜨거운 물에 해줬다가 강찬석 상병이 표정이 변했다. 그때 분위기 살벌했다. 그런데 우리는 비빔면 뽀글이는 늘 뜨겁게 해 먹었다. 비빔면 뽀글이 뜨겁게 해서 케첩을 뿌려 먹으면 맛있는 스파게티의 맛과 똑같다. 요즘도 나는 비빔면을 뜨겁게 해서 먹는다. 신병 시즌 2는 시즌 1에 비해서 재미는 떨어졌다. 그러나 인간대 인간으로 감정에 대해서 감동적인 부분은 더 좋아졌다. 최일구가 이병 시절 구 막사였는데 막내 시절에 많이 두드려 맞는 장면이 나왔다.


내가 딱 그 구 막사 시절이었고 엄청 구타를 당했다. 맞다가 안경까지 부러졌다. 그 정도로 구타가 심했다. 그러나 신병 시즌 2에서처럼 막내 때 힘들다고 울지는 않았다. 울고 자시고 할 정신이 없다. 잠잘 때에도 군기가 들어 있었다.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관등성명을 대면서 발딱 일어났다. 어딘가에 숨거나 힘들다고 눈물을 흘리고 할 뭐 그런 게 없었다. 신병 시즌 2에서는 코믹요소가 많아졌다. 가장 코믹 캐였던 소대장에 마지막에 중대장에게 한 마디 할 때에는 꽤 멋졌다.


영화 속에서도 라면 먹는 장면이 다른 음식보다 월등히 많다. 아니다 국밥이 많은가? 아니다 라면 먹는 장면이 가장 많다. 이병헌의 라면 먹방, 차승원의 라면 먹방, 요즘 나락으로 간 임창정의 라면 먹방은 영화 속 라면 먹방으로 인기기 최고다. 영화 속 다른 먹방보다 훨씬 맛있게 보인다.


현재 맛있는 라면이 아주 많다. 신제품도 속속 나오고 있고, 대형마트에서도 자체 상품으로 천 원 미만의 라면이 등장하는데 사람들의 후기가 꽤 좋다. 새로운 라면이 출시되면 예전처럼 티브이 광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잘 나가는 먹방 유튜버에게 광고를 넣는다. 신제품을 먹방하고 그걸 리뷰를 한다. 어떤 먹방 유튜브는 이건 이래서 별로라고 거짓 없이 말을 하기도 한다.


사실 라면은 대체로 다 맛있다. 그렇지 않을까. 신제품 라면들은 좀 더 맵거나. 좀 더 면이 꼬들하거나, 이런 차이일 뿐이지 맛이 없을 수는 없다. 라면 종류가 많아서 선택의 폭이 넓어져 좋은 것이 아니라 선뜻 새로운 라면에 손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홍수처럼 쏟아지는 여러 종류의 라면 속에서 나는 늘 먹던 라면만 먹는다. 나는 라면의 세계에서만큼은 확증편향 적인 편이다. 먹던 라면만 먹는다.


그리고 추억의 절반이 맛이라고, 라면도 자꾸 추억 속의 라면 맛을 찾으려고 한다. 그 예전 어릴 때 초등학교에서 그 애와 같이 앉아서 먹었던 컵라면의 맛. 나는 분명히 그 맛을 기억하고 있다.


오늘의 선곡은 머라이어 캐리의 노래다. 90년대 초중반의 머라이어 캐리는 정말 예쁘고 노래가 굉장했다.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음악 감상실에 달려가서 머라이어 캐리의 노래를 무척 큰 화면으로 신청해서 입을 벌리고 보곤 했다. 엠티비 언플러그드가 강세였다. 팝가수들이 뮤직비디오를 열과 성의를 다해 찍었다.


바야흐로 듣는 음악에서 온몸으로 즐기는 음악으로의 도약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머라이어 캐리의 손동작 하나하나에 우와우와 했다. 헤어스타일과 표정 무엇보다 그 돌고래 같은 목소리가 독보적인 머라이어 캐리였다. 입을 이렇게나 크게 벌리는데도 얼굴이 망가지지 않았다. 특히 이모션을 부를 때 머라이어 캐리는 예쁜 얼굴이 도망가지 않으면서 돌고래의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저 대단했다.


그렇게 오 밤중에 음악 감상실에서 기어 나온 우리는 늘 가는 다운타운의 분식집으로 갔다. 거기 라면이 기가 막혔다. 라면에 당근이 채 썰여서 들어가고 반찬으로 김치와 단무지가 나왔다. 단무지가 라면에 잘 어울렸단 말이야.


Mariah Carey - Emotions https://youtu.be/h4abd6m71hk?si=E7CDn040d3VvSJ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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