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겨울비다. 겨울비는 어쩐지 슬프다. 김종서도 겨울비처럼 슬픈 노래는,라고 노래를 불렀다. 오랜만에 티브이도 끄고, 라디오도 듣지 않고 모든 소리를 소거한 채 겨울비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리듬이 있었지만 무서운 속도로 떨어졌다. 기이했다. 무릎담요까지 덮고 있어서 몸이 춥지는 않았지만 그 압도적인 차가운 속력 때문인지 마음이 몹시 추웠다. 냉기가 확 밀려들었다. 감정이 시리고 추웠다. 이렇게 감정이 얼어붙을 것 같을 때에는 뼛속까지 뜨겁게 데워줄 수 있는 뜨거운 음식을 만들어 먹어야 한다.


냉장고를 열고 콩나물과 김치를 꺼내서 물과 함께 밥을 넣고 팔팔 끓였다. 김치콩나물국밥이 되었다. 그 위에 계란 프라이도 하나 올렸다. 그럴싸하다. 너무 뜨겁지만, 뜨거운 음식은 안 좋다고 하지만 김치콩나물국밥은 뜨거울 때 먹어야 한다. 하지만 이상하다. 뜨거운 걸 먹는데 이상하게도 시린 마음이 데워지지 않는다. 숟가락으로 입천장이 홀라당 까지면서 후후 먹었다. 몸은 뜨거운데 감정은 전혀 따뜻해지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불안 때문이겠지.


고등학교 때 방학이라 친구와 함께 친구의 동생이 있는, 멀리 떨어진 기숙학교에 뭔가를 전해주러 간 적이 있었다. 친구의 동생은 방학인데도 집으로 오지 않고 기숙학교에 머물렀다. 공부 때문이었다. 친구의 동생은 공부 때문에 몹시 불안한 상태였다. 그에 비해 나와 친구는 공부나 성적 때문에 불안해 해 본 적은 없었다. 그때 공부 때문에 불안해했었다면 지금은 좀 괜찮았을까.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야 했는지 모른다. 시내버스를 타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서 시외버스를 타고 기숙학교가 있는 지역까지 두 시간이나 가서 거기서 다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기숙학교로 들어가야 했다. 학교는 고등학교라고 하기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컸지만 온 사방이 첩첩산중이었다.


남자 고등학교로 방학인데도 대부분의 학생들이 체육복을 입고 얼굴에  여드름을 달고 머리를 아주 짧게 밀어 버리고 삼삼오오 돌아다니고 있었다. 친구는 동생에게 옷이라든가 물품을 전해주고 잠시 대화를 나눴다. 30분 만에 나와 친구는 왔던 방법으로 다시 버스를 돌려 타고 돌아왔다. 우리는 갈 때에는 요점도 없는 대화를 하며 희희낙락 거렸지만 올 때에는 둘 다 별로 말이 없었다. 날은 곧 눈이나 비가 올 것처럼 스산했다. 흐렸고 잿빛이 가득한 날이었다. 누군가에게 살짝 부딪히기만 해도 시비를 걸 것만 같은 날이었다.


우리는 돌아와서 자주 가는 단골집에서 냉동 삼겹살을 먹으며 소주를 마실 생각이었지만 어쩐지 둘 다 그대로 친구의 집으로 들어와서 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친구는 동생 때문인지 날씨 때문인지 방에 누워서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천장을 보며 멍하게 있었다. 바늘로 하늘을 건드리면 곧 눈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대기에 냉랭하고 시린 기운이 밀도 높게 들어차 있는 것만 같았다. 친구가 배고픈데,라고 해서 냉장고를 열어서 그 안에 있는 반찬으로 국밥을 만들어 먹었다. 김치를 넣고 먹다 남은 콩나물 무침도 넣고 물을 붓고 라면스프 하나를 넣고 밥을 가득 넣어서 팔팔 끓였다. 그리고 계란프라이를 하나씩 밥 위에 올려서 퍼 먹었다.


먹다 보면 조금은 잊힐지 모른다. 먹는 순간에는 먹는 것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지금 이 순간 아! 하며 소리를 질러도 금방 과거가 된다. 그 사실을 깨닫는 게 시간이 걸렸다. 음식 맛의 반은 추억이다. 우리는 가끔 추억을 맛보고 싶어 예전에 찾던 동네의 그 중국집을 가기도 한다. 그렇게 김치콩나물국밥을 만들어서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시린 감정은 따뜻하게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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