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흐린 날의 연속이다. 일주일을 꼬박 흐린 날이 지속되는 것 같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저 멀리 파란 하늘이 보이지만 고개를 잠시 돌렸다가 다시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거리와 대기가 온통 퇴색한 빛으로 물들어 있다.


자연이 회색으로 물들어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 또한 고개를 숙이고 거리를 걷고 있다. 2월에는 이렇게 흐린 날의 연속이 가끔 펼쳐졌다. 작년에도 그랬고, 재작년, 그리고 아주 오래전에도. 이런 날에는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이불속에서 휘트니 휴스턴을 들었던 기억도 있다.


고등학교 겨울 방학에 이불속에서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마음을 사로잡는 게 음악이어서 다행이었다. 큰돈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불속에서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이불 밖으로 나가기 싫을 정도로 좋았다. 지구에서 이렇게 노래를 부르는 단 한 사람. 나는 그걸 알게 되었고 그녀의 세계에 빠져서 열심히 노래를 들었다.


휘트니 휴스턴의 이야기는 지난번에도 한 번 했고 본격적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하는 전문가도 많기 때문에 깊은 이야기를 알고 싶다면 역시 복고맨의 이야기를 추천합니다. https://youtu.be/O95hFS1KDC0


휘트니 휴스턴의 다른 앨범은 엘피로 가지고 있었는데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의 앨범이 카세트테이프로 남아 있다. 앨범의 모든 노래가 좋지만 아주 많이 들었던 노래가 ‘미라클’이었다. 이렇게 좋은 노래가 있을까, 이렇게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휘트니 휴스턴은 어쩌면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못하고 조금은 쓸쓸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흑인의 소울 음악을 하지 않고 백인의 팝에 가까운 음악을 했다. 그래서 소울 음악을 하는 흑인들에게서도, 흑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백인들에게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노래를 부를 때 당당하고 자신 있게 불렀다.


91년 슈퍼볼 경기에 백인이 아닌 흑인 가수가 미국국가를 부르기 위해 올랐다. 그녀는 박자를 조금 달리해서 오케스트라와 연습을 했고 슈퍼볼에서 국가를 불렀다. 감흥 없던 국가를 듣고 수많은 관중이 눈물을 흘렸고 감동을 받았다. 그때 휘트니의 모습을 보면 자신감 있게 부른다. 턱을 들고 마치 여봐란듯이, 흑인들에게, 힘없는 사람들에게, 쓰러지는 이들에게 기운을 넣듯이 클라이맥스를 부를 때 입 모양 역시 망가지지 않는다.


휘트니 휴스턴의 미라클이라는 노래는 말 그대로 기적을 말하고 있다. 기적이란 어떤 것일까. 기적은 어떤 사람에게 일어날까. 기적이라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우리는 기적을 늘 바라고 있다. 하지만 눈에 드러나게 기적이 일어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예전에 이소라가 그랬나? 아침에 눈을 뜨는 게 기적이라고 한 것 같은데 그 말에 적극적으로 수긍하는 사람이 있을 테고, 그런 사람들은 아마도 육체적으로 또는 감정적으로 저 밑바닥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올라온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애인이 만취가 되어서 걸을 수 없어 엎고 오는데 힘이 들어 잠시 내렸는데 그때 오바이트를 했다면 그게 바로 기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기적의 정의를 딱히 내릴 수는 없지만 기적은 사실 도처에 널렸다. 비록 휘트니 휴스턴은 이 세상에 없지만 그녀가 남긴 노래를 이렇게 앨범으로 듣고 있는 이 순간이 기적일지도 모른다고 늘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동안 이 앨범을 듣지 않게 되었다. 아마 그때에도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전화가 왔고 비보가 날아들었다. 최초의 비보였다. 밤늦은 시간이나 새벽에 휴대전화가 울리면 그건 필시 비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휴대전화의 문자, 메시지, 전화음 만으로도 지금은 그걸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휴대전화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가지고 다니지 않고 싶은 물품 1위다.


그때는, 겨울방학 때는 이불속에서 나오지 않고 휘트니 휴스턴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때는 비보 같은 건 없었다. 그저 하루종일 음악만 들으면 좋았다. 아 좋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좋은 건, 행복한 건 언제나 찰나로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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