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기간이다. 레인시즌인 것이다. 엇 그제 밤에는 폭우의 소리가 대단했다. 불을 끄고, 라디오 소리도 끄고, 유튜브도 끄고 지축을 울리는 빗소리에 집중을 하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는 별로 무섭지 않은 것들이 어른이 되어서 무섭게 다가온다. 어린이 때 귀신보다 어른이 더 무서웠는데 이제 그 무서운 어른이 되었지만 세상은 온통 무서운 것들 투성이다.
오늘은 집에 오는데 해안도로가 엄청나게 내리는 비 때문에 3차선 중 2차선이 물에 잠겨 경찰들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데 비가 너무 쏟아지니 불안하고 무서웠다. 공포다. 비가 많이 내리면 언젠가부터 무섭기 시작한다. 빗길에 사고가 났는지 차들이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거북이 운행으로 가다 보니 자동차 한 대가 구겨진 종이짝처럼 완전히 구겨져 있었다. 분명 운전자는 사망했을 것이다. 자동차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다. 점점 더 무서워졌다.
여동생이 뚝섬 근처 대학교로 가면서 반지하에서 살았다. 한 번 놀러 갔다가 아침에 눈을 떴는데 캄캄해서 이른 아침인 줄 알았는데 오후 1시였다. 비가 오면 겁이 난다고 했다. 특히 비가 하루 이틀 지속되면 언제라도 당장 달려 나갈 준비를 하며 지내야 했다.
장마 때문에 비가 너무 내려 강물이 불어나고 그 강물에 모든 것이 쓸려 내려가는 모습을 아이폰 3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나는 카메라를 들고나가서 그런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무서운 게 없었다. 태풍이 오면 집 앞이 바닷가이니 방파제에 나가서 파도가 테트라포드에 부딪혀 엄청난 포말을 만들어내는 장면을 카메라 담느라 신났다. 그런데 지금은 비가 많이 내리면 무섭다. 그래서 건물 밖으로 나가려 하지도 않는다.
어릴 때 비가 와서 물웅덩이가 보이면 장화를 신고 일부러 그 안에 들어가서 첨벙첨벙 물놀이를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런 놀이를 하지 않게 되었다.
장마기간에, 굽굽하고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울 때 찬물을 몸에 찌끄리고 나면 엄마가 부침개를 해주었다. 기름옷을 입고 노릇하게 잘 구워져 먹으면 너무 맛있었다. 아버지는 집에서는 술을 드시지 않았는데 장마기간의 주말이면 가족이 모여 마당에 떨어지는 비를 보며 전, 부침개를 먹었다. 비가 쏴아 쏟아져도 무섭지 않았다.
부침개는 밥이 아니라 식사에서 멀어진, 그래서 어쩐지 집 안에서 소풍 같은 기분을 갖게 했다. 동생은 왔다 갔다 하며 질문이 많고, 엄마는 덥지만 부침개가 접시에서 떨어질 때 또 부쳐서 내왔다. 에어컨도 없는데 선풍기만으로 잘 도 여름을 지냈다.
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티브이 만화도 같이 봤다. 조카가 여름에 집에 놀러 오면 만화를 보는데 동참하려고 해도 아, 조카가 좋아하는 만화에는 적응이 잘 안 되었다. 나는 지금도 주위에서 애니메이션을 많이 봐서 초딩들과 꽤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귀멸의 칼날은 디오라마를 만들어 버릴 정도로 좋아하고, 사이타마의 원펀맨, 이 세계 삼촌부터 고전(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헬싱까지. 아무튼 만화를 엄청 좋아하는 편인데 조카가 좋아하는 만화는 아따맘마까지다.
어떻든 울 아버지도 어른으로 분명 만화를 아이들과 같이 보는 것이 고역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기공룡 둘리는 전부 앉아서 재미있게 봤다. 레인시즌에 먹는 부침개는 맛있을 수밖에 없었다. 무서운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가 내려서 마당을 적시고, 가족이 전부 밥상에 붙어 둘리를 보며 호박전을 먹었다. 아버지가 옆에서 있었고 엄마도 젊어 손맛이 좋았다.
며칠 전에 복면가왕에서 오승원의 둘리를 들었다. 그 첫 목소리를 듣자마자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화악 몰려왔다. 둘리는 이상한 게,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다. 웃기고 명랑만화다. 그런데 보고 있으면 항상 슬프다. 그 슬픔은 그리움에서 나온 것이고 둘리가 엄마와 떨어져 지내면서 엄마를 그리워하는 그 마음을 오승원이 노래로 담아냈기 때문이다.
오승원의 그 한 소절이 미소를 짓게 하면서 마음을 온통 두드렸다. 다시 둘리를 보면 알겠지만 온갖 여러 편에서 둘리가 나오지만 둘리는 엄마가 없다. 엄마를 잃은 둘리의 그 마음이 고스란히 보는 이들에게 전해진다. 복면가왕에서 오승원이 부르는 둘리는 사람을 놀라게 한다. 오승원의 목소리가 그리움인 것이다.
부침개를 만들어 먹었다.
예전만큼의 맛이 나지 않는다.
훨씬 맛있을 텐데 예전만큼 맛있지 않은 건 같이 둘리를 보던 아버지는 없고, 빗소리는 예전보다 무섭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기향 연기가 올라다가 선풍기 바람에 날려 공중으로 확 퍼졌고, 아버지는 모기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방충망을 더욱 견고하게 다듬었다. 비가 내려 나뭇잎들이 마당에 떨어져 쓸려 내려갔다. 아버지는 물구멍이 막힌다며 나가서 나뭇잎들을 거둬냈다. 엄마는 부침개를 옆 집에 나눠주었다. 옆 집에서 시원한 단술을 가져다주었다. 아, 맛있다. 땀을 닦고, 빗물을 털어내고 갓 부친 부침개를 먹으며 작은 화면 속 둘리와 인사를 했다.
동심으로 돌아간 마법 같은 무대� 오승원의 <아기공룡 둘리> https://youtu.be/3q4Ey8BcBT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