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뜨거워 공기를 씹으면 바사삭해야 하지만 엄청난 습도 때문에 눅눅하게 씹혔다. 태어나서 이렇게 습기가 많고 습도가 가득한 날은 처음인 것 같다. 눈으로 이 엄청난 습기가 보이고 숨을 쉴 때마다 입 안으로도 들어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조금만 달려도 평소 더운 날보다 더 힘들었다. 굉장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거의 매일 조깅을 하러 나오지만 이런 날은 처음이었다. 이런 날 열심히 달리면 땀이 정강이에서도 퐁퐁 솟아나고 눈 빼고는 전부 땀이 나는 경이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땀을 닦아도 닦아도 눈 안으로 자꾸 흘러 들어가서 잠시 서서 쉬었다. 이렇게 습도가 강하고 엄청나게 더운 날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즐기고 있었다. 즐기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날이었다.


예전 어릴 때 여름에는 이렇게 지옥 같은, 습하고 무거운 굽굽함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저 나의 착각이려나. 중학교 여름 방학에 친구 집 옥상에 자주 놀라갔다. 중학생이 되기 전에는 놀다가 저녁이 되면 집으로 들어왔지만 중학교 2학년 정도가 되었을 때에는 방학에 친구의 집 옥상에서 놀다가 거기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자기도 했다. 옥상에 누우면 등이 따뜻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에는 옥상에서 밤을 지새울 때 술을 마셨다. 한 놈이 더 늘어서 각자 집에서 참치 통조림이나 라면을 들고 와서 밤새도록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시다가 새벽이 되어서 지쳐 잠들었다. 몇 시간 잠들지 않았는데 텐트 안이 너무 뜨거우면 자동적으로 일어났다.


밤새 마신 술이 덜 깨서 헤롱거리다가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보면 앞 집이 보이는데 욕실의 창문으로 그 집 미대 다니는 누나가 목욕을 하고 있어서 우리는 침투조처럼 바짝 엎드렸다. 그런데 옥상 바닥이 너무 뜨거워서 으앗 하는 소리를 한 놈이 내고 그만 누나에게 들켜서 후다닥 도망갔다. 그 녀석 때문에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생각해 보면 누나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창문이 컸는데 활짝 열어 놓고 목욕을 했고 우리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저 뭐 어때 같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계속 비누칠을 했다. 여름이었다. 그런 여름이었다.


매미소리가 어디에서 들리는지 모르겠지만 맴맴맴 요란했고 하늘은 푸를 대로 파랬다. 땡볕에서 놀다가 더우면 아이스크림 하나를 물고 그늘에 앉아 있으면 그런대로 괜찮았다. 바람이라도 불라 치면 고맙게도 시원했다. 지겨울 법도 한데 친구의 집에서 라면을 끓여서 먹고 또 끓여 먹었다. 다시 중학교 여름방학으로 와서, 친구의 집 옥상에는 집에서 버리다시피 한 의자들을 옥상에 올려다 놨다. 눈비바람에 의자는 칠이 벗겨지고 낡았지만 앉아 있기에는 충분했다.


옥상 의자에 앉아서 밤하늘을 보며 이야기를 하며 놀았다. 방학이었다. 여름방학. 친구와는 다니는 학교가 달랐다. 초등학교는 같이 다녔는데 중학교로 가면서 학교가 달라졌다. 친구는 중학생이 되고 나서 덩치가 부쩍 커졌다. 무엇보다 이성에 대해서 심각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중학교 때 나에게 공책을 보여주었는데 거기에는 몇 페이지에 걸쳐 수학공식이나 물리법칙이 아니라 좋아하는 여자애의 이름이 빼곡했다. 그저 이름만 처음부터 몇 페이지에 걸쳐 가득했다. 이렇다 저렇다 할 여지 같은 것도 없고 사상이나 생각, 고뇌도 없이 그저 이. 름. 만 가득했다. 그 여자애는 같은 동네에 살고 있고 우리 집과 친구의 집 중간에 있는 집에 살고 있어서 동네에서 자주 같이 놀곤 했는데 녀석이 이성에 눈을 뜨고 느닷없이 러밍아웃을 하는 바람에 같이 있게 되면 예전처럼 왁자지껄하며 떠들썩하게 놀지 않게 되었다.


더 어린 시절의 여름방학에는 집 앞에 해수욕장이 있으니 늘 새까맣게 되어가며 놀았다. 태양빛을 매일 한껏 받아서 그런지 어지간히 덥지 않으면 그렇게 더위도 잘 타지 않았다. 매일이 찬란한 여름의 하루였다. 백사장은 곱고 너무 하얗고 부드러웠다. 뜨거운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느낌이 좋아서 자주 해변을 걸었다. 그리고 바다에 풍덩 뛰어들었다. 너무 오래 바다에 있으면 입술이 몸이 추워서 파래질 때가 있다. 그러면 나와서 모래를 파고들었다. 모래가 힘 있게 나를 감싸 안아주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덥다고 소리쳐도 여름은 물에 불은 실오라기처럼 빠져나가고 있다. 어제는 부쩍 어둠이 빨리 하늘을 덮었고 바람도 달라졌다. 서서히 가을이 밀려오고 있다.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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