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밤에 조깅을 하면 고개를 꺾어 하늘을 꽤 오래 보게 된다. 이게 북두칠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진 속에 꼬리 쪽 하나의 별은 담기지 않았다. 이럴 때마다 폰을 탓하게 된다. 근래의 밤은 내가 좋아하는 청록색이 가미된 검은 밤하늘이다. 한차례 바람이 몰고 지나가서 그런지 하늘이 깨끗해서 도시임에도 별이 선명하게 보인다. 무엇보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거리에 떠 있는 것 같다.
가스층이 가래처럼 껴 있는 여름의 밤하늘에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짙고 짙은, 그래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밤하늘에 별이 그림을 그려 놓았다. 조금 춥지만 밖으로 나와 조깅을 하면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별이 빛나는 모습에 이렇게도 마음을 빼앗길 줄이야. 그래서 몸을 풀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한 계절이 죽어감을 실감한다. 춥지만 조깅을 한 지 10분이 지나면 후끈함이 밀려오는 게, 그리하여 계절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별은 다시 빛을 내며 다음 계절을 맞이한다. 이렇게 반짝반짝하는 별을 보면 고흐의 그림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나는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가 떠오른다. 김광섭 시인은 1900년대 탄생한 시인으로 인간 존재에 대해서 글을 썼다. 김광섭 시인의 시에는 죽음과 탄생 그리고 희망과 절망 같은 인간이 존재하면서 느끼는 감정들이 두루두루 실려 있다. 독립운동을 하다 훈장까지 받고 말년에 미국에서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말년에 하늘의 별을 보며 벗들을 그리워하며 ‘저녁에’를 썼다.
그리고 그 ‘저녁에’라는 시를 보고 10살 터울의 친구인 김환기 화백이 바로 그린 그림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였다. 김환기 화백은 의사에게 수술을 받지 않으면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수술을 받는다. 그리고 호전되는 와중에 침대에서 떨어졌는데 그만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한다. 김환기 화백의 그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보면 유난히 진하게 채색된 점들이 있다. 아마도 미국에서 김광섭 시인이 바라본 그 별일지도 모른다.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 저 별 하나가 나를 내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 저 별 하나를 올려본다
중략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 아름다운 시는 80년대에 와서 유심초라는 그룹에 의해 노래로 다시 탄생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저 하늘의 별이 된다. 유난히 반짝이는 저 별, 나 역시 죽으면 그 별 옆으로 가서 별이 되고 싶다. 그러면 우리의 사랑은 별처럼 반짝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